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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辨裁 方法
明辨이 없음 西氏(논리적으로 먹힌다는 뜻)에게 當한다. 何人이 경관이 좋은 곳에 집을 잘 지었다 하길래 모두들 모여서 아무날 아무시에 구경가기로 하였는데 그집 구경방식이 이렇다한다。그 집이 明辨者 西氏族中에 힘께나(행세께나) 쓰는 자의 집이라 겉옷이라도 西氏族처럼 걸치지 않으면 구경치 못한다 한다 해서 모다들 제대로 맞지 않으나 (혹 제대로 맛는 자도 있을 것이다) 서씨족 옷을 구해 입고선 서씨족처럼 겉치레를 내는데 소위 정장이란걸 하고 나비 넥타이를 메고 물찍구를 발라 머리를 가름매 타서 옆이나 뒤로 넘기고 뻬딱구두를 싣는 등 요구하는 禮儀式을 그럴듯하게 차리고 그 호텔門을 들어 섰는데 휘황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 쓰는 말씀이 重要한 內用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어떤 구경하는 이의 가슴에 와닿는 느낀 감정을 飛躍的인 말씀으로 지어낸 것이나 그 휘황찬란한게 가슴에 와 비춰진 모습이 이렇게 西氏가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어떤 도목수인지 책임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발언권을 갖고 있는 그럴듯한 사람이 단상에 올라서서 이 집 지은 경과 보고를 한답시고 일장연설하는 가운데 이런 말이 있었다.「여러분들이 이렇게 왕림하셔서 이집 생김을 축하해 주심은 이집을 더욱 빛나게 꾸며 주심과 같음이라°(보는이 없으면 값어치를 인정하는 이가 없으면) 그 휘황함을 어데다 대고 자랑할 것인가? 논어에 있는 것처럼 알아주는 이 없어도 나는 君子란 뜻을 비유한 初入文에 글처럼 벅차는 태도로 그냥 있을 건가? 그렇담 무슨 생긴 큰 보람 있겠는가?) 그러므로 또한 이집 생김과 함께 생겨난 여러 빛나는 보배로운 구슬장식과 같은지라 그 구슬처럼 되옴을 이집으로 인한 것이니 이집의 영화로움이 각개 영화로움이니 이집에다 (이집 지은 이에 다) 그 영화로움의 영광을 돌리시고 즐겁게 놀다 가십시오」하는 것이다。필자가 갖은 궁리를 다 짜내 글을 조리있게 잘 짓고자하나 마음은 달려가도 머리에들은 실력이 실력인 만큼 어찌해 볼 도리 없다치고(그래서 모든 어린 사람들은 修業을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소위 西氏의 휘황한 빛의 말씀이 거기 구경온 사람조차 제가 만들었다는 뜻이니 가만히 듣고 보니 얼마나 껄끄러운 얘기인가? 세상에 글쎄… 집을 잘 지었다 치하하는 말들이 자자하길래 구경 좀 할려했더니 제족의 모습을 차리지 않으면 구경치 못한다 해서 제족처럼 차리고 왔더니 몸뚱아리(心身 空이 一體라 이 또한 허울이라면 허울이라 할것이다。왜냐? 수차 거론했지만 家見은 相。相은 허울…) 조차 제가 만들은 것으로 하니 얼마나 듣기 거북한 일인가? 그래서 구경온 甲氏는 속으로「원 별미친 목수 다보겠네」하였다 한다.그리고 이 집이 어찌 제가 지은 건지 여러 귀신 독갑이들이 이룩한 것인지 어떻게 아나 또 보니 집짓는 자 따로 있고 사는자 따로 있기도 하는 法 여러가지 행태인데 어찌 제 집이며 저들만 살집이라 하겠는가? 집이 꺼리 등 역할 분담 여건 조성이 되었으니까 이루어졌지 하였다 한다。이처럼 西神이 이 세상을 만들고 그대도 만들었다 하는 등 논리적으로 (理想 理念 理想主義) 잡아 먹으려 들려거던 뒷말의 생각도 곰곰히 해보라는 뜻이다。즉、모다 세상이 하도나 잘생겼다 하길래 네 옷입고 유람은 것이라 한다면 西神의 아궁이 같은 입에 짚힐 나무가 없다할 것이다。꼴사납게시리 너무 저만 잘난체 유세하지 말라는 뜻이다.도리어 반감사기 쉽다는 것이다.
桓 思想 한(환)이란 뭘 말하는 것인가? 필자가 만일 여기 장미꽃 한송이를 들고 이것이「환」이라
한다면 그것이 어째「한」인가 하고 대박 의구심을 두거나 이상하게 여길것이다. 더 터득하기 쉬운걸 갖고 例를들어 표현해보자 여기 싸고있는 껍질을 벌리고 탐스런 열매를 내보이는 석류꼭지나 붉은 꽈리 꼬타리 벌어진것을 손에들고 이것이「환」이다 나아가선 온누리 상태가「환」이다 한다면 그것이 어째「환」인가 이상이 여기다 못해 狂人취급을 할 것이다。그렇다 狂人이 되다시피 深醉해야지만 그 深奧한 뜻을 알런지 모르리라。桓字를 玉篇에서 찾아볼진데 씩씩한 모양을 표현한다는 뜻의 字라한다(그 外에도 여러가지를 가르키는 뜻이 있으나 그 첫번째 뜻풀이가 씩씩하다는 표현을 말하고 있다) 즉 氣象이 健壯하고 힘 있어 보이는 것을 씩씩하다한다。이字의 具成을 볼진데 여기서 古來歷 甲金篆文 學論할려 하는 것이아니라 昨今現時에 使用하는 字形面(요즘쓰는 글자형태의 됨됨이)을 본다면 이것은 木邊에 一旦形으로써 三次元座表(
)는 뭘 말하는 것이며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가르키고 있는 字形인것이다。즉 宇宙(時空) 生成形態의 뜻 論理的 것을 간단하게 주려서 한말씀 글로 표현한 한말씀 글인 것이다.
一日字 가운데「日」字形 原來 이것은 圓圜[원환]이나 圓盤(쟁반 같음)을 面이 보이게시리 세운형태의 상징하는 것으로써 그 日形上下「一」形은 하게 놓은 원반을 측이나 正面에서 본상태이다. 이 三個의 원반을 어기여 (交 즉 가로 세로 높이) 맞추면 그 앞과 같은 三次元座表形의 立體 圓滿形 形成된다는 理致를 論理的으로 가르키고 있는 것이다. 즉 우주時空間의 표현象을 간단하게 주린形의 말씀 글자가 되는 것이다. 此字는 韓字의 古語로써 같은 意味의 字라 한다. 말하자면 나라한(國名)字이며 한민족 하는「한」字이며 환웅임금하는「환」字이며 우주生成을 가르키는 字인것이다。韓字形을 또 볼진데 日形을 엇가로 어기여(交)놓는다는 뜻으로 되있으며 그 變形을 말하는 것이니 앞의 破壞하여 해설한 의미와 같다할 것이다. 桓字와 韓字는 이런뜻이 담겨져 있다치고 우리가 쓰는 한글(훈민정음)表音글자의「한」이나「환」字形의 具成을 살펴보자° 이것이 무슨 의도적인 것만을 갖고 억지로 짜맞추고자 하는 말씀이 아니니 그냥 저절로지 우연에일치(그內面을 헤쳐보면 필연성 절대성일수도 있다。지금 이렇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도 하나의 절대性 속의 一科程인지도 모른다。절대성이라 하는 것도 무위유동과 같은 것이니 제 맡은 司名 그 의미를 注知시킬 도막 시공限이 쇠락해지면 변한다할 것이다)처럼 앞뜻 象形文과 그 意味가 一致하게 되어 있으니 잘살펴보라「한」字는 諸열매가 깨이고 깨어 나온다는 의미의 形을 짓고 있는 것이다(※ 혹이 필자더러 삿된 가견관점에 깊이 빠져있다 할지모르나 그렇더라도 우리를 나타내고자 하는데 무슨「하자」가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 하면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가 껍질이 갈라지지 않은 열매를 상상해보자 쉽게말해 여기밤송이가 있다。그 밤송이가 여물으면(熟=信實) 껍질이 벌어지면서 밤알이 보이고 그 밤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떨어져 나오게 된다。즉「한」字는 그 形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즉 끝없이 영원히 늘상 깨쳐 (울림치듯) 나오는 것을 가르키고 있는것이다。이 宇宙(시공)는 無爲有動(不絶作用)하여 끊임없이 깨이고 (覺破 脫罟)있는 것이다。이해가 잘 안된다면 실감나게 다시 한번 설명해보자 여기 둥그런 사과 하나가 있다。半을 꽉 갈라 이形으로 벌려놓는다면(
) 이 形처럼된다 할 것이다。그런데 그속에 (
)이形이 또 들었다 상상한다면 잎사귀 벌어진 속에 또 열매가 들어있다거나 사과씨(種)가 사과되어 자란상태를 그 의미한다 할 것이다。「한」字의 밑받침 「ㄴ」이것은 앞과 같은 열매들이 계속나온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깨쳐나온다。흘러나온다를 표현함인 것이다。「환」字에 있어서도 안의「ㅗ」母音形과 받침「ㄴ」形의 合成(亡)은 그 깨친것이 여러形으로 형질변경되어 나와 萬象을 이룬다는 표현인 것이다。한글「한」字의 의미는 여러가지로 쓰는 것이나(물론 환字 또한 그렇다 그단어 구성따라 그의미를 달리한다) 名 動 助辭를 로 말할것도 없다하겠지만 그 깨쳐나는 여러 가지 형태의 뜻을 分野別로 표현하게되니 그 깨쳐나오는데 忍苦의 逆境이 있다하여 恨이 쌓이는 恨이라하고 살다보면 또한 恨이 많다하여 恨이라 하고 그깨쳐나온 보람이 있다하여 기쁘다하는 뜻 환희하는 ㆍ환ㆍ이라하고 이경계 저경계 有無를 거론하여 한계짓는다는 뜻의 ㆍ한ㆍ이라하고 민족을 이뤘다하여 ㆍ한민족ㆍ하는데 쓰이는「한」이라 하고 삶이 해이해지면 시도때도없이 환난이오고자한다하여 ㆍ환난ㆍ하는「환」이라 하는 등 그 具體形에 들어가선 가나다形이 모두 그에서 깨인形이며 모든말씀 및 촉감할수 있는 (또는 촉감치 못하는 것이라도) 우주 삼라만물이 그로부터라 할 것이다. 즉 우주시공 섭리를 간단하게 주려 한글자 말씀을지어 가르키고 있는 것이 곧「환」字인 것이다。이것이 이러하니 필자가 장미꽃 한송이나 석류 한송이를 들고 이것이「한」이라 한다면 미친자 취급만 할것인가 이런말씀인 것이다。우리 배달겨레는 桓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그 이름 조차도 한국(설령 국호를 변경해도 以前부터 한국이라는데는 變함이 없다) 韓民族이라한다。물론 大局的인 見指에선 우주나 全人類 및 삼라만상이「한」이라 할것이나 왜 우리 민족에게만 유독 한민족이라 하였겠는가? 이것은 여러방면으로 생각해봐야할문제이지만 그사람들의 생각하는바 관념이(物事를 바르게함(正格)에 있는자라) 바른지라 그 桓이란 뜻의 정통성을 이어갈수 있을만하겠기에 우리민족에게 한민족이란 칭호를 부여받게 한 것이다.누구에게 賦與받았는가의 의문을 제기할 필요까지 없다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캐다보면 잘못하다가는 엉뚱하게시리 귀신숭상하는 사단 주장 논리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다만 세상 생김이 내 조상 내 얼 그것은 곧나의 立場에서 부여받았다하면 될 것이다.그것은 저마다 空의 立場이되어 조건짓는 개념으로 化할수 있기때문이다。내가 이(우리) 민족(나를)을 위하여 그 以前에 창조적 개념으로 있었다 한다면 무엇을 만든다거나,어떤이유로 무엇을 賦與한다는 것은 별것아닌 것이다(말에 모순 같지만 그렇다고 감히 누구를 만들었다 시건방을 떤다는 것은 용납될수없다. 저마다 각기 空의 立場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 하나만을 치켜세우는 듯한 논리는 내게는 통치않는다. 다만 諸相을 내아닌바 없다로 생각한다면 혹 그 位置에 설수도 있을지모르나 굳이 그 位라하는 것에 설라할 필요조차없다 할 것이다) 그런것 (만듬 운운)을 갖고 世人에게 파고들어 흑세무민할 필요는 없다할 것이다. 그럼 왜 桓을 말하는가? 할런지모르나 그것은 엉뚱한 나락으로 떨어져 현혹에 들지않게하기 위해서인 것이다.桓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계속 지금도 설명하지만 無爲有動하는 사공燮理 過現來의 時間感을 접은 立體空이란 뜻이다. 이것이 하나의 삿된 家見 眞理法相이라 하더라도 諸法相이 存在하는 限 한法相이 破毁된다해서 諸法相이 그 法相을 벗고 나오는 것은아니라는 뜻이다.그 法相이라 하는게 어떻게 표현하는 形容짓는 것마다 걸리게된다면 스며들지 않는 곳이없어 오히려 諸法相을 싸고 있는 것같이 된다면 표현하는 것마다 이 걸림이 없는것과 같다 할 것이니(비유컨데 諸法相은 별(星) 한法相은 별들을 품안에 띄워 놓고 있는 蒼天空間) 그 法相이라는게 果나 능력이라는 것으로 形容表現하는 것이 커서(大) 諸法相을 감싸안게 된다면 桓의 法相이 諸主張의 삿된 家見相보다 낫지 않을까하는 말씀이다。쉽게 말해 즉 우리 주장으로 세상을 포용하는 능력을 발휘하는게 낫지 남의 주장에 (어떤 감언 명분이던)말려들어 포로될게 아니라는 것이다.이것이 우리桓思想의 일부를 대표할 수있는지 모르겠다.환의 의미를 말하면서 남을 말하는건 모순이지만 桓의 이미지를 퇴색시키는 論(※ 귀신이 세상 만들었다 하는 주장논)에 반대한다거나 구체적 분열표현상에선 자타를 말할 수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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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題는 없다. 아무렇게나 쓰면 글이다。神이란것(作用해 엮는다는 것)의 내면이나 弄斷을 들여다 보는것 같은 억측의 얘기다。神의 뜻 實力이라는 것은 관찰하는이의 복안에 맞질않거나 염증을 느끼는 것처럼되면 마귀의 장난처럼 보이는 것이다.
즉 神의 뜻 '實力이라하는것은 마귀의 作亂인 것이다。時間感 있는걸로 넣어 말한다면 그것은 오래前부터 시작되었다.(이것이 또 남을 비판하는 얘기가 아닌가한다) 먼저 그 어떤 것이 뜻의 눈독을 들인 먹음직스런 먹이체라면 분열상을 일으켜 와해공작을 취한다. 그리고 난다음 입을 갖다댄다는 표현으로 理想의 播種하는 것이다。흡사 아프리카의 말벌이 독거미의 몸을 눈독들이고 있다가 불의에 덮쳐서 그방어하는 것을 눌러잡고 죽인다음 그 독거미의 몸통에다 제알을 씰틋말이다。이것은 잘자라는 남에 채마전을 갈아엎고 자기가 갈구하는 보리씨를 파종코자 하는 것과 같아 실력있음 어디 대항해보라는 것이다(이로부터 草土를 밟는듯한 怨尺이 생겨나는 것이다) 수억만 수천년 동안 物事의 勢싸움이나 各種生物 및 民族을 분열시켜 서로가 물어뜯게한 다음 (마치 한뿌린지도 모르는데 韓人과 日人이 원수되게하여 외나무다리에서 만나서 서로물어뜯는 것처럼) 지칠대로 지쳐있을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듯 문명利器라는 생태계파괴 환경파괴 기구를 겸해 갖고 파고드는 것이다。나는 생명이요 길이요 어떻구말이다。종국이랄것까지 없이 생태계 파멸인 것이니 또 하나의 輪劫이 지나면 그 다음은 기계끼리만 활동하는 기계겁이 될 것인가? 그 기계 또한 독깨스에 부식되어 사라지고 깨스겁은 깨스정화겁에 당하고 그 정화겁 또한 그를 잠식하는 겁에 당할 것이다。지구도 하나의 생명체라 自存治應 기능이 있다 할 것이나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치유한단인가? 허공의 눈처럼 되어 제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계속 추구하는 모습을 보기위하여 치유한단 말인가? 고기가 크면 잡기어렵듯이 다음으로 넘어가게 마련인 것이다.
◎ 삿된妄想이 眞理인 것처럼 엮어나가길「내가 실로 열석자(十三)로 凍土에 와 있노라」한다。열석자는 四九合成數字이다。(※ 異意提起=四九合成만 하필 열석자인가? 그 外의 숫자도 合成함 모두 열석자이다.
六加七 五加八一加四加八 四加三加七二十三減十二升五加三七十八除之六 等等 數理學의 如何한 計算公式이나 符號에 의함도 열석자를 만들수 있는 것이다.그럼 왜 열석자란 것이 잠재의식처럼 새겨져 있는 기억감이 머리에 박혀 제반걸 이에다 뜯어맞춰보고자 하는가? 이는 어느 宗團의 경전에 濟世救民하실분이 열석자로 오신다고 하였기에 이렇게 말씀을 我田引水格으로 들춰서 내 글 엮어감에 빛을 내보고자 하는 것이다。어디는 가면 尺(재는자)으로 열석자인줄 알고 열석자 되게시리 미륵불을 해 세웠하니 그 또한열석자가 아니라 할 수 없는 것 또는 經文句가 열석자라해서 그것을 의미한다하기도하니 그 또한 아니라할 수 없는 것이니 혹시 以上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인지 또는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내(필자)妄想이 四九合成을 열석자의 진리인것처럼 엮어 내려가는 것이다。힘있는 자에게 매어달리고 아첨 아부하고 힘없는 자는 뒤로쳐지거나 도태되라는식 그러므로 도태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쫓아와 따라 잡아보라는 식의 일렬로 이끌고 나아가며 肥大해지겠다(폭의 확대 立志强化)는 수직적 사상과 어깨를 견주는듯한
裒多益謙의 수평적사상이 合成되면 十形으로 엮어오는듯한 十方如來가 된다 할 것이다. 수평적 사상도 고개를 세로 끄덕거려주는 긍정적 思觀과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젓는 否定的 思觀으로 合成되어 있다.
이 또한 누적이나 폭의 확대로써 틀이 짜여 면적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수직 또한 二元化하면 수평의二元化와 같은 논리가 나온다 할 것이다。이렇게해서 思想的 論理的 立體空化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앞서도 擧論했지만 桓이란 立體空化를 논리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했다。이 桓의 가로 세로 높이의 周圍 둘림을 둥그런(圓)이라 가정하면 基本的인 圓은 세 개의 환이라 할 것이다。이것을 단면形으로 지어볼때 세환이란 그 의미를 내보이기 위하여 환의 크기를 차등을 둬 포개 접어놓으면 아래같은
이러한 세환이
된다 할 것이다. 이것을 宇宙根本空을 가르키는 標形이라하고 그 터전을 우리 대한민족과 國의 얼결에 중심점을 둬 이름 또한 한민족 한국이라 한다면 (비약적으로 한민족 한국이라 하는것인데) 이에 대해 백가쟁명의 제 잘났다하는 十方如來思想을 意味하는 十形을 얹어 놓으면 세 개의
환이 四分된 모습을 취한다 할 것이다。昨今에 西歐思想文物이 十方如來(구제의 명분달아 가슴에 와 닿는다. 닿는 느낌을 如來라 함일지도……)하여 우리 江山과 한민족을 선택한 민족인 시험대상을 삼고 (혹 근본이 우리니까 에워쌈을 끌어잡아 우리가 우리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아 純性體에다 시험해보는지도 모른다)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 形은 四金의 形勢라 저절로 민족과 강산이 四金勢에 의해 左之右之되고 있는 것이다。金은 方位上 서쪽을 가르키고 있는 것이니 서쪽은 數字上으로 龍圖에 보면 四하고 九숫자가 配當되어 있음이라 그러니 합성된 數 열석자의 사상(救援思想)이 凍土에 왔다하지 않았다 하겠는가? 凍土란 얼어붙은 땅을 말하는 것으로 解凍을 갈구하는 그에 있는 자들에게 있어선 고난의 땅이기도 하지만 다른것이 침투해 들어올 여지가 많다 하는 未知의 땅 개척해야 할 땅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곧 먹어치우라는 곳 허물을 벗겨달라는 모습의 땅으로 對外的으로 보여주고 있는 땅을 말한다. 즉 우리민족이 舊韓末葉에 대외적으로 그렇게 내 비쳐졌다 할 것이다.당시는 서구열강들이 산업혁명을 일으켜 각국이
부흥을 꾀하는 입장에서 식민지 개척이나 약한곳의 침투에 혈안이 돼 있을때이니 양육강식이 극심하게 나타나는때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사상이나 기타 사상이 또한 영리 목적만을 추구하는 그런 범주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였다 할 것이다.물론 只今世에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자들이 한 둘이 아닐것이라 하지만…… 저(十三사상)는 먹이를 찾아 뿌리를 내린것 같고 이는 록마生旺((官財生旺=東은 木이라한다。즉 삼차원좌표 완성단계를 말하는 것이며(왜 그런가 章 五行論을 보라) 살아있는 삶을 뜻하며 宇宙立體 生命을 뜻한다。命理에 있어서 東은 五行上 木性이라 木性의 官旺은 西金性을 가르키며 陰陽家의 말을 쫓으면 木性에 대한 財性이 또한 戊己인데 戊字陽干性이 申位에서 長生된다하니 그래서 록마생왕이라 해본것이다。命理家의 말 쫓으면 西에서 己土가 長生된다 할 것이다))이 온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金은 부채(扇)形이라 四金의 弄斷이 네 개의 부채를 폈다접었다 왈가왈부 고수장단에 맞춰 판소리唱歌하는것 같다할 것이다.
四金의 勢가 숙질려면 十方如來(意見多樣으로 絹織되듯한 一名 나약한 勢로 몰리면 惡化가 되는)를 잠식해야 되는데 (※ 그러나 설왕설래하는 十方如來도 영원하고 四金 또한 形質을 變更하여 諸森羅化하여 영원한 空化인 것인것이다.) 소위 회색늪에 전해질을 분해하여 가라앉히듯 잠기게 한다면 발전명분마다 生消(이해득실이나 장단만을 가르킴이 아니라 回輪劫을 뜻하기도 한다)가 있는 惡業이 창출되는 잘못된(비뚤어진)벗음 생태계 파멸 人劫消滅은 재촉하지 않으리라 모든 지음(作)은 언젠가는 소멸됨이 법칙이다。그 관점을 어디에 基準을 둬 定하던 有終에 味 좋은 흩어짐이되야 다시 모일때도 좋은 모임이 될 것 아닌가?
西歐思想을 잠식하는 정신적(諸行은 精神의 思考로부터 시작된다)支柱(思想)가 생겨나야지 四金판세가 形質變更 된다 할 것이다.모두가 龍頭가 되어 放漫하게 하는 民主主義란 것이 西歐에서 온것인가? 그렇담 그것 또한 먹어치워야한다 할 것이다.기존에 있던 사상에 의한 諸行이 낡은 것이 되어 當치 못하여 서구 사상 문물이 침투해 들어오게 된 것인가?(낡은 것으로 몰아부치는 힘에 먹힌 것이겠지 소위 여우같은 영특한 신식 무기에 정말 사람들이 물린 것이 된 것이겠지) 그러므로 서구사상을 도리어 먹어치우렴 그보다 몇갑절 실력있는 사상이라야만 된다 할 것이다. 이것이 또 여지껏 쓴글이 삿된 생각이 편파적인 관점으로 글을 엮어 장단면을 시이소처럼 기을겨놓아 한쪽에 짐을 싣고자함이 아니던가? 그래서 삿된 망상이라 하였다。필자의 치더린 생각이 기발한 착상을 내는 것처럼 제 심정에 우쭐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기발한 착상이 아니라 실제로 들어있는 사시적 정신이 세상을 관찰하여 보기를 그렇게 하는데 어찌할 것인가? 이런 말씀이다。時事性 있는 것을 쓰지 않을려 하였으나 잠시 망각하고 썼을뿐이니 이것이 시사성 있는 것인지 오래도록 갈수 있는 사상 이론인지는 두고 봐야한다 할 것이다(시사성을 배제 하고자 하는 理由는 왜냐 지나놓고 보면 흐르는 變化하는 物象에다 새기는 것같아 그 관점이 얼마가지 못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후담=1992년으로봄 삼십년이넘고 1997년 책 출간년 이십육년지난 2023년도 지금와서봄 아주 어리석은 글이지ᆢ세월가면갈수록 점점 더할것 아닌감 ᆢ ㅡㅡ ㅋㅋㅋ)以上의 몇 말은 생각해 볼 제 필자가 분열시 해보는 것 같지만 서구의 구세주라 하던이는 東 民草의 구세주가 아니고 東의 기운을 설기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그래서 저들의 메시아 사상이라하는 것은 우리의 구세주 사상이 아닌 것이다.나는 알파요 오메가라하는 논리는 저들에게나 부합된 논리이지 동녁 우리에겐 하등에 관련없는 주제넘은 오지랍 넓히는 침략 사특한 악마 사갈 뜻 생각 언어 行爲 구사논리라 할 것이다.
◎무엇을 가늠(알아맞춤)하라 하는 것은 시험코자 하는 것이니 귀신(시간)弄斷에 들기싶다。何人이 何事에 黑白을 가늠하라 한다면 그것은 時間的인 事를 미리 예측하라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정신세계의 思慮나 窮理覺이 얼마나 辨裁를 잘하나를 시험해보는 것이라 섣불리 흑백답을 낸다는 것은 스스로 어리석은 覺이라 自認하는 것이다。왜냐 시간(使命鬼神)이 틀어놓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빠져나가지 못할 구석으로 몰아넣듯 집요한 질문공세를 펴서 答하지 않곤 베기지못할 부득이한 형편계가 된다하더라도 말꼬리를 돌리는 머리회전이 빠르면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고 더불어할 착상이 떠오를 것이다。즉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의중을 읽듯하고 逆攻勢를 取하는 次元에서 흑백판결의 요행성은 半半이라 요행이도 맞으면 다행이려니와 맞지 않는다면 거짓말을 한 것이 될 수도 있는 말을 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하는 말씀이다。「즉 大衆이 심정으로 염원하는 어느 한 쪽에 뜻의 짐을 실어줌이 어떠하리」이다。설령 염원에 대한 答이 빗나감이 있다하더라도 그 心脫의 目的을 둔 것에 뜻을 같이 했다는 소리는 들으리라。그 소리를 듣는다는게 그 시기를 지나놓고 보면 그 예언한 것이「틀렸다(맞지 않았다)」는 것이다。이것은 그릇되고 틀린답을 낸 것을 두둔하고 비호하는 말이 아닌가 한다。그래서 핑계없는 무덤없다고 허물을 쓴 자에게 소명할 기회를 주는 것 같은 편벽되고 사벽스런 논리란 것이다。
이미 결정된 것은 과거라 가늠하겠지만 未決은 시간使命의 복안에 있으니 시간 귀신이 심사가 있다면 심사가 뒤틀리듯 뒤틀어 놓으면 그만인 것이다。그러니 시간 귀신한테 축원하는게 더 낫다할 수밖에 더 있게는가? 시간 제報觀(布觀=또는 腹案)에 맞아 잘만보이면 求하는 것은 받아논 밥상과 같은거 무슨 염려, 있겠나만은……(잘만보인다는 것은 어줍잖은말 같으니 그 相應하는 業積을 일궈논 것을 뜻하는 것이니 이것이 노력치 않곤 거져되는 것은 희박하다는 것이니 그 보답에 대한 일궈논 문제가 있다면 무슨 염려있겠는가 이말씀이다) 未來의 事에 대하여 吉凶可否黑白兩比論으로 판결하라하는 것은 徒是 노리개 희롱감으로 가지고 놀듯 시험하겠다는 뜻이니 시간 제뜻대로이다。可하다 걸 可하게 해줄 수 있고 可하게 아니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시간使命이 누구를 지목하여 말하길 무슨일이 아직 미결상태인데 그대는 可할 것이라 한다면 나는 否할 것이라 하고 그대가 否할 것이라 한다면 나는 可할 것이라 한다던지 아님 맞장구를치듯 그대의 可否판단 여하에 따라 나도따라 可否하여준다거나 하는 것은 순전히 시간의 腹案에 있는 것이다。이러니 그 뜻에다 대고 목적하는바 소원성취를 축원함이 또한 어떠하랴하는 敗退不中者의 편력을 드는 편협된 자의 생각이다。흑백가늠은 귀신 심사에 있으니 굳이 가늠할게 아니라 여의성취의 여건조성을 求하는 것이 더 낫다할 것이다.
옛 얘기에 이손에 쥔 새를 죽일것인가 살릴것인가를 알아맞춰보라하니까 그 明答이 한쪽발을 문안으로 들여놓으면서 내가 들어갈 것인가 아니 들어갈 것인가를 알아 맞추면 그 대답을 하여주리라 하니 먼저 문제냈던 사람이 남에 심사를 어찌 알 것인가 하므로 나중 답할 처지에 있던 사람이 답하여 말하길 그럴테지 제심사도 몰라 제 손안에든 새도 죽일지 살릴지 몰라서 남에게 묻는 사람이 남에 심사는 어찌 알 것인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기가 불편한 심정에 복안에 맞지 않으면 틀어놓으면 그만인 것이다. 이런걸 본다면 이런데에는 측량한다는 것은 일을 그르치게 하는 것 모르는게 藥이라고 측량치 아니하는게 더 낫다할 것이다。辨裁를 잘하면 귀신도 막히는 法(막힌다는 것은 흐름 물길을 다른 곳으로 튼다는 것이다) 앞글 내용과 문맥의 불통 여부는 제쳐놓고 사위가 하는말이 튼튼한 고삐가 있으면 저 병풍 속에 숨은
범을 묶어내렸만은 하니까 장인이 듣고선 고삐를 내어주며 어서 묶어내게나 함에 사위가 한다는말이 걸작이라 (:장인 어른 어서 그 범을 몰아내십시요 제가 묶을테니까;) 하는 鄕俗友의 民話처럼 말이다.
○ 넋이 그리(그 어떤體)로 들어감을 다시 태어난다한다。그리라 하는것은 어떠한 넋의 의지처 껍데기
(허물=옷)를 말한다. 그릇이 우그러지면 담기는 物體도 그 모양을 하듯(액체이나 분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어거지로 아니라할려고 우기는 울퉁불퉁하고 단단한 큰돌덩어리를 하나 덩그렇게 담는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또 얼기설기 얼크러진 줄같은 물체를 담아놓고 내 유추하는 방법이 틀린다。탈만잡을려할게 아니라 남에 생각에도 心門을 열어 구경해 보라는 것이다。이 말씀은 군더덕이 객설이다)이 넋 또한 그 모양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할 것이다。사람이 지은 한(一)家屋에도 여러사람이 살듯 어떠한 껍데기가 생명이 있던 없건 넋은 여럿(覺靈의 集會)일 수도 있으며 넋나간 사람 같다는 것 같이 혹 빈집도 있을 수 있다.이는 모여왔다 흩어지는 것을 말함이니 이러한 會離集散 作[필자얘기다 잠잘 시간이 되어서 잠이들었다。꿈속이었다。향리의 내가 얼마간 거처하던 굴속을 집이라고 찾아가게 되었는데 가는 도중 산기슭 오솔길에 들어서서 신발을 벗어놓고 무언가 다른 것도 좀 덜어놓고 굽이진 길을 걸어가는데 맨발로 솔잎이 듬성듬성 깔린 약간 경사지고 밋밋한 바위가 길상간에 있어 밟고 지나가게 되다 비탈길에서 굴집을 보니 우리 집사람이 무언가 하고 있는 것처럼 왔다갔다 하는게 보였다。막상 당도해 보니 누님이었다。사촌동생도 와 있고 좀 있다간 마을에 안면있는 아주머니 두 분도 무언가 급한 일은 아니나 半놀이 삼아 볼일 있는 사람들 처럼 오다 가만히 있는 口=입에 일시킬 乾量을 들고 왔는데 그 일시킬 감을 내발치에 두게 되었는데 그만 약한 바람에 떼구르 굴러가게 되다。그런데 아 글쎄 누님과 동생과 무언가 얘기하는 도중 집앞老松(산비탈 중턱에 굴이 있어서 집앞이 경사가 져서 그 아래 소나무 크기가 문은 열어놓고 옆으로 누워있는 내자세의 크기와 같아 보였다) 잎에 불이 붙어 훌훌타고 있는게 아닌가? 그래서 내뿜는 콧힘으로 흥하고 꺼버렸다 그랬더니 누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야 네 콧힘세다」하신다 이것은 순전히 내 글이 헛풍떤다는 얘기겠지: 여기서 주위 환경 생김은 현실적으로 내 집필 거처 하는 방 사람들은 여러 영각 소나무는
着想ㆍ 솔잎은 필끝ㆍ 불타는 건 글씀 ㆍ불끄는 콧바람은 그 꾸미는치레 허장성세가 가관도 아니란 뜻이겠다……]
用은 時間性 즉 시간속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그시간은 過現來의 흐름인 것이다。앞서 여러論에서 흐름이 있는걸 알 수 있는건 物事의 變化에 있다했다。이러한 과현래 현상이 서로간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틈새 없는 연계된 작용으로써 物事를 變貌시킨다는 것이다.그러므로 과현래가 一物事에 同居處를 삼고 있다는 것이다。一物事의 細分化는 多樣한 觀點을 놓을 수 있으니 差等 相異 同一昨今來 新舊 三分五列 兩比多比 千態 등의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一物事는 世態요 그 세태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物事件들이 과현래(시간)의 분신이요 現身體들인 것이다。또한 그러므로 그 現身體들은 諸넋의 탈바꿈한 幻(혹=換易의 의미도 있다 할 것임) 生身體家들인 것이다。마치 이런 物事나 저런 物事가 있는 것처럼 여러형태나 형상을 그리게 되니 형세에 따라 그 집을 이리저리 옮겨 다닐수도 있으며 그러한 일이 긴 시간을 요구하는 것만 아니라 사람이 집을 들락거리는 거와같이 잠깐 사이에 이리갔다 저리갔다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저 이 그 모두 다 내허울로 아무것이나 뒤집어써도 나라는 것이니 옷을 달리 차려 입었을 뿐 모두라는 개념이 곧 나라는 것이다。(어떻게 옷을 입나는 그 다양한 方法論的 次元에서 다룰 문제이지 여기서 다룰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저것은 나의 과거의 형태 이것은 지금의 나의 형태 또 그것은 미래의 나의 형태로써 한군데 옹기종기 모여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즉 천태만상이 내옷이요 내허울이라는 뜻이니 궁극이랄 것까지 갈것 없지만 굳이 나라는 존재를 우겨서까지 내세울 필요가 없다는 단계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 할아버지와 자자손손은 수직적 연계에 의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單面의 群落을 이룬 모습으로 있다는 것이다. 즉 모두가 포괄적인 내입장空化라 하는 것이다.이러므로 나라는 존재는 없게 되는 것이다。내라하는 存在란 어떠한 見解를 마음에서 그려 만들어 내거나 저촉 받아 갈등을 일으킨 모습을 적절한
표현방법으로 내비추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나라하는 存在이다。과현래란 한곳에 있다는 뜻이다。시간감을 없애면 저라는 것의 돼 있는 형태나 그 행동이 곧 과거의 나라는 것으로 미래의 나라는 것으로 함께 한마당에 그려져 있다는 것이니 내 입장의 시공이 여러 차원으로 조명된 모습이 곧 현실적으로 저 이 그의 모든 形態羅列이라는 것이다。
이런 照明의 立場에서 예전의 집이 그립고 좋았다 한다면 마치 행장을 수습해 가지고 고향집으로 돌아가그럭저럭 수리하고 여생을 보내는 것 같으리니 이는 왔던 과거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늙고 추한 껍데기는 곱게 늙었던간 껍데기의 등신은 따질계제가 아닌 것이다(이것은 祖上의 기리던 얼을 받들러 간다는건 아닌가? 반론의 생각이 짚히길 조상의 기리던 얼이 진취성있는 것에 있지 退行的이고 한여생 편하게 보내겠다는 주저앉는 곳에 있는 것인가? 부단하게 노력하는 농부가 일을하다 밭두둑을 베고 죽을지언정 편안쉼터를 생각하는 것은 자랑할게 없다 할 것이다。혹시나 來日事를 위하여 힘을 배양키 위한 휴식을한다면 몰라도 말이다…) 윤회삶이 접시란 그릇에 둘러그린 십장생 그림과 같으리니 그 접시란 모양과바탕은 변함이 없어도 그에 그려진 그림들은 여러 모양을 하고 있을것 아닌가? 여기서 넋을 나로 표현하였다。그러나 넋 또한 집이다 神 등 어떠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명분을 달거나 그려 형용을 뜻한다하여 이 모두(그린집 가견)집으로써 실로 나는 없다。太初라는 것을 말하여 그 무엇(뜻)이 있었다한다면 그또한 집일뿐이니 나라는건 아니다.왜냐하면 나는 없기때문이다.나라는 것이 太虛에 잠겨 없어졌으니 어디가서 찾을건가? 손속에 쥔 한웅큼에 공기도 공기요 大氣도 공기이니 들판에 떼로 풀을 뜯는 양떼니 그 구름일듯 내달아서 묶어치 몫어치가 없어져 보임이라 무질서한것 같아도 궤도를 이탈치 않는 것 처럼 法이란則(律=어떤 것을 基準을 삼아 守하는 것 그래야만 질서가 서게 된다)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相=진리란? 흐르는 作用이라 哲則으로써 無爲有動하고 있는 것이다)。저 창창하늘이 나인가? 나일수도 있겠으나 굳이 나라고 하지 못하는 것은 왜냐? 그 창창하늘 진공상태도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어떠한 家見이던 허울) 그 執着이 나라는 塊를 形成한다하니 집착의 탈을 떨쳐버리면 내가 없어지는 한 허울 벗음이라한다。집착은 愛憎일 수도 있다。애증은 삿된 진리가 되고 삿된 진리는 行코자(펴고자 하고)하고 行은 作用의 胎動이니 萬象이 作用에 의해 있는 것이다.
필자의 운명使命이 필자보기를 너는 글을 쓸계에 있지않다고 야시봤더라도 나는 집필을 계속할 것이다.그는 왜냐? 저 사명이 나의 정신의 行路를 몰라줘도 너무 몰라주는 등신 사명이기 때문이다。이것은 나를 二元시켜 등신 사명이라는 걸 존재케해 욕구불만의 해소차원에서 그를 질책하는 것 같지만 나의 정신세계를 사람의 救援覺(고뇌소멸각)으로 보지않고 物事의 救援覺으로 봄이라 미천한 일이나 시켜 부려 먹기만 요구한다。이는 내 정신각이 깨인 覺의 그릇(器)이 맑지 못하여 사람들의 苦惱를 벗겨줄만한 자질은 되지못한다는 것이다。실제도 그런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판단은 딸린 의탁한 濁한 靈覺들이 똘똘치 못하여 제수준에 맞춰 같은 어리석은자로보고 그렇게 몰기 때문에 협조한다거나 接하는 일도 그수준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즉 네까짓게 뭐길래 시건방을 떠나 이런식이다. 마구 짓이겨 밟아라 그렇더라도 그 근덕지가 티끌먼지 아니 공기가 되어 없는것 같더라도 근덕의 얼넋이 있는 이상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뜻은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 아무리 沖天재줄 가졌어도 세상이 오탁해져서 귀신 광란 능력은 못 당해낼 것이다。이 귀신에게 굽히지 않으면 베겨나지 못할 세상이 될 것이다。제 잘난체 오기를 부려봤자 도마위에 고기와 같은 신세를 면할길은 없는 것이다。귀신을 떨쳐낸다는 것이 버림받아 구차한 삶으로 나타나 보일 것이니 아무리 정신적으로 그지없는데 도달하였다하더라도 물질세계로 어여쁘게 포장시켜 주지 않으면 초라할 뿐이요 어느 영역에 노닐던간 평범한 사람들이 볼 적에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여겨진다면 무슨 내라할게 있는가 이말씀이다。귀신 제 뜻에 맞게 잘보여 사랑받아 고매한 품위를 갖춤을 얻어서 평범한 사람이 볼때에 내노라 하는 영달을 누림만 갖지 못하다 할 것이다.내가 이것을 동경해서만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찮은가 이말씀이다。즉 영달자는 스스로가 알던 모르던 귀신에 덕을 입고 있다는 뜻이다.
귀신에 덕을 입고 있다는 것은 귀신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다는 뜻이니 내 잘난체 하지말고 귀신덕에 출세한줄이나 알라는 뜻이니 네가 하늘이라 여기는 것은 모두다 귀신 부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귀신은 무슨 썩어빠진귀신 모든걸 배참하게 여기는 필자의 생각이 그렇게 짚히는 것이지…
배참하다 하는 것은 前에 돌봐준 功을 갖고 유세하는 것처럼 보여 알량한 은혜라 하는 것이 원수처럼 여겨져서 배반코자 하는 마음일 것이다。이상 말이 편견이니 귀신을 有用관점으로 부려 쓴다하면 귀신은 노복관점이 되는 것이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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