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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28일(연중 제13주일) 마르 5.21-43
기적의 실체 복음서에는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복음서는 21세기를 사는 우리를 위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2000년 전 팔레스티나 혹은 로마제국 영토에 살던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에는 그 시대 그 지역 사람들이 가졌던 교양, 지식, 편견 등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기적은 자연법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에게 기적은 자연법과 관계없이, 놀랍고 은혜로워서 하느님이 하신 일로 보이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도 하느님이 주신 놀랍고 은혜로운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세상도 하느님이 하신 기적이었습니다. 아침에 동쪽 하늘에서 해가 뜨는 것도 기적이고, 사람이 살아 있는 것도 기적이었습니다. 과학은 대자연의 신비를 하나씩 벗겨 가고 있습니다. 과학은 우주 공간도 정복하여 우주에 대해 많은 정보를 주었습니다. 과학이 인간 유전자를 해독하여 사람의 성격과 장차 발생할 병까지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는 날도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는 알 수 없는 신비라고 생각하던 것들을 오늘 우리는 알아 가고 있습니다. 신비스런 것이 없어진, 오늘 현대인의 삶입니다. 현대인은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그것을 신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우리가 아직은 모르지만, 장차 그것을 이해하고 설명할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합니다. 기적 이야기를 전하는 의도, 하느님이 놀랍고 은혜로운 일을 하셨다 성서가 기적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하느님이 하신 놀랍고, 은혜로운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현대인은 이야기 하나를 들으면, 그것이 실제 있었던 사실인지를 먼저 묻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은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그 안에 담아 전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성서에는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도 기록되어 있지만, 그 시대 신앙인들이 체험하고, 믿던 바도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읽은 사람도 같은 믿음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이번 주일 우리가 듣는 복음에는 두 개의 기적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12년 동안 병을 앓았다는 어떤 부인이 예수님을 만나 치유된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소생한 이야기입니다. 첫 번 이야기의 부인은 병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모든 노력이 수포로 끝났습니다. 찾아다닌 의사들도, 가졌던 재물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병은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예수님에 대해 소문을 들은 바가 있어, 그분에게 접근하였습니다.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그는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접근하자 과연 병은 나았고, 예수님의 시선이 그에게로 왔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모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엎드려 모든 것을 말씀 드린’ 것은 경신(敬神)행위를 하였다는 말이고, ‘딸아’라는 말은 하느님이 여인을 부를 때 사용되는 호칭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여인의 이야기는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신앙인이 지녀야 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구원은 인간에게서 혹은 가진 재물에서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접근해서 얻는 구원입니다. 오늘의 여인은 예수님에게 접근하면서 그분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았습니다. 많은 군중이 있어 예수님에게 접근하기 힘들었지만, 그 여인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갔고, 예수님의 시선이 그에게 와 닿았습니다. 그것이 구원이었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에게 접근하여,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보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일이란... 약자에게 시선 주고, 고치고 살리는 일 오늘 복음의 두 번째 기적은 예수님이 죽은 소녀를 살린 이야기입니다. 오늘 두 개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알리는 것은 예수님은 고치고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해서 사람들을 당신에게 끌어 모으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초능력을 과시하여 사람들에게 믿음을 강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접근하는 약자에게 시선을 주고, 고치고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오늘 두 개의 기적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구원을 기대하고 접근하여, 그분 안에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고, 하느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기적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냉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태 27,42).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기적을 하면 믿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예수님을 기적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현대인은 병들었을 때 기적에 호소하지도 않고, 죽은 이를 하느님이 기적으로 살려낸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병을 고치고 사람을 살리는 인간의 노력 뒤에 하느님의 손길을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고치고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자기 능력에 따라 실천합니다. 그 실천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신앙은 자유로운 인간이 하는 결단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두려워, 혹은 기적에 놀라서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자연법의 질서 안에 일어나는 일이라도 생명을 고치고 살리는 일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웃을 돌보아 주고 그들에게 헌신하는 우리의 모든 노력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이웃을 위해 하는 우리의 헌신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은혜로운 기적입니다. 재물에 목숨을 걸고, 그것을 조금 더 갖기 위해 이웃을 속이고, 해치기까지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웃을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복음 말씀을 따라 살며 하느님의 일, 곧 기적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지위와 권력을 얻어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살고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을 돌보는 사람이 하느님의 일, 곧 기적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내어 자기 한 몸 편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가 가진 것을 무상으로 제공하며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 17,10)라고 말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일, 곧 기적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은혜로운 일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에게서도 은혜로운 일이 발생합니다. 복음서의 기적 이야기들은 우리도 그 놀라움과 은혜로움을 실천하라고 초대합니다. 2015년 6월 28일(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전야)요한 21,15-19 슬픈 기억과 아름다운 치유 베드로는 슬픈 기억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상처입니다. 하지만 그는 스승을 배반하기 전에 세 번씩이나 스승을 따르겠다고 장담을 했었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 (요한 6,68).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요한 13,37) 예수님의 수난이 다가올 때, 베드로는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마태오 26,33)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가던 날 밤, 사람들이 그에게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냐? 라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합니다. (요한 18,25)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Christ)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밖으로 나가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의 전 존재가 무너져 내리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왜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일까?
심리치료나 정신분석학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할 때, 상처받았던 과거를 재구성 한 다음, 상처 받았던 그 현장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감정이나 느낌들을 다시 체험하게 합니다. 그 과정에서 치유가 일어나고,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제가 보기에 예수님의 물음은 놀랍게도 이 과정과 똑 같아 보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베드로의 과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스승으로부터 사랑받았던 기억도, 모든 제자들이 떠나가도 자신만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날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스승을 부인했던 캄캄한 밤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세 번씩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예수님의 물음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대답을 듣기위해서라기보다 스승을 버렸던 제자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릅니다. 이 이름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불러준 이름입니다. 티베리아 호숫가 역시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만났던 자리입니다. 나아가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라는 말씀은, 스승을 배반함으로써 무너졌던 베드로의 자존심을 회복시켜주고 다시 사명을 주는 부여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스승을 배반했던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제자로서의 삶을 다시 살아가도록 베드로를 일으켜 세워주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스승을 배반하고 스승을 따르지 못했던 제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면서 ‘그래 베드로, 다시 시작하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베드로의 나약함을 잘 아시는 예수님이시기에, 다시 등을 도닥거리면서 베드로에게 힘을 줍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하도 눈물을 흘러서 양 볼에 눈물의 골짜기가 생겼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얼굴인지요. 베드로는 이제 제자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아갑니다. 대표적인 부활사화의 하나인 오늘 복음은 저에게도 늘 “처음으로” 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베드로처럼 나약함이 제 안에 있고, 살아가면서 때론 넘어지고, 때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하느님께 죄스러운 삶이지만 예수님은 저에게 위로와 격려를 줍니다. 다시 시작하자, 네가 예수회를 처음 찾아왔던 날을 기억하고, 수련원에 어떤 마음으로 입회했는지 기억하라고. 지금까지 수도 여정을 걸어오면서 내가 너에게 준 사랑과 우정을 기억하라고.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성에서 나오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마르 5,21-43) 보이지 않는 가치 한적한 시골 마을에 요즘 갑자기 아기들 울음소리와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갑자기 들려오고 있습니다. 메르스 공포 때문에 도시에서 피신 온 아이들이었습니다. 부모들이 아기들만이라도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으로 보낸 것입니다. -박재식 신부님(토마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8> 우리 사이에 싸움은 안 된다
[아! 어쩌나] 299. 긍정 마인드의 부작용
다이아몬드의 땅 과 자아
템풀대학을 설립한 렛셀 코넬은 그가 8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5000회에 걸친 강연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강연의 대부분은 강연 제목이 “다이아몬드의 땅”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름을 하여 강연하게 된 데는 중동지역을 다니다가 듣게 된 실화의 한 토막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페르샤 사람인 알리 하베트는 맑은 강이 흐르고 높은 산이 뒤로 있는 물 좋고 공기 좋은 아주 넓은 농토를 경영하는 대농사꾼이었고 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 날 수도사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가 진기한 보석이 있는데, 만일 그 보석의 광산을 찾게 되는 사람은 부자가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부로 인하여 왕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 보석은 햇빛에 응고된 것으로 신기하기까지 한 다이아몬드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알리 하베트는 그날 밤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그 광산을 찾아내어 대부호가 되는 공상 때문이었습니다. 날이 밝기를 기다린 알리 하베트는 수도사에게 쫓아가서 어디를 가면 그런 광산을 찾을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수도사는 “무엇 하시게요?” 하고 물었고 알리는 “대 부호가 되고 싶다”고 했답니다. 한참 있다가 수도사는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높은 산이 있고, 맑은 물이 흐르고 하얀 모래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알리 하베트는 가산을 전부 정리하여 다이아몬드 광산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는 중동을 비롯해서 전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 북부를 돌아다녔으나 광산은 찾지 못했고, 결국은 거지가 되어 스페인 어느 해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고 합니다.
알리 하베트의 농장을 샀던 농부는 어느 날 시냇물에서 몸을 씻다가 유난히 반짝이는 돌 하나를 주어다가 방 선반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농부는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는데 정신을 쏟아서 하느라고 돌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렸는데, 또 얼마가 지난 후에 수도사가 왔다가 방에 들어서자 큰 소리로 “알리가 돌아왔군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말하는가 묻자 그러면 저 선반위에 있는 돌은 누가 가져왔느냐고 물었답니다. 농부가 대답하기를 얼마 전에 자기가 시냇물에서 몸을 씻다가 하도 신기해서 주어왔다고 말했답니다.
수도사는 빨리 그리로 가보자고 해서 뛰어가 그 시냇가에서 손으로 돌을 조금 헤집고 보니 바로 다이아몬드가 묻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더스 골곤다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된 것이며, 그 다이아몬드로 영국의 왕관과 러시아 왕관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 모든 행복이 있음에도 우리는 행복을 외적인 다른 곳에서 찾느라고 우리 인생을 낭비해버리는 때가 많습니다.
내 자신의 주인이기를 원하는 자아는 자신이 가짜 주인이라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사람의 관심을 자꾸 ‘외적인 것’에 두게 만듭니다. 그리고 외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게 유도합니다. 이것이 집착이 되기도 하고 행복은커녕 고통만 안겨줍니다.
그러나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 안에 행복의 원천이 묻혀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행복의 원천이 나의 참 주인이신 하느님입니다. 이는 마치 풍랑 속에서 제자들이 당신을 찾아주기 전까지 배 안에서 잠을 자던 예수님과 같습니다.
자신들 스스로 이 세상을 헤쳐 나가려고 하는 자아가 강한 사람들에게는 배의 참 주인인 그리스도를 발견해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배 안에 주무시고 계신 분이 누구신지 알아볼 여유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아를 버리고 내 안의 참 주인을 발견했을 때는 모든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12년 동안 하혈병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고 치유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하혈병 걸린 여인을 고쳐주실 추호의 의도도 없으셨습니다. 마치 우리가 청하지 않으면 배 위에서 당신과 관계없는 일이라 생각하시며 잠만 주무시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것에서 자신의 모든 재산과 건강을 소진해버린 이 여인은 베드로와 같이 마지막 순간에라도 스쳐 지나가시는 그분께 손을 내밀 줄 알았습니다.
내 가장 가까이 나의 행복의 원천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분에게서 모든 고통을 치유하는 에너지가 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밀쳐댔지만 이 여인은 손을 뻗었습니다. 손을 뻗는다는 것은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십사 청하는 간절함입니다. 이런 간절함으로 그분께 우리를 맡기면 그분은 우리의 주인이 되시어 대신 살아주십니다.
차로 어떤 목적지에 급박하게 가야 하는 상황이고, 또 옆자리에 미카엘 슈마허가 타고 있음에도 자신이 끝까지 차를 몰겠다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자아에 속아서 그분께 손을 내밀지 않고 스스로 내 자신을 운영해 보겠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분에게 운전대를 맡깁시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분도 그분이요,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도 그분이요, 나를 가장 행복한 길로 이끄실 능력이 있는 분도 그분입니다.
예수님의 옷깃을 잡으며 간절하게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십사 청해봅시다. 우리에게 그분이 주인으로 태어나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버려진 하나의 쓸모없는 오두막에 불과합니다.
-전삼용 신부님(요샙) 용기를 내어 표현해 봅시다.
저희 반 동기 중에 한 명이 군종에 갔습니다. 그래서 지난 몇 주 동안 훈련을 받았고, 지난 금요일에 대위로 진급하는 임관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잘 모르는데 그 임관식에 보통 가족들, 동기들, 친구들이 함께 해 주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동기 신부들이 모두 갔었는데요.
차가 여러 대 가면 힘드니까 몇 대를 정해서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까운 곳에 있는 동기의 차를 타고 가기로 했는데요.
아침 배로 나와서 그 사제관에 가서 보니, 제가 제일 처음이었습니다. 그 본당 신부도 나가서 아침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냉장고를 뒤져서 팥빙수를 해 먹고 있는데, 다른 동기들이 하나 둘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동기들의 모습을 보면서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 저는 동기 얼굴만 보면 되는 줄 알고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갔었거든요. 그런데 동기들은 모두 임관식이라 복장을 갖추어야 한다고 끌레지 셔츠에 긴바지를 입고 왔었습니다.
상황 파악이 빠른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만 추리링을 입고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옷을 빌리려고 했는데 그 본당 신부님의 옷이 맞을까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어깨도 저보다 넓고 배 둘레도 저보다 넓은데 맞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입어보니 의외로 입을만 합니다.^^; 제 배가 많이 나왔나 봅니다.
그래서 입고 임관식에 다녀와서 저녁을 먹는데요. 밥을 먹으면서 제가 동기 신부에게 ‘빌려 입은 끌레지 색이 괜찮은 거 같다... 집에 여름 끌레지가 두 개 밖에 없는데 부족한 거 같아서 하나 사야겠다...’고 했더니, 주변 동기들이 ‘빌려 입은 거 잘 맞는데 그거 가지면 되겠네...’ 하는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그러자 옷 주인인 동기 신부가 저에게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말해봐~’ 하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 눈빛을 보고 살짝 갈등을 했습니다.
‘걸려들지 말아야지 이건 장난일거야..’
그리고 말을 주저하고 있었더니 그 친구가 조금 더 진지한 눈빛으로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해야지, 그래야 들어주지..’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만 제가 마음의 경계를 풀고 “이 끌레지 줘~” 했더니, 그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이 장난스런 눈빛으로 “싫어~” 그러더라고요.^^;
‘당했구나...’ 하는 느낌에 잠시 공황 상태가 되었는데요. 한바탕 웃고 나서는 잠시 뒤에 가지라고 하더라고요.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과정이 쉽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요.^^; 그래도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적극적인 노력과 용기가 필요한 거 같습니다.
제가 모금을 다니면서 신자들에게 많이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울어야 젖 준다는 이야기인데요. 처음에는 잘 안 되더라고요.
돈 얘기도 못하겠고, 물건을 팔아달라는 것도 죄송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안 팔아주시면 물건을 도로 가져갈 수도 없고, 특별히 모금을 위해 왔는데 얘기를 안 하면 오나마나 한 것이 되어버리니, 용기를 내어 얘기를 하기 시작했는데요.
적극적으로 얘기를 하니까 오히려 적절한 도움, 꼭 필요한 도움을 받게 되는 거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회당장과 하혈하는 여인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용기를 냅니다. 또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다가가죠. 그 결과 예수님에게서 치유와 생명이라는 은혜를 받게 되는데요. 만약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면, 많이 후회했을 겁니다.
오늘 하루, ‘그걸 했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할 일을 만들기보다, 해야 할 일이고 표현이라면 조금 용기를 내어 말하고 행동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신학교에서 로사리오 기도를 하는데, 후배 신학생이 사도신경의 시작을 이렇게 해버렸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는 저를 믿나이다...” (원문-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김기현 신부님(요한) [금주의 성인] 7월 2일: 성 베르나르디노 레알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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