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참깨 밭의 꿀벌 같은 하도나 이쁜 늦둥이 어린 딸이 있어 오늘은 깨잘도 입에 달아주면서 캘린더 걸어놓고 숫자를 읽히는데 아빠 2는 오리 한 마리 아빠 22는 오리 두 마리 아빠 우리 함께 호수공원에 갔을 때 뒷놈 오리가 앞놈을 타올라 물을 먹여 죽였어요 하길래설랑 나는 저런저런 하다가 나도 호숫가 물소리로 그럼그럼 했더라
새 / 서장춘
그녀의 / 눈치 빠른 몸짓처럼 / 찍소리 하나 없는 / 댓돌 위의 정물처럼 / 굽 높은 / 힐처럼
귀 / 서장춘
하늘은 가끔씩 신의 음성에겐 듯 하얗게 귀를 기울이는 낮달을 두시었다
소묘 / 서장춘
하느님은 부서져서/ 가을볕에 내리시고/ 소리도 그늘도 없는/ 셀로판지 빛깔의/ 따뜻한 공지 위에/ 잠자리 그림자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연필로 그리고 있다/ 너무 투명해서/ 잠자리는 한 마리도 보이질 않는다
고추잠자리 / 서정춘
저! 일획一劃으로 켜진 성냥개비만한 것/ 저것이 여러 번씩 내 속눈썹 지지는 마른 번갯불이네
도마뱀이 피아노를 치다 / 서장춘
세계에서 손가락이 제일 긴 아저씨는 피아노의 거장 루 빈스타인이다 너 같이 짧은 손가락(그것도 손가락이라고) 이 피아노를 친다고? 차마 도마뱀 대가리만 내놓은 발가락 같은 그 손가락이 피아노를 친다고? 물음표 두 개를 마누라 양쪽 귀걸이에 걸어 주며 구박을 하자 건반 위에서 펄쩍 뛰어내린 그 짧은 손가락이 아까부터 자기 발가락에 숨어 있던 돈마뱀을 쫓아 건반 위에 풀어놓고 그것들을 열 손가락으로 때려죽이고 있었다
서 있는 사람의 손에게로 가서 다른 감나무가 되어 주렁주렁 감을 달고 가을 시내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수평선 / 서장춘
하늘 밑 바다 위에 빨랫줄이 보인다
빨랫줄 위에는 다른 하늘이 없고
빨랫줄에 빨래는 파도뿐이다
빨랫줄 / 서장춘
그것은, 하늘 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 줄 같다 그것은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방울이 즐겁다 그러나,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당겨 주는 힘 그 첫 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 뿐이다
난蘭 / 서장춘
난을 기르듯 / 여자를 기른다면 / 오지게 귀 밝은 / 요즘 여자가 와서 / 내 뺨을 치고서 / 파르르르 떨겠지
첫사랑 / 서장춘
가난뱅이 딸집 순금이 있었다 가난뱅이 말집 춘봉이 있었다
순금이 이빨로 깨트려 준 눈깔사탕 춘봉이 받아먹고 자지러지게 좋았다
여기, 간신히 늙어 버린 춘봉이 입 안에 순금이 이름 아직 고여 있다
봄, 파르티잔 / 서장춘
꽃 그려 새 울려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30년 전 ㅡ1959, 겨울
서정춘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수평선 보며 / 서장춘
그렇다. 하늘은 늘 푸른 폐허였고 나는 하늘 아래 밑줄만 그웃고 살았다 .
마치, 누구의 가난만은 하늘과 평등했음을 기념하듯이
눈물 부처 / 서장춘
비 내리네 / 이 저녁을 / 빈 깡통 두드리며 / 우리 집 단칸방에 / 깡통 거지 앉아 있네 / 빗물 소리 한없이 받아 주는 / 눈물 거지 앉아 있네
늦꽃 /서정춘
들국화는 오래 참고 늦꽃으로 핀다 그러나 말없이 이름 없는 가인佳人 같아 좋다 아주 조그맣고 예쁘다 예쁘다를 위하여 늦가을 햇볕이 아직 따뜻했음 좋겠는데 이 꽃이 바람의 무게를 달고 흘린 듯 사방으로 흔들리고 있다 이 꽃이 가장 오래된 늦꽃이고 꽃이지만 중생 같다
균열 / 서정춘
내 오십 사발의 물사발에 날이 갈수록 균열이 심하다
쩍쩍 줄금이 난 데를 불안한 듯 가느다란 실핏줄이 종횡무진 짜고 있다
아직 물 한 방울 새지 않는다 물사발의 균열이 모질게도 아름답다
달팽이 약전(略傳) / 서정춘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 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 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인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 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生이 있었다.
단풍놀이 / 서장춘
여러 새가 울었단다
여러 산을 넘었단다
저승까지 갔다가 돌아왔단다
비 오는 날* / 서장춘
내 몸의 잎사귀 두 귀때기 빗소리 얻으려 귀동냥 가고 있다 귓속으로 귓속으로 귀동냥 가고 있다 * 비오는 날은 떠돌이 빗소리를 아느냐 빗소리 따라다닌 슬픈 귀동냥 * 세상은 빗소리로 가득하고 문득 나만 없다
*구제:우雨中
DNA / 서장춘
나에게 / 밤이란 / 고고조 할배의 / 무덤 속이었다가 / 무덤 속의 / 나는 / 부싯돌을 치는 / 귀뚜라미였다가
깊은 밤 / 서정춘
대숲에 이슬 내린 소리 받아 들으니 / 밤중도 자금 속 같습니다 / 아, 전생 같은 오늘 밤
종소리 / 서장춘
한 번을 울어서 여러 산 너머 가루가루 울어서 여러 산 너머 돌아오지 말아라 돌아오지 말아라 어디 거기 앉아서. 둥근 괄호 열고 둥근 괄호 닫고 항아리 되어 있어라 종소리들아
봄날 / 서장춘
나여 / 푸르러 맑은 날과 / 바람 불어 좋은 날은 / 죽기에도 좋은 날 / 이런 날은 산불 같은 / 꽃상여 좀 타 봤으면,
竹編(죽편) 1 / 서정춘 ―여행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비백 飛白 / 서장춘
저것이냐 비백飛白 어느 흘림체 먹물에서 보았던 비백飛白 오늘 섬진강 여울에서 시린 니쏘리로 여러 번씩 들린다 비백飛白 돌자갈에 몸을 갈며 여울물 차오를 때 보이는 비백飛白 은장도 빛깔의 은어銀魚떼가 보인다 비백飛白 저 역류의 힘! 비백飛白
*) 구제 : 흘림.. **각) 솔 같은 붓으로 글자의 획에 흰 자국이 나도록 쓰는 한자의 서체,
경내境內 / 서장춘
하늘이 조용한 절 집을 굽어보시다가 댓돌 위의 고무신 한 켤레가 구름 아래 구름보다 희지고 있는 것을 머쓱하게 엿보시었다
풍경 (風磬) / 서정춘
우네 물고기 처량하게 쇠 된 물고기 하릴없이 허공에다 자기 몸을 냅다 치네
저 물고기 절 집을 흔들며 맑은 몰소리 쏟아 내네 문득 절 집이 물소리에 번지네
절 집을 물고 물고기 떠 있네
저수지에서 생긴 일 / 서정춘
갑자기 큰 물고기 한 마리가 저수지 전체를 한 번 들어올렸다가 도로 내립다 칠 때는 결코 숨가쁜 잠행 끝에 한 번쯤 자기 힘을 수면 위로 뿜어 내보인 것인데 그것도 한 순간에 큰 맘먹고 벌이는 결행 같은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