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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9월 30일
한국과 소련, 85년 만에 수교
최호중 외무장관(오른쪽)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공동 코뮈니케에 서명하고 있다.
한·소 양국이 1990년 9월 30일 낮 12시 유엔본부에서 역사적인 한소 외무장관회담을 갖고 수교에 합의하는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최호중 외무장관과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이날
유엔본부내 안보리 의장실에서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회담에서 공동 코뮈니케 서명식을 가졌으며,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발표했다.
이로써 한국과 소련은 지난 1905년 대한제국과 제정 러시아간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85년 만에 다시
수교하게 됐으며, 이는 앞으로 한반도 및 동북아 질서
재편에 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기대됐다.
공동 코뮈니케는 정치적 결단의 성격이 강할 때
택해온 수교합의 방식이라고 양측 당국자들은
설명했다. 두 나라 외무장관은 이날 회담에서
수교문제와 함께,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교환방문 문제도 협의, 상호 편리한
시기에 방문을 실현시킨다는 데 합의했다.
이날의 한·소 수교는 그야말로 역사에 한 굵은 획을
그은 신기원적 결사였다. 흔히들 단절 85년 만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것은 쓰러지는 대한제국과
혁명 전야의 제정러시아와의 관계였다. 따라서
대한민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과의 수교는
사상 처음이있고, 그만큼 의의도 컸다.
▶2001년티우 전(前) 베트남 대통령 사망
▶2001년일본 다카하시, 여자 마라톤 세계신기록
▶2000년 kr도메인 50만개 돌파
▶2000년박찬호 데뷔 첫 완봉승. 18승으로 시즌 마감
▶1999년미국 AP통신 `노근리 학살사건` 첫 보도
▶1999년독일의 귄터 그라스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
▶1998년제9호 태풍 `얘니` 전국 강타
▶1992년미국, 수빅만 해군기지를 필리핀에 공식 반환
▶1990년한국과 소련, 85년 만에 수교
▶1990년한국-라트비아, 국교 수립
▶1990년오스트레일리아 소설가 패트릭 화이트 사망
▶1987년전화 1000만회선 돌파
▶1985년미국 지진학자 리히터 사망
▶1985년고리원자력발전 3호기 상업운전
▶1982년미국-일본 국방장관 회담
▶1982년서울신탁은행 민영화
▶1981년대만, 중국의 대화제의 거부
▶1981년서울올림픽 유치
▶1978년김성준 WBC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76년한국-브라질 통상협정 체결
▶1966년베추아날랜드,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보츠와나로 국명 변경
▶1965년인도네시아 친공쿠데타 발생,
수하르토 정권 장악
▶1965년인도네시아 9.30사건 발생
▶1963년알제리아군 일부 반란 (벤 벨라 대통령정부
명령에 반대 모한트 우 엘 하즈대령 등)
▶1963년이준 열사 유해 네덜란드서 56년 만에 환국
일제침략의 부당함을 알리다, 이준 열사
사람이 산다함은 무엇을 말함이며 죽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라.
-선생의 유훈 중에서
최익현 선생으로부터 재사(才士)로 인정받다
이준(李儁, 1859. 1. 21~1907. 7. 14)선생은 1859년 1월 21일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대학자인 부친 이병관(李秉瓘)공과 모친 청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이 세 살 되던 해인 1861년 7월 아버지가 별세한 후 이어 어머니 마저 별세하여 졸지에 고아가 되었으나, 당대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조부 이명섭과 숙부 이병하에게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1875년에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형조판서인 김병시, 최익현 선생 등으로부터 재사(才士)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1884년에는 함경도시에서 장원 급제하였으며, 1888년 북청에서 가재를 털어 경학원을 설립하고 인재양성에 진력하였다. 1894년에는 함흥의 순릉참봉이 되었으나 갑오경장으로 김홍집 등 개화파에 의해 개화당 내각이 수립되자 사직하고 다시 상경하였다. 1895년에 처음으로 설립된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법관생활의 첫발을 디디어 대관중신들의 비행과 불법을 들추어 내고 올바른 법 집행을 하여 사회정의 실현에 노력하였으나 탐관오리들의 중상모략으로 오래있지 못하고 2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선생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을 만나게 되고, 협성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독립협회 평의원에 피선되어 <독립신문> 간행, 독립문 건립, 가두연설 등 맹활약을 하게 된다. 개화파가 몰락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1898년 동경 조도전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였다. 만민공동회에서는 비정탄핵(秕政彈劾) 등의 내용으로 가두연설을 하였다가 이승만, 이동녕 등 17인과 함께 투옥되기도 하였다. 1902년 선생은 효율적인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민영환, 이상재, 이상설, 이동휘, 양기탁, 남궁억, 노백린, 장지연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개혁당을 조직하였으며 이때 서대문 밖 독립문 옆에 있는 독립회관에서 ‘동청사변(東淸事變)이 가져온 영일동맹(英日同盟)’이라는 제목하에 행한 국민대연설은 청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하였다.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철폐하다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하면서 침략을 강화하자 이에 대한 반대 시위운동을 일으켰으며, 같은 해 일제가 전국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기 위하여 이상설, 송수만, 원세성 등과 함께 보안회(일명 보민회)를 조직, 격렬한 반대 상소와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선생은 안창호, 이상재와 함께 연설과 웅변의 대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 당하자 그 후속단체의 성격을 띤 대한협동회를 조직, 그 회장에 이상설, 부회장은 선생이 총무는 정운복, 평의장은 이상재, 선무부장은 이동휘, 편집부장은 이승만, 지방부장은 양기탁, 재무부장은 허위 등이 맡아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완강히 반대하여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04년 8월 일제가 송병준 등 친일 분자들로 하여금 일진회를 조직하여 매국활동을 시작하게 되자 12월 12일 선생은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윤하영, 양한묵 등의 동지들과 함께 공진회를 조직, 동회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열사는 회장으로서 반(反)일진회 투쟁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의해 황해도 황주 철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한편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서울에 급파, 을사오적(박제순,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과 모의하여 마침내 동년 11월 17일 일본 헌병이 황실을 포위한 가운데 소위 을사오조약의 늑결을 강행하였다는 것, 이에 비분강개하여 자결 순국한 민영환의 비보를 들은 선생은 구국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하고 중국 상해에서 즉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선생은 을사조약에 대한 폐기를 상소하는 운동을 펼치고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에는 국민교육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펼치고, 전 재산을 기울여 돈화문 근처에 야학인 보광학교를 설립하여 청년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오상규, 유진호, 설태희 등과 함께 고향인 함경도에 한북흥학회를 조직하여 함경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의 발흥에 큰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해 3월 대한자강회가 창립되자 선생은 이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안창호, 김덕기, 이동녕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여 장기적인 구국운동을 추진하였다.
이상설, 이위종 등과 함께 헤이그에 특파되다
한편 1907년 7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선생은 주위 도움을 받고 비밀리 고종을 만나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황제의 의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의 협박으로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다.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특사는 정사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부사로는 전 평리원 검사인 선생과 전 주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으로 구성되었다.
만국평화회의보(1907년 7월 5일자) 1면에 실린 헤이그 특사들 사진.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선생이다.
선생보다 먼저 출발한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러시아 빼째르부르그에 도착하여 러시아 공사 이범진을 만났다. 이범진은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전이 박탈당하였으나 세계정세를 관망하기 위하여 귀국하지 않고 그곳에 체재하고 있었다. 한편 선생은 1907년 4월 22일 가족들과의 고별의 아픔을 간직한 채 서울역을 떠나 부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 그곳에서 이상설과 합류하였으며 5월 21일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6월 4일 빼째르부르그에 도착하였다. 빼째르부르그에 도착한 선생과 이상설은 이범진, 이위종을 만나 그간의 경과에 대하여 토론하며 [장서]의 공고사(控告詞)를 불어로 번역한 후 6월 19일 그곳을 출발하여 독일 베를린에 들려 [장서]를 인쇄하고 동월 25일에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하여 바겐 스트라트(Wagen Straat) 124번지의 De Jong 호텔에 숙소를 정하였다.
6월 28일 [장서]와 그 부속문서인 [일인불법행위(日人不法行爲)] 책자를 40여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으며, 그 다음날 러시아 대표이며 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A. Nelidov) 백작을 방문하였으나 네덜란드 정부의 소개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 당하여 만나지 못하였다. 이어 30일에는 부회장인 네덜란드 전 외무대신 뽀포로를 방문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하였다. 이어 네덜란드 외무대신 테츠(M. Van Tets)에게 서한을 급송하여 면회를 요청하였으나 평화회의에서의 발언은 어렵다는 통지를 받아 거절당하고 말았다.
통탄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
만국평화회의는 1907년 6월 15일부터 1개월간 개최되었다. 당시 참가국은 46개국이고 대표는 약 247명이었다. 이상설을 비롯한 3명의 특사는 만국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인 공고사를 제출하고 한국의 대표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일본과 영국대표의 노골적인 방해로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세 특사들은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를 각국대표와 언론에 공개하자 각국 언론들은 동정적이었으나 열강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더욱이 일제는 이러한 특사들의 노력에 위기감을 갖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특사들의 활동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3명의 특사는 일제의 방해에 굴하지 않고 한국의 입장과 일본의 부당성을 웅변으로 호소 하였다. 각국 신문기자들이 모여들자 그들에게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설명하였으며 <평회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 하였다. 7월 9일에는 협회 회합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연설 할 기회를 얻어 이위종으로 하여금 불어로 연설하도록 하였다. 이위종의 열성적인 호소는 참석한 각국의 이름난 언론인은 물론 평화회의의 각국대표 및 그들의 수행원들까지도 감명을 주어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국 대표들이 공례를 빙자하여 한국의 청원을 공감하지 않자, 선생은 분격을 금하지 못하고 연일 애통하다가 1907년 음력 7월 14일 한을 남긴 채 순국하였다.
네덜란드의 헤이그 바겐 스트라트 124번지. 선생이 순국한 곳으로 현재는 선생의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55년만에 밟은 고국의 땅
선생의 유해는 순국 3일 후 헤이그 공동묘지에 임시 안장하였으며, 이상설과 이위종을 윤병구 목사와 선생의 동생인 이운이 헤이그에 도착한 뒤인 동년 9월 5일 이상설의 이름으로 102달러 75센트를 지불하고 Nieuw Eiken Duinen 묘지를 영구 사용의 계약을 하고 다음 날인 9월 6일 장례식을 치렀다. 열사의 장례에 대하여 당시 <학세 쿠란트(Haggsche courant)> 7522호의 기사에 의해 그 대강을 파악할 수 있다. “그의 유해는 에이켄무이넬에 완전히 매장되었다. 장례식에는 한국 대표 단 두 사람과 YMCA의 회장 매케이 남작이 참례했다. 이상설은 이 무덤 앞에 조화를 바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다가 가셨다’고 슬픈 조상을 했다.” <학세 쿠란트(7522호)>
동년 8월 9일 일제통감부에서는 궐석재판을 하여 이상설은 처교(處絞), 이위종과 선생은 종범으로 종신징역을 선고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순국 후 55년만인 1963년 10월 4일에 조국의 품 안으로 모셔와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을 치른 후 서울 수유리 선열묘역에 안장하였다. 1964년에는 서울 장충단 공원에 열사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에는 헤이그 묘소에 열사의 흉상과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캠프폴리 스트라트 2A번지에 위치한 선생의 묘적.
선생의 유해는 순국 후 55년만인 1963년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62년미국 대학에서 흑백인 공학분규로 학생들 폭동
▶1961년시리아 독립선포
▶1961년시리아, 쿠즈바리 전(前)국회의장을 수상으로 신내각 구성
▶1961년군사재판, 4.19의거 당시 발포관련자 곽영주에 사형선고
▶1961년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정식 발족
▶1959년흐루시초프 중국방문. 중국-소련 대립 격화
▶1958년소련, 핵실험 재개
▶1957년인천 판유리공장 준공식
▶1955년제임스 딘 사망
http://www.jamesdean.com/
▶1950년유엔총회, UNCURK(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회) 설치안 가결
▶1949년중국공산당, 주석에 모택동 수상에 주은래 선출
▶1949년태국, 대한민국 정식 승인
▶1938년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뮌헨협정 체결
▶1932년대일(對日)전선통일동맹 조직
▶1929년영국 BBC방송, 첫 텔레비전 실험방송
▶1927년베이브 루스, 60홈런 기록
미국의 번영과 함께한 베이브 루스
1921년 3월 4일 워런 하딩이 제29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때 미국은 경제공황의 여파가 최고조에 달해서 국민소득은 전년도보다 20%나 감소했고 실업자는 500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경제 한파도 1922년에 종지부를 찍고 번영과 풍요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 탄생한 이가 ‘전설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다.
애초 루스는 타자가 아닌 투수로 주목 받았다. 메이저리그 데뷔 2년째인 1915년 16승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해서 1916년에는 23승을, 1917년에는 24승을 거뒀다. 특히 1916년에는 1.75로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다. 타자와 투수를 거의 반반씩 한 1918년에도 13승을 올리는 등 통산 163경기(선발 148경기)에 등판해 94승 46패, 평균자책점 2.28을 기록했다. 리그 최고 투수를 눈앞에 뒀을 때 그의 타격 재능을 알아본 에드 배로 보스턴 감독은 전설의 홈런왕을 창조해 내며 데드볼 시대도 막을 내렸다.
1918년 11홈런으로 첫 홈런왕에 오른 루스는 1919년 당시로는 한 시즌 최다인 29홈런(그전까지 기록은 네트 윌리엄스가 기록한 27홈런)을 기록하며 야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무리 홈런 타자라고 해도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는 게 고작이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듬해 1월 또 한번 루스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로는 천문학적인 금액인 12만 5천 달러에 뉴욕 양키스로 현금 트레이드 됐기 때문이다. 베이브 루스가 그런 가치가 있는 선수라는 것을 인정받는데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적 첫해 믿기지 않는 54홈런을 기록한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듬해는 59홈런을 치며 미국의 번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존재가 됐다. 1927년에는 60개의 공을 외야 담장 너머로 날리는 등 한 시즌 50홈런 이상을 4회나 기록했고 통산 홈런 수는 714개에 이르렀다. 꽃이 피면 지는 게 자연의 이치. 1929년 10월 24일 미국 뉴욕 증권시장에 암흑의 목요일이 닥치며 미국의 번영도 베이브 루스의 영광도 어둠 속으로 사그라졌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한 1933년 루스의 홈런 수는 34개로 격감했고 1935년 2월에는 보스턴 브레이브스(현 애틀랜타)로 이적해서 6홈런만을 남기고 쓸쓸히 유니폼을 벗었다.
전설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 <출처: wikipedia>
[월드시리즈 3차전뉴욕 양키스VS시카고 컵스와의 대결
5회까지 4:4의 스코어, 베이브 루스가 타석에 들어서자, 시카고 컵스 팬들은 루스에게 야유를 보냈고,
한 관중이 던진 레몬이 루스에 얼굴에 박히자 루스는 센터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다음 공 낮게 깔리는 카브를 정확히 센터 쪽 홈런으로 날렸다.]
라는 전설이 있네요. 이 경기를 지켜보던 한 기자가 별 생각 없이 전설이라고 말하자, 진짜 전설이 되었습니다.
▶1925년그리스, 공화국헌법 공포
▶1925년서독, 동독과 경제 단교
▶1910년일제, 토지조사사업 착수. 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관제 공포
▶1908년소련의 바이올린 연주자 오이스트라흐 출생
▶1906년영국의 소설가 스튜어트 출생
▶1859년백암 박은식 출생
▶1849년폴란드의 역사가 보브진스키 출생
▶1719년오페라 마술피리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 됨
▶1659년로빈슨 크루소가 표류끝에 무인도에 상륙 28년동안 무인도에 있었음
▶1472년왕양명 출생
▶1227년프란체스코수도회 출신최초의 교황 니콜라우스4세 출생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