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5 사순 제3주간 화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대학 때 같은 학과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대학 때 그리 친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가난한 촌놈이었고 친구는 서울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천주교 신자도 아닙니다. 존경하고 보고 싶답니다. 난 참 친구 복이 많습니다. 고향 동네 친구들, 성당 친구들, 초중고 대학 친구들, 세계 70여개국의 우리 수도회 형제 친구들, 사도직 활동을 하면서 만난 많은 신자 친구들, 너무나 고마운 내게는 정말 '보약같은 친구들'입니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우리 칠남매와 딸린 식구들과 일가 친척들, 원통 폐교 선교공동체 식구들, 밥집 작은형제의집 식구들, 그리고 우리 생태복지마을 공동체 형제 자매 친구들, 다들 하나같이 고맙고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너무나 귀한 선물입니다.
마태 18 장은 하늘 나라의 맏물인 교회 안의 공동체 생활에 관한 설교입니다. 예수님의 이 설교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1.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1-5)
2.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라.'(18,6-9)
3.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18,10-11)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작은 이들을 찾아 구하러 오셨다.'(18,12-14)
4.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고 도와 주어라.'(18,15-18)
5.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8,19-20)
그리고 오늘 복음말씀
6.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18,21-22).
'매정한 종의 비유'(18,23-35).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18,33).
예수님의 이 교회에 관한 담화에 이어, 사도행전과 서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론과 아울러 교회 공동체 생활에 대하여 자세히 보여줍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공동체 삶을 '사도들의 가르침', '기도', '친교', '빵쪼갬(성찬례)'로, 그리고 공동생산 공동분배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초대교회의 '하느님 나라의 비유'로서의 이상적인 공동체 생활은 수도생활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박해 상황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최고의 길은 순교였습니다. 박해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 예수님을 따르는 최고의 길로 등장한 것이 사막의 은수자 생활에 이어 修道 공동체 생활이었습니다. 수도생활은 순교에 준하는 삶입니다. 여러 형제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修道, 함께 도를 닦는 삶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수행정진하는 삶입니다. 수도 공동체생활의 창시자 베네딕토 성인은 처음으로 수도 공동체생활 규칙서를 만들고 수도 공동체생활을 "Ora et Labora"(기도하고 봉사하는 삶)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이 공동체 삶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사도행전에서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이야기'(사도 5,1-11), '그리스계 유다들의 불평 이야기'(6,1-7) 등을 통해 보여줍니다. 구약의 하느님 백성 공동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교회 안의 공동체들 삶 또한 쉽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성격, 사고방식, 살아온 환경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수도생활은 진짜로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교회 공동체 생활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통한 구원에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그들이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시고 완전하신 것처럼 자비롭고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게 하는 수행정진의 자리가 이 공동체 생활입니다. 완덕을 향한 삶의 길입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어려운만큼 공동체 생활이 어렵지만 믿음을 통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공동체 생활은 꼭 필요합니다. 사람은 혼자 힘으로 결코 구원될 수 없습니다. 공동체 생활은 대장간과 용광로 역할을 합니다. 대장간에서 대장장이의 손에서 풀무질, 메질, 담금질을 통해 훌륭한 연장이 만들어지듯이, 사람은 하느님의 손길로 정화와 회개와 믿음의 과정을 거쳐서 자비롭고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구원, 곧 거룩함과 존엄함과 아름다움에 이를 수 있습니다. 깨달음과 자유로움에 이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는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공동체 안에서 기도하고 봉사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정화의 과정에서 '매정한 종'처럼 자신 안에 숨겨져 있던 온갖 상처와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에 부끄럽고 힘들지만, 이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1. 눈을 뜨게 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됩니다.
2.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공부하여 말씀에 맛들이고 깨닫게 됩니다.
3.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게 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아 교만과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루카 6,39-49 참조)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기도하고 봉사하는 생활로 그리스도인들은 "좋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배워 아는 것을, 곧 주님의 말씀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이때 마귀의 온갖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때 비로소 올바른 믿음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할 수 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의 '매정한 종의 비유'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 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 하느님의 자비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하느님의 자비 체험이 우리를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게 합니다.
공동체를 통한 구원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그분의 자비 체험을 기억하고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의 온 존재는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의 결실임을 기억하고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나같이 하챦은 죄인이 무엇이라고 이토록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