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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일(주)
* 시작 기도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주님...
성전은 이제 건물이 아니라 나의 몸인 줄 믿습니다.
내 안에 성령이 거하시므로 성령의 전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몸으로 주를 부정하는 짓을 얼마나 많이 행했는지요.
이 죄인을 주의 공의로 심판하여 주소서.
지금이라도 지옥에 처넣으신다 한들 이 죄인은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그 일조차 그저 달게 받을 뿐입니다.
하오나 하나님께서는 이 종을 그렇게 진멸하지 않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 줄 믿습니다.
그것의 근거는 오직 창세전 언약에 있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언약을 맺으시면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어 주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그 은혜로 인하여 오늘 이렇게 주님과 함께 말씀으로 교제와 사귐을 갖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옛 사람은 주의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렇게 나의 의가 아닌 예수로 부요한 자 되어 주님 때문에 살게 하소서.
오늘은 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곳마다 성령의 임재가 충만히 임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느 1:1-11
제목 :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20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2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5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9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10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 나의 묵상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이 3차례에 걸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된다.
1차 귀환은 BC 537년에 스룹바벨이 주도하였으며 이 때 귀환한 백성들의 숫자는 약 49,900명 정도이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고 살던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 잡족들의 방해로 인하여 성전의 기초만 놓고 더 이상 진행을 하지 못하였다.
성전 공사가 중단된 지 16년이 지날 때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독려로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4년 만에 완공하게 된다.
2차 귀환은 BC 458년에 에스라의 주도로 이루어지며, 이 때 귀환한 숫자는 1,780명 정도이다.
1차 포로 귀환이 있은 지 약 80년 후에 두 번째 귀환이 이루어졌으며, 이 때 성전은 완공이 되었지만 영적, 육적으로 피폐한 삶을 살고 있던 이스라엘에 일대 영적 대각성 운동을 펼친다.
3차 귀환은 BC 444년에 느헤미야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느헤미야는 당시 바사(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의 술 관원으로 있었다.
아마도 2차 귀환 때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동생 하나니가 바사에 있는 형에게 온 것 같다.
형 느헤미야는 동생 하나니에게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물었다.
그러자 하나니는 예루살렘에 임한 환난과 성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에 탄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느헤미야는 비록 페르시아에 머물고 있지만 그의 관심은 항상 그의 본향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다.
이 예루살렘은 단순한 그의 육신적 고향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곳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으로써 오늘 우리들에게는 하늘 본향을 사모하는 것과 같다.
느헤미야가 2차 귀환 때 함께 예루살렘에 가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이었기 때문에 왕이 그를 보내주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왕의 술 맡은 관원이라는 것은 그만큼 왕에게 신뢰를 얻고 있음을 증명한다.
오늘 우리들이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
신뢰와 인정을 통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풍겨낼 때 거기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바라볼 곳은 하늘 본향이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요, 아버지 집이며 또한 아버지의 품속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나의 생명되신 주님이 계시는 ‘나 있는 곳(요 17:24)’이요 창세전, 만물 위이다.
그곳이야말로 내가 가야할 집이며, 내가 거할 아버지 품속이기에 비록 몸은 이 땅에 있지만 내 영혼은 그 나라를 현재로 사는 것이요, 그 때 그 나라가 나의 집이 되는 것이다.
하나니의 이야기를 들은 느헤미야는 수 일 동안 울면서 슬퍼하다가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한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로 부르고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제일 먼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부르셨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단순한 하늘, 즉 sk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조금 전에 언급했던 아버지 집이요 아버지 품속이며 창세전 만물 위의 세계를 말한다.
그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다.
크고 두렵다는 말은 무섭고 공포스러운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지으셨으며, 그 세상보다 더 크시고 경외스러운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은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 하나만큼도 되지 못하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존재는 크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한없이 작기만 한 나에게 오직 의지하고 신뢰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언약이란 공적인 관계를 법적으로 규정지은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법적으로 규정된 관계이다.
그 법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켜 쉐마할 때, 그 언약이 유지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언약 공식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항상 이 언약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그 백성들이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를 항상 지켜보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불의하여 계명을 지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계속하여 갱신하면서까지 그들을 언약 백성으로 삼으려 하셨으나 모압 언약, 세겜 언약 등 줄곧 언약을 깨트리고 만다.
하나님의 아픔이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이 환난과 능욕을 당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느헤미야가 고백한 것처럼 그들은 모세에게 주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았다.
(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그들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나와 내 아버지 집의 범죄로 돌리면서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하나님의 종이다.
느헤미야와 같이 예레미야 선지자나 사도 바울 등 모두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것이 마치 자신의 죄인 양 기도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종들이었기 때문이다.
(렘 20:7-9)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신 기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 뿐 아니라 나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능력이다.
오늘 우리가 회개할 때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는 이유는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이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죄를 덮고 사하고 씻어내는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상황이 극심한 무덤의 상황일 때마다 나의 잘못을 자백하거나 회개하기보다 철저하게 남의 탓을 하였었다.
나는 복음 외에는 전하지도 않고 알지도 않으며 오직 복음만을 위하여 애쓰는데 왜 성도들은 그것을 몰라주느냐며 그들을 탓하였던 것이다.
내가 교회 사역에 소홀한 것도 아니고, 한 달에 한 번 복음을 전하러 외부에 나가는데 그것을 싫어하고 못하게 하는 것이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화가 났다.
내가 그 시간에 외부로 나가지 않고 교회에 있는다고 하여 특별히 무슨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것까지 옥죄려고 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마음을 본다.
아무 죄도 없으신 주님은 사람을 품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만 계시지 않고 완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땅에 기어다니는 곤충이 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가 막힌 일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일을 자처하여 낮아지신 것이다.
아니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오늘 느헤미야를 통하여 주님을 본다.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품고 기도하는 느헤미야는 정녕 주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이다.
나는 복음을 전하면서 주님의 생명으로 산다고 자부했으나 전혀 그렇지 못했음이 오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살다 보면 그야말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러나 그 억울한 일을 해결하려고 몸부림치기보다 그것을 가슴에 안고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진정 주님을 믿는 자요, 생명을 가진 자의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지만, 나는 그들의 자리로 내려간다.
억지로가 아니라 이제 기꺼이 그들의 자리로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여 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한다.
하지만 내가 그들의 모습에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욱 완전한 데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기를 원한다.
물론 그런 극한 무덤의 상황은 이제 다 지나갔다.
그럼에도 내가 할 일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히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사람마다 신앙의 수준과 색깔이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어린 아이와 같은 초보적인 수준이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제법 어른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 자라났다고 해서 그것이 성숙한 자리는 아니다.
이 땅 위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는 누구나 완전한 자리, 즉 창세전 만물 위의 그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곳이 바로 주님이 계시는 ‘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이 일을 능히 할 수 있다(히 6:3).
나는 내심 복음만 전한다고 하면서 교만에 빠져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렇지 못한 자들을 말과 마음으로 정죄하고 손가락질 하며 나는 마치 완전한 것처럼 착각하였던 것이다.
그런 나를 주님께서는 심판하셨다.
하나님은 너무 분명하시다.
교만한 것을 두고 보지 못하신다.
2015년도 쯤에 중국에 가서 일주일간 복음을 전하고 내심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온 나를 주님은 묵사발?을 만들어 놓으셨다.
내 안에 교만함과 자만심 곧 휘브리스라고 하는 원욕으로 가득 채워졌던 그 때를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그것을 깨트리신 주님의 심판은 옳으시다.
이번 선교대회에서도 설교를 하는 어느 목사님의 말이 너무나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마 5: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선포하면서 오늘 여기 모인 선교사들 중에서도 부자가 되기 원하신다면 온유하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선교사들이 ‘아멘’으로 화답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땅은 결코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를 가지고 땅 부자가 되기 원한다면 온유하라고 한 그 말이 나의 마음을 짓누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죄할 수 없는 이유는 그 권한이 내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하신 주님, 나를 심판하신 주님은 항상 옳으시다.
그래서 나는 오늘 그 하나님을 찬양한다.
나의 마음을 낮추시는 주님.
나의 심령이 가난하여져서 다시금 가장 바닥에서 하늘을 올려볼 수 있게 하신 주님을 송축한다.
주의 영광의 빛이 내 안에 스며들어 주의 은혜로 내 영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께서 행하신 공의의 심판은 옳습니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그저 재와 티끌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귀로만 듣던 주님을 이제 눈으로 보게 되었나이다.
주여, 이 종을 더욱 심판하소서.
주의 심판을 먹어야 살 수 있사오니, 날마다 그 심판의 말씀을 홀로 얻어먹고 주님 앞에서 거하게 하소서.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품고 기도했던 느헤미야를 통하여 주님을 보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하여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셨나이다.
날 위하여 죽으시고 나의 죄를 용서하신 주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리나이다.
새 언약의 백성으로써 날마다 말씀 앞에 나아가 주의 심판의 말씀을 먹고 생명으로 살아 지금 이곳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소서.
주의 영광의 광채를 비추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