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et the Bishop on the road
And much said he and I.
'Those breasts are flat and fallen now,
Those veins must soon be dry;
Live in a heavenly mansion,
Not in some foul sty.'
'Fair and foul are near of kin,
And fair needs foul,' I cried.
'My friends are gone, but that's a truth
Nor grave nor bed denied,
Learned in bodily lowliness
And in the heart's pride.
'A woman can be proud and stiff
When on love intent;
But Love has pitched his mansion in
The place of excrement;
For nothing can be sole or whole
That has not been rent.'
(W. B. Yeats)
미친 제인이 주교와 얘기하다
길에서 주교님을 만나
그분과 난 많이 얘기를 했지요.
“자네 가슴도 이제 쭈그러져 쳐졌네 그려.
자네 핏줄도 곧 말라버릴 텐데,
그리 지저분한 곳 말고
천국의 집에 와서 살게나."
“깨끗하고 더러운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죠.
그리고 깨끗한 것은 더러운 것을 필요로 한답니다.” 나는 외쳤어요.
“내 친구들 가버렸지만, 그건 진실이어요.
무덤도 침대도 부인하지 못한 진실이죠.
몸의 낮아짐과 가슴의 당당함을 통해 배운 진실이랍니다."
“사랑에 빠졌을 때
여자는 도도하고 콧대 높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사랑은 자기 집을 짓기를,
배설물이 있는 곳에 지었답니다.
파열을 겪어보지 못한 것은
어떤 것도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Jane역)
은밤님께서 메일로 보내주신 예이츠의 시 ‘미친 제인이 주교와 얘기하다’의 3연과 해설은 잘 받았습니다.
목요 정팅때 논의하면 많은 얘깃거리가 나올 수 있는 시라고 생각했는데, 우리집 컴퓨터가 스파이 웨어인지 하는 이상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어제는 영시사까페의 창이 종일 뜨지 않더군요.
다음의 검색 창은 뜨던데 까페 창은 떴다가 자꾸 없어지고, 싸이월드하고 중앙일보도 안 뜨고, 조선일보랑 동아일보는 되고 아무튼 너무 변덕을 부리더군요. 안되면 다 안 되어야지 입맛대로 되었다 안 되었다 하니까 컴퓨터에도 무슨 생각이랄까 심술이랄까 하는 것이 있는 듯해 섬뜩하더군요.
예이츠는 잔잔하고 낭만적인 시들로 나에게 다가왔지만, ‘Leda and the Swan’(레다와 백조)나 이 시처럼 어쩌면 조금 야할 수 있는 내용을 생각해볼 만한 시로 만드는 시인이네요.
‘미친 제인...’이나 Millay의 시 ‘Spring'을 읽을 때, 나는 가끔 어릴 때 동네에서 보았던 길거리의 미친 여자를 생각해봅니다. (1년에 한두 번쯤 어디서 온 여자인지 머리는 풀어 헤치고 눈은 허공을 응시하며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고 맨발로 비척비척 걸었었죠. 애들은 무서워하면서도 이상한 듯 따라가기도 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지나가며 혀를 차고 미친 여자라고들 말했죠. 때는 어쩐지 봄이었던 듯하고, 자꾸만 때에 찌든 꾀죄죄한 치맛자락을 올리려했었죠.)
그러나 이 시에 나오는 제인은 제목과는 달리 완전히 정신이 돈 여자는 아닌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 술집 주모에 해당되는 정도의 계층일 것 같고, 맹한 구석이 있으면서 인정이 많아 이 남자 저 남자의 이야기 상대나 몸 상대를 해주었을 것 같고, 그래서 주교님을 제외한 그 근방 남자들은 한두 번씩은 따로 그녀를 만나 위로를 받았을 것 같고…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물론 천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여자였겠지요. 게다가 이젠 나이까지 들었으니 전에 찾아주던 애인겸손님들도 발길이 뜸할 테니 외로움과 곤궁에 찌든 처량하고 넋 빠진 모습이었을 겁니다.
이 책 저 책 번역을 보았는데, 이미지는 충분히 느끼겠으나 가다듬어지지 않은 원색적인 언어로 표현된 경우가 많아 그대로 옮기기엔 어색하더군요. 제 나름으로 시를 조금 점잖게 번역하다보니 다른 번역에서 받았던 강렬한 느낌은 좀 수그러드는 듯…
3연을 읽으면서, 사랑이란 부끄러워도 어떤 사람에게 자기의 약한 구석까지 모든 것을 열어 보이고 전폭적으로 맡기는 일종의 ‘무장해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인간은 영혼이라든가 정신의 위대함이 연상되는 머리․가슴 같은 형이상학적 신체기관 만이 아니고, 자기의지의 영역 밖에서 동물처럼 먹고 자고 배설하는 형이하학적 기관이 있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갓난아기들도 어머니의 사랑에 기저귀를 의지하고, 가족 중 노인이나 병자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데도 돌보는 자와 자신을 맡기는 자간에 신뢰와 애틋한 사랑의 소통이 있어야 가능한 것처럼 배설기관은 다른 한편 생각하면 정말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기 헌신을 담을 수 있는 사랑의 장(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시의 주교님은 형이상학이 사랑의 본질이라 하고, 미친 제인은 사랑이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덧글-
예전에 어느 잡지에서인가 기자가 김수환 추기경님께 신부가 되는 결심을 하기까지 가장 어렵고 힘든 것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하자, ‘여자 생각’이 가장 어려웠노라고 하셨더군요. 저는 자꾸 웃음이 나왔어요. 코가 빠끔하고 그 선하게 생긴 분 얼굴에서는 도무지 육(肉)을 떠올릴 수 없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