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 원과 5천 원의 얼굴들
나는 중앙시장을 나와 경포대 방향 시내버스를 타고 오죽헌(烏竹軒) 부근에서 내렸다. 과거 한국에 살 때 나는 오죽헌을 몇차례 갔었는데 이날 내가 방문한 오죽헌은 입구부터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오죽헌 뿐 아니라 강릉시립 박물관, 민속박물관, 율곡기념관, 오죽헌 홍보관 등이 한자리에 모여있어 역사 종합 박물관처럼 느껴진다. 그동안 강산이 변해도 여러 번 변했을테니 이상할 것은 없다. 정문에서 본관에 이르는 광장도 여러 색갈의 태극무늬, 격자무늬 등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나는 무인 라카에 배낭을 넣고 가벼운 차림으로 들어섰다. 길 옆에는 책들고 서있는 율곡(栗谷) 동상과 견득사의(見得思義)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다. 나는 그 앞에서 한참 글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 논어에 나오는 '자장 왈 사견위치명 견득사의'(子張 曰 士見危致命 見得思義 : 자장이 말하되 선비는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칠 것을 생각하고 이득이 되는 것을 보면 의로운 것인지 살피라)의 구절이다. 율곡이 편찬한 격몽요결(擊蒙要訣)에도 강조되는 말이기에 비석에 새긴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이 진정한 선비 정신이다. 세월호 참사 때 죽어가는 승객들을 버려두고 먼저 뺑소니친 선장이나 높은 자리에 앉기만 하면 한몫 챙기는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새겨야 할 경구이다. 율곡 동상 뒤 정원에는 산책로가 있다. 5백미터 산책로 주변에는 연꽃 연못과 초충도(草蟲圖) 화단에 사임당이 즐겨 그린 오이, 수박, 가지, 맨드라미, 봉선화 등이 조화롭게 심어져 있다. 연못의 연꽃들이 만개하면 꽤나 환상적일 것 같다. 또한 연못 주위로는 청풍당, 구용정 등 작은 정자들이 세워져 평화스런 정경을 보여준다. 이곳만으로도 어느 공원 못지 않다. 숲길에서 자경문을 지나 다시 넓은 광장이 나오고 오죽원과 문성사(文成祠) 경내로 들어간다.
오죽헌 경내에는 보물 제 165호 오죽헌 건물과 어제각(御製閣), 율곡 사당인 문성사(文成祠)와 안채, 바깥채, 사랑채 등이 세워져 있다. 문성사는 1975년 이곳에 있던 어제각을 옮기고 지은 것인데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 글씨다. 주위에는 오죽헌의 유래가 된 검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문성은 인조가 율곡에게 내린 시호다. 어제각은 숙종의 어명으로 지은 것으로 율곡이 친필로 편찬한 격몽요결과 벼루가 보관되어 있다. 이밖에 안채와 바깥채, 사랑채는 근래 복구된 것이다. 옛모습 그대로인 오죽헌은 15세기 후반 건물로 온돌방과 툇마루, 대청마루로 단촐하다. 몽룡실(夢龍室)이란 현판이 걸린 온돌방에서 율곡이 태어났는데 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낳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내에는 격몽요결의 구절인 학문의 중요성과 서두르지도 쉬지도 말고 꾸준히 정진하라는 내용과 함께 수신의 네가지 중요한 요점으로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라"는 경구가 세워져 있다. 옮겨보면 '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 사자수신지요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四者修身之要也)이다. 나는 이 문장의 예를 의(義)로 바꾸어 되내어 본다. 옳은 일이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라는 뜻이 되겠다. 이것도 현시대의 중요한 덕목일 것 같다. 오죽헌 앞뜰에는 6백년 수령의 배롱나무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율곡매라는 이름의 홍매가 빨간 매화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나는 입지문을 나와 기념관을 관람했다. 이곳에는 사임당 가족의 유품과 작품,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뜰에는 사임당 좌상과 '겨레의 어머니'라는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에는 아침 대관령옛길에서 본 사임당의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시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란 제목으로 원문과 함께 새겨져 있다. 사임당 신인선(申仁善 1504-1521)은 큰딸 이매창(李梅窓)과 율곡 이이(李珥 1536-1584), 이우(李㻦)등 4남3녀를 두었다. 율곡은 대학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며 매창과 이우도 시화로 이름을 떨쳤다. 이매창은 흔히 부안기생 이매창(1573-1610)과 혼동되고 있으나 기생 매창은 훨씬 후세 인물이다. 사임당은 현대에 와서 현모양처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녀 초상이 5만원 권에 실린다고 할 때 여성단체들이 거세게 반대했다. 유교에 바탕을 둔 순종적 여성상은 21세기 진취적인 여성상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옛날 유교에서는 칠거지악(七去之惡) 즉 아내를 내쫓아야 할 일곱가지 죄악을 규정했다. 시어머니에게 불순종하는 것, 아들 낳지 못하는 것, 바람피우는 것, 질투하는 것, 나쁜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도둑질하는 것을 말했다. 여자들은 남편이 바람을 피워 첩을 여럿 거느려도 질투할 수도 없다. 여필종부(女必從夫)로 아내는 무조건 남편에게 복종해야 했다.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것도 있다. 여자는 어려서는 어버이께 순종하고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복종하며 남편 사후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법이다. 여자들을 겹겹히 묶어놓았던 족쇄였다. 나는 사임당을 다른 각도에서 본다. 개화기 여류시인 나혜석은 '현부양부(賢父良夫) 없는 현모양처(賢母良妻)는 여성을 노예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외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임당은 전통적 현모양처가 아니다. 사임당은 당시 여성으로는 보기 드물게 독립적이였으며 순종적이지도 않았고 자의식과 개성이 뚜렷했다.
열아홉에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한 사임당은 20년이나 친정에서 살았다. 아버지 신명화(申明和)가 사위에게 처가살이를 제안하고 남편이 받아들인 것이지만 그녀는 당당했다. 다음 일화는 사임당이 얼마나 당찬 여인이었는지 보여 준다. 남편은 과거를 준비한다며 절에 들어갔는데 얼마안가 아내가 보고 싶다며 집에 왔다. 사임당은 가위로 자신의 머리를 자르면서 비구니가 되겠다고 협박해 남편이 공부에 정진하도록 했다. 이원수가 훗날 미관말직이라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임당 덕분이다. 그녀는 38세에 시댁살림을 맡아 한양에 정착했다. 그동안은 시댁과 강릉을 오가며 살았다. 한번 친정에 오면 몇 달이고 있었으며 아버지가 죽자 3년상이 끝날때까지 계속 머물었다. 오죽헌을 지은 사람은 세종 때 공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으로 차남인 병조참판 최응현에게 물려주었다. 최응현은 둘째 사위 이사온에게 주었고 이사온은 사위 신명화에게 상속했다. 그가 사임당 아버지이다. 어머니 이 씨는 이사온의 외동딸이다. 이 씨는 친정집에 살면서 딸만 다섯 두었는데 둘째가 사임당이다. 사임당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어머니 이 씨와 외할머니 최 씨 부인이다. 사임당과 어머니가 친정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친정에 아들이 없기 때문이며 이는 당시 사회적으로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녀가 당호를 사임당이라고 지은 것은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로 부덕이 뛰어난 태임(太任)을 본받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7남매를 방임해 키웠으며 대부분 친정 어머니가 양육했다. 율곡도 어머니 사임당의 재주를 많이 언급했지만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율곡전서에는 “조정에서 신은 있으나마나 한 보잘것 없는 존재이오나 외조모에게 신은 마치 천금의 보물 같은 몸이오며, 신 역시 한번 외조모가 생각나면 눈앞이 아득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왕에게 아뢴 그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사임당은 7세 때부터 스승없이 몽유도원도 등 안견(安堅)의 산수화를 모방하며 그림을 배웠다. 그녀는 특히 풀벌레와 포도를 그리는 재주가 비상했다. 그녀는 오죽헌에서 외가를 통해 시화와 서체를 배웠다. 사임당은 칠남매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자신은 그림과 학문에 전념했다. 날이갈수록 그녀는 여류화가로 명성이 높아졌다. 율곡의 스승 어숙권은 사임당을 안견 다음가는 화가로 꼽았으며 시인 소세양은 그녀 산수화에 헌시했다. 사임당은 한양에 올라와 수진방에서 살다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했다. 건강하지 못했던 그녀는 그해 남편이 수운판관에 임명되어 평안도로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사임당은 51세의 남편에게 자신이 죽으면 절대 재혼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사임당은 맹목적으로 여필종부한 여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원수는 재혼하여 10년을 더 살았다. 남자 혼자 어린자녀들을 키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임당은 남편이 술집여인들과 자주 바람을 피워 속상했다는 기록도 있다. 사임당이 죽자 율곡은 16세 나이에 한때 금강산을 방황하기도 했다. 사임당이 산수화와 초충도에 뛰어난 천재화가에서 현모양처로 위상이 바뀐 것은 그녀가 죽은지 백년이 지나서였다. 율곡의 제자 송시열이 사임당 작품에 감탄한 나머지 "율곡을 낳으실만하다"고 말한 것에서 현모양처로 불리우기 시작했는데 훗날 율곡 덕분에 정경부인으로 추증되면서 현모양처 이미지는 더욱 굳혀졌다.
그러나 사임당은 유교적 윤리의 현모양처가 아닌 여성 천재화가로서의 정체성이 더욱 강조되어야 마땅했다. 그녀는 철저한 남존여비 사회에서 스스로 자기계발을 통해 서화와 학문을 완성한 여성으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낸 선구자다. 당시 성리학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먼 사임당을 그들이 현모양처로 만든 셈이다. 그래서 역사는 재미있다. 나는 오히려 사임당을 21세기 진취적인 현대여성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지닌 인물로 생각한다. 남자들에게 억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세계를 펼쳐나간 모습이 그렇다. 대한민국 화폐 5만원 권에는 사임당 초상이 5천원 권에는 율곡 초상이 들어있다. 모자(母子)가 동시에 화폐에 등장한 것은 세계 최초의 일라고 한다. 강원도에서는 오죽헌을 '세계최초 모자 화폐인물 탄생지'로 부각시키고 있다. 나는 정부에서 5만원 권 초상으로 사임당을 제안할 때 성리학 전통의 현모양처가 아닌 21세기에 걸맞는 진취적이고 선구적인 여성상을 부각했더라면 여성단체들의 반대여론이 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사임당 동상 옆에는 민속박물관과 강릉시립 박물관이 있어 대충 둘러보았다. 민속박물관에는 조상들의 의류와 생필품 그리고 다양한 민속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어 옛날 어릴적 생각이 났다. 불과 5,60년 전 우리들이 사용했던 것들이다. 또한 마당 한쪽에는 철기시대 주거지 유적들과 강릉 공항대교 도로공사 중 발견되어 이리로 옮겨진 신라시대 고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오죽헌을 나와 배낭을 찾아 둘러메고 지척의 거리에 있는 매월당 김시습 기념관으로 향했다. 강릉은 경포호수를 끼고 대부분 유적지들이 이웃해 있어 편리하다.
(2014.8.20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