♣복음말씀의 향기♣ No3697
12월7일[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대림 제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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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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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fbDlR78TqQ
[의정부교구 김상엽 유스티노 신부님 집전 (후곡본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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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입은 꾹 다물고 몸으로 행동으로, 실행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그리도 꿈꾸는 하늘나라 입국을 위한 조건을 세상 간단하면서도 명쾌하게 가르치십니다.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아직 글을 깨치지 못한 철부지 어린이라도, 이 세상 그 누구라도 즉시 알아들을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실행이라는 단어가 계속 제 마음에 와닿기도 하고 불편하게도 만듭니다. 언젠가 피정 오신 한 형제님이 꽤 높은 식당 천장에 아슬아슬 달려 있는 에어컨 덮개의 위험성을 지적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저를 포함해서 모든 형제가 다들 이구동성으로 빨리 저걸 손봐야겠다. 잘못하다가 큰일 나겠다. 만일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 밑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은?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세 달이 지났지만, 상황은 그대로였습니다. 할 수 없이 성질 급한 제가 긴 사다리를 설치해놓고 올라가서 단단히 고정했습니다.
사람 마음이 대체로 그런 것 같습니다. 생각이나 마음으로는 뭐든 못할 일이 없습니다. 당장 교체해야겠다, 빨라 바꿔야겠다, 오늘부터라도 새로 시작해야겠다... 수없이 계획하고, 다짐하고, 마음먹습니다. 그러니 정작 실행은 한없이 더디기만 합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가급적 해야할 일은 뒤로 미루지 않고 그때 그때 해치우려고 노력합니다. 자꾸 잊어먹으니, 시급히 해야 할 일들을 순서대로 적고, 하나 하나 체크해 나가면서 일을 합니다.
1. 2024년 연간 계획 마무리
2. 훼손된 도로 복구 작업
3. 파손된 변기 교체
4. 병든 나무 벌목
5. 과수원에 거름주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당면한 현실 문제에 대한 치밀한 계획과 실행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계획, 하느님과 나 사이의 계획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1. 지나온 한 해의 영적, 사목적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
2. 중단된 성경 통독 마무리
3. 내년도 기도 및 영적 생활에 대한 계획
4. 내년에 읽을 영적 독서 목록 작성
5.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과 연대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
그럴싸한 말만 앞섰지 실행은 너무나 더뎠던 지난 삶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참 많은 말들을 던졌지만, 정작 저는 손가락 까딱 안 하고 있으니, 하느님께 송구스럽습니다.
될 수 있으면 입은 꾹 다물고 몸으로 행동으로, 실행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한 해를 계획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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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반석 위에 집을 짓는 법>
오늘 복음에서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고 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이고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이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감이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너무 죄송하고 감사해서, “그러면 제가 무엇을 해드릴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직접 물은 것이 아니라 묵상을 그렇게 했다는 뜻입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다는 말이냐? 나는 포도나무이고 넌 가지인데. 그냥 나에게 붙어 있어라!” 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분께 붙어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생각했고 그 방법을 ‘성체조배’라 결론 내렸습니다. 그 이후로 성체조배는 제가 그분께 붙어 있는 방법이 되었고 지금까지 그 원칙은 지켜지고 있습니다. 하루에 정한 성체조배 시간은 꼭 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니 삶에 원칙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원칙을 실천하는 것은 저의 삶이 크게 흐트러지지 않게 잡아주었습니다. 유학하러 가서도 세 시간 성체조배는 꼭 지키려 하였고 덕분에 건강하게 빨리 끝내고 올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은 기도, 특별히 묵상 시간입니다. 묵상 시간의 지향점은 바로 삶의 원칙을 찾는 것입니다. 소리기도만 하다 보면 묵상기도에서 얻어지는 이러한 삶의 실천법을 찾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말해지는 사람도 다 자기만의 삶의 원칙들을 가집니다. 이 원칙들은 대부분 책을 읽거나 어떤 체험을 묵상함으로써 얻어진 것들입니다. 이것들이 그들의 삶을 반석 위의 집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수성가한 청년 일명 ‘자청’은 작년 40만 부나 팔린 그의 책 『역행자』에서 이러한 그의 삶의 원칙을 전합니다. 그는 공짜로 생긴 돈의 10퍼센트는 항상 자신에게 그러한 이익을 준 사람에게 돌려준다는 원칙입니다. 이는 애덤 그랜트의 『기브 앤 테이크』라는 책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잘 줄 줄 아는 사람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묵상 끝에 그도 보답을 잘 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자청에 매일 일정액으로 나눠 1년 간 20억 정도를 어떤 사람에게 맡겼는데 1년 만에 30억으로 불어났다고 합니다. 자청이 보답하겠다고 하자 그 사람은 받지 않으려 했습니다. 자청은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차 2대와 강남 새 아파트 월세 비용을 매달 지원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얻은 이익의 10%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청에 너처럼 보답하는 사람은 없다. 10억을 벌어줘도 30만 원 보내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야. 나야, 그 사람들이 잘됐으면 해서 도와줬지만 참 안타깝지.” 자청은 공짜로 생긴 돈의 10%를 돌려주는 것을 ‘철칙’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지금이야 “10억 벌게 해주면 5억 줄게!”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 벌고 나면 생각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공부도 꼴찌, 외모도 꼴찌, 재산도 꼴찌였던 자청이라는 청년이 그렇게 성공하게 된 이유는 책을 읽고 그것에서 원칙을 세워 자기 삶에 적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묵상하여 결론을 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런 삶이 무너지려면 그 원칙이 그를 무너뜨려야 하는데 진리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삶에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만의 원칙을 만들어 삶을 굳건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야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올 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 같이 말하는 원칙은 책 읽기, 운동, 명상, 글쓰기 등입니다. 이런 일을 매일 반복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그 반석 위에 집은 저절로 지어집니다. 그러나 묵상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시간을 내지 않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성공하려면 성공한 사람들이 했던 것들을 나의 원칙으로 삼고 따라 하면 됩니다. 그것이 나의 삶의 기초가 됩니다.
구원받으려면 성인들이 했던 원칙을 따라 하면 됩니다. 기도와 말씀 봉사라 할 수 있습니다. 매일 단 1분이라도 이것을 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매일의 원칙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 나에게 필요한 원칙들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정해나갑시다. 그러면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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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뢰란 결단이다>
사막의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성 안토니오는 젊어서 일찍 부모를 여의고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젊은 재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성당에 들어갔었는데 미사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복음 말씀이 들려왔는데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네가 완전해지려거든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라.” 이것이 마치 부자 청년인 자신에게 하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사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신 것인데, 특히 이 말씀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렸던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의 여동생 몫을 남겨놓고 재산을 다 처분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완전히 따르는 것 같지 않아 여동생의 몫까지도 팔아서 완전하게 가난해졌습니다. 그리고 지인에게 동생을 맡기고 자신은 사막으로 들어가 극기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몇 명씩 사람이 모이게 되었고 그렇게 교회에 특별한 형태의 수도생활이란 삶의 형태가 탄생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의 마음에는 그런 고생을 하며 사는 것이 주님께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도시로 나가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생각이 강해질수록 그것이 마귀의 목소리임을 깨닫고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며 마지막 유혹까지도 이겨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끊임없이 당신의 목소리를 신뢰하라고 합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사실 이미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고 교회의 가르침에 다 나타나 있습니다. 안 들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독서의 주제는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당신께서 직접 지으신 견고한 성읍에 들게 하여 평안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본래 신뢰하다(batah)의 히브리어 동사 의미는 ‘피난하기 위해 서둘러 가다’란 뜻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신뢰하는 이들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장면이 아마도 소돔 땅에서 주님의 이끄심에 따라 서둘러 소돔 땅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서둘러 가는 롯과 그 가족의 모습이 아닐까합니다.
완전한 신뢰는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끄심이 진정 옳은 길이라 여길 때는 양다리를 걸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의 영화를 완전히 끊지 못한 롯의 아내는 결국 소금기둥이 되어 이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결국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 이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짓밟히고 맙니다. 자신을 믿는 이들이 높은 도시를 상징합니다. 자신이 높이 있으니 피신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 때문에 이 세상의 영화를 온전히 포기할 수 없는 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은 부자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는데도 그 말씀에 신뢰하지 않고 재산을 축적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데 미워하고 속옷까지라도 내어주라는데 더 가지려고 다른 이의 것을 빼앗는 이들입니다. 자기 생각이 이렇게 강한데 어떻게 주님의 말씀에 신뢰하며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달려 자신을 피신시킬 수 있겠습니까?
루벤스의 그림 ‘사자굴속의 다니엘’이란 그림에는 다니엘이 며칠 동안 굶주린 사자굴 속에 빠져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무서운 사자들이 다니엘의 주위에 어슬렁거립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사자는 전혀 쳐다보지 않고 빛이 들어오는 구멍을 향해 하느님께 기도만 드릴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목소리가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려면 이 세상의 목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주님을 신뢰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주님께서 지으신 성읍에 들어가 살기에 합당한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달려가는 사람들인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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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도나 여행 중에 형제님께서 기꺼이 ‘사진’ 봉사를 해 주었습니다. 세도나 여행안내를 600번 하셨다는 형제님은 ‘사진 찍기 딱 좋은 장소’를 잘 아셨습니다. 산행이 힘들 때면 잠시 쉬어가면서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장소는 모두 사진 찍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서 사진을 감상하는 것도 즐거움이었습니다. 스치는 순간 속에 잊고 지나갔던 곳들도 새록새록 생각났습니다. 사진을 보면서 한 자매님은 구름 속에서 천사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구름이 마치 천사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자매님은 자신의 체험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12년을 키우던 ‘Happy’라는 강아지가 죽었다고 합니다. 3년이 지난 뒤에 너무 보고 싶어서 하느님께 한번만 보여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늘을 보았는데 하늘에 죽은 ‘Happy’ 모습의 구름이 있더랍니다.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고, 저희에게도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구름의 모습에 예쁜 강아지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이성과 과학, 논리와 자본에 익숙한 우리들은 어쩌면 우리들 내면에 있는 ‘감성과 열정, 순수와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지난번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의 강의 중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는 4복음에 공통으로 나옵니다. 그만큼 그 내용이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에게 중요했다는 의미입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는 향유를 붙는 것에 초점이 있다면 요한복음은 향유를 붙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낸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만 독특한 것은 향유를 몸에서 닦아주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어느 날 궁중의 보석 세공인을 불러 명했습니다. “날 위해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되 거기에 내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환호할 때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 결코 좌절하지 않고 자신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으라.” 이에 세공인은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지만, 정작 거기에 새길 글귀가 떠오르지 않아 고민 끝에 지혜롭기로 소문난 솔로몬 왕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왕자님 왕이 큰 기쁨을 절제케 하는 동시에 크게 절망했을 때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때 솔로몬 왕자는 잠시 상념에 잠기더니 이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발에 묻어 있는 향유를 마리아가 닦는 행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향유를 붙는 것이 장례를 상징한다면, 닦는 것은 부활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도 ‘이 또한 지나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여기서 ‘간직하다.’는 희랍어 원문은 지켜보다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서 지켜본다는 것은 시점이 현재에 있습니다. 간직한다는 것은 시점이 미래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 시간이 올 때, 기름을 간직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지켜보는 것을 통해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기름을 부은 행동이 복음과 같습니다. 유다는 그것을 낭비라고 보았습니다. 복음은 계속 낭비하는 것입니다. 계속 나누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렇습니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에게 낭비하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퍼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날에 간직할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계셔도 그 말씀을 지켜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과 같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하느님의 말씀에서 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지켜보아야 하는 것은, 가장 힘들 때 나를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돈, 명예, 권력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을 간직하고 살면 믿음을 간직하고 살면 향유가 퍼지듯이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향기가 전해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 큰 힘을 드러냅니다.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통해서 여러 가지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봉헌하는 마리아의 모습. 십자가 죽음의 의미로 받아 주시는 예수님의 마음. 가장 절망 적일 때 붙잡아야 할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힘들 때 주님의 말씀을 지켜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은총이 향기가 될 것입니다. 나는 어떤 향기를 내고 있을까요? ‘인색, 교만, 시기’의 냄새를 내고 있지는 않는지요? 향유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간직할 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의 향기가 온 집안을 채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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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21.24-27: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21절).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뜻을 행할 때 가능하다. 아버지의 뜻이 바로 아들의 뜻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먼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말씀은 현재의 삶에서부터 맺는 열매와 덕이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말씀의 열매와 덕은 삶의 어려움에 의해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안정을 누리게 된다.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때문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25절) 비와 강물과 바람이라는 말로 인생의 온갖 상황,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끔찍한 일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뿌리박은 사람은 이런 재앙 어느 것으로도 무너지지 않는다. 바위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바위는 예수님 자신이시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대고 굳건히 서 있는데 어떤 어려움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겠는가!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은 인간을 인생의 모든 파도 저 너머에 올려놓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되고 있다.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에게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필리 4,13)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어리석은 자가 된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항상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살며 우리 안에 주님을 탄생시키는 삶, 그래서 주님을 모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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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집 짓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표현들은 서로 비교되는 두 대상의 대비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 /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 /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무너지지 않았다 / 무너져 버렸다.”
같은 강도로 폭풍우(“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가 휘몰아쳤는데, 한 집은 버텨 내고, 다른 집은 버텨 내지 못합니다. 여기서 휘몰아치는 폭풍우는 신앙인이 마주하여야 하는 다양한 형태의 위기를 상징합니다. 누구에게는 쓰디쓴 시련과 고난으로, 누구에게는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올 수 있겠지요. 위기의 순간은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인데, 관건은 ‘그 집이 어디에 서 있는가’입니다. 기반이 단단한 곳에 서 있는지, 무른 곳에 서 있는지에 따라서 위기 극복의 여부가 판가름 난다는 것입니다.
보통 집을 지을 때, 어느 정도 크기로 할지, 어떤 모양으로 할지, 어떤 색으로 칠할지, 내부 구조는 어떻게 할 것이며, 장식은 어떻게 할지 등 주로 눈에 보이는 일들을 먼저 떠올리고 구상합니다. 그런데 눈에 잘 띄지 않는 기초를 놓는 일에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 그래야만 머릿속에 그리는 예쁘고 세련된 집이 외부 영향에도 끄떡없이 그 모습대로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을 세우는 일에도 ‘기초 공사’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신앙은 무른 토대 위에 서 있는 위태로운 집이지만,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는 신앙은 단단한 토대 위에 서 있는 견고한 집입니다. 여러분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신앙인입니까?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라는 주님의 경고를 새겨들읍시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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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음과 실행>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1.24-27)
이 말씀은, “믿는다고 주장해도 믿음을 실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 “주님, 주님!” 하지만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로만’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실행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신앙고백도 아니고, 신앙을 증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빈말’을 하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 생각을 실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24.26) <‘죽은 믿음’이라는 말은, ‘믿음이 아닌 것’이라는 뜻입니다.>
12월 7일의 복음 말씀에서는 생략되어 있지만, 복음서의 본문에는 믿음을 실행하지 않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항의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2-23)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면, 그 사람들의 믿음은 보통 사람들의 믿음보다 훨씬 더 대단한 믿음일 것 같은데, 왜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으실까? 예언을 하는 것과 마귀를 쫓아내는 것과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믿음을 실행하는 것’이 아닌 것인가? 믿음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라는 주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들이 한 일들은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법’을 일삼는다는 말은 ‘죄’를 짓는다는 뜻입니다. 그자들은 자기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진짜 예언을 한 것이 아니라 거짓 예언을 했을 뿐입니다. 또 그자들은 자기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냈다고 주장하지만, 진짜로 마귀를 쫓아낸 것이 아니라, 마귀를 쫓아내는 척 한 것뿐입니다. 또 그자들은 자기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속임수를 써서 사람들을 속였을 뿐입니다. 그 일들은 전부 다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를 지은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사이비 종교나 이단 종파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거창하게 하는 것처럼 선전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일들도 모두 속임수이고,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집’은 ‘인생’을 상징합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어서 그 집이 무너지지 않은 사람은, ‘온 삶으로’ 믿음을 실행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어서 그 집이 완전히 무너진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에 초점을 맞추면, ‘비, 강물, 바람’은 ‘주님의 심판’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무너지지 않거나 무너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환난과 박해’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돌밭에 뿌려진 씨’에 연결됩니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린 것이다.”(마태 13,5-6)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태 13,20-21)
여기서 ‘뿌리’는 ‘믿음을 실행하는 삶’, 또는 ‘믿는 대로 사는 것’을 상징합니다. 환난과 박해가 없을 때에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과 믿는 대로 사는 사람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전부 다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다가 환난과 박해가 닥치면, 뿌리가 있는지 없는지, 알곡인지 쭉정이인지(마태 3,12), 금방 드러나게 됩니다. 신앙인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즉 신앙과 생활이 하나인 사람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표현하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신앙인이 아니다.”가 됩니다. “나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신앙인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답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어야 신앙인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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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이 말씀은 산상 설교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산상 설교에서 참행복을 선포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자애로우신 사랑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주님’이라는 호칭은 하느님의 주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르는 것만으로는, 미사 때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이라는 고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동으로 옮길 때 완성됩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는 것’(티모테오 1서 2장 4절 참조)입니다.
구원은 하늘 나라에서 이루게 될 하느님과의 충만한 친교를 이룸으로써 아버지를 닮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그 사랑을 나누시고자 인간을 만드시어 그 사랑을 인간에게 내어 주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다시 아버지께 내어 드림으로써 하느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모습을 충만히 실현하게 합니다. 우리도 그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고자 노력하며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합니다. 하루의 수많은 만남과 작은 일들도 사랑으로 대한다면 세상에 하찮은 것이 없습니다.
그 작은 만남과 작은 일들 모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질문을 늘 마음에 새기며 하느님께 받은 사랑만큼 모든 일과 만남에 사랑과 정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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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기초공사>
오늘 복음에 바위 위에 지은 집과 모래위에 지은 집에 대한 비유 말씀은 세상에서나 천국을 위해서나 반듯이 실천해야 할 기본적 자세입니다.
기초가 잘되지 않으면 살아가는데 닥치는 시련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넘어지고 쓰러져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건강도 태어날 때 갖추어야 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지만 기초가 잘못되면 건강한 몸으로 살 수 없습니다.
첫 신앙을 받아들일 때 아주 기초되는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깨닫지 못하면 신앙의 기초가 흔들려 작은 시련도 극복하지 못하고 신앙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기초가 없는 삶은 비바람, 지진, 쓰나미. 오면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이 삶의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한 인격도 도를 닦고 인내와 겸손과 양심의 반복된 반성과 시련 속에 견디지 않으면 쉽게 자기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작은 일에도 주위를 어지럽히고 질서를 무너트립니다. 기초가 없는 삶은 권력욕, 재물욕, 명예욕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불나비가 불 속에 뛰어들어 불속에서 산화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요구되는 기초는 어렵지 않게 기초공사를 준비하고 견고이 할 수 있습니다. 천자문에 시작 “ 하늘 천 따지” 귀로 하늘의 소리를 듣고 마음에 새기고 기억에만 생기거나 하늘의 지식만 얻는 것이 아니라 들은 대로 실천해야 하고, 눈으로는 발을 디디고 있는 땅을 보는 대로 사랑하고 진실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거처하는 공간과 시간을 알고 그 상황에 적응 하는 사람은 문자 그대로 천지가 흔들려도 평정을 잃지 않고 견고하게 살아갑니다.
우리의 기초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영원이 살도록 마련하려 오신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주님을 찾아 얻어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의 좁은 문을 찾아 들어갑니다.
저는 오늘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주님에게로 향하여 주님의 손을 잡고 사는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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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동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글과 말>
이따금 글을 쓰게 되면서, 말로 표현하는 것을 글로 다 담아내지 못함을 느낍니다. 또 말은 하면서도, 그것을 삶으로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글에 힘이 있는 것은 말을 잘 담아낸 덕분일 것이며, 말에 힘이 있다는 것은 삶이 온전히 배어 있는 덕택일 것입니다.
옥수수 농사를 짓다가 수확을 얼마 앞둔 때의 일입니다.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큰 수확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태풍으로 옥수수들이 다 쓰러졌습니다.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옥수수를 따고 돌아오는데, 온통 흙투성이가 된 모습을 주교님이 보시고 “뭘 했기에 옷이 그러냐”고 하시기에 저도 모르게 “옥수수를 캐고 왔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주교님은 웃으시며 “옥수수도 캐는 거냐”고 하셨습니다. 땅에 쓰러진 옥수수를 따서 그렇게 답했던 것 같습니다.
돌아오는 주일, 도시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는데 미사 중 보편지향기도에서 신자들이 <매일미사>에 나오는 기도만 달랑 하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바로 옆에서 이웃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시름하는데, 말로만 포장되고 글로만 길들여진 우리네 속내를 그대로 보는 듯했습니다.
옥수수 농사라는 것이 내 삶에 없었더라면, 저 역시도 과연 ‘수해로 아파하는 농민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드렸을지 의문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글만 잘 쓰는 이’나 ‘말만 그럴듯한 이’를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들의 ‘주님’이라는 고백이 삶으로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삶이 바탕이 되면 절로 입이 열려 말도 나오고 글로도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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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7,21)
저는 여행을 좋아하고, 그래서 저는 EBS의 ‘세계테마기행’ 프로그램을 자주 시청합니다. 여행할 땐,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매료됩니다. 때론 흥미롭거나 의미로운 건축물은 일부러 찾아가 봅니다. 몇 년 전 제주도 여행 중에서도 올레길을 걷기도 했지만, 제주 풍경과 함께 틈틈이 건축물을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는 건축물은 이타미 준의 「포도호텔」인데, 이 호텔은 23개의 객실이 포도송이처럼 얽힌 구조도 감동적이었지만, 이보다 더 좋았던 점은 건물 자체가 제주 본래의 고유한 자연 상태를 손상하지 않고 환경친화적이면서 제주의 특색인 물과 바람과 돌을 소재로 지었기에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타미 준의 또 다른 작품인 「방주교회」 역시 단순미와 함께 제주의 오름과 잘 어우러진 건축물이었습니다. 또한 섭지코지에 지어진 ‘안도 타다오’의 「지니어스로사이: 명상센터」는 볼륨과 빛에 의해 구성된 보기 드문 건축미를 자아내는 작품입니다. 이 건물들은 단지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주제가 있고 철학이 있어서 제겐 참 좋았습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각각 산상설교(마태 5,1-7,29)와 평지설교(루6,17-47)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물론 산상설교가 평지설교보다 내용도 풍부하고 복음서 전체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마태오나 루카 복음에서 똑같이 ‘집 짓는 사람의 비유’로 설교를 마무리 짓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집을 짓는 사람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곧 영적 건축가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언급한 ‘누가 슬기로운 건축가며 누가 어리석은 건축가인가’에 대해서 예수님은 “나의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이며, 나의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은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7,24.26)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슬기로운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며, 그는 자신의 집을 반석 위에 지은 것과 같습니다. 반석이란 말은 슬기로운 그리스도인들이 집을 지을 때 건물의 기초, 터전을 말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덧붙여 사도 바오로는 “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저마다 잘 살펴야 합니다.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코 3,10-11)라고 묘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 건축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요1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마태 16,18)라고 할 때 반석은 곧 믿음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위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국 매일 매일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 즉 산상설교와 평지설교를 듣고, 들은 말씀을 말씀대로 실행하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 슬기로운 이가 지은 집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마음과 실천이란 재료로 지은 집이기 때문에, 그 집은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7,25)
이와 반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은 어리석은 건축가는 자기의 집을 모래 위에 짓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모래’란 희망이 없는 이 세상을 말합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리스도란 기초 위에 짓지 않고 모래처럼 약하고 허물어질 세상이란 기초 위에 지은 집은 시련이나 환난이 닥치면 쉽게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그 집은 심판 날에 다 타버리면 그는 손해를 입게 되는 것”(1코 3,13.15 참조)과 같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이처럼 하느님의 심판이 견디지 못하는 허약한 집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그 말씀을 계속해서 실행하고 순종하는 생활에 실패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겉은 화려하지만 단지 타인에게 보여 주기 위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겸손되이 받아들여 자신이 슬기로운 건축가인지 아니면 어리석은 건축가인지 성찰해 보셔야 합니다. “자기가 믿음 안에 살고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 따져 보십시오. 스스로 시험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 깨닫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2코 13,5) 만일 여러분 스스로 실격자라고 생각한다면 ‘주님, 주님!’하고 영혼 없는 말로 부르지만 말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지은 집이 편하게 보이고 머물다 가고 싶은 그런 집을 짓도록 합시다.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이 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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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
작심삼일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돌아보면 결심과 행동은 언제나 다릅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깊은 맛을 내야 하는데 세월이 가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틀에 박힌 법을 지키는 것보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 고 주님의 계명을 합리화시키는데 약삭빠르게 움직입니다.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진리는 변함이 없건만 진리를 대하는 마음은 물러지고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율법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로마 2,13)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그리고 그 실천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 6,6)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른’ 행동입니다. 신앙고백이나 찬미의 말도 그 진실성은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지순례나 기도회, 피정을 다녀와서는 너무 좋았다고 떠벌립니다. 그러나 좋았는지는 삶이 말해 줍니다.
에제키엘서에는 실천의 어려움을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 33,31)고 적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면 기반을 잘 다지고 그 위에 지어야지, 그렇지 않고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기초가 튼튼하면 큰바람과 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비바람을 걱정할 틈도 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면 큰 믿음의 사람이 되지만, 듣기만 하는 사람은 환난이 오면 곧 흔들려 방황하게 됩니다. 사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하십시오.”(알베리오네 신부)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마지막 날의 심판이라는 폭풍우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본당에서 시행하고 있는 ‘성경 통독’, ‘감사 노트’ 쓰기에 적극 참여해 보십시오. 하루의 삶이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하셨으니 실행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차지하기를 기도합니다.
인생은 유 일회적이며 반복할 수 없습니다. 그 끝에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판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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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대 철학자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 철학의 시조라 불리는 탈레스(BC 624-546)의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며 걷다가 물웅덩이에 빠진 것입니다. 밤길이 어두워서가 아니라 깊은 생각에 골몰하다가 그리된 것이었지요.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하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의 이치는 알려고 하면서 바로 눈앞의 웅덩이는 보지 못하는군요.”
정곡을 찌르는 말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 모습도 반성할 수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눈앞의 현실은 보지 않고 뜬구름 잡기식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전혀 공부하지 않으면 시험에 합격할 수 없습니다. 전혀 일하지 않으면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전혀 기도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 뜻에 철저하게 무관심했던 사람이 과연 구원은 얻을 수 있을까요? (물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가능하기도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지금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뜻을 바라보며 지금을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어떤 시련과 고통의 걸림돌에서 걸려 넘어지지 않게 됩니다. 언제나 굳건하게 주님을 향해 나아가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하늘의 이치를 알려고 하면서 눈앞의 웅덩이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지금을 충실히 살 수 있는 모습이 필요했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지금을 사는 그 충실한 모습이 하늘 나라라는 최고의 선물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진짜로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안에서는 그럴싸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적극적으로 실천했던 사람은 박해가 닥치거나 어려움이 오더라도 주님을 향한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어떤 실천도 하지 않은 사람은 박해가 닥치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 얼른 주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을까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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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
마태오 7,21.24-27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라, 내 말을 실행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믿음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인 사람이
믿음의 하늘나라에
들어간답니다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희망인 사람이
희망의 하늘나라에
들어간답니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인 사람이
사랑의 하늘나라에
들어간답니다
하늘나라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인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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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철수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반석 위의 인생집>
-한결같이 주님 말씀을 실행하는 삶-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 26,4)
밤 일찍 눈뜨니 지난 밤 도착한 어느 자매의 메시지입니다. “낼 제 생일이예요. 감사와 찬미로 봉헌해 주세요. 무릎, 심장, 눈 등……. 우울함, 이제 퇴임을 2년 앞두고 저를 바라보니 아픔이 가득하네요.” 어려운 중에도 최선을 다해 온 삶임을 알기에 즉시 답신을 보냈습니다. “주님의 위로와 평화의 축복을 빕니다. 힘내세요! 사랑하는 자매님!”
오늘은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생몰연대를 보니 만 57세를 살았던 성인입니다. 저는 성인보다 무려 17년을 더 살고 있는 중입니다.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모두가 성인이 되어 살라고 우리를 격려하는 성인들 축일입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그리스어로 “불멸”을 뜻하며 성공회에서는 성인의 축일을 그가 선종한 4월4일 지냅니다. 그가 397년 4월4일 성토요일 선종한 날 마지막 남긴 임종어가 얼마나 책임을 다하며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았는지, 또 그가 얼마나 겸손하고 신심 깊은 사람인지 말해줍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단 말인가! 오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지체하시지 마시고 저를 거절하지 마옵소서.”
성 암브로시오는 정말 위대한 성인입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4권” 표지 제목은 “그리스도의 승리”이며 표지 사진은 최초로 로마제국의 황제가 아닌 인물,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성 암브로시오입니다. “마침내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을 삼켜버렸다!”라는 글귀도 나옵니다. 바로 여기 결정적 기여를 한 분이 바로 암브로시오 성인이요 신자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주교가 된 분으로 주교가 된 후에 세례를 받은 분입니다.
성인은 초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분으로, 세속의 권위에 대항하여 교회의 독립과 자주성을 옹호했던 탁월한 행정가이면서, 성경, 교의신학, 신비신학 등의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설교를 통해 설파한 위대한 신학자이자 영성가였습니다. 그는 387년 이단 사상에 빠져 있던 성 아우구스티노를 회두시켜 세례를 줍니다. 성 암브로시오(12.7)와 더불어 성 아우구스티노(8.28). 성 예로니모(9.30), 성 대 그레고리오(9.3) 네 분은 서방의 4대 교부로 추앙을 받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고백록”에서 묘사한 암브로시오의 구체적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그가 아주 짧은 시간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에는 꼭 필요한 요기로 몸을 돌보거나 독서로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그가 책을 읽을 때에는 눈은 책갈피를 더듬어 나가고 마음은 터득한 바를 되씹고 있었지만 목소리와 혀는 쉬고 있었습니다. 가끔 저희가 그를 찾아갔는데 누구든지 들어가지 못하게 금하는 법도 없었고 또 누가 찾아왔다고 자기에게 알리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소리 없이 묵독하고 있음을 보았고, 그럴 때면 저희도 하릴없이 소리 내지 않고 한참 동안 말없이 그냥 앉아 있다가 가만히 자리를 뜨곤 하였습니다. 그처럼 집중하고 있는 사람에게 누가 번거로움을 끼칠 엄두가 나겠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노의 성 암브로시오에 대한 참 중요하고도 아름다운 장면에 대한 생생한 묘사입니다. 중세기가 시작되기 전 그 옛날 고대 권위의 시대에 놀랍게도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늘 활짝 열려 있었던 성인의 집무실이었던 것이니, 감히 비교하건데 제 집무실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 암브로시오가 얼마나 말씀의 사람이자 관상의 사람인지, 또 얼마나 뛰어난 집중력을 지닌 분인지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 특기할 사항은 그가 평생 “주님의 학인(學人)”이자 “말씀의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말씀의 훈련, 말씀의 실행을 통해 그가 주님의 말씀의 반석위에 얼마나 견고한 인생 집을 지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오늘 복음의 다음 말씀을 평생 삶의 지침으로 삼아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우리 또한 깊이 마음에 새겨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마태복음 5장부터 계속된 산상설교중 가장 중요한 결론 부분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세워지기는 평생이지만 무너지기는 순간입니다. 밖에서 아무리 좋게 봐줘도 안으로부터 무너지면, 부패하면 아무도 도와주지 못합니다. 주님 말씀의 반석 위의 인생 집 역시 평생 미완(未完)의 현재진행이니 죽을 때까지 말씀 실행의 수행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사상누각(沙上樓閣), 모래 위의 인생 집 같지는 않은지 다음 묘사가 실감 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정말 이런 인생 집이라면 위기를 맞았을 때 속수무책일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말씀 실행의 반석 위의 슬기로운 삶이나 사상누각의 어리석은 삶 역시 하루하루의 선택입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주님의 평생 말씀의 학인이 되어, 수행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말씀 실행을 통해 주님 반석 위에 인생집을 짓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한결같이 “말씀의 수행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평화의 축복입니다.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주님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이사 26,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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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늘나라 문지기>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이라고 하는 사람 가운데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씀인데, 그것은 하느님 뜻의 실천 여부에 달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주님’하고 하느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 저는 이런 묵상이 되었습니다. ‘주님, 주님’ 하지만 그저 이름을 부르는 주님이 있고, 진짜 당신은 저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주님이 있다고.
그리고 그저 이름으로 주님을 부르는 경우는, 진짜 귀찮을 정도 주님을 부르고는 그저 주님을 부려 먹고 시켜 먹기만 하는 거라고.
‘엄마’하고 부르고는 밥 줘, ‘엄마’하고 부르고는 돈 줘, ‘엄마’하고 부르고는 옷 좀 다려줘 뭐 이런 식입니다.
말은 주님이지만 전혀 ‘나의 주인님’이 아니고 실제로는 ‘나의 종’처럼 주님을 부리는 겁니다.
우리의 청원기도 상당수가 그렇습니다.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주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하며 결국 나의 요청 또는 요구를 들어달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강요이기에 주님께서 안 들어주시면 삐지고 원망하는 기도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그런 기도하지 말고 오히려 실천하라고 하시고, 실천 이전에 하느님이 진정 나의 주님임을 고백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이 진정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면, 나는 진정 하느님의 종이 될 것이고, 내가 진정 하느님의 종이 되면 뭘 하든 내 뜻대로 하지 않고 주 하느님 뜻대로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백성이 되고, 하늘에서와 같이 나에게서도 하느님 나라가 이뤄질 것입니다.
이제 나에게서 하느님 나라를 이룬 우리는 땅에서도 하느님 나라가 이뤄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우리는 하늘나라의 성문을 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하늘나라 문지기 또는 성문지기입니다.
그래서 시편 118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열어라, 정의의 문을! 그리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드리리라. 주님의 문이 바로 여기 있으니 의인들이 이리로 들어가리라.“
그저 주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나의 진실한 고백과 실천으로 하늘 문이 나에게도 열리고 사람들에게도 열리게 하라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성문지기 소임을 주심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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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단순성!'>
오늘 복음(마태7,21.24-27)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라.'와 '내 말을 실행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말씀을 '집 짓는 기초 공사'에 비유해 말씀하십니다. 곧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를 '튼튼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에 비유하시고,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이'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단순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비를 청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
대림 제1주일인 새해부터 다시 성경필사를 시작했습니다. 올해는 신약성경을 완필하려고 합니다. 어제부터 산상설교(마태5~7장)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말씀이 너무나도 분명하고 간결해서 어떤 해석이나 주석이 필요치 않은 말씀이 대부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들에 대한 실행 여부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와 실행하지 않는 이의 두 부류의 사람'과 '회개하는 이와 회개하지 않는 이의 두 부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선포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지금 여기에서 실행하는 이와 회개하는 이가 들어가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이고, '구원'이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예수님 말씀의 요지'이며, '예수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단순하게 믿고 실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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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xwmgehfAjx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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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7, 21)
아버지의 뜻은
우리의
생각을 흔들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깨닫고
실행하게 만드시는
가장 좋으신
아버지의
뜻입니다.
우리는
복음이라는
씨앗을 심고
실행하는
실행의
자녀들입니다.
기초는 기초로
이어지고
기초가 되는
올바른
실행은 또 다른
실행으로
이어집니다.
대림시기는
하느님의 뜻인
기본을 다시
새기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말씀은 기본을
갖추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소금의 역할을
하여야 할 교회가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기본과
허술하고 안일한
실행의 늪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인 부분을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
이 대림시기의
본질입니다.
기본을
갖추는 것이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작은 변화는
작은 기본의
실행으로
이루어집니다.
실행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면
신앙은 지식의
향연으로
전락합니다.
어둠이 아니라
밝음을 드러내는
실행입니다.
실행으로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됩니다.
마음을 합하는
실행으로
하느님의 뜻을
탄생시키는
은총 가득한
대림의 날
되십시오.
진리의 새싹은
실행의 새싹이듯
실행의 새싹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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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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