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 (박태준 작곡)
울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길을 잃은 기러기 날아 갑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넓은 하늘로
엄마 엄마 부르며 호로 갑니다.
오동잎이 우스스 지는 달밤에
아들 찾는 기러기 울며 갑니다.
엄마 엄마 울고간 잠든 하늘로
기럭 기럭 부르며 찾아 갑니다.
어릴적 국민하교 시절 학교에서 "기러기' 동요를 정식으로 배운적은 없지만
형이나 누나들이 가끔 기러기 동요를 부르는 것을 들어 나도 가끔 따라 불러 본 동요다.
어린 마음이지만 멜로디나 가사가 너무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당시에는 왜 그렇게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하는 음악이 많았는지 성인가요는 물론, 어린들이 부르는 동요까지도
반달, 오빠생각, 따오기, 기러기 등, 어린이에 게 까지 쓸쓸함을 느낀 아련한 추억이 있다.
사실 외로운 가요나 동요들은 거의 일제 강점기에 작곡하고 발표된 곡들이다.
한국인들이 당시에는 일제의 폭정 아래, 나라 잃은 설음을 음악으로 표현했으리라 생각되지만
어린 시절 부터 외로움과 쓸쓸함을 느끼며 문학의 감성을 키웠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비교적 서울 태생이라 시골의 적막함과 외로움을 덜 느꼈으라 생각되지만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당시의 아이들은 나보다 더한 외로움을 느끼고 자라지 않을가 싶다.
박태준
뜸북 뜸북 뜸북새~로 시작하는 오빠생각을 포함 오뚝이, 하얀밤을 비롯해 많은 동요를 작곡한 작곡가이다. 가곡 냉면도 작곡하였고 부산대학교, 제주대학교 등 대학 교가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영남중고교 교가도 작곡하였다. 문화훈장, 서울시문화상, 예술원상 등을 수상. 종교는 개신교(예장통합)이다.[2]2. 생애[편집]
1901년 1월 12일(양력) 경상북도 대구군 동상면 남성리(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157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개신교계 학교인 계성학교를 거쳐 평양숭실전문학교[3]를 졸업하였다. 이 당시 서양 선교사들에게서 성악과 작곡의 기초를 배워 가을밤, 골목길 등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들은 한국 동요의 초창기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후 1924년에서 1931년까지 모교인 대구 계성중학교에 재직하면서 대한민국 동요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작곡하였다.[4]
1932년에 미국의 더스커럼 대학과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유학하여 합창지휘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귀국한 뒤 1936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일제강점기 말엽에는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8.15 광복 이후 1945년 전문 합창단인 한국 오라토리오 합창단을 창단하여 1973년까지 지휘자로 활동하며 합창음악 발전에 기여하였다.
1958년 연세대학교에 종교음악과를 개설하여 개신교 음악교육의 초석을 쌓고,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 및 명예교수를 역임하였다. 1945년 이후 1973년까지 남대문교회 성가대를 지휘하고, 또한 1968년 이후 한국음악협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서울음악제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달서구 도원동 월광수변공원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의외로 대구 시민들도 그를 아는 사람이 드문 편이다.
그의 형인 박태원[5] 역시 음악가로 '클레멘타인', '올드 블랙 조', '켄터키 옛집' 등을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을 밤'이라는 동요도 작곡했으며, 이 곡은 개신교에서 '목자의 심정'이라는 제목과 내용으로 바뀌어 불리기도 한다.
'동무생각' 이라는 가곡을 작곡했으며 여기에 청라언덕(동산병원 옆 선교사주택이 있는 곳)이라는 지명이 나오며, 대구 도시철도 2호선 청라언덕역의 유래가 되었다. 청라언덕에 이 노래의 노래비가 있다. 계성학교 시절 신명여학교로 통학하는 이름 모를 소녀를 짝사랑한 적 있는데, 이때의 감정을 나중에 동료로 근무한 작사가 이은상에게 말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첫댓글 엄마!
엄마!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평온해~~.
"엄마 찾아 삼만리" = "사랑 찾아 엄마품"
엄마 엄마 하늘로 기럭 기럭 부르며 찾아 갑니다.
올려주신 동요를 들으면서
소싯적 추억을 되살려 봅니다.
오늘도 우리 친구들 건강한 하루를...
잘듣고 갑니다
엄마라는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찐하고 눈물이 글썽 거려지는것은...
부모님 살아계실때 불효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오늘도 노래를 들으며 불효자는 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