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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북제주군의 세화리 소읍에서 두 달을 머물렀다가 완도행 페리호에 오르게 된 화자는 처음으로 흰 양복
의 사내를 만나게 되고, 후에 고교생
들을 만나는 것까지는 평범한 장면
이 연출됩니다.
그러다가 "중년의 취한 여자가, 저
거, 나비 아니야?라고 취한 남자에
게 외"(325p)치고, "취한 남자뿐 아
니라 두 소년과 나, 흰 양복의 사내
까지 여자의 간절한 손끝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중년 여자는 망연자실하
여 급기야는 흰 양복의 사내를 향해 구토를 하고 자신이 다 망쳐버렸다
며 울기 시작합니다. 이 장면을 보던 화자는 불현듯 송빈막(松殯幕) 혹
은, 생빈눌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립
니다.
4.3 사건 때 남편이 총에 맞아 죽고
사 형제를 혼자 키워낸 자신의 생
애를 항상 들려주곤 하던 세화리의 주인집 노파를 떠올립니다. 노파는
화자와 함께 장을 보러 가던 길에
4.3 사건을 떠올리며 오십 년이 지
나도 변치 않는 것들을 곱씹으면서 생빈눌에 대해 설명해줬던 것입니
다.
기일 안에 마땅한 택일이 나오지 않
으면 육지의 초분과 같은 생빈눌을 만들게 되는데, 노파는 지아비가 숨
지고 꼭 팔 년이 지난 사월 스물 한 살의 나이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난 맏아들을 위해 생빈눌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거기서 택일을 기다리며 자식의 젊
은 몸뚱이가 썩어가는 냄새를 맡아
야 했던 그 서럽고 섬뜩한 사연은 여
러 겹으로 둘러진채 전달됩니다.
그 겹에는 제주 4.3 사건을 비롯해 거듭 애도되어야 할, 그러나 끝내 애도를 그칠 수 없을 죽음들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어떤 예의 바른 애도도 그 죽음을 가장 가까이
에서 겪어내야 할 당사자들에게 미
치지 못할 것임을 헤아리듯이, 소설
은 죽음을 만들어낸 어떤 사건에 가
까이 가 파헤쳐 들어가는 대신, 거듭 무명천을 싸듯 하얀 이미지들로 덮
어갑니다.
이상이 <흰 꽃>에서 나오는 제주 4.3 장면입니다.「작별하지 않는
다」에서 소설가 경하는「소년이 온다」를 쓰면서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
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23p)는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소설을 끝내 놓고도 한참 동
안 그 소설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는 와중에 만주와 베트남 등지
에서 "역사를 통과한 여성들"(34p)
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찍어온 인
선으로부터 연락이 옵니다.
고향인 제주 중산간에서 목수가 된 인선은 손가락 두 개가 잘리는 것을
계기로 경하와 병원에서 만납니다.
이후 앵무새를 매개로 경하는 제주
로 가게 되고 정심(인선의 어머니)
의 이야기 속에서 1948년 제주의 "유골 수백 구가 묻힌 구덩이가 맥
락도 설명도 없이"(167p) 놓인 풍
경을 봅니다.
죽은 사람의 얼굴 위에 내려앉은 눈
송이는 녹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1948년의 소녀(인선의 어머니)가 그 이후에도 긴 삶을 살아냈다는
것을 담담하지만 아프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상실과 기억을 통해서 다시
금 회복하는 과정은 너무나 힘겹게 보입니다. 그래서 제주 4.3은 단순
한 과거의 사건으로만 존재하는 것
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현재형으
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흰 꽃>에서의 세화리 노파와 인선
의 어머니는 다르지만 같은 인물로
인식되어져 옵니다. 같은 상실감을
지녀왔었고 현재에는 회복되기 위
해서 살아가는 인물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③이윽고 터미널 옆 음식점에서 다시 만난 중년 남녀의 "산 사람은 살어야 쓰지"(337p)라는 나지막
한 대화와 함께 말없이 밥을 먹을 때, 곁에서 깔깔한 밥알들을 삼키며 화자는 더 이상 욕지기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일이 벌
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어두운 밥집에서 묵묵히 밥을 먹는
화자는 제주도로 떠나기 전에 "그
때까지 내가 욕망해온 것은 햇빛"
이었다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생
각을 합니다.
그 햇빛은 선박에서 흐느끼던 중년 여자가 견뎌내는 죽음을, 세화리 주
인집 노파가 오래전부터 안고 살아
왔을 죽음을, 화자 역시 부대끼며 살아온 죽음을 환하게 밝혀주게 됩
니다.
이후 빛이 "떨어진 꽃잎 같은 흰 밥
풀"(338p)로 이어질 때 앙금이 가
라앉은 것처럼 맑아지는 애도의 마
음을 갖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
다.
밥!
밥 입니다.
단편 <흰 꽃>의 마지막 문장에 나
오는 "꽃잎 같은 흰 밥풀"은 모든 슬
픔을 녹여주는 이미지로 녹아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한강의 詩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의 시와도 맥락을 같이 합니
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초기 한강의 밥은 회복되어지는 밥
으로, 화자가 더 이상 욕지기를 느
끼지 않는 밥으로, "영원히/지나가
버리"는 그 밥으로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합니다.
그런데「소년이 온다」에서는 밥
이 치욕으로 변환되는 것을 봅니다.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
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
은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가 않을 것
이다. 삶이 없으니까.(소년이 온다/85p)
초기의 밥은 최근의「소년이 온다
」의 김은숙에 와서 밥의 회복력이 다운되고 있습니다. 이는 갑작스러
운 역사적 변화(그것은 계엄!)가 오
면 삶은 물론이고 "먹는다는 것"은 "익숙한 치욕"이 되면서 "언제까지
나 배가 고프지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거기에는 "삶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