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 전, 추운 어느 겨울 날, 최참판댁에 괴나리봇짐을 든 남루한 차림의 젊은 사내가 찾아왔다.
스물한두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는 차림이 누추했으나 준수한 용모였으며 어딘지 슬기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저녁 한 상을 대접받은 그는 추위와 굶주림에 떨면서도 베푸는 음식을 생각 깊은 자세로 천천히 들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한참을 묵묵히 앉아있던 그는 하룻밤의 잠자리를 청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머슴살이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김서방은 거절하려 했으나 이상스럽게 마음이 끌렸다. 어딘지 깊은 곳에 영혼의 불길을 밝히고 있는 듯한 젊은이에게 동정 이상의 감정이 움직여 윤씨부인에게 말을 건네보았는데 그 젊은이를 한번 보자는 분부를 받았다.
윤씨는 여자치고 큰 키였다. 상체는 곧았으며 양 어깨의 뼈대가 무명 겹저고리 밑에서 솟은 듯했다. 오십오 세의 나이보다 겉늙은 것 같았으나 긴 눈매가 아름다웠다. 여자답기 보다 선비같은 모습이다.
윤씨는 젊은이를,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아무 소리 없이 눈을 감았다. 젊은이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눈만 내리깔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던지 윤씨는 한참 만에, 있고 싶으면 있어 보라하고 젊은이의 이력이나 근본 같은 것은 묻지 않았다. 그가 바로 구천이다.
그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그러면서 말수가 적은 사내였다. 하인들은 그의 학식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면서 그를 썩 유식한 사람으로 단정하고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힘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머리를 써서 일을 하기 때문에 남에게 뒤지지는 않았고 그 자신 머슴의 신분임을 똑똑히 자각하여 책임의 한계를 명백하게 지켜 나갔다.
드물게, 어쩌다가 싱긋이 웃는데 그것이 감정 표시의 전부인 듯, 그러나 미소는 따스하고 다정스러웠으며 때론 천진한 동심이 상기도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구천이에게 최참판댁 계집종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내끼리인 동료까지 이상하게 애정 같은 것을 느끼었다. 하인이라는 같은 신분이면서 구천이의 귀한 풍모나 인품이나 유식하다는 점이 자랑스러워 그랬을 것이다. 구천이 자신은 성이 김가라는 말 이외 내력이나 부모형제에 관해서 일체 말이 없었다.
그런 구천이 어느 날 윤씨의 며느리이자 최치수의 아내인 별당아씨를 사모한 죄로 윤씨의 명령에 의해 고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런데 그날 밤 구천이와 별당아씨는 어디론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날 밤 누가 도장문을 열어주었는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무표정한 윤씨부인이나 사랑에 도사린 최치수의 속마음을 도무지 짚어볼 수 없었고 누가 도장문을 열어주었느냐고 추달이 있을 법도했으나 불문에 부치는 저의(低意) 역시 심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하인들 사이에 귓속말이 오고갔는데 나으리마님이 사방에 사람을 놔서 가문에다 구정물을 끼얹고 간 불륜의 남녀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윤씨부인이 문의원을 맞이하기 위해 두 손을 맞잡고 대청에 서있다. 언제나 다름없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태도는 사부를 모시는 것 같은, 일찍이 뉘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 경건한 태도였다. 문의원은 최참판댁를 드나드는 의원인데 , 깐깐하게 말랐으며 백설 같은 수염에 묻힌 얼굴은 맑고 인자해 보이는 노인의 풍모를 그대로 갖추고 있다.
"연곡사에 오늘로 떠나시게 되는지요. 하도 답답하여. . . . . ." 윤씨부인이 물었다. " 답답하게 생각하신다면 한량이 없을 것이요. 지나간 고초는 다 꿈과 같고 당장의 고초 역시 보내 버리고 나면 꿈이 될 것이외다.참으시요." " 어른께서는 노상 그 말씀을 하시었소." " 내일인들 또다시 그 말을 못하겠소?" 윤씨부인은 눈을 들어 문의원을 쏘아본다. 적의에 가득한 눈이, 공손스럽던 눈이 원수를 대한 것처럼 푸른 빛을 발하면서 마음으로 말을 쏘아댄다. ' 이미 공양으로 바쳐진 몸, 어찌 이다지도 세월이 길단 말이요? 내게 아직도 갚음이 남아 있단 말씀이요?' ' 부인이 겪는 고초는 만인이 겪는 고초요. 부인 혼자만의 것이겠소?' 문의원은 원수를 보는 것 같은 윤씨부인의 눈길을 조용히 받는다. ' 아직도 나는 내가 나를 벌주어야 한단 말씀이요?' ' 임의로 죽을 수 없는 게 사람의 목숨이란 말씀이요. 설령 삶이 죽음보다 고생스러울지라도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게요. ' 죽어야 마땅하거늘 이리 명이 붙어 있으니......' ' 부인에게는 죄가 없소, 지나간 일은 환각이요. 참으시요.' ' 내 마음에 죄가 있소. 내 마음은 사악하오, 세상에서의 갚음보다 더 큰 형벌을 받고 싶은 거요. 나는 죽어야 할 사람이요.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아야 할 사람이요.' 문의원은 얼굴을 돌리고 물었다. " 사랑에 계신 분은 별고 없으신지요." " 사냥을 하겠다 하였소." 그 말을 내뱉으면서 윤씨부인의 얼굴은 파아래졌고 경련을 일으켰다. " 그 아이를 찾아나설 심산임에 틀림이 없소." 낮은 목소리였다. 문의원의 낯빛도 달라진다. 두사람 사이에 무겁고 긴, 아득한 것 같은 침묵이 지나간다. " 자신이 받은 수모는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잊는 성미는 아니지요." 누가 파들파들 떨고 있는 윤씨부인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잇을까, 처참했다. " 지나간 일 탓한 들 소용없는 일이지요만 환이가 이 문전에 왔을 적에 부인께서는 잘못하셨습니다." " 그 아이는 내게 매질을 하기 위해 왔었고, 그때 나는 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소,. 무슨 일이든 당하리라 마음먹었던 거요." " 그에게는 부인을 매질할 이유가 없소." " . . . . . . " " 여하간에 연곡사에 가는 길이니 우관을 만나 환이 일에 대해서는 의논해 보겠소이다. 너무 심려 마십시오." 문의원하고 연곡사 노스님하고는 죽마고우다. 우관은 환이의 큰아버지즉 김개주의 형이다. 윤씨부인은 끝내 는물만은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설 때 문의원은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 해월이 처형되었소." 해월은 동학의 접주 김개주를 일러 말함이다. 윤씨부인은 아무런 변화도 나타내지 않았다. 문의원 나가자 무쇠같은 이 여인의 눈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문의원이 사랑에 들러 최치수와 잠시 인사를 나눈 뒤 대문을 나서려고 했다. 그랬는데 " 어르신" 하며 안타깝게 불렀다. " 아 할멈이었구려." " 할 말씀이 있습니다." 간난할멈과 문의원은 다같이 주변을 살핀다. 간난할멈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 환이 도련님 말씀입니다. 별당아씰 업고 가시는 것를 본 사람이 있습니다." " 어디서?" " 어딘지는 모르겠고 함안땅 강청에 갔다오는 길에서 만났다 하니까요. " " 어느때 일인고?" " 지난 봄인데 마님께 말씀드릴 수도 없고, 그 말 들으니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애서, 거지중의 상거지가 돼서 가시는 것을 보았다 합니다." " 알았네." 문의원은 천천히 걸어 길을 떠났다. 길을 걸으면서 착잡한 상념이 가셔지지 않는다. " 오래사는 구나" 아까부터 그 말을 뇌고 있었다. 지나간 칠십년을 꿈으로 친다면 문의원은 참으로 긴 꿈 속에 있었던 셈이다.
문의원은 오늘까지 이십여년 전에 비수를 품었던 한 여인, 윤씨의 눈을 잊지 못한다. 여인의 눈은 정녕 칼날이었다.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한 방에 여인은 죽은 듯이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머리카락 하나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 ' 태맥이구나.' 지아비를 여읜 여인이 태맥이라니 문의원은 내심 쿵,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심히 동요하는 문의원을 윤씨의 시모가 근심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 더위를 마신 모양이며, 허나 그보다 신경이 허해 있소이다. 조용한 곳에서 . . . . . . 조용한 곳에 가서 휴양하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순간 윤씨는 감은 눈을 크게 벌렸다. 비수를 품은 눈이 문의원 미간을 치듯이 쏟아져왔다. 문의원은 제 눈으로 그 눈을 덮쳐 씌웠다. 그러나 윤씨의 눈은 더욱더 날카롭게 ' 어찌하여 거짓을 말씀하시요?' 문의원의 눈을 찌르고 들어왔다. 시모는 신경이 허하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 절에 백일기도를 하고 온 뒤부터. . . . . ." 절에 다녀온 후 노루고기를 먹은 당신 아들의 죽음이 어쩔 수 없이 생각나는 모양이었고 , 그러나 그보다 문의원의 심상찮은 낯빛이 시모를 두렵게 했다. 문의원이 별당 뜰에 내려섰을 때 김서방댁(간난할멈)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질린 눈으로 문의원을 쳐다보았다. 애원하는 눈이 문의원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었다. ' 왜 그러느냐?' 눈빛으로 물었다. 순간 김서방댁 눈에는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 살려주시요. 우리 아씰 사, 살려주시요." 문의원은 땅 위에 시선을 떨구었다가 대답없이 돌아섰다. 날이 저물어 그날 밤 문의원은 사랑에서 묵었다. 잠이 올 리가 없다. ' 해괴한 일이로구나.' 사랑마루 건넌방에서는 열두 살 된 치수 도령의 글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 허참 그럴 수가.' 여전히 잠은 오질 않고 비수를 품은 윤씨의 눈이 그의 망막을 어지럽혔다. ' 대쪽같은 성미를 내가 아는데.' 아까 별당에서의 그 무시무시한 긴장이 되살아났다. 어느덧 글읽는 소리는 멎었고 세상이 없어진 것 같은 정적만이 있었다. 문의원은 수수께끼를 풀 수 없었고 일의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하였다. " 어르신, 어르신." 누지러진 것 같은 사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의원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 누구냐" " 소, 소인 바우올시다." " 야밤에 무슨 일이냐?" " 긴히 말씀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 문의원은 일부러 불을 켜지 않았다. 한참 만에 김서방은 떨리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 우리 아씰 구해주시요." ". . . . . . " " 아씨께서 여차하시면 이 집안은 망합니다." " 알고 있네." " 아씨께서는 아무 죄가 없으십니다. 우리 아씨가 어떤 분이신데. 사, 산에서 목을 맬라고 하셨지요." " . . . . . . " " 우리 내외가 주야로 아씨를 지켰습니다. " 김서방은 푹푹 울었다. 평소 말주변도 없고 말수도 적던 김서방은 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차마 제 입으로 어찌 말씀드리겠습니까. 어찌 감히." ". . . . . . ." " 우관스님한테 가시면 제가 말씀 못 드리는 일을 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어르신은 스님하고 가까운 사이라고 소인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문의원은 우관선사를 찾아갔다. 그 곳에서 들은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백일 기도를 하는 윤씨부인을 겁탈한 사람은 다름아닌 우관선사의 동생 김개주라는 것이었다. 중인 출신의 김개주는 야심만만한 청년으로서 문의원도 몹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움을 자신 감당할 수 없었다. 윤씨부인이 백일기도를 하러 절에 왔을 때 김개주도 공교롭게 형을 찾아 절에 휴양와 있었다는 것이다.
무슨연유로 나를 보살펴주냐고 궁금해 하는 월선이에게 " 그기 다 인연 인기라"... 그 인연으로 윤씨부인은 끝까지 월선이 뒤를 봐주고..얽히고 설킨 그 인연은 서희에게까지 닿고...전 토지의 가장 인상깊은 대사중의 하나가 그말입니다... '인연'을 따라 토지의 그 광활한 이야기가 펼쳐지지요...
첫댓글 넘흐 길으~끈기부족..낼 다시 읽어야쥐~;;;
ㅎㅎㅎ.. 정말 한참 읽었어요.
어쨌거나 대단한 여인네입니다.
간추림의 미를 봅니다.............감사
윤씨부인을 지켜준이는 문의원과 바우할아범내외 그리고 무당인 월선어미가 있었지요..."마님 아씨는 절로 가야 겄십니다.." 그 말 한마디로 윤씨부인은 절로 들어가지만, 월선이와 월선어미는 매번 치수도령에게 당합니다. 나중에 월선어미는 월선이에게 말하지요.. "내가 죽으면 마님이 너를 보살펴 주실게다."..
무슨연유로 나를 보살펴주냐고 궁금해 하는 월선이에게 " 그기 다 인연 인기라"... 그 인연으로 윤씨부인은 끝까지 월선이 뒤를 봐주고..얽히고 설킨 그 인연은 서희에게까지 닿고...전 토지의 가장 인상깊은 대사중의 하나가 그말입니다... '인연'을 따라 토지의 그 광활한 이야기가 펼쳐지지요...
다음이야기는 별비님이 이어나가셔도 될 것 같으네요..ㅎㅎ 인연.....그렇지요..다 인연이지요...
오늘 여유가있네요 쭈~욱 읽어 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