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샘 영화
연말 한 달 남짓 방학에 들었다. 보충수업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나름대로 방학 설계를 빼곡하게 해두었다. 학교 업무는 교지 발간의 교정을 봐 주는 정도였다. 우선 몇 권 읽을 책 목록을 뽑아놓았다. 집사람과 동해 강릉 쪽으로 기차여행도 생각해 두었다. 세인들 입에 오르내리는 영화 두 편을 보려했다. 그 나머지는 인적 드문 산이나 들로 나다니면서 겨울 풍광을 완상함이다.
어느덧 방학이 절반 지나는 즈음이다. 반나절도 집에서 머무적거릴 겨를이 없다. 며칠 전 부산의 작은형님으로부터 ‘국제시장’ 아직 안 보았으면 가서 보라는 문자가 왔더랬다. 답신을 보내길‘ 임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같이 볼 예정이라고 했다. 방학 들면서 볼 영화로 꼽아둔 두 편이었다. 날씨가 포근한 새해 둘째 화요일 아침나절 집사람과 시내 백화점에 딸린 영화관을 찾아갔다.
그간 영화관에 들린 지 좀 되었다. 아침나절인데도 몇몇 영화 마니아들이 보였다. 인터넷으로 예매를 할 줄 몰라 매표창구에서 표를 사면서 아날로그 티를 내었다. ‘국제시장’과 ‘임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두 영화를 시간대를 달리해서 한꺼번에 샀다. 먼저 5층으로 올라가서 ‘국제시장을’을 봤다. 나는 베이비붐 세대 마지막에 해당해 내보다 조금 앞선 세대의 피와 눈물과 땀의 얘기였다.
영화 시작은 부산자갈치 앞 서항이 내려다보는 부민동 단독주택쯤 헤아려지는 옥상이었다. 주인공 덕수가 어릴 적 꿈이 선장이 되고 있다는 얘기를 아내에게 건네는 장면이었다. 그는 흥남철수 와중에 아버지와 막내 꽃분이는 헤어졌다. 국제시장은 어머니가 계시긴 했다만 소년가장이나 마찬가지인 덕수의 삶터였다. 이후 파독광부와 사업차 월남 전쟁터까지 생사 갈림길에서 살아남았다.
언제부터인가 나이가 듦을 눈물샘이 자주 젖음에서 느낀다. 남들에겐 보잘 것 없는 장면이었을지라도 흥남부두에서 덕수의 아버지가 막내 꽃분이를 찾으려다 가족들과 헤어지는 아픔에서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파독 광부들이 매몰된 동료를 구출하러 석탄을 캐던 곡괭이로 동료 덕수를 구출하던 장면에서는 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사이공 탈출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기 이전 1980년대 초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은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전쟁으로 인한 분단의 아픔을 안고 있는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상황이었다. 덕수는 흥남철수 당시 헤어졌던 막내 꽃분이는 전쟁고아로 미국에 입양되었다. 이역만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영상통화로 왼쪽 귓바퀴 뒤 까만 점으로 혈육을 확인하던 장면에서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가장의 책무는 무엇이며 어디까지인가를 통절히 느꼈다. 다음 세대 자식에겐 더 이상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한 평생을 쫓기듯 허둥대며 인생의 황혼을 맞은 덕수였다. 지금 이 땅의 칠순 팔순 어르신들이 모두 덕수의 분신으로 느껴졌다. 혹자는 보수 색채 영화라고 덧칠을 한다지만 새삼스러운 정치적 이념논쟁이라 본다. 그 당시를 살아온 분들은 생활이 아닌 생
존의 문제였다.
‘국제시장’ 영상이 닫히자 곧바로 5층에서 3층 상영관으로 내려갔다. ‘임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도입부 20여분이 지나가고 있는 즈음이었다. 강씨 할머니는 조씨 할아버지와 노인대학에서 정선으로 소풍가는 장면부터다. 친구로부터 어느 방송사 인간극장 프로그램에 나온 노부부 얘기라고 들었다. 76년을 해로한 강원도 산골 노부부가 미운 정 밀어내고 고운 정 붙여가는 이야기였다.
할머니는 길을 가다 무릎 아프다고 투정 부리고 할아버지는 ‘호’하고 불어주기도 했다. 그런 할아버지가 육신의 노화는 어쩔 수 없어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떴다. 할아버지 산소를 되돌아보며 흐느끼던 할머니가 안쓰러워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책에서 바삐 보고 메모로 남기진 못했는데, 시골 노인 한 분이 돌아가시면 박물관 한 곳이 사라지는 만큼 허전함이 크다고 했다. 15.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