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승려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진 - (서프라이즈 / 푸른날 / 2010-6-1 19:29)
베트남 승려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진 [인터뷰365 이근형]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1960년대에도 변함없었다. 오히려 그 당시가 미국이 성조기를 온 나라에 뒤덮이는 일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시대였다. 동아시아를 비롯해서 힘이 없고 약한 대륙은 샅샅이 미국이 점령하고 있었다. 공개적으로 미국의 식민지가 된 곳도 있었고, 미국의 공식적 식민지는 아니지만 미국에게 이유없이(물론 국익이라는 이유는 있다) 무릎을 꿇고 종이 되는 나라도 여럿 있었다. 미국은 그러면서 점점 세를 불려나갔고, 로마 시대 이후로 세계를 점령했다는 뜻에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는 신조어가 탄생하긴 했지만, 그것은 라틴어로 평화(Pax, Peace) 를 뜻하는 게 아니라, 미국에 의한 세계 질서의 획일화와 문화 점령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은 베트남을 남북으로 갈라놓았고, 남쪽 베트남 즉 남베트남의 지도자인 응오딘지엠 (Ngo Dinh Diem) 을 꼭두각시로 변모시켰다. 사실 응오딘지엠은 친프랑스파(=퍼온이 주: 사실상 친프 매국노)인 지도자였으나, 친미의 성향(=퍼온이 주: 친미 매국노라는 의미)을 지녔다. 베트남은 전체적으로 서양 문화를 프랑스에서 가져왔다지만, 응오딘지엠은 이 경로를 철저히 미국으로 바꾸는데 성공한다. 그러면서 서양의 대표적인 종교인 카톨릭교의 베트남화를 위해 애쓰는데, 이면에는 미국 제국주의의 '완벽한 받아들임'이 또아리 틀고 있었다. 불교가 토착 종교이고 국교인만큼, 베트남 불교계의 반발은 수순이었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베트남의 불교계 인사들과 불교론자, 불교신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불리한 조건을 주거나, 사람들을 선동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남베트남을 온통 십자가의 물결로 가득차게 했다. 응오딘지엠이 카톨릭교 신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기득권들은 으레 카톨릭교라는 간판을 내걸었고, 불교계 인물들을 비롯한 피지배층들은 불교라는 이름 하나로 묶여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결 구도로 가게 되었는데, 사실상 이것은 종교 싸움이라는 간단한 토대로 볼게 아니라,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갈등 구도, 그리고 반미와 친미의 으르렁거림이었다.
1963년 6월,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현재는 호치민) 의 미국 대사관 앞에 남베트남 불교계 인사들과 수많은 승려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었다. 그리고 이어 승용차 한 대가 미국 대사관 앞에 서더니, 문을 열고 등장한 것은 남베트남 불교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다고 전해지는 대승려 틱꽝득(Thich Quang Duc) 이었다. 차 안에는 그를 도와주려는 승려 몇 명이 같이 내렸고, 틱꽝득은 사람들이 잘 보이도록 대사관을 앞에서 바라본 전망 좋은 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미 주변에 모인 불교계 인사들은 틱꽝득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눈치를 챈 낌새다. 틱꽝득과 함께 동행한 승려들은 굳은 얼굴로 틱꽝득의 몸에다가 석유를 붓기 시작했다. 틱꽝득은 체념한 듯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고, 승려 한 명이 라이터에 불을 지폈다.
틱꽝득의 몸에 불이 붙기 시작하기 이전부터, 이미 그 주변에 모여있던 승려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몇 명은 그 장면이 보기 싫어 고개를 돌리기도 하였다. 틱꽝득의 주변에서 이런 행위를 도와주었던 승려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마 틱꽝득의 몸에 불이 붙기 전, 1초라도 빨리 그가 이런 도발을 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불은 순식간에 틱꽝득의 몸을 샅샅이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로운 대승려 틱꽝득은 일체의 흐트러짐 없이 가부좌한 자세를 유지했다. 틱꽝득의 신체는 완전히 재로 변해 시나브로 주저앉았으며, 주변에 모인 모든 승려들은 그의 명복을 빌었다.
원문 보기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global_2&uid=2782 =====================================================
또다른 글 : (일부만 펌)
소신공양이라면, 베트남의 틱꽝득 스님이 생각납니다.
그가 소속된 사찰이 반정부 시위의 근거지라고 낙인이 찍혀서 그 사찰이 폐쇄당하는 모습을 봐야 했습니다. 결국 6월 11일,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에서 그것도 미국대사관 앞에서 소신공양을 행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보면, 불길 속에서도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정좌자세를 취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걸로 인해 미국이나 서방세계에 크나큰 충격을 줬습니다.
이 사건이 난 뒤, 오딘지엠의 사실상 퍼스트레이디인 마담 누(오딘지엠의 동생인 오딘누의 부인)이 이 소신공양에 대해서 이렇게 망언을 뱉었습니다. "나는 어느 땡중의 바비큐 쇼를 보고 박수를 쳤다."
마담 누의 망언이 결국 남베트남의 민중들이 남베트남을 지지하지 않게 된 계기가 되었고, 그러한 망언이 케네디 대통령조차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즈엉반민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 군(짠반짜, 위엔칸, 위엔반티에우, 위엔까오끼이 주축)은 친 불교성향의 군으로써 오딘지엠과 대척점 관계에 있었습니다. 오딘지엠에 승려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쿠데타 군은 이에 대항해 대통령의 형제를 갈등하게 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이 있었던지 근 5개월 만인 11월 1일, 쿠데타 군은 거사를 감행합니다. 미국은 오딘지엠에게 망명요청을 하였으나 이에 거부하고 저항하다가 다음날 새벽 쿠데타 군에 체포되어 총살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의 동생인 오딘누도 총살됐습니다.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을 보면서, 베트남의 역사를 결정적으로 바꾸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상황인식과 괴리감을 가진 권력층들이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담 누의 망언이 가져올 파급력에 대해서 아무런 대비책도 없는 국가가 "누가 국가를 위해 희생하려고 하겠느냐"?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PS)틱광득 스님의 유체를 수습한 다음에 다비식이 거행되었는데, 틱꽝득 스님의 심장은 화염 속에서도 아무런 화상을 입지 않은 채로 움직였다는 일화는 베트남에서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10223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