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아주머니.. 내가 어려서부터 같이 지냈던 아주머니의 아들
"이길용" 포철에서 스트라이커러 뛌었고.. 우리가 어려서 기억은 잘 나지않겠지만... 정말 스트라이커였고.. 공도 잘찼다.. 국가대표였고,
우리집에 자주 오는 애들은 알거야 우리집이 좀 작지만 아주머니들로 항상 꽉~ 차있는 사실을... 그 중 한분의 아들 "이길용" 이였어
나두 어렸을때 이 선수"이길용" 자주 봤지..
근데 죽었다고 하더라.. 스포츠신문에도 기사 많이 나고... 여튼..
맘 아프다...
근데 .. 니들 이길용 기억하냐??
아래는 기사다...
맨 아래 기사는 신문선이 쓴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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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1세대 골잡이 이길용 돌연사
국가대표와 포항제철의 1세대 골잡이로 이름을 날렸던 이길용 평택 신한고 감독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숨졌다. 향년 44세.
가족과 떨어져 평택에서 하숙을 해온 김 감독은 최근 이틀간 연락이 되지 않아 이를 이상히 여겨 하숙집을 직접 찾아간 신한고 김진형 코치에 의해 15일 숨진 채로 발견됐다. 경찰에 따르면 이미 13일쯤 숨졌으며 사인은 심장마비나 과로사일 것으로 추정했다.
이 감독은 지난 83년 프로축구 출범 당시부터 89년까지 포철의 공격수로 활약했으며 국가대표 상비군으로도 활동했다. 프로축구 원년에는 7골을 넣으며 베스트11에 뽑히는 발군의 활약을 펼쳤다.
90년부터 포항의 2군 트레이너로 변신해 지도자로 새 출발한 이 감독은 지난 2000년부터 3년째 신한고 감독을 맡아왔다. 지난해에는 백록기 전국고교대회에서 팀을 4강에 올려놓는 등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슬하에 아들 둘을 두고 있다. 시신은 고향인 이천의료원 영안실(031-632-0119)에 안치됐으며 발인은 17일 오전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를 시작해 20여년간 유니폼을 입었고, 은퇴한 후 축구와 관련한 미디어(방송, 신문) 일을 17년 가까이 하다보니 내 인생은 한마디로 축구 인생이다. 돌이켜보면 기쁨과 분노, 희망과 좌절 등이 교차한 승부의 세계를 수없이 넘나든 추억은 아름답지만 정말 생각하기 싫은 기억도 있다.
다름아닌 친구의 죽음이다. K감독. 안양공고, 연세대 출신인 그는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로 활약했고, 할렐루야와 유공에서 뛰었던 스타였다. 은퇴 후 안양공고 감독 시절에는 전국대회를 휩쓸며 지도력을 인정받던 장래성 있는 지도자였으나 대학 진학이 예정된 선수가 대학 감독의 변심으로 진로를 찾지 못하자 도의적 책임으로 괴로워 하다가 90년대 후반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K감독 사건 후 가슴 아픈 일이 또 생겼다. 필자의 2년 후배인 이길용 감독(평택신한고)이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이 감독은 83년 출범한 슈퍼리그 때 포항제철 소속으로 치렁치렁한 장발을 휘날리며 가냘픈 몸매로 매서운 골을 터뜨리고 지능적 플레이로 여성팬들로부터 사랑받던 국가대표 출신의 스타였다.
모든 학원스포츠의 감독들이 겪는 스트레스의 가장 큰 주범인 스카우트(중학선수 영입, 대학 진학) 문제가, 아직 할 일이 많고 한국축구계에 기여할 재능이 있는 너무나 젊은 이 감독을 죽음으로 몰았다.
이 감독은 과로사하기 1주일 전에 중·고추계연맹전이 열리는 속초를 당일치기로 2회 왕복했고, 중학선수권대회가 열리던 태백을 역시 당일에 오가며 피로가 누적됐다.
사망 전날 충북대에 가서 연습경기를 한 후 대학 진학이 결정되지 않은 제자 2명의 진학문제를 놓고 동료지도자들과 밤을 새운 결과 과로와 스트레스는 이 감독의 혈압을 높였고 결국 심장마비(추정)로 혼자 거주하던 작은 아파트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영등포공고, 고려대 시절에 볼을 가장 ‘예쁘게’ 찬다는 찬사를 받았던 이길용. 포철 프로 2군 코치, 포철공고 등을 거쳐 한창 후배들을 육성하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던 이 감독은 결국 성적지상주의와 스카우트 폐해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먼저 세상을 등진 친구 K감독과 후배 이 감독의 영면을 보며 젊은 지도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그릇된 한국 학원축구의 스카우트 시스템에 그저 한 맺힌 눈물만 흐를 뿐이다.논평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