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올바른 천수경(千手經)을 바탕으로 그 동안 통용되어 온 천수경의 한글해역을 살펴
바로 잡고자 한다. 먼저 淨法界眞言(정법계진언)은 법계를 청정하게 하는 진언이다.
청정한 法界(법계)는 바로 淨佛國土(정불국토)이기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신해품(信解品)의
내용을 헤아릴 때 法界淸淨(법계청정)의 근본을 헤아릴 수 있다.
妙法蓮華經(묘법연화경) 信解品(신해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但念(단념), 空無相無作(공무상무작) 於菩薩法(어보살법) 戱遊神通(희유신통)
淨佛國土(정불국토) 成就衆生(성취중생) 心不喜樂(심불희락) 즉 “부질없는 마음으로 空(공),
無相(무상), 無作(무작)이라 생각하고 보살법의 신통함에 놀고 놀았습니다.
淨佛國土(정불국토)요, 成就衆生(성취중생)에는 마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부처님의 상수제자 혜명 수보리와 마하 가전연, 마하가섭, 마하목건련이 부처님 앞에서
스스로를 책망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바라는 바는 空(공), 無相(무상), 無作(무작)이라는 空思想(공사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요, 菩薩法(보살법) 즉 육바라밀을 추구하는 가르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직 佛國土(불국토)를
淸淨(청정)하게 하고 衆生(중생)이 成就(성취)되기를 바라는 바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千手經(천수경)의 淨法界眞言(정법계진언)은 바로 佛國土(불국토)를 淸淨(청정)하게 함을 드러낸
내용이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했듯이 邏字(라자)는 名離依止無垢(명이의지무구) 즉
“이름하여 청정함에 머물러 의지 함이니” 云悟一切法離世間惑染故(운오일체법세간혹염고)
즉 “이르기를 일체법을 깨달아 세간의 미혹함에 물들지 않느니라.”
했듯이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에 千手經(천수경) 淨法界眞言(정법계진언)의 邏字(라자)는
大方廣佛華嚴經(대방광불화엄경) 입법계품의 42자문에 속하며 이는 최상승경인 妙法蓮華經(묘법연화경)에서
확인되는 淨佛國土(정불국토)요 成就衆生(성취중생)을 염원하는 부처님의 뜻임을 알 수 있다.

이에 통용되는 천수경(千手經)의 정법계진언(淨法界眞言)의 한글해역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2002년 11월 11일 도서출판 보련각에서 오고산 편저자로 출판된 [불자수지독송경]에
82페이지와 2008년 10월 20일 도서출판 창에서 출판한 여천 무비 저
[예불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정법계진언(淨法界眞言)(법의 세계를 깨끗하게 하는 진언)
라자색선백(羅字色鮮白) 공점이엄지(空點以嚴之)
곱고 고운 빛으로 진언 편 것이 공점으로 갖추어진 장엄같을 세
如彼계明珠(여피계명주) 치지어정상(置之於頂上)
맑고도 곱게 생긴 밝은 구슬이 정상의 높은 데서 광명내시네
진언동법계(眞言同法界) 무량중죄제(無量衆罪除)
진언과 법계가 둘이 아닐세 한없이 지은 죄업 소멸하오며
일체촉예처(一切觸穢處) 당가차자문(當加此字門)
갖가지 나쁜 곳에 부딪칠 때도 마땅히 이 진언을 지송합니다.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3번)

오고산스님의 번역을 무비스님은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큰스님들의 저술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뜻을 헤아리는 측면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앞서 살핀바와 같이 원문의 라자(羅字)는 라자(邏字)로 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라자색선백(邏字色鮮白)을 [곱고 고운 빛으로 진언 편 것이]라는 해석보다
[라자(邏字)는 곱고 고운 흰색이니]라고 함이 원문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 아닐까?
이어 공점이엄지(空點以嚴之)를 [공점으로 갖추어진 장엄 같을세]라고 했다. 그러나 공(空)과 점(點)은
공점(空點)이라는 하나의 단어가 아니다. 먼저 공(空)에 대한 정의(定義)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공(空)을 삼장법수(三藏法數) 272 中 11 성유식론에서 공즉무옹(空卽無壅) 명즉광명(明卽光明)
즉 “공(空)은 막힘이 없는 것이며 明(명) 즉 光明(광명)이라.”했다.
따라서 공(空)은 막힘도 없고 점(點)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空(공)에 點(점)으로
장엄했다는 표현은 전혀 원문의 본질을 충족하지 못하는 오역이라 할 것이다.
또한 엄(嚴)을 장엄(莊嚴)으로 해역한 것은 공(空)의 실체를 바르게 헤아릴지 못한 결과 엄(嚴)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오역이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점이엄지(空點以嚴之)에
지(之)를 붙여 그 뜻을 명확히 하고 있다.
따라서 點(점)은 “등불을 밝힌다.”는 뜻으로 嚴(엄)은 “으뜸”으로 번역한다면
空點以嚴之(공점이엄지)는 “空(공)은 으뜸이니 등불을 밝힘이요”라고 함이 적절 할 것이다.
如彼계明珠(여피계명주)를 “맑고도 곱게 생긴 밝은 구슬이”라고 했다.
明珠(명주) “밝은 구슬”이라 했다. 맑고도 곱게 생긴 밝은 구슬이 아니다.
그리고 如彼(여피)의 여(如)는 “그와 같은 여(如)”이다. 여기에 엄청난 비밀이 숨어있다.
如(여)를 헤아리지 못하면 해석할 수 없는 내용이다.

따라서 如彼(여피)는 明珠(명주)를 일컫는다. 따라서 그와 같은 명주(明珠)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용(龍)이 물고 가는 구슬 바로 여의주(如意珠)이다. 이에 부처님을 모신
법당에 곳곳에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가는 용(龍)그림과 장엄물이 넘쳐난다.
바로 부처님 머리 위 가장 높은 곳에 올려 진 明珠(명주) 즉 밝은 구슬은 여의주(如意珠)이다.
그래서 명주(明珠) 즉 如意珠(여의주)는 다음 문장인 치지어정상(置之於頂上) 즉
“정수리의 가장 높은 곳에 올려져 있다.”라고 했다. 그래서 계明珠(계명주)라 한 것이다.
바로 상투 위에 올려 진 구슬 바로 명주(明珠) 즉 如意珠(여의주)이다.
따라서 如彼계明珠(여피계명주)를 “상투 위에 그와 같은 밝은 구슬이”이라 함이 적절할 것이다.
이어 치지어정상(置之於頂上) 즉 “정상의 높은 데서 광명내시네”라고 의역하고 있는데
이를 직역하면 “정수리 위에 놓여있네”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글 번역의 光明(광명)은 원문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光明(광명)이라는 표현으로 오히려 본질을 재대로 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어지는 진언동법계(眞言同法界)는 “진언과 법계가 둘이 아니네” 즉 眞言(진언)이 곧 法界(법계)이고
法界(법계)가 바로 眞言(진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지칭하는 眞言(진언)은 바로 邏字(라자)이다.
邏字(라자)가 곧 法界(법계)이며 그 法界(법계)는 곧 實相(실상)이다.
따라서 진언동법계(眞言同法界)는 “진언과 법계가 둘이 아니니”라 함이 쉽게 이해 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다음 이어지는 무량중죄제(無量衆罪除)를 오고산스님은 “한없이 지은 큰 죄 사할려거나”라고 했고 무비스님은
“한없이 지은 죄업 소멸하오며”라고 했다. 그러나 문장을 살펴보면 무량중(無量衆)
즉 “한량없는 중생들의” 죄제(罪除)즉 “죄를 깨끗이하느니라.”라고 하면 淨法界眞言(정법계진언)의
본질에 합당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邏字(라자)가 지닌 뜻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에
“한없이 지은 죄” 또는 “한없이 지은 죄업”으로 주인공인 衆生(중생)이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無量衆(무량중) 즉 “한량없는 중생”의 罪(죄)를 쓸어서 깨끗이 하는 본래의 뜻을 드러내어야 邏字(라자)의
本性(본성)을 통해 衆生(중생)들의 한량없는 죄를 쓸어서 깨끗이 하려는 眞言(진언)의 本質(본질)이 드러난다.
따라서 무량중죄제(無量衆罪除)는 “한량없는 중생들의 죄를 깨끗이 하느니라”해야 할 것이다.
이어 일체촉예처(一切觸穢處) 즉 “갖가지 나뿐 곳에 부딪칠 때도”라고 오고산스님과
무비스님은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촉(觸)은 “닿다, “부딪친다. 더럽히다”는 여러 의미가 있다.
또한 예(穢)는 “더러운 예(穢)”로 더럽다, 거칠다, 더럽히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나쁜 곳이 아니라 더럽고 거친 곳이다. 즉
“모든 더러움 곳에 닿을 지라도”라고 하면 좋을 듯하다.
이제 마지막 구절인 당가차자문(當加此字門)을 살펴보면 두 스님은
“마땅히 이 진언을 지송합니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그러나 당가차자문(當加此字門)에는 진언도 지송도 없다. 중요한 것은 바로 자문(字門)인데
이는 화엄경 입법계품의 42자문 중 라자문(邏字門)을 이르는 문구인데 이를 헤아리지
못하면 이 구절을 이해 할 수가 없다.

바로 선제동자가 선지식을 만나 邏字門(라자문)에 이르면 일체의 더럽고 거친 중생의 죄업을
쓸어서 깨끗이 하듯이 邏字門(라자문)의 진언 즉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으로 그 중생이
지은 죄업을 씻어낼 수 있음을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當加此字門(당가차자문)은
“마땅히 邏字門(라자문)에 이르면 씻어 낼 것이니라.”함이 바른 한역이라 할 것이다.
이에 전체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올바른 千手經(천수경) 淨法界眞言(정법계진언)
邏字色鮮白(라자색선백) 空點以嚴之(공점이엄지)
라자(邏字)는 곱고 고운 흰색이니 空(공)은 으뜸이니 등불을 밝힘이요.
如彼계明珠(여피계명주) 置之於頂上(치지어정상)
상투 위에 그와 같은 밝은 구슬이 정수리 위에 놓여있네!
眞言同法界(진언동법계) 無量衆罪除(무량중죄제)
진언과 법계가 둘이 아니니 한량없는 중생들의 죄를 깨끗이 하느니
一切觸穢處(일체촉예처) 當加此字門(당가차자문)
모든 더러움 곳에 닿을 지라도 마땅히 邏字門(라자문)에 이르면 씻어 낼 것이니라.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3번)
또한 스님은 최근 불교경전 한글화 작업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大韓佛敎曹溪宗(대한불교조계종)에서 발간한 천수 예불문 중 칠정례의
“至心歸命禮(지심귀명례) 三界道師(삼계도사) 四生慈父(사생자부) 是我本師(시아본사)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온 세계 스승이며 모든 중생 어버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절하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경전에 근거한 원문을 잘못이해
한 결과이기에 바로 잡아야 한다고 밝혔다.4)

스님은 그 근거로 원문 예불문은 妙法蓮華經(묘법연화경)을 근저로 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譬喩品(비유품)에서 부처님께서 장자궁자의 비유를 설하시고 舍利佛(사리불)에게 이르시되
“我亦如是(아역여시) 衆聖中尊(중성중존) 世間之父(세간지부) 一切衆生(일체중생)
皆是吾子(개시오자) 즉 나 또한 이와 같음이니라 모든 聖人(성인)가운데 聖尊(성존)이며
세간의 아버지이니라. 일체중생은 모두 나의 아들이니라.”하셨다.
또 삼계화택의 비유를 드시고 “今此三界(금차삼계) 皆是我有(개시아유) 其中衆生(기중중생)
悉是吾子(실시오자) 즉 지금 이 삼계는 다 내가 둔 바이니 그 가운데 중생은 다 나의 아들이니라.”
하셨다. 또 사리불에게 이르시기를 “汝諸人等(여제인등) 皆是吾子(개시오자) 我則是父(아즉시부)
즉 너희 모든 사람은 다 나의 아들이요. 나는 곧 아버지이니라.” 하셨다. 따라서 부처님은
일체중생의 “아버지”이다.
또한 한문 예불문은 “四生慈父(사생자부) 즉 四生(사생)의 자비로우신 아버지”라 한 것이다. 이에 “至心歸命禮(지심귀명례) 三界道師(삼계도사) 四生慈父(사생자부) 是我本師(시아본사)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을 어쩔 수없이 한글로 번역한다면 “지극한 마음으로, 온 세계의 스승이시며 모든 중생의 아버지이신 나에 스승
석가모니부처님께 의지하여 절하옵니다.”로 번역함이 좋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경전에도 찾아 볼 수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울러 부르는 “어버이”로 한글화한 것은
경전의 본질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결론적으로 세종시 아리랑 계룡사 능현스님은 “두 스님의 편저물을 중심으로 살핀 것은 특정인을
거론하고자 함이 아니라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두 분의 편저물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한국불교의 수많은 불자들이 千手經(천수경)을 통해 신앙의 첫걸음에 들고 늘 千手經(천수경)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성취해 간다.”고 말하고 “淨法界眞言(정법계진언)의 올바른 해석과 헤아림은 불교수행의 근원을 바로 잡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또한 스님은 관념적인 수행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채득하고 수행하는 불교 즉 불교의 眞髓(진수)가 담겨 있는
최상승경인 妙法蓮華經(묘법연화경)의 가르침을 통해 實相(실상)을 증득하는 수행에 함께해야
할 것이라며 끝을 맺었다.
세종 계룡사 회주 능현 스님 motp79@hyunbul.com">motp79@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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