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연월일 |
한국공산주의운동사 |
세계사 |
비고 |
1945.2.4 |
|
얄타회담 |
|
1945.7.26 |
|
포츠담선언 |
|
1945.8.6 |
|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
|
1945.8.15 |
대한민국 광복 |
일본 2차 세계대전 패전 |
|
1945.8.17 |
‘건국준비위원회’ 조직 |
|
|
1945.9.6 |
‘조선인민공화국’ 성립 선포 |
|
|
1945.9.9 |
하지장군 서울 도착 |
|
|
1945.9.11 |
박헌영 '조선공산당' 재건 |
|
|
1945.12.28 |
|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안 발표 |
|
1946.3.20 |
|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 |
|
1947.2.11 |
|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 |
|
1948.8.15 |
‘대한민국’ 수립 선포 |
|
|
1948.9.1 |
북한, 최고인민위원회 개최 |
|
|
1948.12.10 |
|
유엔에서 ‘세계인권선언’ 채택 |
|
|
처음엔 제가 쓴 첫 문장의 내용을 읽고 이들의 준비성이 부족했다, 정도의 얕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준비를 해도 번번이 무너져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활동하고 있던 지역이 공산화가 덜 되었고, 때로는 공산당을 적대시하기까지 했었던 지역이라는 점은 그 한 이유가 됩니다. 여기에서 지역적인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 이유를 들자면 공산주의자들의 몸을 아끼지 않는 희생정신입니다. 그들은 가만히 도사리고 때를 노리느니 여러번 몸으로 부딪쳐 상대를 가늠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서는 자신을 불사르는 희생자들이 꼭 발생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 점에서 그들의 강한 의지에 찬탄을 보내는 동시에, 때로는 물러설 수 있는 여유를 두고 일을 진행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