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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육조고도(六朝古都) 남경(南京)
【1】 남경
‘남경’이라고 하면 중국의 ‘난징’을 생각하기 쉬울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남경이라는 지명이 있었지만 어딘지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시대 한성부, 즉 지금의 서울을 남경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그곳을 한양 또는 서울이라고 했기 때문에 남경을 잘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난징’은 ‘난징대학살’로 상징되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곳으로, 그것은 1937년 9월 19일 일본군 3함대 사령관 하세가와 키요시(長谷川淸)가 패잔병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무차별 폭격을 지시하고 6주 동안 연행해 죽인 사람이 30만 명이 넘고, 2만 명 이상의 부녀자를 강간했던 사건을 말한다.
책의 제목에서 보듯 남경은 북경(北京)·장안(長安)·낙양(洛陽)과 더불어 중국 4대 고도 중의 한 곳이고, 고대의 오(吳)·동진(東晉)·송(宋)·제(齊)·양(梁)·진(陳)이라는 육조(六朝)의 중심이었다. 당시에 이미 인구가 1백만이 넘는 큰 도시였다고 하고 지금은 인구 650만(2020년)이 넘는 대도시다. 남경은 오랫동안 11개 나라의 수도였기 때문에 고도(古都)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특이하게도 남경을 수도로 한 국가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 원인을 풍수지리에서 찾는 이도 있다고.
근대 역사로는 1912년 쑨원(孫文)이 ‘중화민국’총통이 되어 남경을 수도로 삼았다. 그런데 1927년 장제스의 북벌군이 남경을 함락시키고 ‘남경국민부’를, 1949년에는 ‘중국인민해방군’이 점령해 ‘남경인민정부’를 성립시켰다. 1952년부터는 강소성에 속해 강소성 성할시(省割市)로서 지금에 이른다. 남경은 장강 하류에 위치한 중요 산업도시이며 경제중심도시다.
남경은 쑨원의 ‘중화민국’처럼 짧은 기간 동안 수도로서 역할을 한 경우가 많지만 삼국시대 오나라 손권은 달랐다. 손권(孫權)의 자는 중모(仲謨), 182년 서주 하비(下邳, 지금의 강소성 비주)에서 태어났다. 오나라 개국 황제로 병법가인 손무(孫武)의 22세 후손이고 장수태수 손견(孫堅)의 아들이자 형 손책(孫責)을 이어 가업을 지켜낸 인물이다. 222년 그가 왕을 칭하면서 조조, 유비와 더불어 삼국을 정립하고는 호북성 악성(鄂城)에서 건업(建業, 지금의 남경)으로 천도했다. 특이한 용모를 가진 손책은 자줏빛 수염에다 푸른 눈, 빰은 네모지고 입은 커서 보통사람과는 다른 용모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아비와 형을 따라 전장을 누비고 말타기, 활쏘기에 능했으며 말을 타고 호랑이를 쏠 정도로 담력과 지략이 출중했다. 조조는 그에 대해 “자식이라면 손중모 같아야 한다”고 했다고.
203년에서 208년 사이 조조는 3번이나 강릉(江陵)을 침공해 손에 넣은 뒤에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 동오를 취하겠다며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자 동오는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었는데 주전파는 노숙과 주유, 주화파는 장소가 중심이었다. 논란 중일 때 유비군사(劉備軍師) 제갈량이 동오로 와서 한차례 조조에게 패한 원한을 갚기 위해 손권에게 싸움을 부추겼고 손권은 전쟁을 결심하고 결전을 준비한다. 손권의 군사(軍師) 주유는 황개의 계략을 써서 3만의 군대로 조조의 80만 대군을 격파한다. 역사는 이를‘적벽대전’이라 한다.
229년 손권이 오나라 황제로 즉위하고는 제갈량의 북벌에 동조해 친정을 하는 등 전장에 나가기도 했으나 승리하지는 못했다. 그런 뒤 교만해지고 사치스러워져 조세와 부역을 무겁게 하고 형벌을 잔혹하게 집행했으며, 후계자를 정할 때는 반대하는 여러 대신을 죽이고 장자 손등이 일찍 세상을 뜨자, 손화를 세자로 세웠다가 폐하고, 손패에게는 사약을 내리고, 마지막에 손량을 태자로 삼기도 했다. 이런 혼란한 태도는 장차 정변의 화근을 심는 격이 되었으며 252년 71세로 병사했다. ‘대황제’시호를, 묘호는‘태조’라 했다. 손권은 24년간 재위했지만 오후(吳侯)로서 사실상 강동을 다스린 기간이 52년으로 삼국시대 가장 오랫동안 장수한 왕이다.
남경의 역사는 춘추시대 월왕구천(越王句踐)이 오를 멸망시킨 이듬해인 기원전 472년 월나라 대부 범려(范蠡)가 축성한 월성(越城)으로부터 시작된다. 기원전 333년 초나라가 월나라를 멸망시키고 위왕(威王)이 현재의 남경 청량산에 금릉성(金陵城)을 축성하였고, 진시황 때 금릉을 말릉(秣陵)으로 바꾸고, 후한 말인 211년에는 손권이 오나라 도성을 경구(京口-현 진강시)에서 말릉으로 옮기고 이곳을 건업(建業)이라 했다. 손권이 건업을 수도로 삼음으로써 남경의 역사는 시작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조의 후손을 멸하고 진나라를 세운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손권이 세운 오나라를 멸한 뒤 37년 후에 남쪽으로 내려와 동진(東晉)이 되었는데, 480년 남조의 송·제·양·진 4대 왕조가 건강도성(健康都城)을 축성함으로써 번화했으나 수나라가 진나라를 평정하고 598년 건강성읍과 궁실을 모두 헐고 농사를 지으라는 칙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6대에 걸쳐 호화로움을 간직하던 건강도성은 폐허가 되었다. 1980년대에 육조 도성 유적을 발굴했는데, 오나라 때 수로(水路)의 너비가 9.75m, 깊이가 약 2m, 수로 보호를 위해 양옆에 나무 말뚝을 박았던 것이 확인되기도 했다.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면서 승려 아도(阿道)를 파견하기도 했던 동진은 왜 망했을까? 동진을 멸한 군주는 송무제(宋武帝)로 이름은 유유(劉瑜), 자는 덕여(德與)이다. 한고조 유방의 동생인 초왕 유교의 자손으로 증조부 유혼(劉混)이 평성(平城, 지금의 강소성 서주)에서 난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와 경구(京口, 지금의 진강시)에 자리 잡았다. 유유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난해 어릴 때부터 짚신을 만들어 팔았다. 그러나 그는 큰 뜻을 품고 젊은 시절에 종군하여 동진 북부군의 하급군관이 되었고, 399년 손은(孫恩) 등이 동진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유뇌지(劉牢之)에게 진압하게 할 때 유뇌지의 요청으로 참전했다. 계략과 용맹으로 전공을 세워 건무장군, 하비태수, 평성내사 등이 되었는데 이로써 가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404년 자신의 고향인 경구에서 군사를 일으켜 제위를 찬탈하고 스스로 초나라 황제라고 칭한 환현(桓玄)을 무너뜨리고, 진안제(晉安帝)사마덕종(司馬德宗)을 복위시켰다. 이 공로로 시중, 거기장군, 아주자사, 연주자사, 녹상서사에 임명되었는데 이때부터 조정을 장악했고, 409년 광고(廣固-지금의 산동성 익도현)를 멸하고 412년에는 파촉을 수복했다. 419년 장안을 공격해 후진을 멸하고 420년 진공제(晉恭帝) 사마덕문(司馬德文)으로부터 선양 받아 황제가 되었으며 국호를 송(宋)이라 했다. 남북조 시대를 열어 황하 이남 지역을 모두 차지했다. 그러나 재위 3년 만인 60세에 병으로 죽어 초령릉(初寜陵)에 묻혔다.
일찍이 백제와도 수교했던 양(梁)나라 시대 무덤에는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벽사(闢邪)인 석수(石獸)가 많다. 그것의 크기는 우리 것과는 비교가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양무제(梁武帝, 464∼549)의 여섯째 동생 ‘임천정혜왕(臨川靖惠王) 소굉(蕭宏)묘’의 경우 무덤 양쪽에 두 개의 석수가 있는데 몸길이 3.30m, 높이 2.86m, 너비 1.42m, 목길이 1.35m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석수를 천록(天鹿)으로 볼 것인지, 기린(麒麟)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고, 높이5.52m, 3.08m인 석주가 두 개, 높이 4.35m, 너비 1.58m, 두께 33.5㎝의 비석도 서 있다. 비석은 내가 본 적 없는 것 같은 아주 특이한 비석인데 비신(碑身) 양쪽에 신괴(神怪)·주작·봉황·청룡·이수(異獸)등 여덟 마리 동물이 새겨져 있고, 인동전지문(忍冬纏枝汶)이라는 장식도 있다고.
소굉은 표기대장군, 양주자사 등을 지냈으며 그는 재물을 매우 좋아해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양무제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 그의 집에서 연회를 베풀라고 하고 그의 집으로 가 집구경을 하면서 창고를 둘러보았는데 창고가 100칸이나 되고 3억 전錢에 비단과 진기한 물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백성을 수탈해 모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정치에 대한 야심이 없다는 것을 안 무제는 오히려 “여섯째야, 네가 사는 모습이 참으로 봐 줄 만하구나”하며 칭찬했다고 한다.
소굉이 형보다 먼저 병들어 눕자 무제는 일곱 번이나 찾아가 문병하고 그가 세상을 떠자 조서를 내려 시중, 대장군, 양주목 등을 추가 제수하고 ‘정혜(靖惠)’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북쪽 백룡산(白龍山)에 후하게 장사지내 주었으며 그 무덤이 호화롭다.
중국의 고대에 우리 말로는 같은 진시황의 진(秦)나라,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의 진(晉)나라 그리고 진(陳)나라가 있었는데, 마지막 진나라 시조는 진무제(陳武帝) 이름은 패선(陳覇先)이다. 태호(太湖) 남쪽 오흥군 장성현(吳興郡 長城縣, 지금의 절강성 장흥)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미천하고 천한 신분이라 어릴 때는 창고지기, 심부름꾼으로 살았다. 그는 소영(蕭映)이라는 후작을 섬겼는데 그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군인이 되고 공을 세우면서 차츰 세력을 키웠다. 549년 소영을 암살하고 군단장이 된 원경중(元景仲)을 공격해 자살하게 만들고, 소영의 아들 소발(蕭拔)을 내세워 실권을 잡았다.
이때 양나라는 후경(侯景)의 난으로 혼란스러웠는데 후경을 토벌하기 위해 진패선과 실권자 왕승변(王乘辯)이 동맹을 맺고 후경을 토벌하고는 원제(元帝) 소역(蕭繹)을 황위에 올렸다. 그러나 북제(北齊)가 대군을 동원해 공격해 와서는 소역을 죽이고 귀족들을 납치했다. 진패선과 왕승변은 원제의 아홉째 아들 경제(敬帝) 소방지(蕭方智)를 황위에 올렸다. 하지만 북제가 포로로 데려간 원제의 조카 소연명(蕭淵明)을 황위에 올리라면서 군사를 보내자 왕승변은 굴복했으나 진패선은 반발했다. 이후 진패선은 기회를 틈타 왕승변을 죽이고 북제에 맞서 싸웠다. 진패선이 북제를 물리쳤고, 경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557년 황제가 되고 국호를 진陳이라 했다. 진패선은 재위 3년 만에 죽고, 조카 문제(文帝)가 뒤를 이었다. 진무제 진패선의 릉은 ‘만안릉(萬安陵)’으로 남경 백마공원에 있다.
중세시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가 남경에 있는데 그것은 대보은사(大報恩寺)라는 절이다. 영곡사·천계사와 함께 금릉(남경)의 3대 사찰로 꼽힌다. 240년 동오시대 장간사(長干寺)와 아육왕(阿育王)탑이 세워졌던 곳에 1420년 세워진 이 절의 유리보탑(琉璃寶塔)은 중국에서 가장 특징적인 건축물로 ‘천하제일탑’이라 불린다. 1412∼1431년간에 영락제가 죽은 생모 공비(恭妃)를 위해 지었으며 지을 때 기초에 말뚝을 태워 목탄으로 변하게 하여 습기방지와 방충을 하였고, 전각이 20간, 회랑 18곳 경방이 38칸이나 되었다. 19년에 걸쳐 10만 명이 동원되고, 은 20만 냥이 들었다. 16년에 걸쳐 완공되었으며 9층 8면으로 높이가 78.2m에 달하여 수십 리 밖에서도 보이고 탑신은 백자로 장식했으며 각 들보마다 풍령을 152개씩 달아 밤낮 소리를 내며 해뜨기 전에는 장명등 140잔에 불을 켰는데 매일 64근(斤)의 기름이 소모되었다고 한다. 탑 안쪽 벽에는 불감(佛龕)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 탑은 1856년 태평천국의 난 때 폭파되어 탑찰과 비석만 남았었는데 이마저 유실되었다가 1958년 대량의 유리 부재가 출토되고 탑을 지을 때 유리 양식을 3개 만들어 하나만 쓰고 나머지 둘은 땅에 묻었는데 그것이 발견되어 이를 기초로 2015년에 복원공사를 완성했다. 대보은사 유리보탑은 로마의 콜로세움, 피사의 사탑, 만리장성 등과 함께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고 중국문화의 대표적 건축물로서 자랑하고 있다.
조선과 개국 시기가 비슷한 데다 우리가 사대(事大)를 바쳤던 명나라는 주원장이 세운 나라다. 어릴 때 이름이 주중팔(朱重八) 혹은 주팔팔(朱八八)이었던 주원장은 1328년 10월 2일 호주 종리(濠州 鐘离), 지금의 안휘성 봉양)에서 태어났다. 집이 빈곤했으며 부모 형제는 역병에 걸려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황각사(皇覺寺)라는 절 사미승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청소나 창고지기를 하며 지냈으며 절에 들어간 지 2달도 채 안 돼 흉년이 들어 여러 스님들이 절에서 쫓겨날 때 그도 절에서 나와 탁발승 노릇을 했다.
1348년 친구 탕화(湯和)가 서신을 보내 군에 들어가자고 해서 이름을 주원장(朱元璋)으로 바꾸었는데 원나라를 멸망시킨다는 뜻이다. 25살 때 홍건적에 참여해 원나라 정벌에 나섰고 이때 대장 곽자흥(郭子興)이 자신의 양녀를 주원장에게 주었다. 그녀가 ‘마대각(馬大脚) 마황후’이다. 곽자흥이 죽은 뒤 군대를 통솔하게 되고 전승을 거듭해 1356년 오국공(吳國公)으로 봉해졌다. 1367년 25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중원으로 북진해 원나라 세력을 만리장성 밖으로 몰아냈다. 이듬해 원나라 잔여세력을 평정한 후 남경에서 황제에 올라 국호를 ‘대명(大明)’이라고 하고 연호를 홍무(洪武)라 했다. 이 때문에 주원장의 치세를 ‘홍무지치(洪武之治)’라 부른다.
남경에는 주원장과 마황후의 릉이 있는데 합장묘인 이 릉은 효자황후(孝慈皇后), 즉 마황후의 시호를 따 ‘효릉(孝陵)’이라고 부르는데 먼저 황후가 죽자 묻었고 16년 뒤 주원장이 죽어 합장했다. 1381년부터 25년 동안 축조해 마무리한 릉으로 2008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규모는 마방, 대금문, 신비도정, 영성문, 어하교, 효릉문, 구복전, 효릉전, 명루 등으로 청나라 때에 소실되었고 현재는 석각과 기초만 남아 있다. 그중에서 어하교(御河橋)를 지나면 6종 12쌍, 총 24점의 신도 석각이 있는데 사자, 해치(獬豸), 낙타, 코끼리, 기린, 말 순서로 배치되어 있고 매종마다 2쌍이 있으며 한 쌍은 서 있고, 다른 한 쌍은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곳을 방문한다면 안내판에 한국어도 있다니 다행이다 싶다.
작년 시안(西安) 갔을 때 올라가 보았던 ‘장안성’같은 성이 남경에도 있는데 ‘남경성’은 오나라 손권이 수도를 건업으로 정하면서 건립되기 시작 해 육조시대 도성으로 사용되다가 수나라에 의해 불태워지고 이후 937년 서지고(徐知誥, 888∼943)가 양오(楊吳)의 황제 양부(楊溥)를 폐하고 스스로 황위에 올라 국호를 당(唐)이라고 했는데, 이를‘남당’(937∼975)이라고 한다. 남당은 금릉부를 도읍으로 삼았다가 경녕부로 개칭하였다. 이때 경녕부성을 건립했는데 둘레 14,020㎞, 위쪽 너비 7.75m, 아래쪽 너비 10.885m, 성벽 높이 7.75m였다. 도성 내에 궁성이 있었고 궁성 둘레가 2,618m, 높이 7.68m였다. 이후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1366년부터 21년 동안 응천부성을 도성으로 개축했으며 외곽·경성(京城)·황성(皇城)·궁성 등 4중으로 성벽을 지었다. 태평천국 당시에도 수도로 활용되었으나 현대들어와 경제개발로 절반 정도가 파괴되고 몇몇 성문과 일부 성벽만 남아 있다.
성은 남경시 중심에 있는 현무호(玄武湖)를 끼고 있어서 풍광이 좋고 장관이다. 이런 웅장한 성벽을 쌓았다는 것은 치세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는지, 권위를 세우기 위해였는지 알 수 없지만 둘 다였을 것 같다. 남경성은 서울도성은 물론이고 대단하다고 느낀 일본의 오사카성과도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웅장하다. 그러나 이렇게 성을 쌓으려면 백성의 고혈을 얼마나 쥐어짰을까 하는 연민이 생기는 것은 비단 나만의 자괴감은 아닐 것 같다.
한 나라의 문화유산을 보려면 당연히 박물관을 찾아가야 하지만 ‘남경박물관’은 좀 더 유별난 것 같다.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인 1933년에 지어지고 계속 확장되어 왔으며, 박물관 면적이 70,000㎡, 건축면적만도 35,000㎡이나 되고, 전시실에는 토기에 넣은 서주시대 계란도 전시되어 있다고 하고 육조시대 유물도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다. 여러 번 명칭이 바뀌기도 한 남경박물관에는 총 40만 점의 유물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중 1급 국보급만도 1,062점이나 된다고 하고 진열면적이 7,000㎡라고 한다.
남경박물관이 국가지정 박물관인 반면에 ‘남경시박물관’은 시립으로, 남경 지역의 고분을 발굴조사하고 문물의 보호, 소장품의 수집과 보관을 주업무로 하고 있다. 1978년 개관했으며 10만 점이 넘는 유물을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중요 유물로 북경원인(北京原人) 시기 유인원인 남경원인의 머리뼈, 양금탁운용문옥대, 어옹희화호박배, 칠보아육왕탑 등이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남경에서 가장 역사적인 건물이기도 한 ‘남경총통부(南京總統府)’는 현재 중국 최대 근대사박물관으로 600년의 역사를 가진다. 1840년부터 1949년 인민해방군이 남경을 점령할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정치, 군사의 중심지이자 중요사건의 발원지기도 한 이곳은 명나라 초 한왕부(漢王府)로 지어졌으며 청나라 때 강희제, 건륭제 등은 강남에 내려올 때마다 행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1853년 태평군이 남경을 점령하고 이곳에다 태평천국의 천조궁, 즉 천왕부(天王府)를 지었으나 청나라에 의해 불태워졌고 신해혁명 이듬해 1912년 쑨원(孫文)이 ‘중화민국’임시총통으로 선서하기도 한 곳이며, 1927년에는 장제스(蔣介石)가 이끈 ‘남경국민정부’가 이곳에서 업무를 보기도 했으나, 1937년 국민정부 통치중심이던 남경이 함락되고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었다.
1948년 5월 20일 장제스와 리중런(李宗仁)이 총통과 부총통으로 당선된 이후 국민정부를 총통부로 개칭하였으나 1949년 4월 23일 ‘인민해방군’이 남경을 함락하고 이곳 총통부를 점령했다. 인민해방군은 남경을 거의 50년 동안 줄곧 공무 장소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기관들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1998년 총통부 건물은 ‘남경근대사유적박물관’으로 만들어졌다.
【2】진강(鎭江)
진강은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도시다. 경제가 활발하고 장강 삼각주에 위치하며 서쪽에는 남경, 동쪽에는 상주(常州), 서북쪽에는 장강과 양주(揚州)와 접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은 3市(단양·양중·구용시) 4區(단동·경구·윤주·진강신구)로 인구 300만이 조금 안 되는 도시지만 그 역사는 3000년이 넘는다.
진강이라는 지명의 이름에서 우리나라 진해(鎭海)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 이름이 ‘강을 누른다’는 뜻이다. 실제로 강과 인접해 지대가 낮아 예로부터 상습적으로 수해가 일어났다고 하는데 진강 시내에 포함된 물줄기가 700㎞나 되고 인공운하도 많으며 저수량 10만㎥ 이상인 저수지만도 107곳이나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금은동 지하자원, 석회암, 벤토나이트, 백운석, 대리석, 인, 내화점토, 흑연 등 비금속 지하자원도 많이 난다. 특히 석회암의 질이 우수하고 매장량도 30억t이나 된다고 한다. 진강의 연평균 기온은 15.6℃, 강수량은 1088㎜로 그리 많지는 않다.
동오(東吳) 등 고대 역사는 생략하더라도 근대사 하나를 짚어보자. 아편전쟁 끝 무렵인 1842년 7월 2일 영국군은 진강을 점령하고 억지로 청나라와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러자 청나라는 반발했다. 마지막 승패를 가르는 전쟁이 여기서 벌어졌는데 전투는 매우 참혹했다. 휴 고프가 이끄는 15,000명의 영국군은 진강성을 맹공격했고, 해령(海齡)이 지휘한 몽골팔기병은 극렬히 저항했다. 이 전투로 영국군 37명이 죽고 129명이 부상당했으며 팔기군은 600여 명이 죽었다. 해령은 패전한 뒤 자결했다. 영국군은 진강에 진입하여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이후 난징조약과 텐진조약으로 진강은 개방될 수밖에 없었다.
진강을 대표하는 고찰은 감로사(甘露寺)다. 장강 기슭인 북고산(北固山)정상에 위치해 있어 사관산(寺冠山) 혹은 소설 《삼국지연의》와 관련이 있다 하여 ‘삼국산(三國山) 감로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액은 장비(張飛)가 썼다고 하는데 전하지 않고, 여러 차례 흥패(興敗)를 거듭한 끝에 지금은 삼국지 이야기로 현장감을 살리고 있다. 감로사에 관련된 설화는 삼국지연의에 소설화된 이야기로 사실인지는 의문이다.
《삼국지연의》54회에 ‘오국태 감로사에서 신랑을 보고 유황숙 배필을 맞게 해주다(吳國太佛寺看新郞 劉皇叔洞房續佳偶)’라고 했는데, 손권은 강적인 조조와 대항하기 위해 유비와 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오나라와 촉나라 모두 장강을 사이에 둔 형주(荊州)를 차지하기 위해 갈등을 빚었다. 손권은 여동생 손상향(孫尙香)을 빌미로 유비를 경구(京口)로 초청해 인질로 잡고 형주를 내놓게 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손권의 미인계는 제갈량에게 간파되어 장계취계(將計就計-역이용)로 오히려 손권의 모친 오국태와 유비가 감로사에서 만나게 되고 오국태가 유비를 보자 “두 귀가 어깨로 늘어 뜨려졌고 두 팔은 무릎에 닿는다”면서 천자의 용모라며 매우 만족해하여 가짜 결혼이 진짜 결혼이 되고 말았다. 손권과 주유는 벙어리 소태 씹은 양 아무 말도 못하고 속을 앓았다. 소설은 제갈량이 미리 조자룡에게 지혜를 담은 주머니 3개를 주어 위기 때 열어보게 하는 등 더 더욱 재미 있게 꾸며져 있다.
앞에서 본대로 백제와 수교한 양나라는 양무제(梁武帝)가 세운 나라다. 양무제 소연(蕭衍, 464∼549)의 자는 숙달(淑達), 말릉(秣陵, 지금의 강소성 남경시)에서 태어났다. 한나라 상국(相國)을 지낸 소하(蕭何)의 25세 후손으로 원래는 남제(南齊)의 군단장이었으나 폭정을 일삼던 동혼후(東昏候)를 타도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동혼후의 동생 소보융(蕭寶融)을 꼭두각시 황제로 삼은 뒤, 502년 겉으로는 선양 받는 듯이 했으나 실제 양나라 황제가 되었다. 48년간 재위해 남조 황제 중에서 가장 오래 재위한 그는 예제와 법제를 정비하고 국립대학을 세우는 등 문치를 펼쳤으며, 스스로 승려행세를 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는데, 절의 노예가 된 그를 환속시키기 위해 나라에서 1억 전이나 되는 돈을 동태사(同泰寺)에 불공하기도 해 유래가 없는 불교전성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양무제 시절 불교는 크게 번성하였으나 경제정책에는 실패해 빈부격차가 커지고 도망가는 농민이 늘어나자 후경(侯景)이 난을 일으켜 무제를 유배시키고 아사하게 했다. 당시 무제는 86세로 수릉(修陵)에 장사지내졌다.
548년 후경은 반란을 일으켜 수도인 건강(健康)을 점령하고, 양무제와 태자 소강(蕭康)을 붙잡았다. 이듬해에 양무제가 사망하자 소강이 재위에 올라 연호를 대보(大寶)라 했다. 그러나 그는 즉위한 지 2년 만에 후경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시해되었다. 나이 49세로 묘호를 고종(高宗)이라 했으며 양원제(梁元帝) 즉위 후 간문제(簡文帝)로 추존되었다. 소강은 양무제의 셋째아들이었으나 장자인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일찍 죽어 태자가 된 인물이었다.
만약에 남경과 진강을 여행하게 된다면 ‘진강박물관’도 가봐야겠다. 박물관은 1890년 영국 영사관으로 지은 건물로 동인도 양식으로 아담하고 아름답고 예쁘기도 하면서 주변의 풍경도 아주 좋다고 한다. 1962년부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에 신석기시대부터 명청대까지의 유물 3만 점이 보관되어 있다.
【3】양주(楊州)
양주는 장강 하류에 위치하며 운하가 발달한 도시다. 가장 높은 대동산(大銅山)이란 산도 해발 149.5m에 불과하고 인구는 450만 정도고 4계절이 뚜렷하며 기후는 온화한 편이다. 춘추시대에는 한(邗)이라 불렀으며 오랫동안 오(吳)나라 땅이었으나 동진과 남조 때는 남연주(南兗州)라고 했다. 한무제 때 양주자사(楊州刺史) 관할이었고, 오나라 때 건업(建業), 이후에 건업(建鄴) 그리고 건강(健康)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양주성은 춘추시대 오왕 부차(夫差)가 한성(邗城)을 세운 이래로 계속 수축해 왔으며 자성(子城)과 나성(羅城)의 둘레가 20㎞나 된다. 양주성에는 한글로 된 안내판이 더러 보이는데 성 입구 ‘양주당성유적박물관, 양주최치원 기념관 관람도’등이 그것이다. 성 중심건물은 연화각(延和閣)으로 당나라 때 궁전 형식으로 처음 지어졌으며 당나라 마지막 회남절도사였던 고병(高騈, ?∼887)의 도원(道院)이었다. 당시에는 연화각 높이가 18척으로 진주와 금으로 장식되었다고 한다. 이 때 명칭을 오늘날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연화각에는 당시 저명한 시인 나은(羅隱)의 《제연화각(題延和閣)》과 최치원의 《사시연화각기비장(謝示延和閣記碑狀)》이 전하고 있어 당시의 화려했던 연화각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사시연화각기비장》은 최치원이 신라로 귀국한 뒤의 문집 『계원필경(桂苑筆耕)』에 수록되어 있어 오늘날까지 전한다
수양버들은 수(隨)나라 2대 황제였던 수양제(隋煬帝)에서 따온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이 아니라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수양제 양광(楊廣, 569∼618)은 14년간 재위하다가 신하에게 암살당했으나, 620년 당고조 이연(李淵, 566∼635)에 의해 황제의 예로 장례가 치뤄졌고 그가 죽고 30년 뒤인 648년에 소후(蕭后)가 죽자 합장했다. 이후 ‘수양제릉’이라고 했으며 양주시(楊州시) 한강구(邗江區) 괴이촌(槐二村) 수양제동로(隋煬帝東路)에 있다.
수양제를 주나라 주왕(紂王), 진나라 진시황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3대 폭군으로 부르는데 이는 600년 아버지 수문제(隋文帝, 20년)가 셋째아들인 그를 태자로 봉했으나 604년 7월 그에게 죽임을 명하게 된다. 수문제가 태자 양광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비밀문서를 읽는 도중에 후궁인 선화부인(宣華夫人) 진씨(陳氏)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태자가 욕보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수문제는 대노하여 둘째 아들 양용(楊勇)을 태자로 교체하려 했다. 하지만 이를 안 양광이 군사를 이끌고 황궁을 점령한 뒤 대신들을 도륙하고 아버지 수문제마저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즉위한 뒤에 아버지 유서를 위조해 양용도 죽였다. 폭군? 틀린 말이 아니다.
수양제가 몰락한 원인 중에는 3차례나 고구려를 침공하고도 성공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608년 천하에 대란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의기소침해져 낙양으로 돌아갈 생각을 못하고 남은 생애를 단양궁(지금의 남경)에서 보낼 결심을 할 때, 그를 수행하던 호위병들은 고향 생각에 몰래 빠져나가고 있었다. 결국 사위 우문사급의 아버지 우문술(宇文述)의 또 다른 아들 우문화급이 반란을 일으켜 양제를 협박해 목매 죽게 했다. 양제는 황제였지만 막상 죽고 나니 시신을 넣을 관이 없었다. 소후와 궁인들이 상(床)을 뜯어 관을 만들어 장례를 치렀고, 나중에 당나라가 강남을 평정한 후 631년에야 황제의 예로 이장해 장례를 치렀다.
세계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운하는 북쪽으로는 북경, 남쪽으로는 항주(杭州)에 이르는 ‘경항대운하(京抗大運河)’다. 춘추전국시대부터 공사를 시작해 수나라 때 완성하고 명·청대까지 보완하였다. 6개의 성과 시를 연결하는 운하의 총길이는 1,747㎞, 서울∼부산을 2번 왕복한 길이와 같다. 물론 한 왕조, 한 시대에 모두 완성된 것은 아니고 여러 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춘추시대 오왕 부차(夫差)가 장강에서 회하로 통하는 장강-회하-황하-제수를 연결하였고, 수나라 때는 낙양에서 북쪽 탁군(涿郡)을 연결했으며, 원·명·청대에 대도(大都-북경)에서 통주(通州)까지 연결했던 것이다.
‘양주박물관’에는 모두 8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그중에 국보관의 전시면적은 184㎡인데 여기에 단 1점만의 귀중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어 조금 특이하다. 그것은 전세계에 단 3점만이 전한다는 ‘원제남유백룡문매병(元霽藍釉白龍汶梅甁)’으로 북경 이화원(頤和園)에 1점, 프랑스 기메박물관에 1점씩 있으나 둘은 일부가 손상되었으나 양주박물관 것은 완전하고 크기도 제일 크다고 한다. 이 매병은 제남유를 발랐으며 운룡과 보주는 청백유를 발랐는데 서로 대비되는 색이라 더욱 선명하고 강렬하다. 피어오르는 듯한 구름 모양, 마치 푸른 하늘을 치솟는 것 같은 용은 강렬한 느낌을 준다.
【4】마안(馬鞍), 서주(徐州), 연운항(連雲港市), 상해(上海)
이 도시들은 모두 장강 하류에 위치한다. 이 중에서 상해와 서주는 들어보기는 했어도 나머지 두 도시는 처음 듣는다. 상해는 유명한 상공도시이자 무역도시로 경제, 교통, 과학기술, 공업, 금융, 무역의 중심도시라는 것을 알지만 나머지 도시들은 어떤 특징과 유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마안시는 ‘말 안장’이라는 뜻으로 부산 복천동 고분군 뒷산도 마안산이다. 마안시는 남경 주변 도시 중에서 핵심적인 도시로 지명에서 어떤 범상치 않은 내력이 있는 듯이 느껴지는데, 초한전쟁 당시 초패왕 항우(項羽, BC 232∼BC 202)가 해하(垓下)에서 패퇴하고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져 오강(烏江)으로 도망치다 여기서 자신을 건네 준 어부에게 아끼던 오추마(烏騅馬)를 주고는 강동으로 가서 마을 어르신들을 볼 낯이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추마는 주인을 그리다가 죽었는데 그때 그 말의 안장이 떨어진 산이라 해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송대(宋代) 여류시인 이청조(李淸照, 1084∼1155)가 이런 사연을 떠올리며 시 한 수를 남겼다.
살아서는 인걸이었는데(生當作人傑)
죽어서는 귀신일세(死亦僞鬼雄)
지금와서 항우를 생각해보니(至今思項羽)
강동을 지나고 싶지 않네(不肯過江東)
서주는 팽조의 고국, 유방의 고향, 항우의 고도(彭祖故國 劉邦故里 項羽故都)라고 불리는 곳으로 많은 문화유산과 명승고적, 그리고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서 ‘동방아전(東方雅典)’이라고도 불린다. 경항대운하가 남북으로 관통하고 각종 철로가 지나는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치우(蚩尤)의 본거지며, 황제(黃帝)의 초도(初都), 팽국, 서국, 송국, 초국의 국도였고, 한고조 유방, 남당(南唐) 열조(烈祖) 이변(李昪), 송무제 유유(劉裕), 후량(後梁) 태조 주은(朱溫)의 고향으로 ‘아홉 제왕이 서주에 적을 두었다’는 말은 그래서 생겼다.
6000년 이상 역사를 지닌 서주는 전국시대 장자(莊子)가 ‘800년을 산 팽조는 요절한 것’이라고 한 그 팽조(彭祖)가 요(堯)임금으로부터 팽국에 봉하져 ‘대팽씨국(大彭氏國)’이 되었고, 전국시대에는 송나라·초나라에 속했으며 진(秦)나라 말 유방과 항우가 봉기하던 때는 초나라 도읍지로서 항우가 다스리기도 했다. 후한 조조 시대부터 팽성을 서주로 불렀으며, 청나라 때는 강소성 직예주(直隸州)에 포함되기도 했고, 중화민국 때 서주로 부활되었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산동성에서 관할하다 2010년부터 5개구, 5개 현을 관할하는 서주시가 되었다.
서주의 중심에 있는 호부산(戶部山, 285m) 정상에는 희마대(戲馬臺)라고 하는 고적지가 있는데 항우가 진(秦)나라를 멸하고 패왕이 된 뒤 팽성을 수도로 삼고 성 남쪽 숭대(崇臺)에서 희마를 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연무(鍊武)와 열병(閱兵)을 하였다고 전하며 지금 희마대에는 항우 시대의 유물과 역사를 복원해 놓았는데 크게 승리한 거록대전, 유방을 암살하려 한 홍문연(鴻門宴) 연회모습 등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두고 있다.
겁먹은 유방의 모습, 칼을 빼어 든 항우와 이를 저지하는 항백의 모습, 범증이 수염을 어루만지고 있는 모습, 유방을 돕기 위해 연회장에 방패와 칼을 들고 뛰어 들어온 번쾌의 모습 등. 항우는 유방과의 싸움에서 줄곧 우위에 있었지만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역발산의 기개에도 항우는 결국 정치가는 아니었다. 진나라가 아닌 같은 뜻을 펼쳤던 한군(漢軍)에게 무너졌다. ‘항우는 군사에 승리했으나 정치에서는 패배했다’거나, ‘승자는 왕과 제후가 되고 패자는 도적이 된다’는 말은 희마대에 올라 회상해 볼 만한 격언들이다.
항우의 이름은 적(籍), 자는 우(羽), 임회군 하상현 출신으로 조상 대대로 초나라 무장을 역임했으며 항우 역시 키가 8척에 솥을 들어 올릴 만큼 기개가 범상치 않았다. 숙부 항량(項梁)에게 글과 검술을 배웠으나 스스로 만족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어릴 때 진시황이 회계산을 유람하고 절강을 건널 때 이 모습을 나중에 유방의 장자방(張子房)이 된 장량(張良)과 함께 지켜보았는데 이때 항우가 말하기를 “저 사람의 자리를 내가 대신할 수 있으리라(彼可取而代也)”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기원전 209년(秦2세 원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켜 혼란에 빠지자 항우는 숙부와 함께 회군태수 은통(殷通)을 죽이고 거병해 난을 진압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범증(范增)의 의견을 듣고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웅심(雄心)을 왕으로 세웠으며, 숙부 항량이 진나라 장수 장한(章邯)의 습격을 받아 죽고 장한이 초나라를 공격하자, 초나라는 송의(宋義)를 상장군, 항우를 차장(次將)으로 삼아 이웃 조(趙)나라를 먼저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송의가 머뭇거리자 항우가 그를 베고 진격해 거록(巨鹿)에서 진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그리고 딴마음 먹을 것을 염려하여 항복한 군사 20만 명을 신안성(新安城)에 생매장했다.
항우보다 진나라 도성 함양(咸陽)에 먼저 들어간 유방은 항우와 대적할 생각을 못 하고 홍문(鴻門)에서 서로 만나 항우에게 복속 의사를 밝혔다. 이에 항우는 진왕 자영(子嬰)을 죽이고 함양을 불살랐으며 초회왕을 의제(義帝)로 높이고 스스로 팽성에 도읍을 정하고 서초패왕(西楚霸王)이 되었다. 그리고 유방에게는 한왕(漢王)이라는 직을 주어 파촉을 다스리게 하고 견제했다. 이후 유방과 여러 번 패권 다툼이 있었지만 매번 항우가 승리했다. 그러나 봉한 제후들을 통솔하지 못하고 유방의 이간책과 고립책에 넘어가 해하(垓下)에서 유방의 군대에 포위되어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몰려 결국 자살했다. 강 건너 강동으로 가 왕이 되기를 권한 이도 있었으나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끝까지 한군과 대항했다. 당시 항우의 몸에는 거금의 포상이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군사들이 시신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다 죽이기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초회왕에 이어 초패왕을 자처한 항우가 죽자 초(楚)나라 땅은 한나라 개국공신 한신(韓信, ?∼BC196)의 봉지가 되었다. 그러나 한신은 유방의 묵인하에 여후(呂后)에게 죽임을 당하고 기원전 201년 유방의 아우 유교(劉交)가 초대 초왕이 되었다. 유교는 재위 23년 만에 죽고, 아들 유영(劉郢)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4년 만에 죽었다. 유영의 아들 유무(劉茂)가 다음 왕이 되었다.
유영의 릉인지 유무의 릉인지 알 수 없는 한초왕릉(漢楚王陵)이 서주에 있는데, 관은 옥으로 감싸 화려하고 찬란하기 그지없다. 이 릉의 주인을 유무로 보는 이유는 유영이 4년밖에 재위하지 못했으므로 무덤을 조영할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기도 하지만, 유무의 릉이라면 유무가 죽고 그의 아들이 초나라 왕이 되어야 할 것인데 유무의 아들이 아닌 유교의 아들인 유찰(劉札)이 다음 왕이 되었으므로 유영의 릉 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구의 능이든 이 초왕릉을 설명하자면 너무 복잡하므로 지궁(地宮)의 주묘실(主墓室)만 보자. 문 길(羨道)의 길이가 10.78m, 폭 3.45m이며, 동실은 관을 안치했고 서실은 청당(廳堂)으로 왕의 골격 외에도 옥편, 오벽, 옥황 등 진귀한 옥기들로 만들었는데 관의 표면은 옥편 2,095개를 써서 만들었으며 일정한 규칙으로 복잡한 도안으로 장식해 현재까지 전해지는 양옥칠관(鑲玉漆棺)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다. 금루옥의(金縷玉衣)는 염구(殮具)로서 옥의에는 4,248점의 옥편과 1,576g의 금실을 사용했다.
나도 그렇지만 중국의 ‘병마용(兵馬俑)’하면 보통 진나라 시대 서안(西安)에 있는 진시황 무덤 근처의 ‘임동(臨潼)병마용’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중국에는 2개가 더 있다. 함양의 서한시대 채회병마용(彩繪兵馬俑)과 서주의 전한시대 병마용이다. 이곳 서주 병마용은 발견 지점에 박물관을 지어 전시하고 있는데, 병사용(兵士俑), 관원용(官員俑), 마용(馬俑), 회갑용(盔甲俑-음식용기)과 궤좌용(跪坐俑-꿇어앉음) 등이다.
1984년 발견된 서주 병마용은 4,000점이 이르는데 모두 도토(陶土)로 구워 만들었으며 말이 4필이고 그 외 갑주용, 계좌용, 회갑용, 발변용, 발계용(髮髻俑-상투), 궁노수용, 지장계용 등으로 용신(俑身)에는 분을 발랐고 일부는 붉은 칠을 했다. 이 병마용은 기원전 1세기경 서한의 경제(景帝) 혹은 무제(武帝, BC156∼BC87) 때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주는 한고조 유방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그의 고향 패현(沛縣)에는 그와 관련된 유적이 많으며, 패현은 강소성(江蘇省)과 산동성(山東省), 하남성(河南省)이 교차하는 곳에 있다. 남쪽으로 서주와 60㎞, 북쪽의 곡부(曲阜)와 120㎞ 정도 떨어져 있다. 대풍가비(大風歌碑)·유리정(瑠璃井)·여모총(呂母塚)·서산한묘군(栖山漢墓群)·사수정(泗水亭)·사극대(射戟臺)·염이매묘(閻爾梅墓) 등이 모두 한고조 관련 유물이다.
기원전 196년 유방은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의 반란을 진압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 어른들과 친구들을 모아놓고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취하자 승리하고 돌아왔다는 감개가 무량했는지 축(筑)을 두드리며 즉흥적으로 노래 불렀는데 그 노래는 ‘대풍가’고 비가 ‘대풍가비’다.
큰바람 불고 구름은 높이 날아가네. (大風起兮雲飛揚)
위풍을 해내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네. (威加海內兮歸故鄕)
내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지키지 않을소냐.(安得猛士兮守四方)
그리고 120명의 아이들에게 합창을 부르게 하고 자신은 춤을 추었다고 하는데 대풍가는 3구절 23자에 불과한 짧은 시지만 왕자(王者)로서의 웅대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시와 이런 일화는 《사기》〈고조본기〉에 수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유방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유협(遊俠-협객)의 무리들과 어울렸다. 진나라 말 시험을 보고 사수정의 정장(亭長)이 되었으며 여산(驪山)에서 황제릉 조영공사에 인부를 감독하기도 했는데 도중에 인부들이 도주해 버리는 일이 잦아지자 인부들을 풀어주고 자신도 도망가 은거했다. 기원전 209년 진2세 원년에 진승(陳勝)이 반란을 일으키자 패현 젊은이들이 현령을 죽이고 유방을 패공(沛公)으로 추대했다. 처음에는 항우의 숙부 항량에게 속했다가 항량이 진나라 장수 장한에게 죽자 항우와 함께 반진세력의 주력이 되었다.
기원전 206년 유방은 항우보다 진나라 도성인 함양을 먼저 점령했다. 진왕 자영(子嬰)의 항복을 받은 뒤에는 약법삼장(約法三章)을 시행해 진나라의 가혹한 법령을 없앰으로써 민심을 얻었다. 뒤이어 들어 온 항우가 홍문(鴻門)에서 연회를 핑계로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고비를 넘긴 뒤에 항우로부터 한왕(漢王)에 봉해졌다. 그 후 5년간 피나는 결전 끝에 승리를 거두고 황제로 즉위했다. 왕조 건설에 공이 많은 장수들을 제후로 봉하고 진나라와 마찬가지로 중앙집권제를 채택했다. 그러나 한신(韓信), 팽월(彭越), 경포(鯁布) 같은 공신들을 숙청하고 자신의 일족에게 봉후를 주었다. 이로서 제후들을 한실(漢室) 일족으로 한정하는 불문율을 낳았다.
기원전 200년에는 직접 흉노(匈奴) 원정에 나섰다가 백등산(白登山)에서 7일간 고립되는 사건이 터져 이후 흉노의 아우가 되어 매년 공납을 바치는 치욕을 당하기도 한 한고조 유방은 기원전 202년부터 195년까지 재위했고, 죽은 후 아들 유영(劉盈, BC210∼188)이 뒤를 이어 혜제(惠帝)가 되었고, 이후 400여 년(BC202∼AD220) 동안 이어졌다.
연운항시(連雲港市)는 우리나라 서해와 가장 가깝고 중국의 10대 아름다운 항구도시 중 한 곳으로 꼽힌다. 앞으로 연도(連島)를 바라보고 운대산(雲臺山)을 등지고 있어서 ‘연운항’이란 이름이 붙었다. 서유기(西遊記) 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하고 지금은 국제적인 항구도시로 발돋음 하고 있다. 전한시대 이곳은 제(齊)와 초(楚)에 속했으며 도교의 발원지이기도 하고 불교가 가장 먼저 퍼진 지역이기도 하다. 수·당은 물론 원·청시대에도 한반도와 일본열도와의 문화교류가 활발했던 곳이다.
2002년 7월 연운항시 해주구(海州區) 쌍용촌(雙龍村)에서 도로공사 도중 옛 무덤 하나를 발굴했는데 서한시대의 무덤으로 유물이 80여 점 나왔다. 그런데 당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출토유물이 아니라 무덤의 주장자인 여인의 미라였다. 장강 이북에서는 처음 발견된 이 미라는 신장 160㎝, 피부가 완벽할 뿐 아니라 근육을 당겼을 때 탄성이 있고 신경과 내장기관 보존 상태도 완전했다. 같이 출토된 인문(印文)에 따르면 묘주는 능씨혜평(凌氏惠平)으로 둥근 뺨에 버드나무잎 같은 눈썹을 가졌고, 쌍꺼풀이 있고 앵두 같은 작은 입을 가진 이른바 절세미인이었다. 그녀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며 2008년 연운항 박물관에서 ‘천고의 비밀-능혜평’이라는 주제로 따로 전시관을 만들기도 하였다.
상해(上海)는 우리와 가깝기도 하고 잘 알려진 도시다. 고대 요·순·우 임금시대에는 희씨(姬氏)의 제후국이었고 춘추시대는 오나라 땅이었으며, 전국시대에는 초나라 춘신군(春申君)의 봉읍이기도 하였다. 또 삼국시대는 손권이 육손(陸遜)을 화정후(華亭侯)로 봉해 하사했고, 원나라 때에 상해진(上海鎭)이라는 독립현을 두기도 했다. 1842년 영국 제국주의 강요에 의해 청나라와 난징조약을 맺고 5개 통상도시를 개방했는데 그중 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미국, 프랑스가 침탈과 수탈을 일삼다가 20세기 초에 이르러 중국경제 중심, 아시아 금융, 무역의 중심이 되었으며 1927년에 특별시가 되었다가 현재는 4개의 직할시 중 한 곳이다.
‘대만을 중국이 무력으로 침공하려고 해도 고궁박물관(故宮博物館)에 보관된 문화재 파괴를 우려해 공격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만 중국은 가는 곳마다 박물관이 있고 또 유명하다. 상해박물관도 그렇다. 11개의 전시관, 3개의 전람청(展覽廳)을 두었으며 세계박물관 중에서도 손꼽힌다. 1층에는 고대청동관, 고대조소관(雕塑館)을, 2층에는 도자관, 3층에는 역대서법관(歷代書法館), 4층에는 소수민족 공예관, 역대화폐관, 명청가구관, 고대옥기관(古代玉器館)으로 되어 있다.
상해박물관은 북경·남경·서안박물관과 함께 중국 4대 박물관 중 하나로 해외 전시로 2007년 부산시립박물관에서 청동기와 옥기를 전시한 바도 있다. 전시품 중에서 두드러진 것은 후기 상(商)나라 시대 유정(劉鼎)으로 고색 찬연한 흑갈색을 띠고 있는 솥이다. 400여 점의 정교한 청동기들은 중국고대 청동예술의 역사를 말하고 있으며, 옥기관은 중국을 ‘옥돌의 나라’라는 말에 걸맞게 7천 년의 옥역사가 말하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옥은 장식뿐 아니라 부와 권력의 상징이기도 하고, 통치자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신령과 통하는 법물(法物)이기도 하였다. 옥이라는 자연적 속성을 인격화·도덕화한 것이다.
책의 마지막은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청사를 둘러본다. 상해시 노만구(盧灣區) 마당로(馬當路)에 위치하고 주변에 신천지(新天地)라는 번화가가 있으며 한국인들이 자주 찾는 이곳은 1926년 3월부터 1932년 4월 말까지 활동하였는데 당시 김구(金九, 1876~1949)가 국무령을 맡았으며, 1932년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가 홍구공원(虹口公園)의거로 일경에 체포됨으로써 일제의 압박을 피해 이곳에서 항주로 철수했다.
그리고 1935년 진강(鎭江), 1937년 장사(長沙), 1938년 광동(廣東), 같은 해 유주(柳州), 1939년 기강(綦江), 1940년 중경(重慶)으로 옮겼다. 이렇게 자주 옮겨 다닌 것은 1937년 중일전쟁으로 여러가지 사정이 불안정하였기 때문이었다. 중경으로 옮긴 뒤에는 상해 때처럼 활발하게 활동했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 한국 문제를 한국민족이나 임시정부의 뜻과 다르게 처리되었는데 이는 영국·미국·소련 등 열강들의 제국주의 독단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임시정부의 역량 부족도 간과할 수는 없는 문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