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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가 되신 하나님
창 18: 1-15
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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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을 읽고 있으면 조금은 어설픈 연극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는 이야기인데 다른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릅니다.
여호와께서 이런 식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적은 없었습니다.
항상 당당하게 자신을 여호와라고 소개하시면서 그를 찾아 오셨는데 이번에는 좀 다른 것이지요.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나그네의 모습으로 감추시고는 아브라함을 찾아오십니다.
성경에는 세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이 중에 누가 여호와이신지, 어떤 사람은 여기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로서는 잘 파악이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나그네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정말 모르고 그랬는지 그것도 궁금한 대목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가장 궁금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왜 나그네가 되셔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는가? 하는 것에 있습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말입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대답은 히브리서 13장에 나오는 말씀 속에 담겨 있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하였습니다.’(히브리서13:2)
아브라함을 생각하며 이렇게 권하였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힘없고 배고픈 나그네 가운데 혹시 하나님이나 아니면 그가 보내신 천사가 있을지도 모르니 우리는 그들을 잘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예를 성 프란시스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은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음식을 얻으러 그를 찾아 왔습니다. 음식을 잘 대접해주고는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는데 그 문둥병자는 유독 프란시스와 같은 침대에서 자기를 원하였습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하도 완강하게 청하니까 그렇게 하였는데 암만 성자라고 하여도 그 기분이 어땠을까요?
그런데 잠을 자다가 문득 깨어서 보니까 그는 문둥병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 프란시스가 그것을 알게 된 순간 그는 이미 침대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스페인의 전설적인 지도자 엘 시드에게도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한 문둥병자를 만나게 되는데 엘 시드가 그를 데려다가 잘 먹이도록 합니다. 그리고는 밤이 되었는데, 엘 시드는 그 문둥병자를 자기의 침대에서 함께 자도록 하였습니다. 부하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펄펄 뛰었는데도 말이지요. 잠을 자다가 엘 시드가 깨어 보니 그는 문둥병자가 아니라 <성 나사로>였다는 것이지요.
이런 이야기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려 하다가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하였다든지, 성 프란시스나 엘 시드에게서 일어난 이야기들은 정말 우리들에게 지극히 작고 힘없는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정성을 다하여 대접하는 일이 곧 하나님을 대접하는 일이라는 것...(마태25:40) 이런 사람들에게 하늘의 상급과 복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것으로 오늘의 설교말씀이 다 끝났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나도 아브라함처럼 나그네를 잘 대접해야 하겠다. 그러다 하나님을 대접하는 놀라운 일을 겪을는지 누가 알겠는가? 과연 이렇게만 오늘의 말씀을 읽을 수가 있을 것인지... 다른 때와는 다르게 자신을 이렇게 나그네로 감추시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다른 의도는 없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이 자기가 나그네라고 생각하고 대접했던 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러한 만남은 그 후의 아브라함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아마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의 소중한 숙제를 내놓으셨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왜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찾아 갔는지... 한 번 그 이유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러 번 찾아 오셨는데 그 때마다 자신을 드러내시면서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이를테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창17:1) 혹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염려하셔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렇게 자신을 밝히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창15:1)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그네가 되어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를 다시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17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에 이미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다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이삭을 낳아서 잘 키울만한 사람이 되도록 그에게 준비를 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새롭게 갱신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셨고, 아브라함과 그 집안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셔서, 이삭의 출생을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가 정말 다 끝났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습니다.
이삭이 태어난 것이 아브라함이 백 살 때의 일이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빨리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적은 없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한 십여 년 이상을 침묵하시면서 아브라함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처럼 그렇게 보였던 시간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불과 한 두 달 남짓한 시간에 다시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궁금증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빨리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을까? 그리고 왜 나그네가 되어서 오셨을까? 이러한 궁금함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하나님과는 또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새로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면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창세기 17장과 18장 사이에 얼마나 되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는지... 그것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하나님은 두 번 거듭해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17장에서 하나님은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되는 시기를 ‘내년 이맘 때’라고 못을 박으셨습니다.(17:21) 그런데 18장에서도 하나님은 거듭해서 이삭이 태어날 시간을 ‘다음해 이맘 때’라고 거듭해서 말씀하십니다.(10절)
이런 것을 보면 정말 17장과 18장 사이에는 시간의 차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궁금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다시 찾아 오셨을까? 아마 이 때는 하나님이 좀 한가하셨나보다... 물론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깊은 뜻은 없는 것인지요?
말씀드렸던 것처럼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있었던 일. 그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하나님과 맺었던 땅에 대한 약속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그에게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믿음의 조상에 걸맞는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물론 그의 아내에게도 사라라고 하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다른... 아주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17장에서 있었던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이제는 정말 길고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도 다 끝나고 오로지 기다리는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내년 이 맘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이 세상에 태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일 년을 참지 못하시고 다시금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으니 어찌된 일인가요? 우리는 그 단서를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반응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쩐지 아브라함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17장 17절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17절)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솔직한 자기의 심정을 털어 놓습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18절)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의 솔직한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너무 시간이 오래 지나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화려하고 창대한 미래를 말씀하고 계시지만 이제는 그것조차도 아브라함의 가슴에 와 닿지를 않습니다.
“새로운 이름을 가졌다는 것... 또한 할례를 행하여서 자기들이 남다른 존재라는 것을 몸에 새기게 되는 일도...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니까 하기는 하지만... 이제는 아브라함은 너무나 늙어 버려서... 오랜 나그네살이에 지쳐버려서... 모든 희망을 다 단념해 버리고... 단지 이스마엘이나 바라보면서 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이런 아브라함의 심경을 모를 리가 있을까요?
이런 아브라함을 두고 그냥 하늘로 올라가시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다시금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시기 위해서... 처음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만 붙잡고 희망찬 발걸음을 걷기 시작했을 때의 아브라함으로 되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이제 늙고 지치고... 희망조차 사라져버린 아브라함을 다시 붙잡아 주시고...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아브라함을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이야기의 주제도 여전히 희망인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번에는 사라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주 신속하면서도 정성스레 차려놓은 식탁을 대하신 하나님... 이번에는 사라를 언급하시고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다음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10절)
물론 장막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사라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입니다.
12절에 보면 이렇게 사라의 반응을 소개합니다.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12절)
혹시 아브라함은 이렇게 거듭해서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몰라도... 사라는 여전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됩니다.
한 번 선택하시고, 믿음의 세계로 초대한 사람은 결코 포기하거나 그냥 내버려 두시는 분이 결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다 지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무력하고 무능한 사람들인지... 자기들의 한계를 잘 알기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약속을 하여도 이제는 믿을 수가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믿음에 이르도록...”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과 후손에 대한 목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설득하시고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새로운 이름을 주시고, 할레를 행하게 하시고... 그 이전에는 찾아 오셔서 아브라함이 마련한 제물을 불로 태우시고(창15:17)... 이런 모든 하나님의 행위들이 다 시들어 가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을 일깨우기 위한 특별한 시도였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러더니 이제 다시 그들을 찾아 오셔서 다시 한 번 그들이 믿음을 회복하도록 약속을 확인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거듭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하나님의 열어 주실 후손들에 대한 희망과 땅에 대한 희망으로 충만하여서 신나게 믿음 생활을 하였는데... 이제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렇다고 과거로 되돌아가자니... 이미 그것도 늦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이곳에 마지못해서 머물러 있는 존재가 되고 말았는데...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여전히 약속은 유효하다고... 우리들에게는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고...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자신이 보장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다시금 우리를 믿음과 희망이 가득한 세계로 초대하십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두 번째로 생각해야할 주제. 하나님께서 왜 나그네가 되셨을까?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도 엿보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스킨십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찾아 온 나그네들을 위하여 아주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그들을 대합니다. 그들은 마지못해서 그러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베풀어 주는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려 합니다.
그들을 대접하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브라함의 모습... 그것은 정말 아주 즐겁고 신바람 나는 모습입니다.
가장 뜨거운 날씨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아주 즐겁고 신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마침내 그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가 알아차렸을 때... 그가 얼마나 놀랐을까요?
“하나님이시라니... 하나님이 우리 집을 찾아오시다니... 그리고 이렇게 내가 준비한 빵이며 고기며 여러 가지 음식들을 잡수시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해 드릴 것을... 고기도 더 잘 굽고... 빵도 더 잘 만들고... 치즈와 우유도 더 잘 만들었어야 하는데... 이런 아쉬움도 있었겠지만... 그 기쁨이나 감동은 얼마나 큰 것인가요?
지난 주간에 한 식당에 들어 가보니까... 의 투수인 김광현 선수의 사인이 붙어 있더라구요... 요즘 한참 헤매고 있는 김광현 선수가 다녀간 것만 해도 그 식당에서는 경사스러운 일이고...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자랑할 법한 일인데... 하나님께서 다녀가셨으니... 아마 그 일이 있은 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앉으셔서 잡수시던 식탁이며... 그분이 사용하시던 수저며... 그릇이며... 그런 것들을 따로 진열해 놓지 않았을까요?
어쨌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시고 그의 식탁에서 잡수시며 머무르시던 일... 아마 이것은 아브라함의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감동과 기쁨을 주기에 충분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나그네가 되셨다는 것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닙니다.
오늘의 이야기 속에서는 아브라함은 한 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은 누군가가 쉴 곳과 먹거리를 마련해 주지 않으면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친 나그네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그네의 원조는 아브라함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의 후예들은 아브라함을 말할 때마다 항상 나그네라고 이야기합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던 아람 사람으로서...’(신명기26:5) 이런 대목이 있는 데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요즘 우리가 수요일마다 읽고 있는 히브리서에서도 아브라함은 영원한 나그네로 고백되어지고 있습니다.(히브리서 11:9)
오늘 말씀을 보아도 그런 나그네로서의 아브라함을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아직도 그가 장막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훌륭하고 견고하게 기초를 둔 저택이 아니라 장막에서 생활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그가 항상 이 세상에서는 떠돌이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줍니다.
그런데. 오늘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바로 나그네가 되셨으니...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아직도 나그네 길 위에 서 있는 아브라함에게는 얼마나 커다란 위로와 격려가 되는 것일까요?
나만 혼자 고달프게 나그네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메마르고 힘들기 만한 나그네의 길에서 때로는 목이 몹시 마르기도 하고... 때로는 나무 그늘 하나 찾을 수 없고... 때로는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는 힘든 순간들을 수 없이 겪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런 모습을 하고 나를 찾아오시다니... 이것이 아브라함에게는 얼마나 커다란 격려와 위로가 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아... 지금 네가 가는 길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이든 것인지...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단다...’ 구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든지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는 나그네의 길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힘들고 어려운 중에서도 기쁨과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즐겁고 기다려지는 것이지요.
하나님도 나그네셨는데... 하나님께서 앞서서 가신 길을 지금 내가 걷고 있는데... 하나님만 생각하면 힘이 나고... 하나님만 생각하면 배가 부르고... 하나님만 생각하면 갈증이 사라지고... 하나님만 생각하면 이렇게 남다르게 나그네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항상 힘들고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나그네가 되어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잘 알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서 결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혼자서만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그네가 되셔서 우리가 가는 길에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 이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희망의 말씀이 있습니다.
아마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시려고 오늘 나그네가 되어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라를 향하여 아주 단호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거듭해서 그들을 찾아 오셨고, 내년 이맘때면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만... 사라는 여전히 그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자신과 남편 아브라함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사라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이지요.
모든 생명의 징조가 사라져버린 그들이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가 있다는 말인지... 사라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냥 어처구니없는 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이렇게 믿지 못하고 있는 사라를 향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인 것이지요.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들을 낳는 것은 당연히 아브라함과 사라의 몫이지요. 하지만, 이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 그들 속에서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도록 하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 이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단 이렇게 아기를 낳는 일 뿐일까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오늘까지 이르도록 하신 분! 그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우리가 도무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나의 생전에 어지 그런 즐거운 일이 있겠어? 이렇게 어렵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 그것을 능히 이루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들을 향하여서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우리들을 다시금 믿음의 세계로 초대하십니다.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우리가 여기가지 오는 동안의 모든 일들... 그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손길과 인도하심이 있기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항상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간절히 바라고 희망하는 것... 그 희망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어서 ‘내 생전에 그런 좋은 일이 있겠어...’ 결국은 그렇게 포기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가지는 소중한 꿈과 희망들... 그것을 이루어 주시는 분!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 이런 믿음을 가지고 다시금 용기 있기 내일을 향하여 나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