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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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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 이재무
아랫마을 성당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 종소리들
그중 하나 대열에서 빠져나와
몰래 골목, 골목을 돌아
하늘 가장 가까운 마을 찾아나선다
맨발로 가파른 빙판길 오르다,
오르다가 미끄러지고
오르다가 미끄러져
무릎 까져 피흘리는 하나님
아랫마을 성당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 종소리들
저 보이지 않는 견고한 평화의 울타리
종소리 / 박남수
나는 떠난다. 청동(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雷聲)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 음향이 된다.
종소리 / 서정춘
한 번을 울어서
여러 산 너머
가루 가루 울어서
여러 산 너머
돌아오지 말아라
돌아오지 말아라
어디 거기 앉아서
둥근 괄호 열고
둥근 괄호 닫고
항아리 되어 있어라
종소리들아
종소리 / 정호승
사람은 죽을 때에
한번은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죽는다는데
새들도 죽을 때 푸른 하늘을 향해
한번은 맑고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죽는다는데
나 죽을 때에
한번도 아름다운 종서리를 내지 못하고
눈길에 핏장울만 남기게 될까봐 두려워라
풀잎도 죽을 때에
아름다운 종소리를 남기고 죽는다는데
종소리 / 정호승
종소리에도 손이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처럼 긴 손가락이 있다
때로는 거칠고 따스한 어머니의 손이 있다
어디선가 먼 데서 종소리가 울리면
나는 가끔 종소리의 손을 잡고 울 때가 있다
종소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별을 바라볼 때가 있다
그 별이 사라진 곳으로
어머니를 따라 멀리 사라질 때가 있다
종소리 안에 네가 서 있다 / 장옥관
조약돌 주워 호수에
퐁!
던졌더니
동그랗게 무늬가 생긴다
동그라미 안에 동그라미
끝도 없이 생긴다
종소리 같다
물무늬처럼 번지는 종소리
종소리처럼 번지는 내 마음
종소리 안에 온종일
네가 서 있다
종소리 / 신달자
외로움이 내게 다가와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은은하게 조금은 무뚝뚝하게
외롭다고 한마디 하네
외로움이 죽음에게
내가
프랑스 루르드 성당에서 사 온
종을 살짝 쳐 주었는데
그게 그렇게 깊은 물소리가 나는 거야
다시 오면 이스라엘 성당 종을
그 다음엔 연둣빛 새잎 하나를 손에 쥐여 주었는데
그 담엔 내게 오지 않았어
그 소리를 다 들으려면
세 번의 생은 다 가야 할 테니……
범종소리 / 이시영
머리를 들고 풀숲을 가르는 배암의 착한 배처럼
허공을 향해 차고 오르는 새들의 무서운 첫 발자국처럼
먼 산굽이를 돌아나가는 꽃상여의 은은한 요령소리처럼
내 놀던 모래사장에 쓸리는 외로운 조가비의 낮은 탄식처럼
종소리 / 오장환
울렸으면...종소리
그것이 기쁨을 전하는
아니, 항거하는 몸짓일지라도
힘차게 울렸으면...종소리
크나큰 종면(鐘面)은 바다와 같은데
상기도 여기에 새겨진 하늘 시악시
온몸이 업화(業火)에 싸여 몸부림치는 거 같은데
울리는가, 울리는가
태고서부터 나려오는 여운. ....
울렸으면... 종소리
젊으디 젊은 꿈들이
이처럼 외치는 마음이
울면은 종소리 같으련마는.....
스스로 죄 있는 사람과 같이
무엇에 내닫지 않는가,
시인이여! 꿈꾸는 사람이여 너의 젊음은,
너의 바램은 어디로 갔느냐
종소리 / 박용래
봄바람 속에 종이 울리나니
꽃잎이 지나니
봄바람 속에 뫼에 올라 뫼를 나려
봄바람 속에 소나무밭으로 갔나니
소나무밭에서 기다렸나니
소나무밭엔 아무도 없었나니
봄바람 속에 종이 울리나니
옛날도 지나니
종소리 / 김영석
흙은 소리가 없어 울지 못한다
제 자식들의 덧없는 주검을
가슴에 묻어두고 삭일 뿐
소리를 낼 수가 없다
그러나 흙은
제 몸을 떼어 빚은 사람을 시켜
살았는 동안
하늘에 종을 걸고 치게 한다
소리없는 가슴들
흙덩이가 온몸으로 부서지는
소리를 낸다.
종소리 / 문태준
해 질 무렵이면 종소리가 옵니다 내 사는 언덕집에 밀려와 곱게 부서집니다 나는 이 종소리를 두고 숨어 살 수가 없어 손 놓고 아무 데나 걸터앉아 있습니다 오늘은 종소리를 듣고 있으니 낮에 보았던 무덤 생각이 났습니다 산속에 혼자 사는 무덤 묏등에는 잔설이 햇살에 녹고 있었습니다 나는 묏등으로부터 흰나비떼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곤 집에 돌아와 물을 한 컵 마시고 숨을 돌리고 있을 때에 종소리가 왔습니다 종소리는 내 앞에 하얀 바탕을 펼쳐 보입니다 종소리는 수산리(水山里)에서 생겨나 내 사는 장전리(長田里)로 오는 것 같으나 누가 어디에서 당목(撞木)으로 종을 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는 종소리가 오는 곳을 찾아 나섰다가 도중에 길머리에서 돌아왔습니다 종소리는 목깃이 까매진 나의 저녁을 씻깁니다 그리고 종소리는 내내 남아 잠든 아이의 방을 둘러보고 가는 어머니처럼 나의 혼곤한 잠 속을 맴돌다 갑니다
종소리 / 신경림
- 안동의 동화작가 권정생 씨에게
과수원 사과나무에 가려 담이 반밖에 안 보이는
산모롱이 개울가 외진 곳집 옆
궤짝 같은 두 칸 집이 그가 혼자 사는 집이다
맨드라미가 핀 손바닥만한 마당에서
개와 토끼가 종일 장난질을 치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은 떼로 몰려
질퍽질퍽 물을 밟고 개울을 건너
주인이야 있거나 말거나
젖은 발로 방에 들어가 엎드려 동화를 읽는다
늦어서 아이들과 함께 먹는 밥은
그가 생활보호 대상자라고
면에서 나오는 쌀로 지은 것이다
밤이 되면 그는 마을 안 교회로
종을 치러 간다 그 종소리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오늘도 무사히 넘겼음을 감사하지만
그 종소리를 울면서 듣고 있는 것들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버러지며 풀 따위 아주 작고 하찮은 것들
하지만 소중한 생명을 지닌 것들이
종소리를 들으면서 울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 신경림,『길』(창작과비평사, 1991)
종소리 / 손민달
땅속에는 거대한 종이 있음이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저 많은 새싹들이 한꺼번에 눈 뜰 리 없지
수많은 매미들이 일제히 세상에 나올 리 없지
그래서 굼벵이도 씨앗도 제 몸에 귀가 있다고 하지
그런데 말이야
그 큰 종을 사람이 친다는 말이 있어
혹독한 겨울 지나 온 땅 간질이는 새싹 돋는 일과
숨 막히는 여름 시원하게 울리는 소리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겠어
사람들은 큰 종을 울리기 위해
수신자 없는 편지를 눌러 쓰고
멀리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한동안 울기도 한다지
어떤 지혜로운 자는
사람이 스스로 종이 되어 울기도 한다는데
어느 따뜻한 봄날 갑자기 울렁이는 가슴과
여름밤 내리는 소나기에 누군가 그리워 우는 것이
명백한 증거라고
땅속에는 사람들이 울리는 소리가
사람들이 종인 그 소리가
지금도 때를 기다리고 있다지
- 2023년 <서정시학> 겨울호 신인상 당선작
새벽 종소리 / 조재도
한없이 부드럽게 울리는
새벽 교회의 종소리
저 작은 눈송이 같은 소리 안에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 새벽기도 가려고 부시럭거리는
할머니의 어둠이 있을 것이고
당신 오늘 안 가
이, 나 오늘은 안 갈텨
베개 맡 노부부의 웅얼거림이 있을 것이고
한 자 두 자
마을을 향해 기어가는
저 한없이 부드러운 종소리 안에는
차가운 마룻바닥
서서히 온기 올라오는 네모 방석에
쪼그리고 앉아
올리는 기도의 눈물도 있을 것이다
지붕 위로
더 낮은 지붕 위로
새벽 미명을 울리는 저 둥근 종소리에는
눈 내린 마을 어두운 고샅이 있어
쌓인 눈 발밤발밤 헤치며 간
할머니의 털신 자국도 있을 것이다
- 조재도,『공묵의 처』(작은숲출판사, 2014)
새와 종소리 / 천양희
가슴으로 울어
목이 쉬지 않는 새와
짧게 울려도
여운이 긴 종소리가
줄이 하나밖에 없는 악기 같지요
소리이기만 하면 되는
새소리와 종소리
그것으로 충분한데
어쩌면 그 악기는
충분하게 우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종소리 하나를 아는 것이
다른 소리 백번 듣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게 하지요
새의 가벼운
몸짓을 배우는 것이
몸만 있어 무거운
나에게는 큰 공부이지요
어둔 구름에서 나온 번개같이
거침없이 나아가는 소리는
그 속에 초인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요
소리가 날 무렵
저 소리 좀 들어보세요
저것이 우주의 율동 아닐까요
자연의 몸짓이고 숨결 아닐까요
나는 저럴 때
새소리 종소리도
하나의 가치라는 믿음이 생기지요
그 소리는 이따금
허공을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고
귀띔하지요
세상이 시끄러우면
우는 듯 노래하는 새와
영혼을 건드리는
종소리의 마음으로
하루에도 백 년을
살아버리고 싶지요
울리는 종은
너를 위하여서도 울테니까요
모란이 지는 종소리 / 김수복
화성 용주사 저녁 범종은
가슴 깊이 숨을 들여 쉬었다가
멀리 몸속 항아리들을 내보내는데
아랫마을 사람들 둥근 가슴에까지
소리의 뿌리를 담아 재워서
뜰 앞 모란이 지는
그 슬픈 미소에
그 얼굴을 갖다 대어 보네
기억 하느냐 그 종소리 / 박영근
모든 것은 지나간다.
천년의 꿈이라 한들
제자리에 있겠느냐
우리가 사는 일이
온통 고통이라 해도
오늘 바람 속에 흔들리는
저 풀잎 하나보다 못하구나
기억하느냐
겨울 빈 들에서 듣던 그 종소리
달에게 보내는 별들의 종소리 / 이병률
마셔요
그는 마시지 않습니다
어서 마셔요
그는 마십니다
그러고는 옆으로 쓰러집니다
그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새벽 세시의 술집
그 어떤 물살도 와서 부뒷치지 못하는 시간
그가 슬퍼 보여 나눈 술이 문제만은 아닐텐데
단 한잔만으로 물약을 마신 듯 쓰러져 누운 그는
덤불 속의 새집 같았습니다
그럴 수 없는 일들이 그렇게 되고 마는 바닷가에서였습니다
그는 인생의 단 한번 큰 실수를 한 적이 있는데
바로 오늘밤이었다고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말 걸어왔습니다
밤 열두시를 알리는 종을 쳤다가
멈춰 있던 시계가 열한시를 가리킨 걸 보고 놀라
다시 열한 번의 종을 쳤으나
열두 번이 맞았노라고
그길로 성당을 나와 무작정 걸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종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렸노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쓰러진 그를 두고 나오는 길
기다렸던 것처럼 유난히 추운 밤이 오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 벼랑을 피하진 못했을 것입니다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노향림
해에게서는
언제부턴가 종소리가 난다.
은은히 울려 퍼지는 소리 앞에
무릎 꿇고 한데 모으는 헌 손들
배고픈 영혼들을 위한 한끼의 양식이오니
고개 숙이고 낮은 데로 임하소서
하늘이 지상의 빈 터에다 간판을 내걸었다.
무료 급식소,
무성한 생명력의 소리 받아먹으려고
고적함을 견디며 서 있는 길고 긴 행렬
깃털처럼 야윈 몸들을 데리고
될 수 있는 한 웅크린다.
아무것도 움직여본 적 없고
스스로를 쳐서 소리 낸 적 없는 몸짓이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파동치는
해에게서는
수세기의 깨진 종소리가 난다.
튤립 뿌리에선 종소리가 난다 / 고두현
겨울이 지난 뒤에야 알았네.
전쟁의 신 마르스도 정원지기였다는 걸.
누군가는 지하 무덤에 들고
누군가는 지상 봉분에 눕지.
꽃의 알뿌리는 봉분을 닮았네.
혹한에 몸 눕히고 뿌리로 남아
대지에 입을 물리는 어머니 젖무덤 같은 것.
지난겨울은 혹독했지. 발밑으로
흙덩이를 뭉치며 나는 땅속 깊이 집을 지었네.
그래서 내 몸에선 둥근 소리가 나지.
눈과 코, 심장을 도는 물관들이
내 뿌리를 둥글게 감싸듯 내 입도 둥글다네.
그곳에서 벌레들만 아는 비밀을 공유하며
천둥과 태풍, 눈보라 닮은 씨눈을 준비했지.
알뿌리의 운명은 때로 가혹하면서도 따뜻해
봄 정원에 앉으면 꽃에서 구근 냄새가 난다네.
튤립 뿌리들이 땅 밑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우주 저편에서 숨죽이던 별,
하늘정원의 별똥만한 구근으로 빛나고
내 몸에서는 종일 둥근 소리가 난다네.
누군가의 봉분 같고 누군가의 젖가슴 같은
깊고 낮은 종소리.
종소리 / 최찬상
종소리가 둥근 건
중심을 텅 비웠기 때문이다
같은 쇳소리라도
칼과 창처럼 날과 모가 없어
베거나 찌르지 않는다
일찍이 칼을 부러뜨리고 창을
구부려 만들었으므로
그저 품을 뿐이다
먼 종루에서 쿵~하고
울려오는 하루가 닫히는 땅울음
빛과 그늘로 깨어진
하루의 파편들을
어루만지며
운다
스스로를 깨는 힘으로
깨어진 파편들을 하나하나
별빛으로 보듬어 잠재운다
그리고 빛이 끊어진
지상에 금빛 태양으로
다시 새벽을 타종한다
오래도록 피를 닦아주던
손들은 모두 종소리였다
종소리가 멀리 울려 퍼질 수 있는 건
종소리의 둥지 속에 고요한 침묵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떠나보내는 종소리와 함께 / 김후란
마음 허전한 날은
먼 길을 떠나고 싶다
그토록 좋아했던 종소리에 실어
미련 없이 어제를 보내고 싶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운 사람들이 떠나갔으며
꽃길 같던 추억에도 찌르는 가시가 있었다
시간은 흐르는 강물인가
누구도 앞질러 뛰어갈 수 없는
흐르면서 사라지는 실체인가
해는 또다시 떠오르고
새날은 여전히 강물을 타고 흐르리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댄다
보라색 종소리 / 김용택
발소리가 들린다
길은 흙길
참나무 옆 오동나무가 알아들을 것이다
살이 차 오르지 않은 새 이파리들이 아침 바람을 부른다
자귀나무 잎이 필때
앞산 참나무 잎이 하얗게 뒤집어 지면
어머니는 "용택아 ,비 올랑갑다."
어머니와 참나무 잎은 사흘 뒤에 비를 불러온다.
참나무 잎들을 믿고
가문 감자밭으로 가는 농부들 발소리로
다져진 흙 속에 산수국 날개를 접고 곤히 잠든 부전나비들
생각이 먼저 짙어진 감자는 땅속에서 흙을 밀어내며 커가고
오동꽃은 보라색으로 핀다
다람쥐들은 참나무 가지사이
허공의 두려움을 딛고 건너 뛰고
먹이 찾아나선 새들은 나비처럼 제 무게로 난다 (시, 보라색종소리) 부분
물의 종소리 / 김충규
돌을 던지지 않았는데 수면에 파문이 일고 있다
물의 종소리,
사방을 향해 뎅뎅 퍼져나간다
그 종소리 깊고 아득하여 물고기들 귀가 먹먹해지고
어떤 물고기는 순식간에 등신불처럼 딱딱해져
스스로 움직임을 멎는다
돌을 던져 생기는 파문이야 그 여운 이내 식고 말지만
물이 제 깊은 곳에서 뎅뎅 울려 수면에 퍼뜨리는 종소리는
오래오래 퍼져나간다
물의 종소리 가만가만 듣고 있다가
그 소리에 무진장 사무쳐서
물속으로 걸음을 옮겨놓는 사람 있을까
물의 종소리 퍼져 나가거든 돌멩이를 집어던져야 한다
물의 종소리를 깨뜨려야 한다
물의 종소리에 사무치기 전에 등을 돌려야 한다
물 밑,
죽은 자들이 종일 종을 두드린다
시집 <물위에 찍힌 발자국> 2006년 실천문학사
어느 날 종소리를 듣다 / 나호열
높은 망루에 올라 한 대 맞으면 속으로 불알 흔들어대며 요란떠는 그런 것 말고
묵직하게 어깨를 내려깔고 안으로 아픔을 감아 올리는 우리나라 종소리는
이 말 저 말 다 버리고 그저 우물거리는 단 한 마디 말씀 뿐이어서
世音, 발자국 소리 멀리 물리친 뒤 적막 한 장 깔아놓고 받아 적어야 하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작은 산새처럼 날아가 버리고
때로는 나뭇잎 몇 장 떨구어지기도 하여
한번도 제대로 받아 적어보지 못하였지만
우우우 우웅 우웅 우우우 그 소리가 내 목덜미를 죄어와
네 세 치 혀를 내놓아라 으름장 놓는 것은 분명히 알겠네
종소리는 어느 깊이에서 잠자는가 / 정복선
느닷없이 이 가을 아침에 마음 속 악기 하나 있어
통주저음으로 울린다 해도
누가 있어 화답해주겠는가
대종천 어디쯤에 수장되었다는 전설을 따라
대종을 찾고자 해도 너무 늦었다
그 종을 금생에 한번만 더 울리고 싶은데,
흐르는 피에 방패가 떠내려갈 지경이었다는 김부식의 기록처럼
쏟아낸 종소리의 파편을 주워서 복원하고 싶지만
종이 다시 돌아오겠는가
이 삶에 이사하여 당신들 참 고되게 견디었다
꽃잎들 사이 말라붙어 가는 가랑잎처럼
무너진 층계참에 파도가 위문 오는 부두,
사랑 맺지 못한 어미의 가락으로
이 아침에 악기 하나 울린다 해도
세세토록 따라 울 종소리는 어느 깊이에서 잠자는가.
시집『종이비행기가 내게 날아든다면』2018. 시인동네시인선
하늘에 종소리 퍼지듯 / 김형영
시간이 찾아왔다.
가자가자 저 언덕 너머로.
꾸물대지 말고 어서 가자.
옷은 무엇 때문에 입으려 하느냐.
육신은 왜 챙기느냐.
가져갈 게 남아있거든
쓰레기통에 버려버려라.
기억을 가슴에 품지 마라.
가져갈 것은
남몰래 베푼 자선뿐,
이번에는 그것도 버려버리자.
하늘에 종소리 퍼지듯
가자가자 저 언덕 너머로.
종소리 / 이창수
비누가 사라졌다
칫솔이 보이질 않아 새로 샀다
보름을 두고 허리띠와 속옷이 보이지 않았다
새로 산 시집과 읽다만 서적이 사라졌다
하루걸러 만나 술을 마시던 친구도 사라졌다
머리 위에서 빛을 내던
조약별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만은
머릿속에 남아 있다
집으로 가는 길모퉁이 교회당과
오리의 꽁지를 물어
늙은 집사에게 혼나는
강아지는 그대로 남아 있다
기억에도 힘이 있다
집으로 가는 길과 그 풍경 속에 살고 있는
오리와 강아지와 늙은 집사와
강물 위를 떠다니는 종소리가
혼신을 다해 나를 기억하고 있다
비탈 길을 오르는 종소리 / 권행은
골목은 어둑한 바닥을 물고 있어서 이가 아프다
치통을 앓는 골목에게 시간은 독거노인
부어오른 골목이 바람에 휘고 있다
두부장수가
시간의 틈새에 빠진 발자국을 조심스레 거두어 언덕을 오른다
겨울마다 얼음 든 상처를 진물로 흘려서
음식을 씹지 못하는 골목은
오래도록 허술한 집들을 낳았다
누우면 하늘이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산동네
사나흘씩 사람들의 발목이 묶이는 골목으로
어떻게 찾아왔을까 두부장수‘
종소리가 따뜻한 호명이 되어 사람들을 부른다
귀먹은 해거름을 깨우는 종소리가
앓아누운 할머니의 언 손으로 두부 한 모를 쥐어주자
내려앉은 창들도 그제야 꾸물꾸물 밥을 짓는다
오랜만에 할머니의 아궁이가 불을 먹는다
닫힌 빗장 속으로
두부장수의 종소리가 눈송이처럼 뛰어들 때
바쁘신 하나님도 모처럼 숨을 고르신다,
흰 눈처럼 이 세상 어디에나
부드러운 잇몸을 가지고
두부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