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미사 밖의 신앙생활과 공동체
‘주님의 몸’ 얼마나 간절히 열망해 왔는지 돌아볼 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미사 중 사제와 교우들이 나누는 이 대화에는
그리스도 현존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게 하는 축복의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각 교구마다 일정 기간 주일미사를 중단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면서, 우리는 주님의 식탁 앞에 모여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며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는 공동체 전례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김기태 신부(인천가톨릭대 전례학 교수)로부터
공동체 전례의 의미와 이를 대신하기 위해 일상에서 갖춰야할 우리의 자세 등에 대해 들어본다.
- 2017년 9월 17일 광주 방림동본당 당시
주임 박래형 신부가 노인 신자들에게 성체를 분배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전국 각 본당 등에서 거행하는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가 중단된 현 시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성찬례의 의미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해야 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성전에서 본당 수녀님들과 소박한 미사를 봉헌하며
텅 빈 신자석을 바라보자니 허전함이 밀려옵니다.
당분간 미사 참례를 하지 못하는 교우 여러분들이 느낄
아쉬움과 공허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입니다.
교회는 지금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사태로 신앙의 가장 큰 선물인
미사의 공동체적 거행이 잠정 중단되는 초유의 사건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첫 번째 중요한 의무로 알고 있었던 주일미사마저
공동체 거행이 중단되면서 신앙생활의 위기감을 느끼는 분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고민의 핵심은 이 시련과 침묵의 시기를 보내면서 ‘미사’ 없이, 곧 미사를 통해 주어지는
성사적 은총 없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습니다.
기도와 공동체 전례 그리고 나눔의 실천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는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만 모인 사교 집단도 아니요,
저마다의 기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어떤 친목 단체도 아닙니다.
본디 교회를 가리키는 ‘에클레시아’(Ecclesia)란 말의 어원은 건물이 아니라 하
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당신과의 만남에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초대가 믿는 이들의 모임을 가시적이고 살아있는 교회,
곧 ‘하느님의 백성’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성당이 크던 작던 그곳에 신앙하는 하느님의 백성이 없다면 단지 건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보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그분의 현존 안에 모인 신앙인들의 모임 자체가 곧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모습은 주님의 만찬인 성찬례(미사)를 거행하기 위해 모인 하느님 백성 안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사도행전에서도 ‘빵을 떼어 나누는’(사도 2,42) 성찬례 거행이 초기 신자 공동체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찬례는 의심할 나위 없이 교회 생활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어떤 것도 미사에서 주어지는 성사적 은총,
곧 말씀과 성체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미사 참례만은 아닙니다. 사
도행전은 우리에게 또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해줍니다.
“(신자들은)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사도 2,45-47)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신앙 행위로서 기도와 공동체 전례만이 아니라
사랑의 나눔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로 인하여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무엇으로 백성의 호감을 얻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의 선물인 성찬례 거행을 잠시 중단하는 것은
어떤 ‘두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찬례 거행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랑’의 실천을 더 중요하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한 모든 종교에 보편적인 가르침으로 남아있는 황금률,
곧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는 말씀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미사 참례의 중단, 신앙생활의 단절을 의미하는가?
혹독한 박해시기에 미사에 참례하고 싶어도 참례할 수 없었던 신자들은 어떻게 신앙을 굳건히
지켜낼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희망과 사랑 안에서 끊임없이 기도함으로써 시련의 시기를 이겨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부활의 희망을 간직한 채 기약 없는 사순 시기를 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박해시기가 아니더라도 일 년에 딱 두 번 미사가 봉헌되지 않는 유일한 날들이 있습니다.
파스카 성삼일의 첫 두 날, 곧 주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을 기념하는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입니다.
이날 교회는 파스카 단식을 실천하며 주님의 부활을 기쁘게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이때 지키는 단식은 참회와 보속의 표지가 아니라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잃고
깊은 슬픔에 빠진 신부의 마음으로 교회가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깊이 참여하기 위해 드리는
믿음과 사랑의 행위입니다.
파스카 단식은 부활의 기쁨과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이 고통과 시련의 시간도 결국 지나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 가운데 남아 있게 될 것이 무엇일까요?
상처와 아픔, 미움과 원망, 혐오와 비난, 분열과 다툼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과 행위가
지배할 지도 모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머물 자리가 있을까요?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마련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그 절망의 대열 어딘가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들과 함께 봉헌하는 공동체 미사가 잠시 중단된 이 상황이
어떤 신앙적인 박해로 인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신앙인들에게 ‘도전’인 것은 사실입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모든 실천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의 핵심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의 방식 안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로 완성됩니다.
유다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던 온갖 차별을 넘어서
모든 이를 하나로 불러 모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신앙 공동체를 교회의 틀 안에만
가두어 두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교회 밖에서 신음하고 울부짖는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을 만나도록,
그래서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재촉합니다.
이는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복음의 기쁨」에서 줄기차게 강조하신 내용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무엇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응답하라고,
다른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우리 자신에게서 나와 다른 이들의 선익을 추구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복음의 기쁨」, 39항)
종교적 혐오와 비난이 난무하는 지금,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회를 위해,
다른 이들의 행복과 선익을 위해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입니다.
무엇보다 미사에 참례할 수 없다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중단될 수는 없습니다.
매번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말하지만
우리 삶의 참된 양식인 ‘주님의 몸’, 곧 미사에서 주어지는 성체를 모시기를
얼마나 간절히 열망해 왔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날 미사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며 하느님 말씀에 머무는 기쁨을 발견하십시오.
사순 시기의 정신에 따라서 기도와 자선과 단식을 더 적극적으로 마음을 다해 실천해 보십시오.
그동안 습관적으로 미사에 참례하면서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가 일상에서 잊고 있었던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에 대한 열망과 감사의 마음을 더 키우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20년 3월 15일, 김기태 신부(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총무)]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