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장
사라 자신도 수태할 나이가 지났지만 믿음으로 씨를 잉태하는 힘을 받아 아이를 출산하였으니, 이는 약속하신 분이 신실하신 줄로 여김이라.
사라가 사람의 세상적인 경험적 생각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모습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주의 면전에 엎드린 채 웃으며 그의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백 세가 된 사람에게 아들이 태어날 수 있으리요? 구십 세가 된 사라가 애를 낳을 수 있으리요?' 하고
창세기 17장 17절
아브라함이 이해가 되지만 사람이 가진 시각의 한계에서 발생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사람이 평생에 목격하는 것은 젊은 시절에 임신하여 아이를 낳고 늙으면 병들어 죽는 것입니다.
경험적인 근거로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은 그것이 진실일 수 있지만 더 큰 진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세상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에 있어서 불가능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나 모든 사람은 본것들의 영향을 받기에 아브라함도 속으로 웃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와 같이 된 한 사람으로 인하여 하늘의 수많은 별과 해변의 헤아릴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은 사람이 생육하였느니라.
죽은 자와 같이 된 한 사람으로 이삭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곧 죽을 것처럼 보였지만 수많은 별과 해변의 모래알만큼의 자손을 가지게 된 사람입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안에 죽었으나 모두가 그 약속들을 받은 것은 아니로되 멀리서 그것들을 보았고 확신하여 소중히 간직하였으며, 또 이 땅 위에서 타국인이요 순례자라고 고백하였느니라.
These all died in faith, not having received the promises, but having seen afar off,
and were persuaded of them, and embraced them,
and confessed that they were strangders and pilgrims on the earth.
KJV 히브리서 11장 13절
영문 킹제임스를 자세히 보면 한글 개역과 한글 킹제임스에 모두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이 느껴집니다.
이것은 저의 견해로 가능성에 대한 의견입니다.
즉 not (only), but(also)로 문장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다 아시다시피 이것은 중학교 영어에 등장하는 숙어입니다.
not only A ~ but also B는
A뿐만 아니라 B도 라는 뜻을 가진 숙어입니다. 이렇게 번역을 적용하면 문장이 어색해지지 않습니다.
제가 의문을 가진 부분은 믿음안에서 죽었는데 어떻게 약속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믿음안에서 죽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저는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약속하고 있는데 이 번역은 그것을 깨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위 말씀에서 These라고 불리는 그들은 히브리서가 믿음의 성공사례를 짚어주고 있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인데 그들중에 약속을 받지 못하기도하였다고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afar off
멀리에, 멀리 떨어져
persuade
1. (…을 하도록) 설득하다, 설득하여 …하게 하다
2. (…이 사실임을) 납득시키다.
embrace
1. (껴)안다, 포옹하다
2. (생각·제의 등을 열렬히) 받아들이다
3. 포괄하다, 아우르다
저의 의견으로 직역을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안에서 죽었으므로, 약속 받음을 가졌을 뿐만아니라 멀리 떨어져서도 발견되어짐을 받았고,
약속에 설득되었고, 약속에 받아들여졌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이땅에 낫선 사람들이고 순례자들이라고 고백하였느니라.
계속 반복되는 구절로 모두 be ~ed의 수동태의 형식의 연결방식으로
첫문장에만 having received the promises가 있고 나머지는(by) the promises가 생략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promises라고 쓰인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즉 약속이 아닌 약속들로 쓰임은 그약속이 구원을 의미하는 약속이였다면 promise가 되어야 할 것이나 각 사람에게 각각 주신 약속들이기에 promises 약속들로 쓰인 것이라 보여집니다.
아벨에게 하신 약속과 노아에게 하신 약속과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노아는 배를 만들면 그의 가족들의 생명을 구하게 되는 약속이며, 아브라함은 자신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라는 지시에 따르면 많은 민족이 자신의 아들인 이삭에게서 나올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구원의 약속은 하나이나 각자에게 부르심의 약속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런 not only ~ but also의 숙어 해석의 문제는 이곳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 ever. Amen.
KJV 마태복음 6장 13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
한글 개역개정 마태복음 6장 13절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옵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
그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아멘.'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마태복음 6장 13절
여기서도 not (only) ~ but(also)의 구조가 보입니다. 여기서 but을 그러나로 번역할 수 가 없습니다.
but을 다만이라고 약간 애매하게 개역개정은 번역을 하였고, 말씀보존학회는 그냥 빼버렸습니다.
not only ~ but also로 적용해보면
우리가 시험에 들더라도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여 주옵소서가 됩니다.
그러러면 (not) not이 되어야 하는데 저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으로 더이상은 무리라고 보여집니다.
조심스럽지만 충분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이는 이런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낸 것임이라.
이땅이 낫선 땅이고 우리는 여기를 거쳐가는 순례자들이라면 우리의 본향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실로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되돌아갈 기회가 있었겠지만,
떠나온 고향은 아벨에게는 삶이었을 것이고, 노아에게는 배를 짓기 이전의 평범한 삶이었을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아버지인 데라가 머물던 하란에서의 삶이 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세상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도 이 세상의 삶에서 떠나서 이곳은 잠시 거쳐갈 공간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자유로와질 수 있습니다.
삶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하여 이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집을 가진 사람에게는 집에 대한 걱정이 있으며, 돈을 가진 사람에게는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없는 걱정이 있습니다.
즉 우리도 이 세상을 잠시 머무는 곳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이라는 걱정에서 자유로와질 수 있습니다.
요즘은 사람이 죽으면 모두 화장을 하기에 전에도 글을 쓴 적이 있지만 죽으면 모두 한줌의 재로 바뀌어 버립니다.
시중에는 몇십만원하는 화장품과 몇십만원하는 보약들이 있지만 모두 죽음에 이르며 그끝은 재로 바뀌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될 우리의 처지는 우리가 나그네요, 순례자라는 진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사모하는 곳은 더 좋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그들을 위하여 한 도성을 예비하셨음이라.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의 고향이 본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도성이 우리의 본향입니다.
그곳보다 더 좋은 곳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이삭을 제물로 드렸으니, 그 약속들을 받은 자가 그의 독생자를 드린 것이라.
그에 관하여 말씀하시기를 "네 씨라 불릴 자는 이삭에게서 난 자라."고 하셨으니
그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살리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음이라. 이로써 그는 모형으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이니라.
히브리서 11장 11절 ~ 19절
아브라함은 이삭에서 난자가 별들의 숫자와 해변의 모레알 숫자처럼 많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삭을 제물로 바쳐도 하나님께서 다시 그를 살리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이고 그는 모든 것으로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이 모두 약속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에 속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론은 우리도 각자 받은 부르심이 있으며 그것을 순종하는 데에는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굳게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니 우리가 믿고 의지하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위기와 죽음에서 구함을 받을 것입니다. 아벨이 그랬고, 노아가 그랬으며,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아벨은 비록 죽었지만 그의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만으로도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