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시와 역사를 비교하면서, ‘시는 역사보다 훨씬 진지하고 철학적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시’는 고전문학 이론의 대부분에서 그렇듯이 서사시, 희극, 비극, 서정시, 낭독, 연설까지 예술성 일반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문장의 법칙을 ‘변증법’과 ‘수사법’으로 구분하듯이, 이 ‘수사법’과 상관이 있는 모든 말과 글이 ‘시’에 속한다. 형식주의 해석을 따르면, 산문적 언어가 아닌 ‘문체화된’ 모든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문학의 진지성과 철학성에 커다란 무게를 주었다. 플라톤은 이데아 세계의 모조품 정도로 현상 세계를 보고, 예술은 이데아에서 가장 뒤떨어진 진모조품 중의 모조품이라고 얕보았다. 문학에는 진실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해서, 역사가 추구하는 진실과 문학이 추구하는 진실은 그 성격이 다르다고 못박았다. 그의 『시학』 9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시인의 작업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시인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 추정이나 필연성에 의거하여,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을 이야기한다. 역사가와 시인이 다른 점은 산문이나 운문으로 쓴다는 점이 아니라(헤로도투스의 역사같은 경우는 운율을 맞춰서 쓸 수도 있고, 그냥 산문으로 쓸 수도 있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이 역사일 수밖에 없다) 역사가는 일어났던 사건을 적고, 시인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다르다.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훨씬 진지하고 철학적이다. 왜냐하면, 시는 세상 사물을 일반성으로 다루지만, 역사가는 개개의 사실 그 자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사물을 일반성으로 다룬다는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일을 저지를 때, 추정이나 상상 가능한 방법, 혹은 그 일이 그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의 입장에서 풀어나간다는 말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직 시인이 견자(見者), 예언자, 원시 철학자였음을 기억하고 있는 듯하나, 라틴어로 시인을 가리키는 말 ‘vatem’은 바로 이런 점쟁이, 예언자라는 말이기도 하다. 위에서 문학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말한다’라고 한 것은 우선 문학의 이런 예언자적 성격을 말한 것이다. 즉 시인은 과거의 사실만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그리고 상상 가능한 세계까지를 전반적으로 다룬다고 말한다. 역사가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는 것이라면, 문학은 같은 과거의 사실이라도, 지금 우리 모두에게 수긍이 가는 형태로 그린다. 또한 문학은 ‘옛것을 생각하여 새로운 것을 알듯(溫故而知新)’ 미래를 점지하는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의 이성적 성격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가 문학의 ‘당위성’을 이야기한 것은, 오늘 흔히 역사 설명에 쓰이는 ‘원인―결과’ ‘인과응보’같은 관점이 문학에 유효함을 인정하고 있는 점이다. 문학이 철학적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성격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현실이 아닌 상상 가능한 영역까지를 포함하는 문학 세계야말로 총체적 비전을 기대할 수 있는 철학 중의 철학이 아니었겠는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역사적 진실과 문학적 진실을 구분하면서 문학성의 성격을 지적한 것은 플라톤의 문학론이 호메로스를 비롯한 서사시의 내용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스승과 이론을 달리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서사시가 갖는 역사성과 문학성을 구분지을 필요성을 느꼈다. 마치 오늘 우리 역사 소설, 대하 소설류에서 어디까지가 진짜 역사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가를 가려낼 필요성이 있듯이 ‘역사 재 현실 반영’이라는 우리 소설의 리얼리즘의 열기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배울 게 무척 많으리라. 지나치게 현실성, 역사성을 중시하다 보면, 문학이 필요로 하는 그 ‘철학성’이 빈약해질 수 밖에 없는 법이다. 어떻든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이 갖는 독특한 진리성을 역사 뿐 아니라 다른 과학과도 비교하면서 추출해 낸다. 위에서 문학이 갖는 ‘일반성’ 혹은 문학이 ‘일반적 방법으로’ 사물을 제시한다는 뜻은, 문학이 다루는 현실은 현실 자체보다 현실스러운 것을 요즘 말로 ‘실감나게’, 사실보다 ‘사실스럽게(veros뭢il)’ 표현한다는 말이다. 문학이 ‘일반적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수긍할 수 있는 ‘진리’를 문학이 선호한다는 이야기이다. ‘시인은 믿기어지지 않는 실재 가능성보다는, 그럴 듯한(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불가능성을 선호한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정작 시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사실 그대로인가 아닌가보다는 사실처럼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가 중요하다. 그는 『시학』 25장에서 문학 비평의 기준에 대하여 말한다.
…시인은 동물을 그리는 화가나 다른 비슷한 예술가들처럼 하나의 모방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항상 사물의 세 가지 측면 중 하나 정도를 모방해야 한다. 사물이나 사건의 과거나 현재의 모습 그대로를 모방하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그렇다고 한 말대로 모방하거나, 당연히 그랬으리라 생각되는 방향으로 모방한다. 시인은 언어를 사용하여 모방하는데, 그 언어는 남이 한 말이나 은유를 쓴다. 그리고 거기에는 시인에게 용납되는 많은 수정, 보완이 가능하다…
『시학』 25장은 마침내 시가 다른 학문에서 오류이거나 불가능한 요소까지 예술적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인정한다. 예술이 있거나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묘사한다면 그것은 적극적 사실주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이야기한대로 이야기한다면 들은 풍문에 의하여 이야기하는 점으로 용납될 것이다. 또한 그러리라고 추정하는 대로 썼다고 할 때, 신문 보도로서는 문제가 있겠지만, 문학의 허구성으로 볼 때 오히려 바람직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사시 속의 말을 보고 말 조련사가 되지 말 것이며, 시 속의 투사를 본따서 결투를 하지 말 것을 권한다. 투사는 투사의 기술이 있듯이 시인은 ‘모방가’로서의 기술이 뛰어나다. ‘그럴 듯하게’ 투사의 결투 장면을 그렸으면 되지, 결투 승부수나 창 쓰기같은 현실적 기술은 문학가의 전통이 아니다. 동물학자는 그림 속의 말의 뛰는 모습이 오른 발을 동시에 앞으로 내딛는다고 잘못 그렸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그림은 그린 사람이나 시인을 그 사실보다는 얼마나 실감있게 말의 뛰는 모습을 잘 그렸는가에 따라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의 판가름이 나게 되어 있다. 예술상에는 어떤 현실보다 ‘진실스러움’이 우선이다. 비록 이 예술이 표방한 사실이 진실과 어긋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보다 더 깊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진실을 미리 제시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현실로는 불가능한 사실을 그럴듯하게 그려내는 것을 선호한다는 말은 단순히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한 기술상의 강조라기보다는 예술의 보다 깊은 현실 성찰적 측면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가능하거나 부조리한 사물의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그리면 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전적으로 부조리하거나 불합리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더러는 짐작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일이 일어나는 추정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서구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을 지나치게 모방 기술(imitative skill)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시학』의 내용의 대부분이 비극과 희극에 관한 것이고, 연극이 어떻게 다양한 인간 계층의 캐릭터와 행위를 모방하느냐, 아니면 어떻게 감동을 줄 수 있도록 구성을 하느냐 등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더구나 플라톤의 책 『이온』에서의 ‘시는 기술(t럄hne)이 아니다’(연간론)에 대한 반박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방의 기술적 측면을 강조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기술이 있듯이, 시인은 자연이나 현실을 모방하는 기술이 있다는 식의 설명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모방의 기술적 측면에 무게를 둔 것은 사실이다. 희극이 하층계급의 행위를 모방하고, 추한 배우가 나온다면, 비극은 상층 계급의 행위를 모방하고, 멋진 배우에 의하여 연출된다는 식의 설명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희극은 현실보다 ‘더욱 나쁘게’, 비극은 ‘더욱 좋게’모방한다는 말도 모방의 기술적 측면을 규정한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여기 하나 중요한 것은 그 희극이나 비극이 웃음과 즐거움, 공포나 연민과 같은 감정을 유발시킨다고 하는 점은 외적인 모방 기술보다 감정의 주관성에 무게를 둔 사고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강조하는 대목은 실제 현실에서 ‘불가능 한 것, 부조리한 것(irrational)’이어도, 믿음이 가게, 그럴듯하게 모방하면 훌륭한 예술이 된다는 주장이다. 이 말은 실제와 다른, 현실성이 없는 모델에 대한 모방이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모방이 아니라 창조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어도 관중에게 그럴듯하게 공감대를 형성하면 좋은 문학이라는 뜻이다. 이와 비슷한 사고는 『시의 생겨남에 대하여』(4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시의 생겨남에 대해서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두가지는 모두 인간의 본능에서 나온 것이다. 모방이라고 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사람이 가지고 있는 천연적 습관이다. 인간은 대단히 모방을 좋아하는 것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이다. 사람은 모방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첫 지식 (예를 들어, 말 배우기처럼―필자 주)을 얻는다. 그리고 모방 속에서 쾌락을 얻는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느끼는 경험의 예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람의 시체나 대단히 불쾌한 짐승같은 것을 볼 때, 마음이 좋지 않다. 그러나 그 자체가 기분 나쁜 물체라고 할지라도, 일단 그것을 정확하게 그려놓은 그림을 보면 재미가 있다. 그 이유는, 배운다는 것이 철학자들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똑같이 일반 사람들에게도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비록 보통 사람들은 이런 쾌락을 함께 느끼는 정도가 약하긴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그림을 보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림을 보면서 배워가는 재미를 맛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저 그림 속의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거기에 대하여 사람마다 의견 (원래의 모습보다 잘 그렸다, 못그렸다 등등―필자 주)을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한 그림의 모델이 된 사람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해도 그는 그런 그림을 보고 재미를 느낄 수 있으리라. 그것은 모방(모델과 그림을 비교해보는―필자 주)에서 재미를 맛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색채라든지 그와 비슷한 기술적 완성도에서 오는 쾌감이다. 모방이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즐거움을 준다면, 조화나 리듬 또한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의 생겨남이 사람의 천성적 모방 본능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사람이 커가고 철이 드는 것은 어린애의 말 배우기처럼 어머니 아버지나 주위 사람들의 말을 모방하면서 이루어진다. 사람의 지식 습득이 이런 천성적 모방 행위이며, 이는 동시에 즐거움을 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학론을 들으면 우리에게는 공자의 학문론이 생각난다.
배워서 때때로 익히니, 아니 즐거운가(學而時習 不亦說乎)
여기서 공자가 배운다는 뜻도 스승이나 글의 가르침을 본따른다(모방한다)는 뜻이다. 그것을 익힌다는 행위야말로 모방 연습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학문과 문학을 이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앞서 인용한 글에도 나오듯이, ‘(모방을 통하여) 배운다는 것이 철학자(오늘의 학자)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문학이나 철학은 똑같은 배우기의 즐거움, 모방의 쾌락의 수행인 점에서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철학이 이성적 사고나 변증법에 무게를 둔다면, 문학은 감정이나 상상의 세계에 대한 공감대 형성에 주안점을 두는 점이 다르다. 문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심을 갖고 있는 연극은 희로애락을 전파하고 또한 ‘정화’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보듯 문학은 철학에 비해 실천적 측면이 강하다. 말하자면 그의 ‘형이상학’이 가장 도덕적으로 공인을 받는 현장이 연극이요 서사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독자나 관객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를 문학성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로 인식한다. 그것이 엉터리 이야기이건 황당무계한 사건이건 보는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느끼면 그것은 곧 문학적 진실이 된다. 동시에 어느 사변 철학의 진리성보다 실제로 만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함께 느끼는 점에서, 그 진리성이 훨씬 일반적(universal)이고 깊다. 문학이 역사보다 더욱 철학적일 뿐만 아니라, 철학보다 더욱 철학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시인,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