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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6월29일 수요일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수도회] 목숨을 다 바치는 오늘의 사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12,1-11
○ 제2독서 2티모 4,6-8.17-18
† 복음 마태 16,13-19
○ 오늘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우리 신앙의 모범인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를 기리며 주님을 찬미합시다. 베드로 사도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고, 바오로 사도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습니다.
교회의 기초를 놓아 준 두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기로 다짐하며
미사에 참여합시다.
◈ 오늘의 묵상
한 인간의 평가는 그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 드러난다고 합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인격적으로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새 인간이 되었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음의 기쁨을
전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난 일화는, 복음의 힘이 어떤
세속적인 억압에도 짓눌려지지 않음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하느님의 은총의 힘으로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로 고백하여, 저승의 세력도 이길 수 없는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의
위대함을 예표로 보여 준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바오로 사도가 죽음을 직감하면서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감동적인 고백이 나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과연 누가 인생의 마지막에 이런 후회 없는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인생의 뒤안길에서 모자람 투성이였던 자신의 생에 대한 회한에 빠지는
것이 보통의 인간입니다. 바오로 사도라고 그런 회한을 갖지 않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자신을 통해서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라는 믿음 덕분이었다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아름답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숨 가쁘게 달려온 인생을 되돌아볼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나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처럼 후회 없이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살았습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느님을 마주
뵐 기쁨의 순간을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지금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2016년 6월29일 수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제1독서
<이제야 참으로 알았다. 주님께서 헤로데의 손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2,1-11
제2독서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4,6-8.17-18
복음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3-19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게 되면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텔레비전의 리모컨을 잡고서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이 순간이 ‘휙’ 하고 그냥 지나갔으면 하지요. 바로 이러한
상상이 만들어낸 ‘클릭’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 마이클 뉴먼은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그 승진에 빠르게 도달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모든 과정을
생략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적인 즐거움까지, 승진이라는 최종 목표를 향해 가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빨리 감기를 통해서 지나치는 것이지요. 그런데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이 빨리 감기를 하는 동안은 마취 상태가 된 것처럼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며, 빨리 감기를 한 순간이 기억되어서
빨리 감기를 했던 상황이 되면 저절로 건너뛰기가 되어서 그 상황을 직접
경험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떨까요? 과연 행복할까요? 주인공은 나중에 되어서야 이렇게 빨리
감기가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즉, 빨리 승진을 해서
회사의 고위관리가 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현재를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사소한 일상들 심지어 교통 체증으로 인해 지루하게 차 안에 있는 그
시간도 직접 체험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시간이 지루하고 힘들다고
빨리 감기를 해버리면 아무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낸 것뿐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시간 역시 직접 체험을 했을 때에만 나의 소중한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들 그리고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무의미해 보이는
사소한 일상까지 우리에게는 소중한 시간들입니다. 그 시간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감사하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과 노력을
동원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신앙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신앙 고백의 모범을, 그리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게 깨우쳐 주면서 교회의 기초를 바르게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 둘 역시
부족한 인간이었기에, 주님을 배신하기도 했고 또한 주님을 박해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이 둘에게 이 시간은 정말로 빨리 감기를 하고 싶은
순간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 역시 그들이 신앙의 모범을 세울 수
있도록 했던 소중한 때였던 것입니다.
지금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또 너무
지루하다면서 건너뛰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 모든
시간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 기쁨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는 하루아침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30년 동안이나 기나긴 밤을 보내야 했다(레이 크룩).
예수님께 수위권을 받은 베드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은 다 공짜다(‘유쾌한 인생’ 중에서)
부는 바람도 공짜, 하늘에 뜬 흰 구름도 공짜,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나무도
공짜, 눈부신 햇살도 공짜였다. 화사하게 피어나는 꽃의 자태도 공짜, 그
꽃이 풍기는 향기도 공짜였다. 우연히 만난 아이의 환한 웃음도 공짜,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도 공짜였다.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은 다 공짜다. 사랑, 우정, 의리, 신뢰 등은 천만금을
주어도 살 수 없다. 그 대신 노력과 시간을 들이고 온 마음을 쏟지 않으면
절대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아침에 시린 공기도 숲길을 걷는 것도 아이들 뛰노는 소리도 책방에서
뒤적이는 책들도 거리의 시원한 미인의 몸매도 아무 바람 없는 친절도
시원한 나무그늘도 인생에서 진실로 좋은 것은 다 공짜다.
돈으로 살 수 없고 숫자로 헤아릴 수 없고 무엇으로 대체 할 수 없는 것이
진정 존엄하고 아름다운 것,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다 공짜다.
우리가 누리는 것들 중에서 공짜가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따라서 공짜를
맘껏 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많다고 느끼는 것은 왜 일까요? 혹시 내가 스스로 어떤 틀에 갇혀서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 틀에서 벗어나야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많은 공짜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목숨을 다 바치는 오늘의 사도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6월29일 수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마태 16,13-19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9)
Peter's confession about Jesus
목숨을 다 바치는 오늘의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두 사도는 교회의 두 기둥으로 공경을 받아왔습니다.
시몬은 동생 안드레아와 고기잡이를 하던 중 부름을 받고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고 맺고 푸는 권한을 받습니다. 그는 어부
출신으로서 성격이 급했으나 늘 예수님을 동행하였고,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했지만 통회하고 다시 돌아와 굳건한 신앙으로 교회의 기초를 다지고
순교하기에 이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열흘 째 되는 날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성령을
받고 나서 여러 사람 앞에서 설교하여 3.000명을 영세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태생 앉은뱅이를 기적으로 낫게 해주었고, 사마리아와
안티오키아 교회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를
주관하였고 베드로 전후서를 남겼습니다. 그는 네로 황제의 치하인 64년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하였습니다.
한편 타르수스에서 출생한 사울은 예수님을 박해하다가 회개하여 바오로라
불리면서 대단한 열정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한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유대교의 신학과 히브리어를 배웠고, 그리스 철학,
역사, 문화, 언어 등에도 능통하였습니다. 사울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신자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을 무렵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유대교 율법에 대한 존경심에서 맹렬히 그리스도교를
탄압하였습니다. 그는 성 스테파노와 다른 신자들을 죽일 때에
가담하였습니다. 얼마 뒤에 그는 다마스쿠스의 신자들을 체포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 신비스런 회개체험을 하고
하나니아스에게 세례를 받고 바오로라 불립니다. 이후 그는 예루살렘에서
로마 스페인까지 3차에 걸친 여행을 하면서 열심히 전교하였습니다.
선교하면서 4년간이나 옥고를 치렀고, 유대인들에게 39도의 매를 다섯
차례나 맞았으며, 로마인들에게 태형을 세 번 당하고, 세 번 파선 당하여
바다에서 일주일간 표류한 적도 있었습니다. 또한 목마름, 단식, 추위,
노고 등등 일체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인내하였습니다.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킨”(2티모 4,7) 그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인
서기 67년 성 밖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이스라엘에 초기 교회를 건설하였고 바오로는 이방인들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축일을 지내며 인간적인 나약함과 시련
가운데서도 베드로 사도와 같은 굳건한 신앙을 지니고, 바오로 사도처럼
열정을 다해 헌신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선포하여야겠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에서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16) 하고 고백한 그 신앙고백을 삶으로 살아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이 고백은 예수 부활 이후 초대 교회의 가장 심오한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살아계신 하느님”은 거짓 신들, 곧
생명이 없는 우상들과는 전혀 다르고, 생명을 주시는 신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하느님의 진리보다는 거짓이 팽배하고, 하느님의
정의보다는 인간적 탐욕에 이끌리는 불의가 넘치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생명보다는 죽음과 우상을 섬기는 죽음의 문화가 넘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오늘의 세상은 하느님에 대한 거부요, 복음의 가치에 대한 저항이
드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도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오로처럼 살아계신 하느님을
삶으로 증명하는 오늘의 사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의미 없어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참 의미이신 하느님을 드러내보이며,
허황된 가치를 추구하며 현세의 유혹에 끌려가는 세상에 바오로 사도와
같은 명민한 지혜와 사랑으로 참 진리요 길이신 주님을 증거하도록 온
마음과 정성을 다 기울였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6월29일 수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2디모 4,17)
저는 1979년 부활에 영세를 하여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해 10월에 견진을 받고 12월에 수도원에 들어왔으니
그해는 나에게 참으로 벅차고 감격스런 시작의 해였습니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나 오늘 주보성인 축일을 맞이하여
바오로의 삶을 돌아보니 참으로 은총과 축복의 세월이었습니다.
저 또한 바오로 사도의 오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내 곁에 계시면서 나도 모르게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여태껏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칠삭동이 같은 나를 선택해서 복음선포자로 삼으셨다고 고백한
사도의 고백을 저도 되풀이합니다.
허물 많고 죄 많은 나를 선택하시어 당신 말씀의 전파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여정도 그분 덕분으로 열심히 살아
바오로 사도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나의 주보이신 사도 바오로, 나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 15)
한상우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6월29일 수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 15)
신앙의 여정안에서 실패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알아보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어가시기 때문입니다.
부서지는 파도처럼 편협한 우리의 편견도
부서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선 분들의 삶은 언제나 아름답고 찬란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이 참된 열정이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서는 여정은 열정으로 이어지고
열정은 또다시 뜨거운 사랑으로 이어질 것임을 믿습니다.
열정과 사랑또한 회심을 필요로하는삶의 가장 긴요한
뼈대들이기에 하느님 도우심없이는 성장할 수 없고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부르심의 여정과 따름의 여정안에
빠질 수 없는 부분이 넘치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은총이 회개이며 회개가 진정한 희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참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으로 수시로 출렁이는 베드로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됩니다.
이 희망으로 파도처럼 부서지는 바오로의 절망이 은총으로 바뀌게됩니다.
두 분 사도를 사랑으로 기다려주셨던 예수님 마음을
진정 만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기다림을 통해 기다림과 함께 기다림 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다림의 길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이 깊을수록 간절해지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다림을 배우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부끄러움에 대한 성찰
2016년 다해 6월29일 수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 16,13-19
부끄러움에 대한 성찰
한 워크숍에서 ‘천황폐하 만세 삼창’을 건배사로 외쳤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잔혹한 일제 식민통치의 트라우마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계신 분들이
많은 지금, 할 말이 따로 있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시인/동주(안소영, 창비)를 읽으면서 우리 민족이 얼마나 참혹한 시절을
견뎌왔는지 새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소설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전쟁을
확산시켜나가면서 우리 민족에게 가한 거짓말 같은 탄압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불과 5~60년 전의 일입니다. 창씨개명, 국어 박탈, 강제 노역,
강제 징집, 생체실험...무엇보다도 치를 떨리게 한 것은 건강한 남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 징집까지도 모자라 새싹 같은 우리 어린 소녀들까지
데려가 위안부 역할을 하게 하면서 그 소중한 인생들을 무참히 짓밟은
일입니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길어지고 극에 달한 시절 두려움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던 당대 문인들 사이에는 체념하는 분위기가 짙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조선이 영원한 일본의 식민지라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생각
말입니다. 당시 조선 문인 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이광수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반도 문학의 새로운 건설은 내선일체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 당시 대세 문인이었던 최남선 역시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을
적극 옹호하면서 그 길을 따르는 길만이 민족을 위한 길이라며
변절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윤동주 시인은 괴로워하며 숱한 밤을 지새우다가
마침내 절필을 선언합니다. “잘못된 전쟁을 지지하고 동포들의 고달픈 삶을
외면하는 것이 문학의 길이라면, 가지 않으리라. 감투와 명성을 탐하고
궤변으로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는 자들이 문인이라면, 되지 않으리라.”
윤동주 시인의 시(詩)가 쉽게 다가오고 만인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유는
이렇게 그는 시대와 삶 앞에 치열하게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닿아봤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는 깊은 우물 끝에 닿은
두레박이 길어 올린 샘물처럼 맑고 서늘합니다. 그의 시는 우리 마음속의
순수하고 고요한 본령을 건드려 순식간에 일깨웁니다.
서정시를 쓰기에는 너무나 참혹한 시대에 청년기를 보냈던 윤동주 시인은
확신했습니다. 혼란과 좌절의 시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민족과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최선을 다해 시를 쓰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설령 그 일이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고 마침내 죽음으로 내모는
길이 된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시를 썼습니다. 순수한
자신의 내면의 부끄러움과 순수함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시를 통해 우리에게 남긴 언어들이 지닌 한 가지 특징은
순수함이며 정직함입니다. 그리고 시의 배경에 깔려있는 분위기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입니다. 그는 잔인하고 참혹한 야수의 시절, 너무나도
비인간적이고 부끄러운 시대와 온 몸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높은 벽 앞에 시를 쓰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무척이나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시를 통해 거대 악에 맞서
싸웠습니다. 이렇게 그가 지닌 무기는 열정과 순수함과 그리고 시대 앞의
부끄러움이었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가톨릭교회의 반석이 되신 베드로·바오로 사도 역시 열정과
순수함, 부끄러움과 진지한 성찰 측면에서 탁월한 분들이었습니다. 우리
시대 주변을 돌아보면 부끄러운 삶을 살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후안무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지난 날 자신들의
삶 안에서 벌어졌던 실수와 과오에 대해 솔직히 인정하고 가슴을 쳤습니다.
한 마디로 부끄러움을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의 인생
안에서 철저하게 감추고 싶은 ‘흑역사’를 만민 앞에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잔잔하던 자신들의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며 다가온 예수 그리스도란
존재 앞에 치열하게 고민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분께서 지니고 오신
엄청난 가치관과 비전 앞에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때로 부족한 그릇으로
인해 너무나도 큰 새로움이신 그분 존재를 수용하기가 버거워 부대끼기도
했습니다. 때로 배신의 길을 걷기도 했었고, 그로 인한 깊은 좌절의 늪으로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들의 전존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데 성공합니다. 결국 나중에는 자신과 스승이
되었으며 이런 고백까지 서슴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주님을 향한 강할 열정과 새로운 가치관 앞의 순수한 자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절대자 하느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에 대한 솔직한
인정, 지난 삶 안에서 벌어진 오류에 대한 부끄러움, 자신에 대한
지속적이고 진지한 성찰의 결과로 인해 베드로·바오로 사도는 제2의 예수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2019년 다해 6월29일 수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 16,13-19
‘거인들의 발자취’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인류는 ‘현인(賢人)’
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문명과 문화를 키워 올
수 있었습니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기원전 800 ∼200년 무렵에 많은
현인들이 있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서양에는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있었습니다. 동양에는 석가모니, 공자가 있었습니다. 야스퍼스는 당시를
‘현인들의 시대’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사도들이 시대'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커다란 기둥
베드로,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으며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배반한 적은
있었지만 진심으로 뉘우쳤고,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과 신자들을 박해하였지만 이방인의 사도로 초대
교회가 기틀을 잘 잡을 수 있도록 헌신하였습니다. 두 사도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과 반대편에 있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배반한 적이 있고,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금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두 사도는 용감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곳에는 ‘성 베드로 대성전’이 세워졌고,
교황님께서는 베드로 대성전이 있는 바티칸에서 전 세계 교회를 위해서
사목을 하고 계십니다.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곳에는 3곳의 샘물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순교했을 때, 머리가 땅에 떨어져 세 번 굴렀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샘물이 솟아나서 지금도 물이 흘러나옵니다. 바오로 대
성전에는 역대 교황님들이 초상화가 모셔져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를 통해서 베드로, 바오로 사도가 완벽했던 분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사탄아 물러가라!’
는 야단을 맞았었고, 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잡아
가두던 바리사이파였습니다. 그런 부족함이 있음에도 예수님께서는 두
사도를 교회의 기둥으로 세우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 야단도 맞았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야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안 된다.’고 했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야단을 맞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갔을 때, 예수님을 아느냐고 물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면서 3번이나 배반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순교하는 것이 겁이 나서 로마를
탈출하려고 했습니다. 로마를 벗어나는 길에 베드로 사도는 멀리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도망을 치니,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러 가려고
한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발길을 돌려 로마로
돌아가 순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부족하고, 겁이
많았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고, 마침내 교회를 빛내는 천국의 별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보다 더 나쁜 일을 했습니다.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인 확신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였고, 잡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는 바오로 사도를 부르셨고,
바오로 사도는 이제 예수님을 박해하는 사람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3차례에 걸쳐 선교 여행을 떠났고,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하고
박해하는 사람까지도 초대하셨고, 구원 사업의 협력자가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 교우 분들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신부님은
자상하신데, 다른 신부님이 오시면 어떻게 하나요?’ 저는 자상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당 사목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어르신들께서
좋아하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베드로 사도처럼 열정은 있지만
추진력이 부족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바리사이파처럼 주님을 따르기도 하였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너무 빠른 것도, 너무 느린 것도 없습니다. 천년도 하느님
앞에는 지나간 어제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완벽한 것도,
똑똑한 것도, 재능이 있는 것도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 하나로도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 사도가 흘렸던 참회의 눈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오로 사도가
보여주었던 새로운 삶으로의 회개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지금 여기 하느님나라에 산다고 믿거든요?
2016년 다해 6월29일 수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지금 여기 하느님나라에 산다고 믿거든요?
편지-전보-전화-영상통화 앞으로는 또 뇌파교류? 아마 그럴지 모르죠.
암튼 새로운 걸 계속 연구하여 삶에 보태는 능력을 보면 감탄스럽지요.
이렇게 자진해 변하며 발전하는 인간을 왜 세상은 잡아끌어 내립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도 성체를 통해 우리와 함께 교감을 바라십니다.
죽은 후에 하느님나라가 오는 게 아니고 이미 하느님나라는 선포됐죠.
신앙인은 하느님나라가 보이지만 않을 뿐 여기 지금 산다고 믿거든요?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오 16,19)”
세상에서 뉘우치고 고해하는 모습은 하늘나라에 그대로 동시 반영됩니다.
사죄경을 외우는 사제의 모습대로 하늘나라에서 그대로 동시 실행됩니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청주] 아픈과거는 약이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6월29일 수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 16,13-19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
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께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베드로,
바오로성인의 삶을 본받고 복음전파의 열정에 목말라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던 하느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 구세주(그리스어), 메시아
(히브리어; 기름부음 받은 사람)라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혹은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고백했는데 그들과는 다른 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아느냐고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냐?’
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그에 따른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작은
몽당연필’로 표현하였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환시를 통해
“너는 누구냐?” 는 한 소년의 질문을 받게 되는데 “예수의 데레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꼬마에게 묻습니다. “너는 구구냐?” 그에 대한 소년의
대답은 “데레사의 예수다.”였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어떤 고백일까요?
그리고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화답해 주실까요?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달라도 너무 다른 분이었습니다.
출신부터가 베드로는 배움이 부족한 어부였고,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바리사이파 출신이고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인들을 위해, 바오로는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두 역할이 합하여져 모든 민족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 함께 협력하며
교회의 기초를 닦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성향을 충분히
존중하시며 당신 구원사업을 완성하십니다.
바오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역경을 헤치며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한 복음의 사도였으며 스승 가말리엘 밑에서 제대로 된
신앙수업을 받은 엘리트였습니다. 많은 서간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그 핵심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체계화하신 분입니다. 사도 바오로 덕에 이방인에게까지
주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흔들림 없는 신앙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이어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안다는 것은 곧 내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
라고 확실히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와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두 떨어져 나갈 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마르14,29).하고 말한 그 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씻어 주시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7) 하셨습니다. 세 번 의
배반을 세 번의 사랑으로 감싸주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함께했었습니다. 열렬한 유다교
신봉자였던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말합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4,6-8).
베드로, 바오로! 그들은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는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느님 안에서 노력했고 어려움 중에서도 희망을 찾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연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열정을 가진 신앙인이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하며 도대체 나에게 주님은 어떤 존재인가? 묻고, “당신은 저의
모두입니다.”,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오늘 저는 수품25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동안에 함께 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미사를 봉헌합니다. 저는 사제수품을 받으면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 라는 성경구절을 선택하였습니다. 혼자 힘으로
신부가 된 것도 아니요,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 또한 홀로 서 있기를 바람이
아니니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희망을 간직하였습니다.
그러나 허물로 누벼놓은 날들이 많았고 세상에 걸려 넘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저를 도구로 삼고 계시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주님,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 너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닮고 싶습니다. 당신을 살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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