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을 읽는 것은 법조 기자의 주요 일과 중 하나다. 1990년대 초 필자는 각 법원장 부속실에서 거의 매일 수십개 재판부가 만든 판결문 초고(草稿) 수천건을 읽으며 보도 가치가 있는 판결문을 찾으려 애썼다. 상당수는 타자로 친 판결문이었지만 판사들이 직접 필기한 판결문도 많았다. 그런 판결문을 보면서 때로는 "역시 판사는 다르네"라고 달필(達筆)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런 악필(惡筆)이 어떻게 사법시험에 합격했을까" 하고 개탄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의 판결문은 대부분 "피고인은 ~하고, ~하여, ~한 바, ~라고 봄이 상당하다고 할 것이다"처럼 한 문장이 몇 페이지씩 이어졌다.
대법원과 법원행정처 등은 1991년부터 3~4년에 한 번꼴로 '판결서 작성 방식에 관한 권장사항' '판결서 간이화 사례집' '간결한 판결 사례집' 등을 보급하면서 판사들에게 짧고 쉬운 판결문 쓰기를 독려해 왔다. 그 결과 문장은 짧아졌지만 판결문 전체 길이는 더 길어지고 있다. 최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 대한 무죄 판결문은 108쪽,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1심 판결문은 231쪽, 이석기 의원 등 RO사건 관련자 7명에 대한 판결문은 473쪽, SK 최태원 회장 형제의 1심 판결문은 480쪽이나 됐다.
도대체 판사들은 이렇게 긴 판결문을 어떻게 쓸까? 해답 중 하나는 컴퓨터다. 판결문에 종전 판례나 당사자들의 주장을 '복사해 붙여쓰기'를 하다 보면 길어진다는 게 판사들의 고백이다. 심지어 일부 판사들은 검사나 원고·피고 측 변호사에게 논고문과 변론요지서 등을 CD나 USB로 받아 그걸 쟁점별로 나열하고 여기에 재판부 판단을 첨가해 판결문을 쓰기도 한다.
그러다가 잘못된 판례를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균형성'이란 단어를 '권형성'으로 수십년간 잘못 쓴 것이다. 1983년 3월 대법원은 형법 20조의 정당(正當)행위의 5가지 요건을 명시하면서 "정당행위는 ▲동기나 목적의 정당성 ▲수단이나 방법의 상당성 ▲보호이익과 침해이익과의 법익 권형성 ▲긴급성 ▲다른 수단이 없다는 보충성 등의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런데 '법익 권형성'이라니? 그런 말도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은 판사들과 교수들은 이후 20년 이상 '권형성'이란 단어를 수천개의 판결문과 법학 교과서에 인용했다. 그런데 한 재판연구관이 손으로 쓴 문제의 판결문을 찾아 균형성이란 단어를 흘려 쓴 것을 확인하고 2010년의 새 대법원 판결문에는 '균형성'으로 고쳐 넣도록 했다. 이후 전국 법원의 판결문과 교과서도 '권형성'이 아니라 '균형성'으로 바로잡고 있다.
판사들이 며칠 또는 몇 주씩 밤을 새우며 판결문을 쓰는 공력을 폄훼할 의도는 전혀 없다. 하지만 긴 판결문은 가독성과 완결성·효율성·설득력을 모두 떨어뜨린다. 때로는 부분적으로 오류가 발생하고 이는 당사자들이 "틀린 내용을 기초로 잘못된 판결을 했다"면서 항소·상고를 남발하는 부작용으로 이어진다. 쉽고 간결한 판결문 쓰기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판사들의 숙제이자 차원 높은 사법서비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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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항수 |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