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일간 국토순례기(54)
아흔아홉 구비돌아 삼숙이를 만나다
영월에서 강릉가는 시외버스는 평창군내 평창읍과 진부면, 횡계리를 거쳐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향한다. 버스가 평창군 경계에 들어서자 사방에 공사현장과 2018년 평창 동계올릭픽 홍보간판으로 올림픽 붐이 한창이다. 평창군은 면적은 전국에서 세번 째로 넓은 군이지만 인구는 4만 3천에 불과하다. 특히 군청소재지 평창읍 인구는 1만 명도 안된다. 그런데도 지금 올림픽을 앞두고 도처에 호텔과 아파트 등 고층건물들이 건설되고 있다. 대부분 외지 사람들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다. 물론 올림픽에 필요한 시설이겠지만 행사 뒤 이들 시설들이 어떻게 쓰일지 궁금하다.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평창에서는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피는 무렵'에 나오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나는 감수성 예민한 어린시절 장돌뱅이 허생원이 늙은 나귀에 짐싣고 조선달과 동이 셋이서 달빛을 받으며 하얀 메밀밭 사이를 걷는 장면을 묘사한 문장에 매료되었었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80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공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부디 낭만어린 이 고장이 올림픽 후에도 그대로 보존되기를 바란다.
대관령의 횡계리 정류장에서 이 지역 토박이 김호경 씨가 짚차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40년 이상 횡계에서 철물절을 운영하고 있다. 시골이던 횡계도 여기저기 파헤처져 있는 것을 보면 이 분도 올림픽 경기를 누리고 있을 것이다. 26년 만에 만난 김호경 씨는 여전히 동안이지만 세월은 어쩔 수 없었던지 머리는 새하얗다. 나는 이민 떠나기 직전 처와 함께 차를 몰고 전국을 일주하면서 지인들에게 작별인사를 드렸었다. 그때 김호경 씨가 횡계 특산물인 황태찌게와 오징어 불고기를 대접해 주었던 기억이 남는다. 이날은 나를 대관령 한우식당으로 안내했다. 식당에는 처음보는 몇 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호경 씨가 나를 어떻게 소개했는지는 모르지만 모두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모처럼 연한 한우갈비와 술을 마시며 담소하다보니 식당문을 닫을 시간이다. 그분들과 헤여져 김호경 씨 집으로 갔는데 여기서도 부인이 술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다. 아무래도 시골에 살면 정에 굶주리는 모양이다. 이분들은 아들 자랑에 열을 올렸다. 영국에 유학한 아들이 중국 공산당 고위간부 딸인 여자를 만나 결혼해 서울에서 사는데 아들과 며느리 모두 대기업에 취직되어 아들은 빈번하게 해외출장을 다녀 만나보기 힘들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몹씨 피곤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새벽 3시가 되어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8시나 되어 일어났는데 이들 부부는 벌써 일어나 조반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 5시간도 채 못잔 셈이다. 부인은 대관령 전통음식이라며 감자전에 황태해장국을 차려놓았다. 여행 중 옛 벗을 만나 과분하게 대접받은 것이다. 이들은 대관령 구고속도로 휴게소까지 나를 바래다 주고 작별했다. 이제부터 대관령 옛길 13킬로를 걷는 것이다. 나는 입구를 헷갈려 구고속도로를 따라 반정이라는 곳까지 내려갔다. 그곳에는 대관령옛길이라는 커다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텅빈 주차장 옆 작은 초소에서 제복차림의 중년남자가 문을 빼끔이 열고 내다보다 나온다. 자신을 산림감시원이라고 밝힌 남자는 내 복장이 색다르게 보였던지 어디서 오셨느냐고 묻고 미국에서 여행 중이라고 대답하자 잠깐 초소에 들어와 차 한잔하고 가라고 한다. 초소에 들어가니 방명록을 꺼내놓고 써달라고 한다. 내가 산림감시 초소에 무슨 방명록이냐고 하니 이곳에 오는 특별한 분들을 매일 기록하는 것이라고 한다. 미국에서 여행온 덕에 특별히 취급받는 것같아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錦繡江山 우리祖國'이라고 쓰고 서명해 주었다. 이들은 나에게 녹차를 한잔 건네며 자신들의 고충을 말하는데 내가 안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산림감시원은 등산객들의 취사도구와 흡연, 나물이나 약초 채취 단속과 산불감시를 맡는다고 한다. 일부 등산객들이 몰래 취사하고 담배 태우는 일 때문에 골칫거리라고 했다. 내가 그만 내려가겠다고 하자 이들은 옛길 입구까지 정중하게 안내해 준다. 졸지에 VIP가 된 기분이다.
입구에서 조금 내려가자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라는 사임당(師任堂) 신인선(申仁善 1504-1551)의 시판이 세워져 있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 외로이 한양으로 떠나는 이 마음 / 돌아보니 북평은 아득도 한데 / 흰구름만 저문산을 날아내리네" 신사임당은 오죽헌 친정과 파주와 한양 시집을 오가며 생활했다. 어린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손을 잡고 험한 산길을 오르면서 언제 또 친정 어머니를 볼 수 있을지 눈물짓던 사임당의 모습이 그려진다. 대관령은 평창군과 강릉 사이의 고개(嶺)로 높이 832미터에 길이 19킬로가 넘는다. 말이 고개이지 웬만한 산보다 높고 험준하다. 이곳은 옛부터 영동과 내륙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이곳을 통해 영동의 해산물이 내륙으로 운반되었고 내륙의 문물이 동해안으로 퍼져나갔다. 또한 영동 선비들이 괴나리봇짐에 짚신을 주렁주렁 매달고 이 길따라 한양에 과거보러 다녔다. 물론 북쪽에 태백산맥을 넘는 진부령, 한계령, 미시령이 있지만 편리함이나 통행량은 대관령에 훨씬 못미친다. 원래 한 두사람 겨우 지날 수 있었던 대관령은 중종 때 강원도 관찰사 고형산(高荊山 1453-1428)이 수레가 지나갈 정도로 넓혔다. 그러나 고형산은 이 일로 사후에 큰 욕을 당할 뻔했다. 그가 죽고 210년 후 병자호란 때 함경도 북쪽 청군들이 대관령을 이용해 서울로 거침없이 진격한 것이다. 이들은 평안도쪽에서 내려온 군사들과 합세해 남한산성을 포위한 것이다. 전쟁이 조선의 굴욕으로 끝난 뒤 인조가 노발대발해 대관령길을 닦은 고형산의 묘를 파헤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지금 횡성에 그의 묘가 건재한 것을 보면 그냥 전해지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옛날부터 고개가 험해 내려올 때 대굴대굴 구른다해서 '대굴령'이라 했고 이를 한문으로 대관령(大關嶺)이라 옮긴 것이라는데 우스개소리로 들린다. 대관령이 '아흔아홉구비'라 불리우는 사연도 재미있다. 율곡 이이가 어머니가 챙겨준 곶감 백개를 들고 이길을 오르면서 한구비 지날 때마다 한 개씩 빼먹었는데 전부 올라간 후 한 개 밖에 남지 않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전설도 다양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대관령 기슭마다 샘솟는 물은 계곡마다 용소와 폭포를 이루고 거센 물줄기로 변해 계곡을 흘러내린다. 한참 산길을 내려가며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옛날 고형산이 수레가 지날 정도로 길을 닦았다고 했는데 지금 걷는 대관령옛길은 수레는 커녕 자전거도 지나지 못할 산길이다. 그렇다면 병자호란 후 다시 대관령을 예전처럼 험하게 되돌려 놓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길을 말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안내소에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이다.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칠 수 밖에 없다. 한참 내려가니 옛주막집을 복원한 초가가 나타났다. 약수물이 입을 통해 흘러내리도록 한 개구리 조각이 재미있다. 방에는 괴나리봇짐을 풀어놓고 식사하는 과객들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이제부터는 틈틈이 강릉쪽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과 마주친다. 내려갈 수록 사람들의 통행이 늘어나면서 계곡물 수량도 많아진다. 갑자기 왼편에 우주선이 착륙해 있다. '우주선 화장실'이라는 대관령옛길의 명소이다. 외관은 우주선 그대로인데 안에는 최신식 설비를 갖춘 화장실이다. 공원 화장실 중에는 제일 깨끗할 것 같다. 우주선 앞에는 상가가 형성되어 있고 야생화마을로 꾸며진 민가지역이다. 음식점과 카페, 민박집 등이 줄지어 있다. 나는 마을을 피해 계곡길 산책로를 따라 계속 내려갔다.
드디어 산길이 끝나고 지금은 지방도로가 된 옛 영동 고속도로를 만난다. 길가에 대관령박물관이 있다. 사설박물관으로 출발해 지금은 강릉시에서 운영하는 대관령 박물관은 평생 혼자 살면서 골동품을 수집한 홍귀숙(洪貴淑 79세) 할머니의 귀하고(貴) 맑은(淑)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깃든 곳이다. 그녀는 평생 수집한 귀중한 문화재 골동품 2천여 점과 함께 박물관 건물, 대지를 2003년 3월 아무 조건없이 강릉시에 기증했다. 홍 할머니는 1993년 5월15일 이곳에 사설 대관령박물관을 열면서도 “이제 이 유물들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며 사회 환원 의사를 밝혔었다. 당시의 말대로 그녀는 정확히 10년동안 자신이 운영해 박물관 기틀을 잡은 뒤 미련없이 지역사회에 돌려준 것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처음 취미로 용돈을 모아 골동품을 한 점씩 사들였으나 나중에는 물려받은 가산을 몽땅 쏟아부어 서울에 골동품점을 차리고 본격적인 수집에 나섰다. 홍 할머니는 박물관 기증식에서 "유물 한 점을 모으면 방안에 앉아 차를 마시며 혼자서만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혼자 보는 것이 두려워졌습니다. 조상들의 유물을 쌓아놓고 보니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가 기증한 대관령박물관 소장품은 통일신라 때의 석조미륵불상을 비롯해 청자, 백자, 장신구, 서예작품 등 구석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다. 또한 그녀가 자신의 의지를 담아 설계한 박물관은 고인돌 형태를 본따 지은 건물로 6개 전시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주변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어 강원도 건축대상과 건설부 건축사협회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야외전시장에는 계곡물을 이용한 물레방아와 함께 장승을 비롯한 동자석, 문관석들 그리고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남근석 등이 풀밭에 제멋대로 놓여진 듯 치장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멋을 보여준다.
나는 박물관을 나와 강릉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시장기가 돌아 강릉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오랜 벗님 지윤식 형에게 전화해 강릉의 먹거리를 문의했다. 그는 중앙시장 삼숙이탕과 감자전을 추천했다. 나는 박물관에서 3킬로 쯤 더 걸어 성산면에 도착했다. 이 부근에도 '어명받은 소나무'와 '명주군왕릉' 그리고 송이마을이 안내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이곳들에 대한 안내를 안내서와 귀동냥으로 듣고 일부러 찾지는 않았다. '어명받은 소나무'는 수백년 된 수령의 금강송 숲으로 산책길이 좋다고 했다. 금강송은 재질이 단단해 갈라지지 않고 오래가기 때문에 대궐을 짓는데 쓰인다. 몇년 전 화재로 전소한 국보 제 1호 남대문도 금강송으로 복원했다는데 무슨 까닭인지 일년도 안돼 갈라지고 색깔이 벗겨져 경찰이 수사한 결과 대목장이 금강송을 빼돌리고 국민들이 기증한 나무들도 횡령하는 등 문화재 복원업체와 문화재 관련 공무원들이 비리로 얽혀있다는 것이 밝혀져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엣날에는 금강송을 자르려면 관리가 나무앞에서 "나라의 부름으로 큰 재목에 쓰일 것"이라는 임금의 교지를 낭독한 후 위령제를 지내고 베어냈다고 한다. 그래서 어명받은 소나무이다. 이렇게 귀한 금강송이기에 남대문 대목장도 탐이 났던 모양이다. 부근의 명주군왕릉은 강릉 김 씨 시조인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의 릉이다. 785년 신라 37대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군신들이 의논해 선덕왕의 친족으로 귀족들의 지지를 받던 김주원을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자 상대등 김경신이 정변을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원성왕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김주원은 명주(강릉)로 피신해 독자 세력을 형성했다. 원성왕은 회유책으로 김주원을 명주국왕으로 봉해 동해안 일대를 식읍으로 삼아 통치하게 했다. 강릉에서 소왕국을 형성한 김주원은 강릉 김씨 시조가 되었고 그의 자손은 신라말까지 지방 호족으로 행세했다.
성산면 면사무소 앞을 지나는데 시내버스가 정차한다. 나는 얼른 올라타 중앙시장으로 향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이날 중으로 오죽헌과 매월당 기념관, 허난설헌 생가를 둘러보려면 시장기부터 채워야했다. 강릉 중앙시장은 일제 전부터 영동의 해산물과 평창, 횡계 등지의 황태 그리고 내륙의 문물을 취급해 온 이 지역 최대의 전통 재래시장이다. 나는 시장 2층 식당가에 삼숙이탕 전문식당을 찾았다. 상호는 무슨횟집인데 회는 안 팔고 삼숙이탕과 알탕이 전문이다. 늦은 점심시간에도 방은 물론이고 테이블도 만원이다. 잠시 기다려 빈자리에 앉았다. 삼숙이는 표준말로 삼세기란 물고기로 강원도에서는 삼숙이, 전라도에서는 삼식이로 부른다. 우스개소리로 암컷은 삼숙이 숫컷은 삼식이라고 부르니 강릉의 삼숙이탕은 암컷으로 조리하는 모양이다. 나는 이날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돌아 삼숙이를 만나러 온 셈이다. 커다란 주둥이에 턱과 머리 등에 울퉁불퉁한 돌기와 가시가 뾰죽하고 살갗은 미끌미끌한 것이 워낙 못생겨 옛날에는 어부들이 그물에 걸리면 그대로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날 내가 처음 먹어 본 삼숙이탕은 예전 어느 광고 문안처럼 울퉁불퉁해도 맛은 좋다. 온갖 양념과 고추장을 풀어 명태 고니를 넣고 미나리와 쑥갓을 얹어 매운탕처럼 끓인 것이 얼큰한 맛으로 별미이다. 소주한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대낮에다 술벗도 없어 마음 속으로만 즐겼다. 별미를 추천해 준 벗님께 속으로 감사했다. 이제 먹고 기운을 차렸으니 경포호수쪽으로 가야할 차례다. 신사임당 생가 오죽헌이 이날 오후 첫번 째 목적지이다.
(2014.8.18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