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24]어린이는 언어의 천재?
우리 나이 아홉 살 손자를 2주째 돌보고 있다. 지난 1년간 중동 바레인에 제 부모를 따라가 살다가 지난 7월 3일 돌아왔다. 신통방통(신기방기)하게도 영어로 말하는 게 우리말보다 더 편하고 쉽다는데 기가 질렸다. 그렇게 영어가 배우기 쉬운 말이던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손자에게 영어로 떠듬떠듬 말했다. “이 할애비가 영어만 10년을 공부했는데, 네 말을 못알아들으니 창피하고 부끄럽다"고 고백했더니, 이 녀석이 싱긋이 웃는다. 발음이 엉망이고 틀렸다며 엄지를 좌우로 흔드는 데야 웃을 수조차 없다. 그것 참!
아무튼, 귀국 다음날부터 제 부모가 출근하는 통에 평일 오전오후 케어할 사람이 없으니 달리 도리가 없다(제 할미도 논술교사로 일한다). 2학년 2학기에 전학할 때까지는 내 담당. 그러니 뭐가 중허겠는가? 시골 농사는 뒷전이다. ‘사람(자식) 농사’가 최고인 것을. 국어와 수학문제를 풀게 하라는 것도 나에게 부여된 과제. 이미 아이패드로 게임을 즐길 줄 알았으니, 학교도 아니고 숙제를 어떻게든 안하려 몽니를 부린다. 할래비가 저를 세게 혼내지 않고, 혼낼 수도 없다는 것을 아는 영리한 녀석. 2학년 1학기 국어공부를 옆에서 지켜보며 오랜만에 동시 한 편을 감상하는 재미도 있었다.
<바람이 마루 위에 놓인/신문지 한 장을 끌고/슬그머니 골목으로 나간다./홀홀홀/공중에 집어 던져서는/데굴데굴 길거리에 굴려서는/구깃구깃 굴려서는//골목, 구석진 응달로 찾아가/달달달 떠는/어린 민들레꽃에게/쓱, 목도리를 해준다//그러고는/힘내렴!/딱 그 말만 하고/골목을 걸어나간다, 뚜벅뚜벅>
객관식 8문제는 금세 푸는데, 주관식 하나(바람, 신문지, 민들레꽃 중에 하나를 골라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쓰세요)는 읽자마자 ‘x'를 표시하기에 “왜 답을 쓰지 않냐?”니까 “아무 생각이 없다”며 귀찮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런 이런? ’대략 난감‘의 상황이다. 마음이 온통 게임에 가있는 이 노릇을 어이 하랴
이 녀석 짐을 정리하다, 정말 놀라운 문건을 하나 발견했다. 현지 국제학교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 공부를 하다 홈워크(숙제)를 내준 모양인데, A4용지 두 장에 영어로 제법 길게 썼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내용이 기승전결이 잘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필체도 아주 좋았다. 시제tense時制도 거의 정확하다. 와우-. '어린이는 언어의 천재'라는 말이 실감났다. 실제로 이 녀석이 짓고 썼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혹시 영어에 특화된 천재genius일까? 흐흐. 한글도 제대로 못쓰는 녀석이 어떻게 이 많은 영어단어를 알고 구사하게 된 것일까? terrifing, kidnap, defeat, courageous, agonising 등 몇 개의 단어는 물어봐 뜻도 알았다. 몇 개의 단순 오탈자를 지적하자, 할래비를 달리 보는 듯했다. f와 k를 필기체로 쓰는데 우리와 크게 달라 알아보지 못했다. 용감한 무사 마크(Mark)가 아내(Athena)를 King Minos가 외딴 섬으로 납치, 쇠사슬로 감금해 놓은 것을 알고 제우스의 신탁을 받아 괴물에게 화살을 쏘아 구해내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들의 뇌腦는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낯선 외국어를 불과 1년도 안돼 고스란히 스폰지처럼 받아들여 말하고 쓰고 듣기를 할 수 있다는 게 보고 있어도 신기했다. 손자 자랑을 이렇게 하는 것이 팔불출인가? 팔불출이래도 할 수 없다. 아아-, 그래서 젊은 학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영어 조기교육을 하고 유학을 보내지 못해 안달하는 것일까? 요 녀석, 뭔가 고약한 상황이 생기면 우리말보다 영어가 튀어나오는 것도 ‘웃긴다’. 문제는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 그런데, 귀국하여 계속 공부를 하지 않고 1년만 지나면 또 거개가 다 잊어버린다고 한다. 아무튼, 영어가 국제공용어인 것을 틀림없는 사실. 우리야 노쇠한 뇌로 아이들처럼 자유자재할 수 없어도 걱정이 없어졌다. 이제 구글 등에서 자동번역기가 아닌 자동통역기 앱이 나왔다니, 따로 골머리 썩이며 공부할 필요조차 없는 세상이 온 듯, 해외여행이 두려울 일도 아니다.
어쨌거나 글로벌세상,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AI 등 컴퓨터와의 싸움이 아이들 앞에 놓여 있다. 창의력이 번쩍번쩍 빛나게 해야 할 터인데, 아이는 게임 좀 마음대로 하게 해달라며 할래비를 원망하고 있다. 성질도 낼 수 없고, 답답한 평일의 일상이지만, 어제는 이 희한한 영어작문 답안지를 발견하고 너무 기특해 껴안아줬다.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니, 그림을 그리는 painter(화가)도 되고 싶고, 프로 게이머와 게임을 개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게이머? 휴우, 나는 모를 일이다. 너희 세상은 왕할아버지 세상과 할래비 세상과는 아주 판이하게 다르게 펼쳐질 터이니. 우리 아이들의 세상에 그저 전쟁만 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건강하게만 자라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