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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일(월)
* 시작 기도
주님...
다윗은 늘 진리의 빛 곧 말씀과 성령으로 살기를 소원하여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시 43: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그가 비록 원수들의 추격과 억압으로 인하여 도망 다니지만 원수 갚는 일은 주님께 맡겼음을 압니다.
사무엘상 26장에서도 자기를 죽이려고 쫓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를 죽이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에 맡긴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주일 이후 한 주간의 첫 날입니다.
이 하루도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의 의와 나의 뜻이 아닌 오직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날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느 2:1-10
제목 :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1 아닥사스다 왕 제20년 니산 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2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3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5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6 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7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9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쪽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10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 나의 묵상
아닥사스다 왕 20년 니산월은 BC 445년 4~5월에 해당된다.
느헤미야의 동생 하나니가 온 때는 BC 446년 11-12월 경이었으므로 그 때로부터 약 4-5개월이 흐른 시점이다.
아마도 느헤미야는 동생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에 탔으며 자기의 동족들이 큰 환난과 능욕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로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매일 깊은 수심에 싸여 지낸 것 같다.
그는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써 왕 앞에서 근심하는 얼굴빛을 나타낸다는 것은 당시 고대 왕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페르시아 역사에 보면 시종이 왕 앞에서 굳은 표정을 지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마치 북한의 일인 통치자 김정은 앞에서 한 번 졸았다는 이유로 숙청을 당한 인민무력부장 현영철과 비슷하다.
느헤미야가 이전에는 한 번도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는데 그날 아침에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다.
지난 4-5개월 동안 자신의 고향인 예루살렘을 생각하기만 하면 잠을 이룰 수 없고 오랜 동안 금식을 하면서 몸이 쇠약해진 탓에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근심어린 모습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런데 근심어린 느헤미야의 얼굴을 본 아닥사스다 왕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왜 그런 근심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자 느헤미야는 순간 크게 두려워하였다.
자신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을 자신도 모르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용기를 내서 왕에게 말하였다.
내 고향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타버렸기에 자기가 근심하지 않을 수 없노라고 말이다.
그 때 왕이 느헤미야에게 “그러면 네가 무엇 하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대답하였다.
느헤미야는 왕의 질문을 듣고 지체하지 않고 대답을 하였는데, 그 질문과 대답하는 잠깐의 사이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느헤미야는 이처럼 기도의 사람이다.
작은 일에나 큰 일에나 먼저 기도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가서도 기도하는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4:9, 5:19, 6:9).
느헤미야의 기도는 결코 만물 위의 하나님을 만물 안으로 끌어내려서 자신의 정욕과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었다.
그는 창세전, 만물 위에 계신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특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의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였는데, 이는 구속사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기도인 것이다.
6절에 보면 5절의 문맥과 전혀 맞지 않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문구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는 문구이다.
그 문구가 없으면 오히려 앞뒤 문맥이 잘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이 문구를 그 자리에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① 왕후의 강력한 영향력이 작용하여 왕이 느헤미야에게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
② 그와는 정 반대로 왕후의 방해가 있었지만 느헤미야가 왕의 호의로 예루살렘에 돌아갈 수 있었음을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
③ 당시 아닥사스다 왕과 느헤미야가 대화를 나눈 장소가 정사를 다루는 자리가 아니라 사적인 장소였음을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
이러한 견해들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은 ①번이다.
그 이유는 아닥사스다 당시에는 왕의 측근에 있었던 여성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었다고 한다.
따라서 왕후가 함께하였다는 기록을 굳이 남긴 것은 분명 느헤미야의 귀환과 관련해서 왕후의 영향력 행사가 있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느헤미야는 항상 왕궁에 거하여 왕의 공적 사적 자리에 함께하였으므로 왕의 처첩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당시 상황에서 왕후가 함께했다는 기사는 자신의 의사를 비교적 쉽게 말할 수 있는 사적인 식사 자리에서 왕후가 평소 좋은 관계를 맺어 온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귀환을 지지했을 것이므로 ①번과 ③번의 견해는 함께 연결해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참고로 아닥사스다의 왕비는 다마스피아인데, 그녀는 왕의 국사 결정에도 관여할 만큼 당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W.W. Tarn).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를 통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페르시아 제국의 왕후의 마음까지도 역사하셨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허락하는 의미로 그 길이 얼마나 걸리겠는지, 언제 돌아올 것인지에 대하여 묻는다.
그것은 느헤미야를 보내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허락하는 것이며 또한 가능하면 빨리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제 왕은 기쁨으로 느헤미야를 보내기로 하고 느헤미야가 정한 기한을 허락한다.
게다가 느헤미야는 계속해서 왕에게 자기의 필요를 요구한다.
첫째, 자신이 유다 땅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강 서편 총독들, 즉 지방 관리들에게 조서를 내려줄 것을 요구한다.
이는 페르시아를 분할하여 각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들로써 행정이나 사법권을 가지고 자치적으로 다스리는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페르시아 제국은 수많은 민족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서로 간에 권력에 대한 다툼이 많았다.
이런 속사정을 잘 아는 느헤미야는 왕에게 이런 요구를 하여 불필요한 것에 힘을 빼지 않고 예루살렘에 가는 본질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둘째, 삼림 감독 아삽에게 명령하여 영문의 문과 성곽 그리고 느헤미야의 총독 관저를 지을 재목들을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런 것을 왕에게 요구할 때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느헤미야를 도와서 왕으로 하여금 허락하도록 하셨다.
(8b)...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그뿐 아니라 왕은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서 느헤미야와 함께 가도록 배려하였다.
한편 느헤미야는 강 서쪽에 있는 총독들에게 도착하여 왕의 조서를 내밀자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가 느헤미야의 등장으로 인하여 두려워한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산발랏과 도비야는 팔레스틴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페르시아 왕의 측근인 느헤미야의 유다 총독 부임은 결정적 걸림돌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완전한 자치를 시행하지 못하고 사마리아 방백들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만일 느헤미야의 귀국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성이 재건되고 이스라엘이 흥왕케 된다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것이 분명하였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산발랏은 이후에도 유다 지역 안에 심어 놓은 자신의 세력들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느헤미야를 대적하고 선민 공동체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것이다.
오늘 신약의 교회 시대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헌신할 때 악한 세력들은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를 저지하고자 성도들을 대적하며 환난을 가중시킬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을 두려워한 사탄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방해한 것과 동일하다.
사탄은 베드로를 이용하여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것을 방해하기도 하고,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을 이용하여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 방해 공작에도 예수님은 최고의 구원의 방편인 십자가 지는 일에 굴하지 않으셨다.
세상은 3A를 가지고 성도들을 유혹한다.
3A란 Appearance(보란듯함), Achievement(성공), Affluence(풍요)를 말하는데 이 3가지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이다.
무엇보다 예수를 믿으면 이 땅에서 잘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수 믿어서 남들 보기에 보란 듯해야 하고, 예수 믿으면 하는 일마다 성공해야 하며, 예수 믿고 나면 부요함과 풍요로움으로 윤택하게 살아야 한다고 유혹하면서 많은 경우 그 유혹에 넘어가곤 한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내가 잘 돼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성도들이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 땅에서 잘 되게 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으면 이 땅에서 오히려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하는 일이 내 뜻대로 잘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아니고, 또한 내가 원하는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도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땅의 것이나 만물 안에 있는 존재물들에 매몰되지 않고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것을 초월하는 영생의 삶을 사는 데 있다.
그것은 나의 상황에 따라 내가 요구하는 필요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구하는 것에 응답하시며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도 채워주실 것이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느헤미야는 자기 자신을 위한 욕심이나 정욕대로 구하지 않았다.
그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아닥사스다 왕에게 구하였으며, 그것을 구하는데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였다.
아닥사스다 왕에게 구하는 것은 곧 영적으로는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구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모든 걸림돌이나 악조건들을 제거하면서 응답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사용하셔서 입애굽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고자 하셨다.
물론 요셉은 그가 꾼 꿈이 하나님의 언약적 꿈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그가 중간중간에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장면들이 연출된다.
그러나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
비록 요셉은 하나님의 언약은 몰랐지만, 그에게 주어진 삶속에서 경건을 잃지 않았고, 또한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므로써 하나님께서 그가 형통한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셨다(창 39장).
형통은 내가 뜻하는 일들이 술술 잘 풀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만사형통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형통은 곧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그 자리가 바로 형통의 자리인 것이다.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또한 형통한 자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불신자나 이웃에게 증거하는 자이다.
(창 39: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그가 하는 일이 다 잘 되기 때문에 이웃이나 불신자들이 형통한 자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이웃이나 불신자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형통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의 능력이다.
이는 늘 아닥사스다 왕이나 그의 왕비와 궁중에서 함께하므로 느헤미야의 경건과 신실함을 나타내 보인데 따른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였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경건의 모양은 마치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나를 멋지고 그럴싸하게 포장하였다.
그러나 나 혼자 있을 때, 아니 하나님 앞에서 있을 때 나의 경건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였다.
느헤미야는 크고 두려우신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나는 그야말로 철저하게 나를 경건의 모양으로 포장하고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를 좋아하는 자였다.
나는 그 경건의 모양이라는 무화과 옷이 벗겨지면 죽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것이 벗겨지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하여 관리하였다.
그것은 나의 습관이 되어 지금도 그런 모습이 내 안에 있다.
나는 오늘도 그런 모습 앞에 절망하며, 그런 나를 십자가 앞에 내어 놓는다.
그리고 주님의 심판을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만물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하였다(히 4:13).
오늘 이 말씀 앞에서 나의 더럽고 부끄러운 실체가 벌거벗겨지듯 드러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벗겨내시는 것이다.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지심으로 담당하셨다.
나도 그런 주님과 연합하기 위하여 그 부끄러움에 동참한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나의 몸과 영혼을 다 지옥에 능히 던져 넣으실 수 있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진짜 부끄러움이다.
오늘도 그 진리를 깨닫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나의 수치를 벗겨내시고 대신 그 수치를 지시려고 스스로 벌거벗겨지신 주님.
그리고 만 천하에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며 그 높고 참혹한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 엎드려 회개와 함께 영광을 올려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경건과 신실함으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선한 손의 도움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악한 종은 경건을 상실하였나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정욕으로 구하고, 예수 믿어서 내가 이 땅에서 잘 되고자 했던 죄인 중의 괴수였나이다.
지금도 여전히 경건의 능력과 거리가 멀고 사람들 앞에서 경건의 모양만 나타내어 칭찬 받고 인정받으려 하는 악인입니다.
주여, 이 종을 심판하소서.
이 종을 심판하여 그토록 내가 무서워하는 부끄러움 속에 던져 주소서.
그것이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말씀 앞에서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보게 하시고, 만 천하에 나의 벌거벗겨짐이 드러나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하소서.
제가 주님 앞에서 무엇을 감출 수 있단 말입니까?
무엇으로 속일 수 있겠습니다.
돌아보면 나의 인생은 거짓과 포장으로 얼룩졌나이다.
이것이 나의 실체임을 고백합니다.
나를 죽여주옵소서.
그리하여 나의 영혼은 구원받게 하소서.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나에게도 이루어져 오직 주님 뜻대로 사는 자 되게 하시고, 내 안에 진정한 영생을 누리게 하소서.
나는 주의 것이오니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