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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5년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은 뜻깊은 해입니다.
정조 19년(1795, 乙卯年) 음력 윤 2월 9일 7시경 조선 제22대 정조(正祖) 임금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를 모시고 창덕궁(昌德宮) 돈화문(敦化門)을 출발하여 배다리(舟橋, 주교)를 건너 노량의 용양봉저정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습니다.
식사 후 만안현을 넘어 문성동(文星洞) 앞길에서 잠시 휴식한 후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다음날인 2월 10일 안양문화원 문화해설사 신규교육의 일정으로 박석환 부회장님의 인솔하에 정조의 행차에 동행하였습니다.
정조임금은 안양 만안교(萬安橋)를 건너 안양행궁에서 혜경궁에게 미음을 드시게 한 후 사근참행궁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길을 떠나 오후에 지지대(遲遲臺) 고개를 넘어 만석거(萬石渠)에 도착하였습니다.
정조임금은 수원화성을 축성하면서 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네 개의 호수를 파고 방죽을 축조하였습니다.
이 방죽은 장용위(壯勇衛) 운영에 충당하기 위한 화성둔전(華城屯田) 경영에 필요한 물을 확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중 만석거(萬石渠)는 장안문 북쪽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대규모 농장인 대유평(大有坪, 둔전)의 관개시설(灌漑施設)로 정조의 을묘원행 직후에 완성되었습니다.
만석거 축조 후 남쪽에 'ㄱ'자 모습의 영화정(迎華亭)을 지었습니다.
화성(華城)을 맞이한다는 의미인 영화정은 신구관(新舊官) 부사와 유수들이 거북 모양의 관인(官印)을 인수인계하고 업무를 시작하였다고 일명 교구정(交龜亭)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현재의 영화정은 1996년에 복원된 정자로 누마루에 앉아서 만석거를 감상하도록 담장을 낮게 둘렀습니다.
제방 남단에는 관개용수(灌漑用水)의 양을 조절할 수 있는 최신식 수구(水口)와 갑문(閘門)을 설치하였습니다.
만석거는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에 '세계관개시설물유산'으로 등재 되었습니다.
화성(華城)에 도착한 정조는 수원부 유수의 영접을 받고 옹성 홍예문(甕城 虹霓문)과 장안문 홍예문을 일렬로 배치한 장안문(長安門)으로 위풍당당하게 들어갑니다.
장안문의 옹성(甕城) 문루에는 오성지(五星池)라 부르는 다섯 개의 큰 물통을 만들어 성문에 불을 진화할 수 있도록 고안하였습니다.
장안문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박석환 부회장님
장안문은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이 장안문에 대기하자 미군 폭격기의 조준사격으로 인해 파괴되었습니다.
당시의 피해로 석축의 곳곳에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현재의 장안문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따라 1975년에 복원되었습니다.
옹성 아래쪽에 의궤에 그려진 각 구조물들의 모습을 그려 놓았습니다.
장안문의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도 새겼습니다.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은 아래쪽에 화강암으로 육축(陸築)을 쌓고 가운데 홍예문(虹霓門)을 내고 그 위에 전돌(塼)로 여장(女墻)을 쌓은 위에 중층(重層)의 누각(樓閣)을 세웠습니다.
성의 안쪽에서 바라보면 장안문의 홍예문 천장인 홍예개판(虹霓蓋板)에 청룡(靑龍)과 황룡(黃龍)이 가운데 여의주(如意珠)를 희롱하는 교룡(交龍)을 그리고 옹성 홍예문(甕城 虹霓門)과 일렬로 배치 하였습니다.
옹성(甕城)은 적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시설로 출입문을 옆쪽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장안문의 옹성은 임금을 맞이하는 정문(正門)이므로 중앙에 설치 하였습니다.
장안문(場安門)을 통해서 화성행궁으로 들어가기 전에 화성(華城)을 한바퀴 둘러봅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안양문화원 해설사님들
장안문 문루 내부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반월형(半月形) 옹성 용도(甕城 甬道)의 가운데 문루(門樓)를 세웠습니다.
장안문의 중층 문루(重層 門樓)는 겹처마 다포(多包)의 우진각지붕으로 한껏 위용을 높였습니다.
옹성 문루에서 바라보는 장안문의 위용.
정조임금은 을묘원행 6일차인 윤 2월 14일 낙남헌(洛南軒)에서 양로연(養老宴)을 베풀고 신하들과 이곳 장안문 문루에 올랐습니다.
장안문 밖 북쪽의 황무지에 조성될 농업용 수리시설인 만석거(萬石渠)와 둔전(屯田) 터를 살펴보기 위해서 였습니다.
장안문의 체성은 옹성으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이곳 옹성 문루 여장(女墻)은 매년 10월경 정조대왕의 효심과 부국강병에 대한 의지, 백성을 돌보는 마음을 담아 '을묘년 화성원행'의 재현 때 수원유수(수원시장)가 왕을 맞이하고 함께 장안문을 통과하는 장면을 보는 명당이라고 설명하는 부회장님입니다.
장안문의 양쪽에는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시설인 앞으로 돌출된 적대(敵臺)를 설치하였습니다.
장안문 서쪽의 북서적대(北西敵臺)에 설치된 홍이포(紅夷砲)가 북쪽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동쪽에 배치된 북동적대(北東敵臺)에 설치된 홍이포도 북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적대의 끝단 바닥에는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공격이 가능한 세로로 긴 홈을 낸 현안(懸眼)을 세 개씩 설치하였습니다.
장안문(長安門)에서 동쪽 성벽을 따라가면 치성(雉城) 위에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화포(火砲)를 갖춘 북동포루(北東砲樓)가 있습니다.
화성(華城)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등 5곳의 포루가 있습니다.
* 또다른 포루(舖樓)는 치성(雉城)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시설입니다.
외부에서 보면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누각을 만들었습니다.
정약용은 중국의 제도를 두루 살펴 화성에 발전된 형태의 포루를 설치했는데, 그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에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성벽 위에 설치하는 낮은 담장을 여장(女墻, 성가퀴, 여담)이라고 합니다.
여장은 사이사이가 끊어져 있는데 그 끊어진 구멍을 타구(垜口)라고 하며, 타구로 끊어진 여장의 한 구간을 첩(堞) 또는 타(垜)라고 합니다.
타의 갯수는 성벽의 길이를 가늠하는 기준이 됩니다.
타에는 총을 쏠 수 있는 총안(銃眼)이라고 하는 구멍이 세 개씩 뚫어져 있습니다.
가운데 배치된 경사진 총안은 성벽 바로 아래쪽이 보이는 근총안(近銃眼)이고,
양쪽에 배치된 수평으로 뚫려있는 것은 멀리 보이는 적을 공격하는 원총안(遠銃眼) 입니다.
여장과 여장 사이에 끊어진 장구모양의 타구 아래쪽에는 성벽에 접근하는 적에게 기름을 부어서 공격하는 유혈(油穴)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타구(垜口) 사이로 보이는 북수문(北水門)인 화홍문(華虹門)과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의 아름다운 모습
수원시내를 남북으로 흐르는 광교천(光敎川, 수원천)에 7개의 홍예(虹霓)를 설치한 다리를 놓고 그 위에 팔작지붕으로 된 누각(樓閣)을 세웠습니다.
누각은 수문 북쪽의 경계와 감시를 할 수 있도록 사방을 개방하였고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습니다.
정면 3칸의 아래쪽은 중앙칸은 개방하고 좌우 협칸은 벽돌로 막았습니다.
화홍문(華虹門) 편액(扁額) 글씨는 물줄기가 화홍문 아래로 떨어져 튀어 오르는 모습의 예서체(隸書體)로 유한지가 썼습니다.
화홍문 아치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평택을 거쳐 안성천과 만나서 아산만으로 흘러갑니다.
누각의 북쪽에는 벽돌로 낮은 성벽인 첩(堞)을 쌓았고, 네모난 대포(大砲) 구멍을 뚫고 그 위에 소포(小砲) 구멍을 뚫었습니다.
홍예(虹霓) 구조는 하단에 물 흐름이 쉽도록 뾰족하고 육중한 받침돌인 선단석(扇單石)을 놓고 부채꼴 모양의 홍예를 얹었습니다.
홍예의 가장 위쪽 꼭지점에 올라가는 홍예석을 홍예종석(虹霓宗石)이라하고 그 위에 아랫면이 위로 솟은 원형을 이루는 부형무사석(缶形武砂석)을 얹고 그 위에 혀처럼 약간 튀어나온 배수구인 석누조(石淚槽)를 설치하였습니다.
동북각루/방화수류정(東北角樓/訪花隨柳亭)은 화성(華城)의 네 개의 각루 중 동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입니다.
북수문인 화홍문의 동쪽 구릉 정상 즉, 용연 남쪽의 용두 바위 위에 우뚝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화포를 쏠 수 있는 군사시설이지만 아름다운 연못과 함께 있어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많이 쓰였습니다.
'ㄱ'자 형태 2층 건물의 상층은 사방이 트인 누각이고, 하층 벽체는 전돌로 쌓고 성 바깥쪽으로 총안을 뚫었습니다.
건물의 모습은 사방의 위치에 따라 각기 달리 보입니다.
을묘원행 6일 째인 2월 14일에 정조는 신하들과 함께 화홍문을 경유하여 방화수류정에 올라 '아름다움이 적을 두렵게 한다'라고 치하 하였습니다.
동북각루의 별칭(別稱)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인데 정조는 이를 '아버지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이 있는 화산(花山)과 버드나무가 많은 수원 읍치 유천(柳川)을 가리키는 뜻'이라고 풀이했습니다.
2층 누각의 용연(龍淵) 방향으로 작은 쪽마루 툇칸을 달아내어 교란(交欄)을 설치한 평난간을 둘러서 용(龍)이 연못 가운데 여의주(如意珠)를 희롱(戱弄)하는 듯한 연못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북암문(北暗門)은 화성 북쪽에 낸 비상 출입문 입니다.
암문(暗門)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합니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습니다.
문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반원형여장(半圓形女墻)을 세웠습니다.
여장에는 총안(銃眼)과 성벽에 붙은 적을 공격하는 현안(懸眼, 길게 네모난 구멍)을 설치하였습니다.
화성의 북쪽 성밖에 있는 연못은 용연(龍淵)이라고 합니다.
이는 용머리처럼 생긴 용두(龍頭) 바위에서 유래하였으며 용두 바위 위에 있는 방화수류정을 용두각(龍豆閣) 이라고도 부릅니다.
성벽은 용의 머리인 용두(龍頭) 바위가 화산(華山, 사도세자의 현륭원이 있는곳)으로 향해 꿈틀거리며 나아 가는 형국입니다.
용연(龍淵)의 물이 넘치면 서쪽의 출수구를 통해 흘러 나옵니다.
이 물은 잡귀(雜鬼)를 걸러내는 역할을 하는 이무기의 입을 거쳐 수원천으로 흘러듭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쓰던 각건(角巾)이라고 하는 모자를 닮은 각건대라고도 부르는 동북포루(東北舖樓)가 있습니다.
포루(舖樓)는 치성(雉城)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건물로 화성에는 5곳의 포루가 있습니다.
동암문(東暗門)을 지나면,
장수가 군사 훈련을 지휘하던 연무대(鍊武臺)라고 부르는 동장대(東將臺)가 있습니다.
수원시의 활터로 쓰이고 있는 연무대 넓은 광장 앞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화성(世界遺産 華城)' 표석이 있습니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화성 동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입니다.
3층으로 이루어진 원통형의 건물로서 출입문에서 통로를 따라 빙글빙글 올라가면 꼭대기 망루에 이르는 구조라서 '소라각'이라고도 부릅니다.
동북노대(東北弩臺)는기계식 활인 노(弩, 쇠뇌)를 쏘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화성에는 동북노대 외에 팔달산 정상에 서노대(西弩臺)가 있습니다.
화성의 동문(東門)인 창룡문(蒼龍門)은 장안문과 팔달문 보다 격식이 낮은 1층 문루의 팔작지붕 입니다.
창룡문의 옹성(甕城)은 서울 흥인지문(興仁之門) 처럼 한쪽 모서리를 열어둔 형태입니다.
옹성 안쪽 홍예문 석축에는 창룡문의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석공 우두머리의 이름을 새긴 각자성석(刻字城石)이 있습니다.
공사실명제 입니다.
옹성 용도(甕城 甬道)에서 바라보면 화강암으로 쌓은 홍예 석축 위에 전돌로 여장(女墻)을 쌓고 총안(銃眼)을 설치하였습니다.
창룡문 밖에는 헬륨기구로 하늘 위에서 아름다운 화성을 감상하는 플라잉수원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동1포루(東一舖樓)
동1치(東一雉)를 지나면,
동포루(東砲樓)가 있는데 동1치와 동2치 사이에 지은 화포(火砲)를 갖춘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5곳의 포루(砲樓)와 5곳의 포루(舖樓)가 있습니다.
성벽은 각 군영의 수비 담당 구역을 정해 놓았습니다.
이곳은 창룡위전부두국(蒼龍衛前部頭局) 구역입니다.
봉돈(烽墩)은 불과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내는 시설입니다.
보통 봉화대는 높고 인적이 드문 곳에 두었으나 화성에서는 시야가 트인 동쪽에 설치해 화성행궁(華城行宮)에서 바로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동2포루(東2舖樓)
동남각루(東南角樓)는 화성의 4각루 중 남수문 동쪽의 경사지에 풍수에서 안산(案山)에 해당하는 곳에 지은 감시용 시설입니다.
남수문(南水門)은 화성의 남쪽 성벽이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입니다.
북수문에는 일곱개의 홍예(虹霓)를 만든 반면, 남수문에는 아홉 칸의 홍예를 만들고 안쪽에는 군사 수백 명이 수문을 지킬 수 있는 장포(長舖)를 만들었습니다.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八達門)
정조는 을묘원행 4일째인 2월 12일 혜경궁(惠慶宮)을 모시고 팔달문을 나서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였습니다.
팔달문도 장안문과 규모나 형태가 동일합니다.
서남암문(西南暗門)과 서남포사(西南舖舍)
서남암문은 화성 서남쪽에 낸 비상 출입문입니다.
화성의 5곳 암문 가운데 유일하게 문 위에 군사들이 머무는 포사(舖舍)를 세웠습니다.
이곳은 지형상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 특별히 포사를 만들어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이름은 암문이지만 성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라 용도(甬道)를 거쳐 서남각루(西南角樓)로 나가는 문입니다.
이곳은 화서위전부두국(華西衛前部頭局) 방어 구역입니다.
암문 밖 용도에서 보면 암문위에는 화공에 대비하여 오성지(五星池)도 설치 하였습니다.
서남문을 나오면 서남각루로 가는 용도(甬道)가 좁고 길게 설치되어 있습니다.
용도 중간에는 좌우에 하나씩 치성(雉城)을 만들어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용도(甬道)가 끝나는 서남쪽 요충지에 감시용 시설로 세운 서남각루(西南角樓)가 있습니다.
화성의 4곳의 각루 중 서남각루는 별칭(別稱)으로 화양루(華陽樓)라고 부릅니다.
건물 전면은 장수가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벽돌을 깔았고, 후면은 바닥을 높이고 창문을 달아서 실내에서도 주변을 살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서포루(西舖樓)는 서암문과 서3치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으로 지은 시설입니다.
서3치(西三雉)
화성에는 모두 15개의 치성(雉城)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하였습니다.
서암문(西暗門)은 팔달산(八達山) 정상 서장대(西將臺) 아래쪽에 설치한 비상 출입문 입니다.
서암문(西暗門)은 성벽을 안쪽으로 90도 꺾어 들어가도록 쌓고 그 사이에 문을 내 바깥에서 알아차리기 어렵게 지형을 잘 이용하였습니다.
서장대(西將臺)는 팔달산(八達山) 정상에 자리 잡은 군사 지휘소로 위층 처마 밑에 정조가 직접 쓴 화성장대(華城將臺)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東將臺)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西將臺)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이용하였습니다.
서장대는 시야가 트여 있어 멀리 용인 석봉산 봉화와 현륭원 입구까지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수원행차 넷째날인 2월 12일 현륭원을 참배하고 오후에 서장대에 올라 장용영외영(壯勇營外營) 군사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튿날 새벽까지 실시한 군사훈련을 참관한 후 정조는 군사들을 칭찬하고 견고하게 쌓은 화성 성곽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습니다.
이날의 군사훈련을 기념하고자 친히 시를 짓고, 이 시를 현판에 새겨 서장대에 걸도록 하였습니다.
서장대 뒷쪽에 기계식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한 서노대(西弩臺)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서장대에서 내려다 보면 화성행궁(華城行宮)이 훤히 보입니다.
서포루(西砲樓)는 팔달산 중턱에 위치한 화포(火砲)를 갖춘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이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 하였습니다.
서북각루(西北角樓)는 서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입니다.
팔달산으로 오르는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자리 잡아 서북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서북각루 누마루에서 내려다 보면 성곽 아래쪽으로 화서문(華西門)의 옹성과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이 보입니다.
화서문(華西門)은 화성(華城)의 서문입니다.
동문인 창룡문과 같이 1층 문루의 팔작지붕으로 창건 당시 모습을잘 간직하고 있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18세기 건축기술을 보여줍니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화서문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치성(雉城) 위에 3층의 망루(望樓)를 세우고 꼭대기에는 단층의 누각(樓閣)을 올려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북포루(北舖樓)는 북서포루(北西砲樓)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누각입니다.
북서포루(北西砲樓)는 장안문(長安門) 서쪽에 설치한 화포(火砲)를 갖춘 시설로 화성의 5곳의 포루 중 북서포루가 가장 높습니다.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습니다.
# 탐방 하루 전에 예비답사로 성을 한바퀴 돌면서 성곽 시설물들을 둘러 보았습니다.
을묘원행 다섯째 날의 혜경궁 진찬은 다음편 화성행궁에서 이어가겠습니다.
# 참고자료
[수원화성 역사탐방 답사 자료집-안양문화원]
[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김왕직]
[그리고, 박석환 부회장님의 해설]
첫댓글 자세한 설명과 함께 사진 공유 감사합니다.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양문화원 가족이 되어서 하나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많은 지도 부탁드립니다.
화성 순성하시면서 꼼꼼하게 정리하셨습니다.
간결하면서 사진과 용어가 정확합니다. 화성공부는 강호인선생님께서 올려주신 이 글로 충분하겠습니다.
화성답사여행 같이해서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부회장님의 심도있고 재미있는 해설을 바탕으로,
전날 순라꾼이 되어서 한바퀴 돌았던 내용을 추가해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 가끔씩 찾았었던 곳이지만
관심도에 따라서 보이는 각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 탐방도 기다려 집니다.
감사합니다.
박석환 부회장님 해설과 교재
또다른 강호인샘 안내 해주신
사진과 자료는 세번의 화성 답사 입니다
귀한 재능을 나눠주신 샘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박석환 부회장님의 해설이 너무 좋았습니다.
박석환부회장님과 강호인선생님 너무대단하시고 자료정리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수원화성을 한바퀴 돌았네요.
감사합니다.
사진과 안내문을 정리하면서 저도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답사보고에 참고해야겠네요. 열심히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쓰려다 보니 글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참고를 하실수 있다니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열심히 배워요~
대단하십니다
정리 해주신 내용~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