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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마태오 11장 11-15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너무나 쉬운 하늘나라 입국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두고 하신 말씀은 꽤나 아리송합니다.
우선은 먼저 세례자 요한을 확 띄웁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극구 칭찬하십니다.
인류 역사상 세례자 요한은 가장 크고 위대한 인물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그 말에 이어 바로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내던지십니다.
그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들었을 때 엄청 기분 상하는 말씀입니다. 완전히 깔아뭉개는 듯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오늘 예수님의 이 상반된 말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위 말씀은 절대로 세례자 요한을 격하시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을 무시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늘나라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세례자 요한은 한 밤중에 등불을 켜든 시각 장애우와도 같았습니다.
자신이 든 등불로 지나가는 행인들의 앞길을 밝혀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빛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 시대를 정리하는 구약의 마지막 대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쉽게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명확히 볼 수 있었던 신약의 백성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파스카의 신비를 체험하는 오늘의 우리 역시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후 한 가지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하느님 나라는 그야말로 멀고도 먼 곳이었습니다.
도저히 다가서기가 힘든 곳이었습니다.
입국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까마득한 미지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래 이후 하늘나라는 얼마나 우리와 가까워졌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쉬운 하늘나라 입국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늘나라 입국이 얼마나 쉬워졌는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건 아니다’며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백성들과 하늘나라 사이를 가로막는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입국을 위한 방법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수천가지 율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가 아닙니다.
엄청난 요구를 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단 두 가지입니다.
이 땅의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분께서 제시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
이 간단한 방법을 통해 이 지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하느님 나라를 사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하늘 나라는 자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의 것>
복음: 마태오 11,11-1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칭찬하시며 여자의 몸에서 세례자 요한보다 큰 사람은 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보다는 크다고 하십니다. 이는 인간에게서만 태어난 존재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나야 하고 성령은 하느님의 살과 피임을 압니다.
이후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여기서 폭행이나 폭력은 긍정적인 의미일까요, 부정적인 의미일까요?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쟁취하고 있다.”
저는 전에 하늘 나라는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고 유대 지도자들이 그분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폭력’은 분명 하늘 나라를 쟁취하는 도구로서 부정적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교부들의 해석을 읽어보니 대부분은 세례자 요한처럼 자기 자신을 ‘폭력적으로’ 낮추고 버리는 이들이 하늘 나라를 쟁취한다고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이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보려고 합니다.
하늘 나라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으로 얻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이를 위해 폭력을 쓰게 하는 자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사실 어린이들은 아버지에게 폭력을 가하며 평화를 얻습니다. 이를 어머니에게서 배웁니다. 어머니는 세례자 요한과 같습니다. 구약에서 레베카 어머니는 야곱에게 에사우의 장자권을 강탈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폭력입니다. 겨우 불콩죽으로 말입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분이 어머니이고 교회이고 세례자 요한입니다. 인간은 그리스도께 폭력을 가하지 않고는 자녀의 지위를 얻을 수 없습니다. 자녀만이 아버지에게 이러한 종류의 폭력을 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김창옥쇼리부트] ‘아빠, 그동안 어찌 그렇게 사셨어요?’란 프로그램은 조금은 아빠를 고발하면서도 아빠의 마음을 뒤늦게나마 이해하게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34년 만에 철든(?) 남편’에서 결혼 34년 차 아내가 남편에 대한 불만을 이렇게 터뜨립니다.
“남편이 전화를 받으러 간 사이 두 아이를 다 자연분만으로 낳았고 친정의 도움을 받아 가며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아이들이 한창 자랄 무렵 ‘아이가 왜 날 보면 우는 겨~?’ 그 말에 저는 ‘모르는 아저씨라 우는 겨~.’ 했습니다. 이 아이들이 성장하여 큰딸이 34살, 아들이 32살이 되었는데 딸이 결혼해 손녀를 낳고서야 자신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소홀했는지 남편 스스로가 느끼고 있습니다. 손녀가 예쁘긴 예쁜지 카톡 프로필에 사진 올리고 모임에서 자랑까지 합니다. 남편은 30년 전에는 왜 이 기쁨을 몰랐을까요?”
남편은 지금 와서 매우 미안해하면서 아내가 ‘골반’이 좋아서 잠깐 전화 받고 오면 아기가 태어나 있더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 어이없어합니다. 미안하다고 하면 될 것을 골반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때 김창옥 씨가 말합니다. 당시 남편이 15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소년 가장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돌봐야 할 동생이 다섯 이나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어머니까지 부양해야 했습니다. 분명 그때 걸려 왔던 전화는 일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섯 동생과 어머니, 아내, 두 자녀의 가장으로서 당시는 죽으라면 죽으라는 시늉을 할 정도로 돈을 벌어야 했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제 은퇴하고 손주가 태어날 때쯤엔 아내는 ‘내가 필요할 때 없었던 남편’, 자녀들은 ‘우리가 자랄 때 없었던 아빠’가 되어있습니다. 아빠는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것은 너무 당연하기에 그것을 주장할 수 없어 그저 미안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아이들도 엄마를 따라 아빠에게 폭행하는 게 아닐까요? 아이들의 설문 조사에서 자신에게 고민이 생기면 먼저 이야기를 나눌 사람으로 ‘1. 엄마, 2. 형제, 3. 친구, 4. 선생님, 5. 아빠’라고 적습니다. 아빠는 자녀가 자신에게 제일 먼저 이야기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50%이지만, 실제로 아이들의 4%만이 아버지를 대화 상대로 여겼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해 주는 것만큼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강탈하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비가 오면 일을 가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돈 때문에 걱정을 하셔야 했습니다. 저도 아버지가 일을 나가지 않으면 불안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오늘은 일 안 가?”라고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서운하셔서 조금 화를 내셨던 것도 기억합니다. 아들인 제가 돈 벌어오는 기계처럼 당신께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돈은 바로 성령과 같이 저에게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폭력을 당해주는 분이 계신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어린 양은 구약에서 폭력을 당하였습니다. 그 피가 문설주에 칠해지고 그 살이 그들에 의해 먹혔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먹히며 자녀에게 평화를 줍니다. 이것을 아는 자녀들은 가출하지 않습니다. 가출해서 살아봐야 부모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사는 것보다 나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어떻게 해서든 부모에게 폭력을 가해서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사는 곳에 살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세례자 요한이 왜 ‘엘리야’와 같다고 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렸습니다. 그때 바친 제물은 소였습니다. 제단에 바쳐지는 소는 바로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하늘 나라가 폭력을 당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아드님을 사르기 위해 성령을 불을 내려주셨습니다. 그 불로 우리가 하늘 나라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는 엄마를 통해 아버지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하늘 나라를 쟁취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존재일 수 있음을 아는 게 하늘 나라입니다. 아버지에게 돈 벌어오라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 자체가 바로 행복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당연히 아드님을 죽여 그 살과 피를 내어달라고 청할 수 있습니다. 이 위치란 얼마나 행복한 위치입니까? 하느님께 이러한 폭력을 쓸 줄 아는 존재만이 하늘 나라의 행복을 차지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11,11-15: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절) 예수께서는 구원사에서 요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하신다.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선언하신다.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는 위치란 다시 있을 수 없는 위치이며 요한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하다. 요한 세례자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절) 성령이 충만한 곳에서는 성령을 아주 조금 나누어 받은 사람이라도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하늘나라를 아직 기대하며 싸움터에 있는 이보다 더 크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가장 나중에 성인이 된 사람도 여전히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가장 훌륭한 이보다 더 크다는 말이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12절) 하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믿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도 하찮게 여겼다.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을 비난하고, 그들의 적들은 그분을 감싸 주었다. 자녀가 되는 권한이 상속으로 주어졌지만, 가족이 그것을 거부하였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를 거부하고, 집안의 종들이 그것을 받았다. 이것이 폭행을 당했다는 말이다. 성조들이 이스라엘에 약속하고, 예언자들이 예고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광이 이제 믿음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넘어가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요한을 엘리야라 하셨다. 그가 엘리야의 힘과 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천사도 요한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루카 1,17)라는 말은, 요한이 비록 사람의 모습에서는 엘리야와 달랐지만 바로 엘리야임을 알려준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 그 길을 마련하러 왔고, 그 사명을 다하였으며, 예수께서 사랑과 봉사로 하늘나라를 선포하셨다면, 우리의 자세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세는 사랑과 봉사의 원리에서 길을 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러시아 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운 좋게 마술램프를 발견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램프를 문지르자, 램프 속에서 ‘지니’가 나타나서 자기를 이 램프에서 구해줬으니, 농부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합니다. 농부는 말했습니다.
“옆집에 젖소가 있는데 온 가족을 다 먹이고도 남을 만큼 우유를 생산했어요. 옆집 사람들은 남은 우유를 팔아 큰 부자가 되었죠.”
농부 이야기를 듣던 ‘지니’가 “그러면 우유가 잘 나오는 젖소를 구해드릴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농부는 어떻게 말했을까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니, 옆집 젖소를 죽여주세요.”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부러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부러워하고 그래서 그 사람처럼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자기 능력의 부족으로 그 사람처럼 되지 못하면, 앞의 이야기에 나오는 농부처럼 그 사람이 망하길 바랍니다.
질투와 시기는 모두가 망하는 길입니다. 상대의 망함을 떠나 나부터 망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사람처럼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의 고유함을 간직하면서 사는 노력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 고유함을 간직하는 사람은 질투와 시기에서 벗어나, 자기 안에서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듯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많은 이가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사제인 즈카르야의 아들로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야로 향했고, 그곳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면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라는 사람의 질문에 “나는 그리스도이다.”라고 말해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의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실 주님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면서 겸손의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삶이 아닌, 자신의 고유함이라 할 수 있는 주님을 높이는 삶을 철저하게 살아갑니다.
세례자 요한이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고유함인 주님 높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보였던 겸손을 본받아, 자기보다 주님을 높이는 삶을 사는데 자기 고유함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인정받는 것이 아닌 주님께 인정받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특별한 기회를 기다리지 말라. 평범한 기회를 붙잡아 특별하게 만들어라(오리슨 스웨트 마든).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마태 11,12)
타인에게 던지는
모욕적인 언사나 행위
무심코 내뱉는
불평과 불만이
우리가 하늘에 가하는
폭행이라네.
나태함과 무관심과
불손하고 오만한
우리의 태도가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 분을 향한
무자비한 폭행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 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
그런데 안개꽃처럼
다른 사람의 배경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에 나서지 않으면서
남들을 묵묵히 받쳐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개꽃같이 살다가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산골짜기 두메꽃처럼
살다가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들에 핀 야생화처럼
살다가 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장미의 아름다움을 받쳐주는
안개꽃의 소중함을 우리가 알고 있듯이
안개꽃처럼 혼자는 빛을 발할 수 없지만
세례자 요한처럼 조연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
안개꽃에 폭행을 가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이 세상에 배경이 되어주는 삶처럼
아름다운 삶도 또 없습니다.
“그대가 빨간 장미라면 난 흰 안개꽃이 되겠습니다.”
- 어느 시인의 싯구에서 인용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하늘 나라를
듣고
보고 배우는
희망의
대림
시기입니다.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켜내는
겨울 나무를
만납니다.
하늘 나라는
모호하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이들로
확연히
드러납니다.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는
이들에게서
결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비겁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태어나고
복음으로
다시
살아갑니다.
우리들의
삶으로
더욱 빛나는
하늘 나라입니다.
그저 주어지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단호함과
진심어린
실천으로
우리의
하늘 나라는
우리의
생활이 됩니다.
누구에게서
태어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삶을 잃으면
하늘 나라도
잃게 됩니다.
잃었기에
다 찾는 것이
삶을 위한
진정한
회개입니다.
고통과
수난으로
다시
일어서는
하늘 나라입니다.
하늘 나라가
지켜주는
우리의
반가운
생활입니다.
우리의 생활로
하늘 나라의
기쁨과 희망을
되찾는 은총의
날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11,12)
'폭행을 멈추자!'
오늘 복음(마태11,11-15)은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이 생각하던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 곧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 사도들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두고 '하늘 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면서 주님의 길을 닦으러 온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의 칼에 의해 죽었습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과 율법에 정통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 나무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도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그렇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도 하늘 나라가 폭행 당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폭행',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이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헛된 말을 쏟아내는 폭행',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마구 파괴하는 폭행'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통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회교리주간(12.8-14)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회교리가 말하고 있는 내용의 핵심'은 바로 '이 폭행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폭행과 폭력을 멈추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라.'는 외침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다시오심)과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면서 준비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폭행을 멈추고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멘.
(~ 2마카4,22)
복음말씀
제1독서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너의 구원자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1,13-20
13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14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15 보라, 내가 너를 날카로운 타작기로, 날이 많은 새 타작기로 만들리니
너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바수고 언덕들을 지푸라기처럼 만들리라.
16 네가 그것들을 까부르면 바람이 쓸어 가고 폭풍이 그것들을 흩날려 버리리라.
그러나 너는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자랑스러워하리라.
17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
나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
18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19 나는 광야에 향백나무와 아카시아, 도금양나무와 소나무를 갖다 놓고
사막에 방백나무와 사철가막살나무와 젓나무를 함께 심으리라.
20 이는 주님께서 그것을 손수 이루시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그것을 창조하셨음을
모든 이가 보아 알고 살펴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11-1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13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14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