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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0. 묵상글 ( 부활 제3주간 토요일. - 어찌 당신을 떠나겠습니까?. 등 )
*** 05:56. 김찬선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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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0.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찌 당신을 떠나겠습니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당신을 알 수 없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떠나기에
알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당신을 떠나겠습니까?
당신을 믿을 수 없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떠나기에
믿을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당신을 떠나겠습니까?
당신을 닮을 수 없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떠나기에
닮을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당신을 떠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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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0. 부활 제3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4.20 05:46
- 영의 선택
우리는 한 주간 내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주님의 몸과 피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내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넘어 듣기에 거북한 말씀을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당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고 그래서 주신다고.
이에 사람들은 급기야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사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말이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과 듣기에 거북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말은, 내가 이해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기에
그래도 이해하려고 애쓰며 주님 곁에 머물러 있으려 했지만
듣기에 너무 거북한 말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다며 마침내 떠나버립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겠냐고 하시며
당신 말씀은 거북한 말이 아니라 영적인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주님의 말씀이 거북한 것은 주님의 말씀이 영적인 말씀이기 때문이고,
영적인 말씀이 거북한 한 이유는 우리가 육적이기 때문이라는 말이며
영적으로 한 말을 육적으로 이해하면 거북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출세하려는 이에게 하느님 나라를 얘기하면 거북할 수밖에 없고,
권좌에 오르려는 이에게 섬기는 사람이 되라면 거북할 수밖에 없음과 같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거나 못 알아듣거나 하는 것,
주님의 말씀이 달콤하거나 거북한 것은 결국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그 사람 안에 주님의 영이 계시냐 육의 영이 있느냐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영적인 말이 거북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몸과 관련한 권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영 안에서가 아니면 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아드님도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에 아버지를 보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영과 신성으로 보지 않고, 인성으로만 보아 그분이 하느님의 참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보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던 모든 사람은 단죄받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축성되는 성사를 보면서, 영과 신성에 따라 이것이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모든 사람도 단죄받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이것을 증명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서 머무르시는 주님의 영이 주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머무시게 하는 것인데
주님의 영이 자기 안에 머무시게 하는 쪽으로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늘 복음의 사람들처럼 그것을 포기하고 떠나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 사람입니까?
주님은 어느 쪽 사람이냐고 오늘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이에 베드로 사도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선택입니다.
내 살던 대로 살겠다며 육의 영을 선택할 수도 있고,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추구하게 하는 성령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며칠 전에 말씀드린 대로 내 안에 어떤 영이 있는지 먼저 식별하고
다음으로는 성령을 선택하고 성령을 모셔 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처럼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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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0.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 밥을 먹다 보면 입에서 ‘우두둑’ 소리가 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돌 씹히는 소리입니다. 지금이야 돌 씹을 일이 전혀 없지만, 예전에는 돌이 꽤 많아서 쌀을 일어서 밥을 안쳐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밥에 쌀보다 돌이 많지는 않습니다. 만약 돌이 더 많다면 그것은 쌀밥이 아닌 돌밥이겠지요. 그래서 돌이 있어도 밥을 먹습니다. 왜냐하면 돌이 있다고 먹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배를 채우기 위해, 돌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도 밥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밥을 먹을 때 오히려 큰 돌이면 눈에 잘 보이기 때문에 가려내기 쉽습니다. 문제는 모래알처럼 작은 돌입니다. 잘 보이지도 않아서 쌀과 구분하기 힘듭니다.
우리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큰 고통과 시련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남들이 보기에 별것 아닌 어려움이 더 힘듭니다. 큰 고통과 시련에는 다른 이의 도움도 받습니다. 그러나 작아 보이는 고통과 시련에 대해서는 “그런 걸 가지고 뭐가 힘들다고~~”하면서 핀잔만 듣기 때문입니다.
어떤 삶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인간의 위로가 힘들다고 해도 주님께서는 더 큰 위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서의 위로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랑 그 자체이신 분께서 내게 그런 아픔을 주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커다란 착각입니다. 세상 안에 고통과 시련을 겪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요즘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벌일까요?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계속 겪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이때 주님의 손을 잡고 함께 하는 사람은 고통을 오히려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주님을 외면하는 사람은 고통을 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고통과 시련이 있다고 해서 주님을 떠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역시 은총으로 받아들이면서 주님 안에서 위로받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음에 길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 옛날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 역시 어리석음에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의 생각과 다르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면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떠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대답이 되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주님을 보고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그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면서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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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는 어제가 만들어 낸 길들을 밟고, 오늘이라는 길 위를 걷는다(김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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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0.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영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1-63)
오늘 <복음>은 그동안 우리가 들어오던 <요한복음> 6장의 끝부분입니다.
<앞 장면>에서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임을 선포하시자, ‘유대인들’은 서로 수군거리고(41절) 말다툼(52절)까지 하였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도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라고 투덜거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1-63)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이 생명의 빵’일 뿐만 아니라, 이제 당신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씀” 안에 진정한 생명이 있고, “영”인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이신 분’은 말씀을 발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발설한 말씀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이를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씀은 읽는 이 안에서 자란다.”고 표현합니다.
이토록, 성령께서는 <에제키엘서>(37,1-14)에서 보여주듯이, 죽은 문자인 마른 뼈들에 생기를 돋게 하고 뼈와 살이 붙게 하고, 문자를 성체가 되게 하여 우리가 받아먹을 수 있도록 하여, ‘말씀의 영성체’를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은 “생명을 주는 영”(로마 8,2)이라는 합니다.
이처럼, 참으로 신비롭고 놀랍게도, 참 생명이 영으로 말씀이 되시어 육화하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령으로 도유된 독서’(lectio untionis)인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가 생겨나게 됩니다. 성령께서 “말씀의 동반자이며 해석자”가 되시어 성경을 읽는 이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계시헌장>(12항)과 <가톨릭교회 교리서>(111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건네주는 것이므로,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 속내를 꿰뚫어 읽어야 한다. 그러기에, 성령을 통해서 쓰려진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가고, 예수님께서는 남은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하시며, 자유로운 응답을 요청하십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계시한 바에 따라,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9)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는 ‘믿어서 친교를 맺는 삶’이 먼저임을 보여줍니다. 결국, 참 제자가 되는 길은 정보나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생명이신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먹음으로 실행하게 하소서.
저희가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 말씀과 함께 하고, 말씀 속에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주님!
제가 떠나야 할 것은 당신이 아니라 제 자신이오니,
저 자신을 떠나게 하소서. 떠나온 자신마저 떠나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더라도 당신 장막에 머물고,
흔들림 속에서도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 희망에 매달려 있고,
흔들릴수록 더욱더 뿌리 깊게 내리는 믿음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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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0. 부활 제3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혀 새로운 사실을 얘기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되지도 않는 소리라고 외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기대하고 귀를 기울이는데 전혀 다른 소리를 하면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대놓고 뭐라 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불만을 지니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자기가 기대하고 바라는 쪽으로 얘기하면 신이 나고 기분 좋아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못마땅해 담을 쌓게 됩니다. 그러나 큰 사람은 자기의 기대를 뛰어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줄도 알고 거기서 깨우침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듣기에 거북해하였습니다. 모르면 스승의 가르침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인데 그렇지 못하고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는 사람에게 무엇인들 비위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어른 신부님들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본당의 책임을 맡으면 적극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3분의 1이라도 되면 성공이라네. 3분의 1은 관망하는 사람이고 또 3분의 1은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그러니 누구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용기를 가지고 추진하게.”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간적 나약함을 지니고 사는 신부야 오죽 하겠습니까?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 힘을 낭비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식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7). 이 말씀은 결국 ‘떠날 테면 떠나라. 잡지 않겠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남아있던 제자 중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6,69).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너도 떠나겠느냐?’ 아닙니다. 당신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만,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따르다 보면 당신을 알게 되리라 확신하며 그저 따르겠습니다. 훗날 당신을 등질지 모르지만 지금 순간은 당신이 저의 전부입니다. 당신만을 따르겠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을 따르고 당신을 느끼기까지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당신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믿음이 부족하니 도와주세요.
기적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당신의 살과 피를 내주시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칩니다. 당신의 몸을 생명으로 주시지만 합당하게 모시기에도 벅찹니다. 그러나 지금 포기하면 당신을 영원히 차지할 수 없기에 당신께 매달립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6,68). 성체를 모실 때마다 당신과 일치를 이루게 해 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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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0.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은 1980년에 ‘코스모스’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코스모스를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코스모스’에서 해설을 맡았습니다. 칼 세이건은 우주의 나이를 1년으로 줄여서 우리들의 시대를 생각하였습니다. 우주의 나이는 138억년이기 때문에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주의 나이가 1년이라고 할 때, 우리가 속한 갤럭시 은하는 5월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태양은 8월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9월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공룡의 시대는 12월 25일쯤이라고 합니다. 현생 인류가 태어난 것은 12월 31일 11시 52분이라고 합니다. 인류가 쌓아온 문화와 문명은 12월 31일 11시 59분 마지막 1분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11시 59분 55초에 석가모니 탄생, 56초에 예수님, 그리고 57초에 마호메트가 탄생했다고 합니다. 인류의 영적인 깨달음을 이끌었던 분들이 모두 쌍둥이처럼 1초 간격으로 탄생했다고 합니다.
칼 세이건은 아등바등하고 쉼 없이 다투기만 하는 인류에게 서로 싸우지 말고 공존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우주력’을 통해 인간이 하찮기 그지없는 존재임을 자각시켜 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태양계의 끝을 향해 여행을 떠난 보이저 1호는 1990년 태양계를 떠나면서 64억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구의 사진 찍어서 보내왔습니다. 그 사진이 유명한 ‘창백한 푸는 점’입니다. 땅 위를 기어다니는 애벌레와 하늘을 나는 나비가 보는 세상은 차원이 다를 것입니다. 우주라는 차원에서 지구를 보면 우리는 정말 한 없이, 작고 초라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점과 같은 지구에서 우리가 서로 싸우고, 죽이고, 죽는다는 것은 정말 의미 없는 일입니다. 이 광대한 우주에서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마지막 한 점을 파괴하고, 병들게 하는 인간의 행위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위대한 것은 장대하고, 광대한 우주의 역사를 인식하는 유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두 별에서 왔다고 합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원소는 우주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시간이라면 138억 년이라는 우주의 역사로 충분합니다. 공간이라면 장대하고 광대한 우주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차원의 문제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성공, 명예, 권력을 찾으려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떠났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성공, 명예, 권력을 빼앗기리라 생각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 그리고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내어놓는 ‘비움’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을 섬기는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아낌없이 내어 주는 ‘나눔’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온전히 내어놓은 비움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섬기는 겸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으로 오른 것은 아낌없이 내어 주는 나눔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가까이하기에는 또 너무나 먼 차원의 문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욕망과 탐욕을 비울 수 있다면, 우리가 살아있는 것을 섬길 수 있다면, 우리가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창백한 푸른 점인 지구는 장대하고, 광대한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138억 년을 뛰어넘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중심은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주의 중심은 의미와 생각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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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0. 부활 제3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으로 마치신 후 많은 제자는 주님을 떠났습니다.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마지막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영과 육에 대해 말씀하시며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떠난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영이 아닌 육을 보고 따라온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육이란 이런 것입니다. 치유의 은총을 보고 무병장수를 꿈꾸며 다가온 이들, 혹은 빵의 기적을 보고 먹고 살 걱정을 덜기 위해 찾아온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아무리 믿음을 고백해도 이것은 육에서 비롯된 믿음이며 이런 믿음은 모래성같이 금방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영과 생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영으로서 믿는 이들은 그 뿌리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다시 물으십니다. 그랬더니 시몬 베드로가 답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대답은 영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알려주셨으며 동시에 그의 입을 통해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나의 안위를 위한 육에서 출발한 것일까요. 아니면 영으로 말미암은 것일까요?
우리의 발걸음이 영이며 생명이신 주님께로 나아가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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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길을 찾아낸다.
어느 책에서 읽었을까요.
사랑은 길을 찾아낸다.
-영국 속담-
어둠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은
한 줄기 빛이 되어줍니다.
아픔에 슬퍼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따스함 가득한 위로가 되어줍니다.
절망에 좌절하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은
희망의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사랑은 길을 찾아냅니다.
사랑은 길을 안내합니다.
사랑은 길을 걷게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여러 방식의 사랑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이 꼭 이타적인 사랑에 바탕을 두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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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0.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영의 사람으로 삽시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시편116,12-13)
영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육의 사람도 있습니다. 영과 육은 분리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어느쪽에 강하느냐에 따라 영적인 사람, 육적인 사람꼴이 형성됩니다.
어제 병원에 다녀오면서 지하철 안에서 감동적인 장면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구(巨軀)의 노년은 아닌 중후반의 몸이 불편한 남성이 자리에 앉다가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버둥대고 있을 때 평범한 형제자매 여러분들이 놀라며 함께 힘겹게 일으켜 세웠습니다. 너무 비대(肥大)하여 혼자라면 도저히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때 바로 영적인 측면의 순수한 마음이 발휘된 것이라 봅니다.
어제 타계한 자유인 홍세화는 “누구든 선한 길로 돌아올 것”이란 믿음을 지녔는데 누구나 선한 마음, 영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생각됩니다. 옛 어른의 다음 말씀도 영의 사람이 되라는 충고로 들립니다.
“내가 돈을 지휘하고 있는가, 돈이 나를 지휘하고 있는가? 돈을 붙잡으려하면 할수록 가장 소중한 것을 놓아야 한다.”-다산
“부(富)가 구해서 얻을 만한 것이라면 비록 채찍을 잡는 천한 일이라도 나는 하겠다. 그러나 추구해서 안되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논어
노령에도 불구하고 영의 사람인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비오10세 교황의 평전 서문을 썻고 그중 일부 내용입니다. “성 비오 10세는 고통중인 사람들에게 가까이 있었던 교황이었다. 그는 부드러웠으나 강했고, 겸손했으나 명석했다.” 성 비오 10세 교황 역시 참 사람, 영의 사람이었음을 봅니다.
교황들은 전통적으로 수요일 일반 알현 시간에는 강의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몇주에 걸쳐 ‘현명, 인내, 정의, 용기’에 초점을 두고 강의하신후 지난 수요일 마지막 주제는 ‘절제’를 택하여 주옥같은 강의를 하셨습니다. 이 다섯 덕목들은 한결같이 영의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덕목들입니다.
“절제는 우리의 기쁨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행복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절제에 대한 강의 내용을 요약한 말마디입니다. 황창연 신부가 소개하는 영의 사람, 문희종 주교의 사제 당시 모습도 흐뭇한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가나의 잔칫집애서 술떨어진 사실을 걱정하는 성모님처럼 이것저것 꼼꼼하게 챙기고, 본당에 부족한 부분을 남모르게 채우는 맘씨 고운 분들이 주로 성모회장직을 맡는다. 문신부는 로마로 유학나오는 신학생이 있으면, 기숙사 문제부터 입학허가와 언어연수 일정을 하나하나 꼼꼼히 챙겨주고 심지어는 유학나온 신학생들에게 용돈까지 쪼개어 나눠준다. 로마의 성모회장이라는 별명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신학교 교수로 있을 때도 어려운 신학생들 학비와 책값을 도와달라고 내게 전화해서 신학생들 장학금을 챙겨주곤 했던 친구다. 문신부는 나한테 돈맡겨 놓은 것도 아닌데 전혀 미안해하지 않고 내돈을 뺏어간다. 그런데 더 신기한 건 돈을 빼앗겨도 한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2015년9월10일 서품된 문희종 요한 세례자 주교의 사목표어는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사랑, 겸손, 순종’이다.”
믿는 이들 모두가 유일무이한 하느님의 일꾼들입니다. 누구나 문주교같은 성모회장처럼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되며, 자기 고유 색깔을 지닌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살을 먹고 당신 피를 마셔야 영원한 삶을 살리라는 성체성사의 진리를 말했을 때 많은 제자들의 어려워 이해할 수 없어 투덜거리자 예수님은 결정적 답이 되는 말씀을 주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예수님 당신처럼 생명을 주는 영의 사람이 되라하십니다. 육의 사람이 되어 성체성사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생명을 주는 영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될 때 성체성사의 신비를 제대로 깨달아 알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은 떠나고 열두 제자만 남자 예수님은 묻습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동시에 우리를 향한 물음이기도합니다.
“너희도 떠나겠느냐?”
주님을 선택할지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 또는 육의 사람, 어느쪽을 선택할지 묻습니다. 저라면 지체없이 “불암산의 떠나면 떠났지 전 당신 곁을 안떠납니다. 당신 곁에 평생 머무르는 정주를 선택합니다.” 흔쾌히 대답하겠습니다. 역시 제자들의 마음을 대변한 수제자다운 베드로의 정답이자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요셉수도원 수도자들의 고백은 물론 참으로 주님을 믿는 모두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곁에서 항구한 사랑과 인내의 믿음으로 정주할 때,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을 닮아 생명을 주는 영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방금 복음에서 명쾌한 답변으로 주님을 크게 기쁘게 하신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제1독서에서 애네아스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모습에서, 도르카스를 다시 살리는 모습이 그대로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생명을 주는 영의 사람, 베드로가 이 둘을 치유하고 살리는 모습이 참 통쾌합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타비타, 일어나시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영의 사도, 베드로를 통해 치유하시고 살리신 것입니다. 때로 나태해지고 영적으로 무기력한 느낌이 들 때 벌떡 일어나 하늘 향해 두 팔 활짝 펴고 만세육창을 하시기 바랍니다. 뇌졸증 예방은 물론 건강에도 좋은 운동입니다. 영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느낌일 것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 은총이, 복음에서 애네아스를 치유하시고 도르카스를 살려주셨듯이 우리를 치유하시고 살려주시고 주님처럼 생명을 주는 영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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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0. 부활 제3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
영만이 생명을 줄 수 있다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은 앞뒤 문맥을 고려해 뜻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마치 실제로 당신 살을 먹으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듣기 거북하고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확립하는 것은 성령이심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신지라 먼저 “영은 생명을 준다”고 하신 다음에야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덧붙이셨습니다. 물론, 생명을 주는 일에 쓸모가 없다고 하신 것이지요. 그러고는 사람들이 ‘영’을 어떻게 이해하기 바라시는지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이렇게 당신의 가르침을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 ‘말씀’은 영이고 생명이니까요 – 확인시키신 다음, 그것은 당신의 살이라고도 하십니다. ‘말씀’이 육이 되기도 하였으니까요(요한 1,14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얻으려면 그분을 소망해야 합니다. 귀로 그분을 집어삼키고, 마음으로 그분을 되새김질하며, 믿음으로 그분을 소화해야 합니다.
-테르툴리아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사랑받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한 사랑에서 다른 사랑으로 옮겨간다. 우리의 인식이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느님 안에는 자연적인 사랑과 은혜로운 사랑과 신적인 사랑이 한데 뒤얽힌 단 하나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하느님 안에서는 더 작은 사랑도 더 큰 사랑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최고의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라는 하나의 계명만이 있을 뿐이다.(156)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과 '믿음의 다섯 기둥'
이슬람의 ‘믿음의 다섯 기둥'
모든 무슬림은 적어도 하루 다섯 번 정해진 때에 기도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아침 기도, 정오 기도, 오후 기도, 일몰 기도, 밤 기도가 그것이며, 홀로 기도할 수 있지만 집단적으로 모여서 함께 기도하기를 뎌욱 권장한다. 특히 정오 기도는 도시마다 마을마다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모스크에 모여 기도한다. 모스크가 없을 때는 산이나 들이나 사막에서나 어느 장소에서 나 메카를 향하여 기도한다.
이슬람의 기도 행위는 마음의 자세와 신체의 자세를 하나로 통일시켜 의미심장한 경건심을 유발하고 본인 스스로 마음속에 영적 정화를 경험하게 한다. 기도 행위로 들어가기 전에 물로 간단하게나마 손과 얼굴을 씻는데, 이 정결 의식은 신 앞에 나아가는 자의 경건한 마음 자세의 표지이다. 사막이나 들판에서 물을 구할 수 없을 때는 흙이나 모래 한 줌을 가지고서라도 정결 의식을 행한다.
이슬람의 기도 행위를 구성하는 세 단계의 행동, 곧 ‘바로 서기', ‘허리 굽히기', ‘엎드려 절하기'는 서로 연결되면서도 각각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메카를 향하여 경건하게 바로 서는 행위는 알라만을 생각하면서 세상의 모든 잡생각을 털어버리고 신의 자비를 염원한다는 신앙의 표현이다. 허리 굽히기는 알라의 절대 권능과 존엄성 앞에서 피조물이 복종하고 순명하겠다는 몸짓 기도이다. 엎드려 절하는 몸짓 속에서 이슬람 유일신 신앙의 경건은 절정에 도달한다. 알라의 전지전능성과 절대 거룩성 앞에서 인간은 자신이 한갓 먼지와 한줌 흙에 불과하다는 자의식을 갖는다. 단순하면서도 절도 있는 이 세 가지 동작을 통하여 이슬람 신앙은 여타의 모든 예배 행위의 정수를 압축시켜 표출하는 것이다.(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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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0. 부활 제3주간 토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내용으로 이해한 사람들은 지독한 거부감과 불편함을 드러냅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결국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느끼는 혼란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덧붙여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곧 당신의 말씀은 살과 피를 실제로 먹으라는 강요가 아니고, ‘영적’이고 ‘진정한 생명’에 대한 내용이었음을 풀어서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은 길게 이어졌던 ‘생명의 빵’ 담화의 결론이며, 요한 복음서 6장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복음에서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백한 베드로가 어떻게 성숙하여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약속대로 예수님 곁에 남아 있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계속하며 그분을 닮아 가는 여정을 걷습니다.
남아 있고 머물러 있었기에 점차 스승님을 닮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핵심은 ‘먹음’이 아니라 ‘닮아 감’입니다.
살을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예수님과 일치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이 성체성사의 의미입니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아 불편하여도 그대로 머무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복음적 선택이고 최선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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