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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1. 묵상글 ( 부활 제4주일. - <나는 지녔는가?>. 등 )
*** 06:05. 김찬선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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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1. 부활 제4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지녔는가?>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
버림받은 벗들의
짓눌린 속 볼 수 있는
착한 눈
나는 지녔는가?
서러운 벗들의
신음소리 들을 수 있는
착한 귀
나는 지녔는가?
주저앉은 벗들에게
희망을 속삭일 수 있는
착한 입
나는 지녔는가?
쓰러진 벗들을
정성스레 일으킬 수 있는
착한 손
나는 지녔는가?
외로운 벗들에게
기꺼이 달려갈 수 있는
착한 발
나는 지녔는가?
아무 것도 아닌 벗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착한 마음
죽어가는 벗들을 살리려
목숨 내놓을 수 있는
착한 삶
나는 지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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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1. 부활 제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4.21 05:45
- 좋으신 목자의 착한 양들?
저는 가능하면 우리말을 쓰자는 주의자인데
오늘 복음의 목자에 대해서만은 한자어를 쓰자고 주장합니다.
지금 우리의 번역은 주님을 “착한 목자”라고 번역했는데
한자어 “선한 목자”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입니다.
선한 목자 안에는 착한 목자와 좋으신 목자의
두 가지 뜻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착한 목자라고 번역하면 아버지 보시기에 착한 아드님만 강조되고,
우리에게 참 좋으신 주님이라는 측면은 빠져 있는데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께는 착한 아들이시지만 우리에게는 좋으신 목자시지요.
이는 마치 맛이 좋은 과일을 맛이 착한 과일이라고 번역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께 ‘당신은 제게 참 좋은 목자십니다.’라고 해야지,
‘당신은 제게 참 착한 목자십니다.’라고 해서는 안 되지요.
어쨌거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의 목자가 되신 분이시고,
우리를 아버지 하느님께로 책임지고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목자는 삯꾼과 다르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삯꾼은 돈을 벌려는 사람 곧 돈에만 관심이 있지 양들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어서
이리로 인해 양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때 자기 목숨을 바쳐 구할 마음이 없습니다.
삯꾼의 관심 없음에 대해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당신 목숨을 바쳐 우리를 살리시는 구원자시고,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는” 유일무이한 구원자십니다.
사실 우리의 부모가 나를 아무리 사랑하셔도 나를 구원하지 못하시고,
아무리 내가 나를 사랑해도 나의 구원에 너무도 철없이 무관심하지만
주님만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이렇게 철딱서니 없는 나를 구원하시려고 불철주야 애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 구원자이시기에
당연히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래서 이렇게 또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여기서 주님께서 나를 아심은 나를 속속들이 아심이고
그래서 관심과 사랑의 다른 이름이요 그 결과입니다.
나의 죄도 속속들이 다 아시지만
나의 약함도 아시고 나의 고통도 다 아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목자는 우리를 잘 그리고 다 아시는데
우리는 이런 주님을 알고 있고 잘 알고 있습니까?
양들도 당신을 안다고 하셨는데 우리도 주님을 잘 아느냐 그 말입니다.
주님을 잘 그리고 다 알지 못하더라도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그것만이라도 아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참 좋으신 목자인데
우리는 그분의 착한 양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참 좋으신 목자인데
나는 길잃은 내 이웃 양들에게 무관심하니
좋은 목자도 아니고 좋은 양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좋으신데 나는 착하지 않음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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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1. 부활 제4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얼마 전,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습니다. 국민의 봉사자, 일꾼을 뽑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국회의원 본인만 열심히 선거 운동을 해서 당선되었을까요? 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 국회의원 후보를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을 한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습니까? 도와준 사람이 아닌, 그저 국회의원 한 사람만 알 뿐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일을 한 사람이 자기를 모든 국민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자기 역할에서 최선을 다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음 그 자체로 만족합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중요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 동네 치안을 담당하시는 분, 마트에서 계산을 도와주는 분들 역시 중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이름도 아니 얼굴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 중요한 사람들로 인해 편하게 지금을 살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알아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자리에서 중요한 자기 역할을 묵묵하게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사랑을 그리고 자기의 헌신을 몰라 준다고 억울해하고 화내는 사람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실천은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또 남들이 나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 주길 바라면서 실천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 자체로 만족하며 행동하는 사람만이 행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입니다.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정한 날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소를 계발하고 육성하는 일에 꾸준한 기도와 필요한 활동으로 협력해야 할 의무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착한 목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즉,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자기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묵묵하게 수행하셨습니다. 목자의 참된 요건은 단순히 양 치는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양들에 대한 관심과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랑 그리고 양 떼의 주인에게 충실한 것이 착한 목자의 자질입니다.
성소는 단순히 사제 성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성실하게 사는 삶이 바로 성소에 부합하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 속하는 양이 되어 자기 성소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충실한 양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성소를 다시금 생각하고, 자기 자리에서 얼마나 충실하게 살고 있는지를 떠올리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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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내가 얻은 깨달음을 다른 사람과 나누면 놀랍게도 세상에 바뀐다(메리 파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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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1. 부활 제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착한 목자이다.”(요한 10,11)
오늘은 부활 제4 주일이며, 성소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예수님 부활의 선물인 ‘성령’으로 가득 차서,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이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밖에는 없다고 증언합니다.
<제2 독서>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그분처럼 되고, 그분을 뵙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로 선포하시면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생명을 얻어주는 부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요한 10,11)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목자”로 언급됩니다. 그리고 유배를 겪으면서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당신 백성을 모아들일 미래의 “착한 목자”로 소개합니다(에제 34,11-16;스바 3,19;미카 2,12 등). 그리고 미래에 나타나 백성의 목자가 될 다윗 가문의 한 인물을 언급합니다(예레 3,15;23,4-6;에제 34,23-24;37,24;미카 5,1-4).
오늘 <복음>에서 “착한 목자”는 하느님과의 하나 됨에 그 바탕이 있습니다. 곧 그는 ‘하느님이 보낸 목자’인 동시에, ‘보낸 분의 마음에 드는 목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삯꾼과는 달리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로 드러납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 10,14-16)
여기에는 “착한 목자”의 특성이 세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의 <첫째> 특성은 양들과 서로 압니다. 곧 양 없는 목자는 있을 수 없으며, 목자는 항상 양과 함께 있어야 목자 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있기에 서로를 압니다. 이는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알 듯, 밤낮 같이 지내면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곧 양들을 “안다”(γινωσκω)는 것은 ‘사랑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착한 목자”의 <둘째> 특성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습니다. 곧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목자는 양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놓을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바칩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의 존재 근거요 신원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착한 목자”의 <셋째> 특성은 ‘양 우리 밖’에 있는 양들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 10,16)
예수님께서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스스로 자유로이 목숨을 내놓으십니다. 그리하여 목숨을 다시 얻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7)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사랑의 죽음과 부활,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요한 10,17)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를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 바로 이 일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우리 주님에게서 받은 명령입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는 바로 이처럼, 부여받은 소명을 사는 일입니다. 곧 자신이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사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듯이, ‘성소’도 “양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이처럼, ‘성소’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양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데려오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고귀한 사랑을 ‘성소’로 받아 살아가고 있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선사하신 이 아름다운 ‘사랑의 성소’를 삶으로 불태워야 할 일입니다. 리지외의 소화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성소는 사랑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5)
주님!
당신의 눈은 항상 저를 향하여 계십니다.
저를 살리기 위해 당신을 내놓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보십니다.
주인이면서도 군림하지 않으시고 시중들기 위하심입니다.
이 지고한 당신의 사랑 앞에, 황송함으로 무릎 꿇어 경배합니다.
오늘 제 마음이 형제를 향하여 있게 하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놓기 위해서 그러하게 하소서.
섬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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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1. 부활 제4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착한 목자이시고 우리는 양입니다. 그리고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습니다. 스스로 내놓는 것입니다.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용기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성소(聖召)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부르십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구원을 선물로 주시고자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 중에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하느님 자녀에로의 부름입니다. 일반적으로 ‘성소’ 하면 성직자나 수도자의 부름만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성직자, 수도자 이전에 세례를 받아야 하고 세례 이전에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기 부름을 받은 대로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수도자는 수도자로서 삶을 살아야 하고 결혼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혼인 안에서 가정을 꾸리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서로 다른 성소는 더 높고 낮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양들을 알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이웃을 위한 희생, 봉사에 한몫을 다 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부름입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의 양 떼를 위해 목숨을 겁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양도 목자를 알게 되고 또 그의 음성에 기쁘게 달려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 반가워야지 부담스러우면, 안 되겠습니다. 부담스러우면 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왕이면 반가운 목소리, 기다려지는 음성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 만큼, 나도 주님을 알기에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모르면 그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정 안에서, 또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를 알고 서로의 음성에 귀 기울여 주는 넉넉함이 그 구성원임을 확인해 줍니다. 한 주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이웃을 위한 헌신과 희생, 봉헌의 삶을 새롭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성직자 수도자들이 많이 나와야 영적 풍요로움에 도움이 되느니만큼 특별 성소의 부름에 응답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우리 공동체에서도 가까운 시기에 성직자 수도자 성소에 응답할 수 있는 젊은이가 나오길 희망합니다. “우리 모두는 고유한 생활 신분에서 나름대로 작은 방식으로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희망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직자는 “복음 선포를 위하여 자신을 봉헌하고,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성찬의 빵과 함께 자신을 쪼개어 나누며,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하느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모든이에게 드러냅니다”(프란치스코교황).
저는 누가 신학교 입학의 동기를 물으면 ‘오기(傲氣)로 갔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께 지나가는 말로 “신학교 갈까?” 하고 던져놓은 것이 어머니에게는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저에게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날 버스터미널에서 친구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 대뜸 “너 신학교에 가야 하겠니? 신부 되는 것도 좋지만 부모님께 효도 해야지. 어머니께서 걱정하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 어머니하고 저의 어머니하고 그러셨답니다. ‘사위 삼았으면 좋겠다.’‘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다.’ 실은 그 여자 친구보다 더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거든요. 어쨌든 그 말씀을 듣고 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신학교 갈까?’가 아니라 “어머니, 저 신학교 가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반대는 시작되어 “신학교 가면 학비는 물론 용돈도 주지 않을 것이고 너와 나는 끝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기가 생겨서 “그래도 갑니다” 하고 버텼습니다. 그때 후원자가 생겼습니다. 바로 위 누나가 공무원이었는데 학비를 마련해주겠다고 제 편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때 누나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안배였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흘러 원서를 준비할 때가 되었습니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본당신부님께서 추천서를 써 주실까? 실은 본당을 떠나 공부하였기 때문에 신부님을 잘 몰랐습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어쩌나?
그런 가운데 시골 공소를 방문하신 테오필라 수녀님의 “하느님의 뜻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러니 힘들게 하지 말고 기쁘게 보내라”는 말씀에 어머니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입학할 때는 학비도 살림살이도 모든것을 어머니가 준비해 주셨습니다. 신학생 신분으로 있을 때 여자에게 전화만 오면 걱정하시고 신부가 되어서도 자나 깨나 걱정하셨습니다. 이놈이 끝까지 잘 살아야 할 텐데…그러면서 매일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기도하시면서 꼬박꼬박 졸기도 하시고, 그래서 묵주기도 한번을 몇 시간을 하시는 줄 모르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도 나오고…그냥 주무시라고 해도 상관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당신이 할 것은 다 해야 한답니다. 졸음을 지적하니 자존심이 상하셨나 봅니다. 이런 어머니의 기도가 저를 여전히 지켜주었고 이제는 신부로 33년을 살았습니다.
한번은 여자 신자 분이 옆자리에 앉으신 것을 보고 ‘보기 좋지 않다’. ‘뒤를 돌아보지 마라.’고 편지를 쓰셨습니다. 미국 사목을 할 때 한번 편지를 받았는데 ‘공부할 때 용돈을 제대로 주지 못한 게 가슴이 아프고 신학교 간다고 할 때 반대한 것이 안타깝고 면목이 없으시다’고 쓰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신부님 생각하면 한없이 기쁘다. 앞날을 보고 사는 것이 인생이니까 어려움을 잘 견뎌라. 집 걱정, 어미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길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하느님의 부르심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옆에서 잘 부추겨 줘야 하고 어떤 사람은 오기가 생기도록 해 주어야 하고요. 사실 ‘제가 신학교 갈까?’ 하고 얘기한 것도 시골 공소 회장님이 “너는 신부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씀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시골 공소에 어울리는 4명이 있었는데 하나는 시집가고 하나는 수녀가 되고 둘은 신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한마디 말이 귀한 열매가 맺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응답은 나의 몫입니다. 하느님은 부르시고 나의 협력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젊은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은총을 입기를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참된 목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꺼이 선택하시길 기도합니다. “어느 곳에서 살아가고 있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일에 투신합시다. 투신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집시다.”(프란치스코 교황).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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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1. 부활 제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댈러스에 있으면서 뉴욕에서 왔다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제가 살던 동네에서 왔다는 분을 만나면 분위기가 좋아집니다. 서로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주 가던 공원, 즐겨 가던 식당, 미술관, 공연장 등을 주제로 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왔다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제가 살던 명동에서 왔다는 분을 만나면 분위기가 더욱 좋아집니다. 명동 근처에는 갈 곳도, 볼 곳도 많습니다. 한옥마을, 남산, 청계천, 경복궁, 대학로, 남대문 시장이 있습니다. 먹을 곳도 많습니다. 광장시장의 빈대떡, 종로의 닭 한 마리, 북창동의 해장국, 명동의 칼국수, 을지로의 골뱅이, 남대문의 갈치조림, 장충동의 족발, 명동의 냉면 집이 있습니다. 군대에서는 ‘주특기’가 있습니다. 운전, 행정, 통신, 공병, 정보, 헌병, 의무, 군종, 보병‘과 같은 주특기가 있습니다. 다른 할 이야기도 많지만 자신의 주특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눈에서 빛이 나기 마련입니다. 저는 행정 업무 그 중에서도 동원 예비군에 대한 업무를 보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의 주특기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기도, 선교, 성경, 나눔, 봉사, 성지순례’와 같은 것들이 주특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고, 교회에서 정한 ‘성소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하느님께 추수할 일꾼을 청하여라.”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님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부활 제4주일을 성소주일로 정했습니다. 추수할 일꾼인 ‘성직자와 수도자’가 될 젊은이들을 교회로 초대하자는 의미로 성소주일을 제정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성소주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습니다. 제가 5년 동안 교구에서 성소국장으로 사목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된 업무는 신학생을 선발하는 것입니다. 신학생들이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교구의 서품식과 성소주일 행사를 주관하는 것입니다. 성소국장으로 있으면서 기억에 남는 것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3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사제’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100만 명이 넘게 보았고, 지금도 예비자 교리에서 사용하는 성당이 있다고 합니다. ‘사제’라는 작품을 통해서 사제가 되는 과정, 사제 서품식과 새 사제의 이야기, 다양한 사목의 현장을 담았습니다. 혹 관심이 있으신 분은 유튜브에서 ‘사제’를 검색하면 볼 수 있습니다. ‘구독과 좋아요.’는 사랑입니다. 제가 제작했기 때문에 저도 잠깐 출연합니다.
두 번째는 예비신학생을 위한 기숙사입니다. 신학교 옆에 5층 건물이 저렴하게 매물로 나왔습니다. 교구에서는 건물을 매입했습니다. 건물을 어느 용도로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관리국장 신부님은 원로 사목자를 위한 숙소로 사용하자고 하였습니다. 신학교 옆에 있으니 신부님들도 좋아하실 거라고 하였습니다. 청소년국장 신부님은 청소년 사목을 담당하는 신부님을 위한 숙소로 사용하자고 하였습니다. 신학교 옆에는 가톨릭 회관도 있고, 명동과도 가까우니 신부님들도 좋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예비신학생들 위한 기숙사로 사용하자고 건의 하였습니다. 예비신학생들이 신학교에 가까이 있으면 사제성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결정은 추기경님의 몫이었습니다. 저는 식사를 마치고 추기경님과 산보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추기경님 저 건물을 어디에 투자하시겠는지요?’ 원로 사목자를 위한 용도라면 과거에 투자하는 것과 같습니다. 청소년 사목자를 위한 용도라면 현재에 투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비신학생을 위한 용도라면 미래에 투자하는 하는 것입니다. 추기경님은 어디에 투자하기로 하셨을까요? 맞습니다. 추기경님은 저의 손을 들어 주셨고, 건물은 예비신학생을 위한 기숙사가 되었습니다. 벌써 10년이 지난 일입니다.
세 번째는 ‘교황방한 준비위원회’입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아시아 청년대회와 124위 시복식을 위해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저는 교황방한 준비위원회에서 ‘영성신심분과’를 맡았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제가 성소국장이었기 때문에 그런 임무를 주었습니다. 저는 124위 시복식을 위한 기도문을 제작하였고, 시복식에 필요한 자료집을 만들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그런 소중한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봉사자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소국장으로 5년 동안 있으면서 외부로 드러나는 일은 하였지만, 저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은 사제로 살아가는 데는 많이 부족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의 아픔과 고뇌를 이해하는 것도 많이 부족했습니다.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겸손한 사제가 되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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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1. 부활 제4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양들을 알고, 양들도 나를 안다. 이것은 아버지와 내가 서로 아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목숨을 내어놓습니까? 서로 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답은 너무나 뻔한 것 같지만 ‘사랑’이라는 두 글자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서로를 알고자 합니다. 함께 있고자 합니다. 그래서 결혼도 하는 것이고 그래서 부모가 자녀를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목숨을 내놓는다.’라는 말. ‘내놓는다.’라는 말의 의미를 저는 두 가지로 바라보고 싶습니다. 하나는 ‘포기한다.’라는 의미와 또 하나는 ‘봉헌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 말 자체로 행복한 말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계십니까? 사랑을 하게 되면 포기해야 하는 것도 생긴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셨듯이 우리도 주님을, 혹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사랑을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던 삶을 사랑의 대상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봉헌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포기와 봉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계십니까? 혹시 예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혹시 말로만 사랑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한치의 포기도 없고, 양보도 없으면서, 자기 자신으로 가득 들어차 있으면서 말은 사랑한다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안에 있는 온갖 욕심과 악습과 시기와 질투는 버리지 못하면서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포기하십시오. 나 자신을,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하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예수님을 위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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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주지 마세요.
공원을 산책하는데
플랜카드를 만들어 걸어 놓았습니다.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길거리 동물에게 밥주지 마세요.
그냥, 마음이 별로 였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 마음이 별로 였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별로였나봅니다.
공원 저 구석에 밥그릇이 놓여 있었습니다.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주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를 빕니다.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 주셨듯이 필요한 곳에 필요한 은총이 내리기를.....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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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1. 부활 제4주일. 키엣 대주교님.
우리 역시 누군가의 목자입니다
양과 목자, 유목민들의 삶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일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양이며,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은 억압이 아닌 진정한 사랑, 이해와 배려, 희생의 사랑으로 양들을 돌보십니다.
이해의 사랑
배움을 통한 이론적 사랑이 아닌 마음으로부터의 사랑, 사람들은 사랑할 때 아주 작은 소리와 미세한 움직임, 영혼의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세심해집니다.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없는 영혼의 소리를 듣고,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영혼 깊숙히 숨겨진 것까지 보고 느끼고 알게 됩니다.
“나는 내 양을 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인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현실과 내면의 갈등, 짊어지고 있는 짐이 무엇인지 등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며 그 고통을 같이 공감하십니다.
우기가 고통받을 때 영혼 속의 주님도 함께 고통받으시고, 우리가 상처받을 때 그 분께서도 그 상처에 괴로워하십니다.
배려의 사랑
깊은 이해는 배려에서 비롯되고 배려는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사랑이 있어야 관심이 생기고 관심이 있어야 그가 무엇을 필요로하는 지 알수 있습니다. 즉, 배려란 상대방이 필요한 것을 알 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유하는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독립적인 성장, 자유를 저해하는 보살핌은 독단적이고 구속적인 배려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나약함과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도록 도움을 주십니다.
희생의 사랑
희생보다 더 확실한 사랑은 없습니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기꺼이 희생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을 아시기에 고통받을 때 위안을 주시고 돌봐주십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주님이 계시기에 지금 우리는 이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받은 행복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과 같은 선한 목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목자이며 형은 동생들의 목자입니다. 학교에서 교사는 학생들의 목자이며 기업과 공동체의 대표는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목자입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누군가의 목자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어 목자의 책무를 잘 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간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영적인 삶을 돌보는 하느님의 사업을 이어나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러한 연유로 교회에서는 성소의 날을 정하고 있습니다. 환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고 학생에게는 교사가 필요하듯 신자들에게는 사제가 필요합니다. 기쁨과 슬픔, 아픔을 같이 공감하고 나누기 위해, 다음 삶을 위한 영적인 삶을 지지해 줄 수 있는 목자가 필요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사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사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권유해 주십시오. 무엇보다 사제들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사제들이 예수님과 같이 나의 양을 알고, 양들의 마음을 알아, 그 양을 사랑으로 돌보고,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선한 목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
저희에게 주님을 닮은 선한 목자를 보내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저희가 가족과 이웃, 사회의 선한 목자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 양떼를 이끄는 모습에서 느낀 점을 묵상해 보십시오
2. 나 역시 어느 누구의 목자입니다. 어떻게 나의 양떼를 돌보고 있는 지 생각해 보십시오.
3. 사제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까? 본당신부님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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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1. 부활 제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소(聖召)의 여정
-희망의 순례자-
“착한 목자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주님은 말씀으로 하늘을 여셨네. 알렐루야.“(입당송:시편33,5-6참조)
오늘은 제61차 성소주일이자 일명 착한목자주일이기도 합니다. 희망의 순례자, 평화의 건설자로서 불림 받는 우리 모든 신자들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는 절호의 날이기도 합니다. 새삼 성소주일에 확인하는 바,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인, 우리 삶의 모두인 착한 목자 예수님입니다. 문득 제가 좋아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15,1)
얼마나 멋진 하느님 아버지의 정의인지요! 순간 제 좋아하는 열정넘치는 농부 자매 레지나가 생각납니다. 착한목자이자 농부이신 아버지를 닮아 평생 민초(民草)들의 목자로 말씀의 농부로 일관하신 예수님이요 저도 묵묵히 “말씀의 농부”가 되어 평생 날마다 하루하루 우보천리(牛步千里) 우직하게 강론을 씁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
라는 옛 어느 대선후보자의 말처럼 예수님도 그러했을 것이며 저 또한 초지일관 그런 심정입니다. 오늘 주님의 수제자이자 제1대 교황인 사도 베드로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의 확신에 넘친 말씀이 우리의 정신을 새롭게 일깨웁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4,11-12)
바로 이런 착한목자 예수님께 불림받은 우리 믿는 이들이요, 예수님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하기에 저는 서슴없이, “예수님은 언제나 영원히 나의 사랑이자 운명이다!” 고백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참으로 착한목자 주님을 따라 사는 모든 이들의 고백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착한목자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사람들이라면 참으로 초연한 자유를 누릴 것이며 다음 옛 어른의 말씀도 그대로 공감할 것입니다.
“가난은 쪼들리는 처지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남들과 비교하는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된 상태다.”-다산
“도에 뜻을 두면서도 누추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선비와는 함께 도를 논할 수 없다.”-논어
이렇듯 도(道)자체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듯 가난을 사랑하는 참 선비같은 참 성소자들인 우리의 심정을 대변하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참 좋습니다.
바로 이런 우리 성소자들의 빛나는 모범이 현재의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입니다. 말그대로 교황 재위 11년 동안 희망의 순례자, 평화의 건설자로서 일관된 삶입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를 열었을 때 금과옥조의 말씀들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역사가들에게 교황님은 인류(humanity)의 종들이자 전문가들이 될 것을 요청하다.”
어제 교황님을 찾은 역사가들에게 주신 요지의 말씀입니다.
“평화의 장인(artisans of peace)이 되십시오.”
엊그제 교황님을 방문한 이태리 5천명의 소년소녀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목자들이 되십시오.”
어제 교황님을 찾은 미래의 사제들인 신학생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교황 비오 7세(1742-1823)는 참으로 힘든 시대 소통의 달인이셨다”
역시 어제 비오 7세에 관한 요지의 귀한 말씀을 나눠 주셨습니다.
시간 되는대로 위 원고들 출력하여 읽어보려 합니다. 하루하루 교황직의 성소에 한결같이 충실하신 88세 고령의 교황님지만 정신은 하느님을, 착한목자 예수님을 닮아 영원한 청춘입니다. 젊음은, 영적건강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찾는 열정에, 사랑에 있습니다. 교황님의 제41차 성소주일 담화문도 공감, 감동 만점입니다.
-“성소주일은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아버지께 거룩한 성소의 선물을 청하는 기도에 특별히 봉헌된 날입니다. 기도는 희망의 첫 번째 힘입니다. 여러분의 기도하면 희망이 자라나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저는 기도가 희망으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편에 희망이 존재하지만, 그 희망에 이르는 문은 나의 기도로 여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례자입니다.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순례는 목적없는 여행이나 정처없는 방황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날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곧 평화와 정의와 사랑 안에서,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걸음을 내딛으려고 노력합니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며 이를 실현하려고 최선을 다하여 한걸음 한걸음 내딛고 있기에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입니다.
모든 성소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희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성취된 구원은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희망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이런 희망에 힘입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도전들에 맞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궁극적 소명을 날마다 미리 맛봐야 합니다. 바로 지금도 우리는 일치, 평화, 형제애를 향한 하느님의 꿈을 실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누구도 이 부르심에 배제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고유한 생활 신분에서 나름대로 작은 방식으로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희망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일어나십시오! 잠에서 깨어납시다. 우리가 저마다 교회와 세상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성소를 찾고 희망의 순례자, 평화의 건설자가 될 수 있도록, 무관심을 뒤로하고 우리 스스로를 가두어 놓곤 하는 감옥의 문을 열어젓힙시다. 삶에 대한 열정을 지닙시다.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러 가신 것처럼, 우리 또한 기쁨의 전령이자 새 생명의 원천, 형제애와 평화의 장인이 될 수 있도록 일어나 희망의 순례자로서 길을 나섭시다.”-
수제자 베드로의 후계자 다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주옥같은 성소주일 강론의 핵심부를 인용했습니다. 우리 모두 희망의 순례자, 평화의 건설자로 각자 불러 주신 삶의 자리에서, 살아 있는 그날까지 “성소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소의 여정의 중심에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요 도반이신 착한목자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다음 복음 말씀이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켜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나는 착한목자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착한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
짧은 말마디이지만 심금을 울리는 전율케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착한목자 예수님을 사랑하고 알아 닮아가는 성소여정임을 깨닫습니다. 희망과 평화의 성소 여정은 바로 자발적 사랑의, 끊임없는 비움과 겸손의 순례여정이자 순교여정임을, 날로 착한목자 예수님과 더불어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깊어지는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의 마지막 소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떼가 될 것이다.”
온 인류를 품에 안은 아버지의 마음을 대변하는 착한목자 예수님을 닮아 부단히 우리의 시야를 넓혀야 함을, 또 세상을 향해 활짝 교회의 문을 열어야 함을 배웁니다. 착한목자 예수님 눈에는 온 인류가 하느님의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의 말씀이 우리를 격려하며 성소의 여정에 샘솟는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1요한3,1-2참조)
바로 언젠가 뵈올 하느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요, 마침내 그분을 닮아가는 성소의 여정이 끝날 때 주님과의 반가운 만남이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니 성소자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우리 삶의 자리에서 기쁘게 감사하며 희망의 순례자로 평화의 건설자로 살아갑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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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1. 부활 제4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목자와 양의 비유를 들으시며 당신이 착한 목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목자와 양떼의 모습은 유랑생활을 하는 아람인으로서 목축생활을 한 이스라엘 조상들의 머리 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바빌론, 아시리아와 같은 고대 근동제국의 왕들은 신으로부터 양떼를 모으고 돌보는 일을 위탁받은 목자로서 자처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성서는 그리스도가 보여주는 목자상을 통해서 하느님과 당신 백성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양떼를 몰고 다니는 목자의 비유는 양떼의 주인이며 동시에 동반자인 두가지 측면을 말합니다. 목자는 야수로부터 양떼는 지키는 힘을 가진 강한 모습을 지니면서도 양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기울여 그들의 사정을 숙지하고 온갖 조치를 다하여 약한 양들을 안아주고 모든 양들을 자기 자녀들처럼 헌신과 사랑을 지닙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착한 목자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교회의 출발점입니다. 성서는 목자들의 자격과 의무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사도바오로는 티토에게 보낸 서간에서 교회 지도자의 자격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간략하면 흠잡을 데가 없고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고 순종하는 사람,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사람,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하고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참된 말씀을 굳게 지켜 격려와 충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을 얘기합니다. 베드로의 첫째 서간에서 사도 베드로는 지도자의 의무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양떼를 돌볼 때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지배하지 말고 모범이 되기를 권고합니다.
이러한 착한목자의 모습은 한국교회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한국의 ‘쿼바디스;라 할 수 있는 압록강에서 돌아선 주문모 신부의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주문모 신부는 당신이 없으면 조정에서 천주교 신자를 잡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한국사목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건너가려고 의주까지 갑니다. 압록강의 마지막 밤, 다음의 묵상이 주문모 신부를 한국으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양떼는 목자를 위해 목숨을 바쳐 죽어갔는데 목자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강을 건널 수 있느냐” ‘내가 주문모 신부요’ 자수하여 1801년 4월 19일 순교하기 되는데 한국최초의 사목자가 돌아가심으로서 한국교회의 중요한 고비를 맡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 안에서 목자의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 책임이 과중하여 어려운 일들을 외면하고 싶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을 때까 있습니다. 가장으로서 혹은 각 공동체의 책임자로서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다음의 성 프란치스코의 글을 묵상하며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용기를 내어 견뎌내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업적을 이룬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링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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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브와-시뇰-이삭에서 피흘리는 성체
벨기에-1405년
1405년 성령강림절 전 금요일에 패터 오스트 (Peter Ost) 신부가 접전한 미사
그러나 오스트 신부는 이 사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영성체 때 다른 성체와 함께 축성된 성체조각을 분배해 주기 위하여 그는 성체포에서 가만히 성체조각을 떼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허사였다. 그 성체조각은 마치 저항을 하고 있는 듯 했으며 성체포에 단단히 달라불어 있었다. 오스트 신부는 너무 놀라서 그 성체조각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 때 그는 그 성체조각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하여 성체포를 붉게 물들이는 것을 보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놀랐다. 그 신부님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몸을 부들부틀 떨기 시작했고 실신할 지경이었다. 복사가 곧 그것을 알아채고 재빨리 기사 쟝에게 제대를 보라고 눈짓하였다. 쟝은 피를 흘리는 성체의 기적을 보고서 이것이 주님께서 탄식하신 것과 어떤 관련이 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깊은 연민을 갖고 그는 미사를 드리던 사제에게 속삭였다.
“신부님, 그렇게 놀라지 마십시오! 이 기적은 하느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뜻을 알리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오스트 신부는 용기를 내서 성스러운 십자가에 대한 미사 전례를 계속 진행하였다. 그는 여태까지 경외심을 갖고 성스런 신비의 미사성제를 접전하지 않았었다. 미사를 집전하면서 그는 끊임없이 피를 흘리고 있는 성체조각을 바라보았다.
성스러운 미사성제가 끝난 후에 오스트 신부는 미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성체조각을 보여 주었다. 이 성체조각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은 마침내 차츰차츰 손가락 하나 굵기만큼 고이더나 손가락 세 개 굵기만큼 되어서 성체포 전체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성체 조각의 찬연한 흰 빛은 변하지 않은 채 그 위에 그대로 떠 있었다.
성령강림절 전 금요일부터 성령강림절 후 화요일까지 5일 동안 그 성체는 피를 흘리고 있어서 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급히 달려 와서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이 기적의 성혈은 성체성혈 대축일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마르기 시작하였다.(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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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1. 부활 제4주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부활 제4주일의 복음은 ‘착한 목자’에 대한 긴 담화의 결론 부분에 해당합니다.
오늘 복음은 “나는 착한 목자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이를 부연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첫 번째 “나는 착한 목자다.”라는 선언 뒤에는 그 ‘착함’의 이유가 설명되는데,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목숨”(그리스 말 ‘프쉬케’)은 오늘 본문에 여러 차례 등장할 정도로 강조된 단어인데, ‘숨’ 또는 ‘호흡’을 뜻하며, 인간의 영혼, 생명, 활력 등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자기 숨과 영혼을 내주어 상대를 대신 살게 함을 뜻합니다.
그와 반대로 ‘목숨을 내놓지 않는 목자’는 “삯꾼”입니다.
삯꾼은 자기가 살고자 양들을 이용하고 불필요해지면 내다 버립니다.
그가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등장한 “나는 착한 목자다.” 다음에는 ‘앎’에 대한 내용이 소개됩니다.
‘안다’(그리스 말 ‘기노스코’)라는 말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배우는 인지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고, 상대의 본질을 섬세하게 깨달아 이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행위까지 포함합니다.
그래서 제2독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셨는지를 생각하여 보라고 권고합니다.
특별히 오늘 제1독서에는 작은 반전이 등장합니다.
착한 목자는 사랑하는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만, 동시에 그 착한 목자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십니다.
목숨을 내놓는 목자는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 시기에 착한 목자 본문을 봉독하는 이유입니다.
양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맡겨진 양들을 하나하나 알고 생명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 것, 그래서 그의 숨이 양들의 숨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 이 ‘착함’만이 목자가 가지는 진정한 힘이며 권위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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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1. 부활 제4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삯꾼과 목자를 비교하십니다.
삯꾼은 양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만 생각하기에
어려운 상황이 오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삯꾼이 양들에게 관심이 없는 반면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잘 압니다.
즉 삯꾼은 양들과 관계를 맺지 않지만
착한 목자는 양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그 양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이 관계는
단순한 관계가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목자가 양을 아는 것을 넘어서
양들도 목자를 알고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에게 관심을 갖는 반면
양들도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서로를 안다는 것은
서로 동등하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성부와 성자가 서로 동등한 위격을 가지시기에
성부와 성자는 서로를 잘 아십니다.
그런 것처럼
목자와 양들이 서로를 안다는 것으로
목자와 양이 서로 동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양들은 우리들을 말할 때
서로 동등하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신이라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아시고
우리에게 관심이 있으신만큼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더 이상 하느님께서는
전지 전능하심을 이야기하시면서
하늘 높은 곳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 오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와 늘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모든 어려움
모든 고통
모든 기쁨
삶의 모든 순간에
나와 함께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것은 단순히 거리 상으로 가깝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나를 지지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나의 지지자,
나의 후원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우리에게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삶의 모든 순간,
특히 어려움의 순간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분을
만날 수 있는 복된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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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1. 부활 제4주일. 함승수 신부님.
굿뉴스 박영희 2024-04-21 ㅣNo.171697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나해] 요한 10,11-18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얼마 전, 면직된 전 신부가 이끄는 기도 공동체의 실상이 방송을 통해 폭로되어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 공동체를 이끄는 면직 신부는 성모님이 자신의 꿈에 나타나 계시를 내려준다고 주장하며 여러가지 지시와 명령들로 신도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철저히 통제했는데, 그 내용들은 가톨릭 교회의 정통 교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단’이었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 면직 신부를 철저히 믿는 신도들은 한눈에 봐도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그 무리한 요구들을 ‘구원의 진리’로 여기며 철저하게 따랐지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자매가 목숨을 잃는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10년 이상 그 공동체에 몸담으면서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다 보고하고 허락을 구했던 그녀가, 병원치료를 당장 중단하고 기도의 힘으로 암을 극복하라는 면직 신부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가 암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또한 많은 신도들이 면직 신부의 종용에 따라 집과 현금 등의 재산을 전부 그 공동체에 봉헌하기도 했습니다. 가족도 미래도 생각하지 않고 말이지요. 이 모든 일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목소리와 우리를 멸망으로 이끄는 악마의 속삭임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해 생긴 일입니다.
오늘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묵상하는 성소주일입니다. 그 부르심은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가지 목소리와 방식을 통해 주어지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유혹의 ‘소음’들이 가득하기에 주님의 부르심을 제대로 알아듣고 응답하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판단과 식별의 기준입니다. 내 귀에 들리는 목소리가 나를 파멸로 이끄는 ‘삯꾼’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참된 목자’ 주님의 목소리인지 헷갈린다면 그 목소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삯꾼은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며 이해타산을 내세우고, 자기가 더 큰 이익을 얻을 길, 자기가 더 큰 명예와 권력을 누릴 길을 찾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흑심’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달콤한 감언이설로 우리를 유혹하지요. 자기를 따르면 고생 없이 꽃길만 걷게 해주겠다거나, 자기를 따르기만 하면 일확천금,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해주겠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꼼꼼히 따져보면 궁극적으로 나에게 이로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철저히 그의 배만 불려주게 될 뿐입니다. 그런 그의 진의를 모른 채 욕망에 사로잡혀 무턱대고 그의 말을 따랐다가는 나도 삯꾼 같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을 등에 업고 자기 영광을 쫓는 사람, 주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더 소중히 여기며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쓰다고 하지요. 우리를 참된 행복과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목소리가 그렇습니다. 당장은 그 말씀이 듣기 불편하고 따르기 싫습니다. 그대로 따랐다가는 큰 손해를 보거나 사람들로부터 ‘바보’라고 손가락질 당할 것만 같아 받아들이기가 망설여집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존재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양들을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양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오히려 양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심지어 목숨까지도 바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양들은 그가 하는 말이라면 주저하거나 고민할 필요 없이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지요. 착한 목자이신 주님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한 번 사랑하신 이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당신 자신보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우리를 먼저 생각하시고 챙기시는 분입니다. 그런 그분의 사랑을 신뢰한다면 당장 듣기 거북하고 따르기 힘들다고 해서 주님 말씀을 함부로 흘려버리지 않습니다. 입에 쓴 약이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듯, 듣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힘든 그 말씀이 우리 영혼을 건강하게 만들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열심히 따라가다보면 거기에 내가 살 길이, 참된 행복이 있을거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목소리를 제대로 식별하고 따르게 도와주는 그 믿음과 희망을 어떻게 해야 우리 마음에 지닐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그 방법을 ‘앎’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십니다. 착한 목자와 그분의 양은 서로를 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머리로,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함께’ 있으면서 경험을 통해 상대방의 세세한 점까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앎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나를, 내가 주님을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비로소 제대로 알게 됩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마음과 뜻을 깊이 헤아리면서 알게 된 살아있는 ‘앎’이, 주님과 거리를 두고 머리로만 그분의 뜻을 추측하는 죽은 ‘앎’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참된 목자이신 주님은 당신이 사랑으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우리 또한 사랑으로 당신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주님과 우리가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며, 그 앎을 통해 더 깊은 친교 더 완전한 일치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주님으로부터 진정으로 사랑받는 그분의 참된 양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방법을 하느님을 위한 희생과 봉헌으로 설명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그분 뜻에 순명하기 위해 기꺼이 당신의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으시며 그런 마음가짐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드님이 당신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봉헌한 그 생명을 다시 돌려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먼저 보여드려야 그분께서 그 대가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식으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특별히 어떤 행동을 해야만 조건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능력이나 자격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으시며 먼저, 차별 없이, 한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지요. 다만 그런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분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편에서 그럴만한 준비를 먼저 갖추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준비로 하느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희생과 봉헌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 희생하는 것이 우리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며, 그 사랑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따르는 그분의 참된 양떼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 사실을 되새기는 것이 오늘 성소주일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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