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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은 전쟁이다
아무리 내라할걸 요구치 않는다하더라도 내주장이 목적이 아니라하더라도 목적없는 행위는 무의미한 法罟를 벗어재키는 파괴행위가 목적을 위한 행위가 아니던가? 집필 또한 鬼才靈覺을 포획해서 그려짓는 목적을 둔 전쟁인 것이다. 어떠한 전쟁이던 치열하게 싸움해서 승리하면 초라하지 않다하나 彼我가 만신창이가 되어 넓브러져있거나 기진맥진해서 있으면(目的한 功의 成就形態) 승리감에 만취되어 있기 以前에내가 왜 싸워야 했나하는 회의만 구름일듯 하리니 목적을 위한 수단이 너무 잔혹하다하지 않으랴? 내가그 먼저 파괴되어 그 먹이가 되어 네게 먹힘이 먹어서 남아 있는자만같지 못할게 없다하는 敗한자 스스로안위를 찾는 美化의 모습됨됨이라 하나(敗戰한 구실을 찾는데 이는 승리한 너를 위함이란 변명으로 功成就內容의 맛의 苦甘을 가르킴이다.) 그 죽어서 넓브러진 더러운 껍데기를 어떻게 美化한들 참맛이 있을것이라 할 것이며 기진맥진한 승리자보다 나은 패퇴로 승리한자라 自處한다 할 것인가? 또 내가 기진맥진한 승리자 너보다 낫다하진 못하리니 왜냐하면 내가 그꼴 모습)을 네게 베풀었기 때문이라 하여서 이래도 저래도 귀신의 농락엔 벗어나지 못하였다 할 것이니 왜냐하면 그꼴을 보니 실제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전재산을 모든이에게 다흩고 육신을 火鬼의 먹이로 삼아도 그 누구에게도 베푼것이 없다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저 열개의 주먹구슬을 얻었다하더라도 쓰잘데없고 부질없는 돌덩어리에 불과한걸로 여긴다면 그걸 뭣한단말인가? 찬란한 빛을 발한다한들 눈조리개를 따라 빛밝기가 조정돼 피해가 없다한들 비판적인 비판관념이 머리에 흐를때는 무슨 眞價가 있단 말인가? 각오를 새롭게 하는 맑은 기운의 음악선률이라도 흘러나온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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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도 생각한다는 온갖 번뇌잡념을 털어놓고자 한다.
넋이 분열됨으로 그子孫이 있고 그가 있으니 담기는 그릇따라 모양새가 달라지게 됨으로 돼지 소 굼벵이 등 갖은 삼라의 象을 띄게된다 할 것이다.그러므로 갖은 삼라의 넋얼을 나눌게 없으니 곧 하나(壹)라 하는 생각조차도 모르는데에 도달케 되어 헛된 것을 이루게 됨이다。 만일에 하나라한다면 그 以前後나 그 內外凝集分列 等을 舉論하게 되어 삿되게 내라하는 다양한 견해를 내세우게됨인 것이다。이렇게됨 고(罟)의 萬象이 있게되고 이를 어쭙잖게 顚倒시켜 諸森羅 脫破象이라 거짓진리 증명자 代辯象노릇을 하게 됨인 것이다.
그래서 그 하나라는 것과 그 전후 등을 몰라야 한다는 치우친 편벽된 가르킴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어떠한 관점 가견은 허울이라 했음)。어떤이들은 전체 또는 하나라고 하나 이 전체 하나라는게 本來없는 것이니 사람의 상념에서 생겨났음인 것이다。담기는 그릇은 의지하는 집과 같으니 따지고 보면 그 넋이라하는 것도 헛된것의 집일뿐이니 마치 집을 짓고 살자(生態)를 기다리는 거와 같음이니 그 헛된 것이 원함이 아니라 저를 알아 달라는 뜻(뜬것=實하다는 假(家)見)이 그 집을 우그리고 기다림이니(포로 있을때를 믿음직스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림 유혹하는 것에 자신도 모르는새에 빠져드는 함정은 갈무려져 있다。이미 함정인줄 알았을때에는 빠져나오기 힘들다 할 것이다.) 밥사발을 만드는 것은 밥을 담아 먹기 위함이라 그 뜻이란 것이 견해를 내는 그림을 그려서 벗어남을 구함에 그 헛된것은 백지같은 것을 제공할뿐인 것이다(포로가 되어준다 포로꺼리를 들여밀어준다는 뜻이다)。하지만 이것은 한편에 치우친 관념이나 하필 그렇지만도 않으니 밥사발은 밥이 담기지 않더라도 제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준비 예비 방비란 것이 담겨져 밥노릇을 하고 있는 實器라는 것이다。實로 實한 허울밥은 헛된것 하필 총이란 그릇으로 전쟁을, 해야만 맛인가 이말씀이다。진리라 내보이는 것은 그래보이는 것만으로도 자기역할을 다하는 것도 있으니 굳이 모든 것을 포로로하여 먹을 것도 없으며 또 먹을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니 가견을 살찌워서(이것은 가견을 도구로 사용하는 次元이다 갖은 허울을 象形化하여서 世上을 어지럽힐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어떠한 견해는 제반게 관념이 있건 없건 相論家가 되어 저는 이집 이는 저집 등의 두루 뭉실한 허울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만히 있는 것만이 아니라 어떠한 作用形態를 띈다는 것이다。以上內容도 골수가 한쪽에 치우친 망상이다. 흐르는 것은 물(水)뿐이요 시간이 있어 흐르는게 아니다. 또한 흘러오고감이 어드메뇨 있는 그대로의 현상이 그렇게 보여질뿐이니 실은 돌고 있는 풍차관성과 그 反하는 凝縮으로 힘새기를 겨룰이니 균형을 이뤄 삼라가 돌처럼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여라。
以往이 正直하면 하늘이라는게 두렵지 않고 본능에 대한 두렵게 하는 것이 도리혀 守護神이 되리니 어두운 밤길을 행하여도 사나운 맹수와 독사가 오히려 수호神將으로 변신하듯하고 야광주처럼 가는 길을 밝힐 것이다。그 헛된 귀신 또한 에워싸듯 보호하리니 상념이 험악한 상을 그렸더라도 아름다운 꽃으로 化하여 와 닿으리라 설령 먹이 되어 소멸된다 하더라도 그 맑은 넋의 기운은 창공에 새겨지리라(이것이 또 말도 되지도 않는 편벽된 말씀으로 실제로 그럴리 없겠거니와 美化수식하는 말이 너무 지나치다 할 것이니 지나친 칭찬은 도리혀 시기질투요 辱됨을 느끼게 한다 할 것이다。本來 正直은 없어 힘이 휘둘르는 刀劍 역할을 할 뿐인 것이다)。諸先賢의 思想을 다들먹거려도 마음에 끼인 찌꺼기를 없앨만함이 없다。마음을 그릇 씻어가듯 가실려면 常理를 모을만함이 없고 常理를 모으렴 궁구하는 생각이 다방면으로 막힘이 없어야한다 할 것이다。삼라의 共感想은 개운한 맛을 좋아하고 불쾌한 것엔 거들떠보기도 싫어하나니 개운하려면 꺼림놓는 걸림이 없어야 할텐데 마음에 相當한 理由를 간직한다면 무슨걸림이 있을 것인가이다。내신발 눈이 밝으면 어찌 풀속에 뱀을 밟아 놀라게 할 것인가? 조심성있게 행하는데 뱀이 물기를 바랄것인가 이런 말씀이다
◎ 神의 밝기가 물질로 옮겨가 물질의 밝기(발명 발전)가 되고 그물질 또한 밝기가 다른 차원으로 옮겨갈 것이다。神은 문명이기를 만들고 문명이기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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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 수평적 思觀을 이렇게도 定立할 수도 있다.즉 힘의 有無 行爲論理다。힘있는 자가 스스로 힘이 없는 것처럼 행세하고 힘이 있다.自處하는 자를 끌어잡고자 하는데서 수직적 思觀이 形成되고 힘이 없는자가 힘이 없으면서도 힘이 있는체 행세하여 실제로는 힘이 많을지 모르는 힘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게 편력을 들고자하는데서부터 수평적思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힘있는자는 수직적 사관을 일으키고 힘없는자는 수평적 사관을 일으키는 것이다。실력이 없으면서 베풀겠다는 뜻이 앞서는 것은 제처지는 생각지않고 오만한 自尊心性을 내보이겠다는 것이요 실력이 있으면서도 굽히는 것은 다 빼앗아오고 그를 쭉정이처럼 만들어서 날려 버리겠다는 것이다。실력없는 자는 생각이 모자라 하는 행동이 단순하다할런지 모르지만 약자로 느껴지는 것을 없수이여길줄 모르고 또 그대로 간과코자않는다.
이 반면 실력있는 자는 영리한 지혜는 있으되 힘없는 것에겐 천박시 대하고 깔아뭉게길 잘하고 무언가 있어보여 得을 보겠다하는 것엔 아부하기를 즐긴다 할 것이다. 즉 필자의 말은 보편성 원칙에 의하여 이렇게 되기 쉬우니 이러함을 경계하라는 뜻이니 모든 힘의 有無者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이런 취지에서 조명을 다음과 같이도 할 수 있으니 너와 내가 같다는 수평적인 관념과 너와 나는 차별이 있다는 수직적인 관념이 모여서 상념 및 그로한 행이 立體現象을 띄게되는 것이다。다시 말해서 내가 옳으니 너도 옳다는 무한한 채우는 생각 비우는 관념과 너는 그르되 나만이 옳다는 無妨으로 뻗는 관념이 어울어져 立體現象을 하는 것이다。관념은 어떤 것을 念하던 心의 性分(氣分의 左右) 性質(씀씀이의 左右) 등 性에 의한 生覺이 破散(헤집는 뜻이 아니라 파괴한다는 뜻임)(깨뜨려지는 覺)되어서 想理를 會施(긁어모으고 펴는 것)하고 思考(覺의 綿綿한 이어나감)를 일으키는데서 비롯된다 할 것이다°(※ 정신이 혼돈을 일으켜서 무진장 어지러운 논리를 내뱉아 놨는데…) 관념이 어떠한 數量質의 元(原)素가 아닌데도 일단 現象하면 수량질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어떠한 性이라함은 森羅의 性을 말함이니 거미가 心性에 의한 생각을 형용함이 없다면 어찌 거미줄에 의지하여 자신에 모습을 사람의 相을 짓고 本能的인 防禦를 하겠는가?
넋의 파생과 뼈의 分裂은 分別할 수 없을 정도로 같다할 것이다(지금 내가 이렇게 생각하여 나라는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것이 정신으로써 파생된 넋과 靈에 의함이라 할 것이니 이러한 심어진 정신은 같다는 것이다)。다만 그려지은 집들이 다른 모습을 띄고 있을뿐이라 할 것이다。이것이 또한 사람의 눈이나 個體의 森羅의 目이 그렇게 분간하는 것이지 實은 그 아닌지도 모르는 것이다。저 나무의 觀相 目이 느껴보길 사람의 형상은 돼지처럼 그려져 있고 돼지와 소는 사람처럼 보일지는 알수없는 것이다。저 나무의 性 또한 春秋를 생각지 못하면 새움나고 낙엽질줄 모른다할 것인데도 또한 그것이 사람의 눈이 그렇게 보는 것이지 그것이 人形化되어 팔이 자라나고 머리통이 커지고 머리털이 나왔다 빠지고 공간과 立場이 뒤바껴서 그 새움나는 것이 공간이 먹는 것이고 낙엽이 지는 것이 그 맛있는 음식을 도로주는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이런 뜻이다。수평적인 관념은 표면을 감싸거나 실속으로 나타나고(필자의 생각이 지금 그렇게 편파적인 관점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다.) 수직적인 관념은 확대나 축소를 나타냄이니 어떠한 現象體이던 기본적으로 셋이 會合한 것이라하나 前後의 상징은 立體空化를 이루게 하는 성격을 띄는 것으로써 平直이 혼합하여 있을뿐이니 어떤 쪽으로 치우쳤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수평이 누적되면 수직을 이루고 수직의 폭의 확대는 수평을 이루는 것은 기정된 이치이다。다만 굴곡에 의한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다할 것이다。이것은 경직된 死論이라 할 것이니 살아 움직이는 논리라면 굴곡에 의한 파장이나 포물선 斜線 휘어틀어져 나아가고 응축확산되는 空化形의 나선을 이뤄 어지러운 去來集會體가 된다할 것이다。동서남북 상하의 思想이 相會合交流하여 무늬를 띄는 空化현상을 이루는 것이다。다양한 표현으로 어느한 것의 줄기찬 주장은 누적과 폭의 확대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그렇게됨 주장이 무색할 정도로 궁극엔 무의미한것이 되거나 立場이 전도되는 方向으로 흐르게 된다 할 것이다。자루도 오래쥐고 있음 냄새가 배듯 혁명세력이 처음엔 기치를 높이드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깃발이 점점 잠기듯 무엇을 지칭하는 것마다 전체가 그로 쏠리듯하면 무의미한 것이 되는 것이다.즉 거기로 다 옮겨가 붙어 모든 가르킴의 生息 (부패와 생산)도 같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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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時間 空的인 槪念
釋氏 敎類中 한말씀에 의하면 過現來가 한곳에 모여 있다 하였는데 과현래가 한 곳에 사귀어 있다함이 그럴듯한 말씀이나 그렇게되면 立體空化된 空間的인 數量質의 分裂과 凝縮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것은 시간적인 개념을 뜻하는 것이다.그것이 이 모두 없는 것이라 한다면 삼라만상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본대 그것은 하나의 回空으로써 그 많고 많다하는 인간의 상념이 그렇게 지을뿐이라 할 것인가? 또 그것은 現象되는 空間的 物事로 照明할 수 없는 것이라 할 것인가?(일체의 作用이라 하는 것이 과현래라 할진데 軸現을 에워싸는 作用이 過來라는 것이 아닌가? (움직이는 것은 권형질 할 수 있는 균형을 잡는 始軸을 形成함으로 부터이니 이글을 적어 내려감도 필을 紙面에다 대고 그림을 生成시킴으로부터라 할 것이다) 축이라는 것이 또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고 있는 것인데 어디停處를 둘수 없는 것 아닌가? 마치 부는바람(原因)따라 저가랑잎이 날라가는 것처럼 말이다。축을 셋중 어느 것으로 一定하게 定할 수 없는 것이라한다면 축이 현실이란 개념에서 벗어날수도 있다는 것이니 현실은 하나의 枝葉이요 피고 지어 나타났다 사라지는 物事의 作用속에 一科라는 것이다。何必現實만이 아니라 어느 것을 가르키던 모두가 다 그런 立場處地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어디를 軸을 삼던 去來作用이 있는 以上의 과현래는 함께 존재케된다는 것이며 하필 一定한 律의 軸을 선정치 않는다 하더라도 (또 一定한 律의 軸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軸이란 뜻을 제쳐두고라도 과현래는 無爲作用 속에 無現한 虛無(허무=허울=너울象의 想念)처럼 存在 流動作用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저 상념속의 창창하늘처럼 말이다) 그 數量質의 盈仄이 저 그릇의 具成員이란 뜻일 뿐이니 때로는 손잡이 장소배경상 밑바닥 씀씀이 따라 물그릇 밥그릇이라는 것이다。그렇다면 그 어떠한 物事가 어떠한 理由에 의해서 數量多大나 良質로 있다가 어떠한 理由에 의해서 없어졌다면 그들이 있었거나 채웠던 공간은 빈공간이 되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공간조차 없어졌다는 말인가? 아니다 비거나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다른 理由에 의한 것들이 그 位置를 빼앗듯 차지하여 항상 그릇에 가득찬 물처럼 차 있다는 것이다。즉 영원한 器의 回空이란 뜻이다.
이를테면 그대의 육신과 정신을 분석하니 그 性分이 출생해서 여지껏 아니 무궁한 전생으로부터 여지껏 또 다음 生을 받을때까지 여러가지로 모여 이뤄졌으니 각양객색 다양한 곳에서 순서대로 왔다가 그대로 변질로대는 또 흩어져가든 會合해가든 간다는 것이다.또 가는곳이 하필 온 곳으로만 가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변모해서든 原形대로든 가는 곳이 多樣하다면 그곳은 도대체 어디며 이 무엇이란 말인가? 손은 닭으로 가고 머리통은 소로 가고 발은 꽃으로 가고 오장육부는 나무와 흙과 돌과 새와 공기 등등으로 간다는 것인가? 以 간다는 것이「가긴 어디로가?」로 생각이 돌아서 짚히는데 가긴 어디로가? 그들이 지금 곧 나라고 내보이는 모여 이룬집(家=허울상)을 에워싸고 있는 過來이다하고 佛氏는 가르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과래란 자아가 처해있는 현실적 주위환경배치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빛의 반사처럼 저를 알아주는 것을 저를 담아 주는 그릇 제그릇이라 한다면 한그릇을 갖고 저마다 제그릇이라할 것이다。즉 각 物事의 과현래마다 제그릇이라한다(그 한그릇이란 표현은 여러 그릇일 수도 있다)。마치 잔잔한 호수에 삼라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처럼 바람따라 일렁일렁 파문이 일면 저마다 벗은 춤을 너울너울 춤이라 할 것 아닌가? 그 귀신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그 回空은 누가 만들었나 이런 식으로 의문을 제기하여(시험비슷하게 논리꼬투리를 물어 잡고서 어떻게 하면 저 理想의 빈틈이 없나를 노리는데 사방팔방 무방으로 生門方이라 헛점과 모순투성이요 벽을 窓(창)하겠다고 비집을 것까지 없이 파고들면 틈새가 왜 없겠는가?) )自己들 主張의 立志强化를 획책하니 관념에 차이지 만들음은 무슨 만들음 인연에 의해서 있지 하고 釋類가 말하니 이 또한 前의 벗음이고 後의 벗음을 갈구하는 神을 능멸히 여김이 아니던
가?(神은 無爲有動作用 속에 있는 것이다) 神은 그저 제가 만들었다하면 입이 허벌쩍하게 벌어지듯 좋아하고 으시대는 표현에서 혜택의 능력을 행사한답시고 한다는 것이 한번 왔다가 돌아갔을땐 만추의 낙엽처럼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이것은 조건반사의 표현이 그렇다는 것이다。 부흥집회 미명하에 모여 왔을적엔 금새 떼부자라도 된 것처럼 모두들 좋아라고 희희락락하지만 그 떠나고들 난다음이냐? 쓸쓸함이란 아무일이 없었던 평상시만도 못하다할 것이다)。그렇더라도 남에 理想도 들어줘 貴神(귀하신 신분)이 만들었다 긍정해주라(남의 것을 긍정해줘야 제 치우친 理想念도 원위치로 되돌아와 家見의 한 허물을 벗을 것이다)。
저들 주장대로 나는 부모가 만들고 부모는 할아버지가 만들고 할아버지는 차례대로 위에위에분이 만들었다해도 틀린바없으니 그 주장대로 따라줘라 나만 따르라 하거든 요량을 해서 큰 덕이 될 만하거든 그렇게해라 그렇게 따라한다해서 하등에 나쁠게 없을 것이다。무엇이든 回空은 벗어날순 없다。과현래의 사귐(交)은 없는것(無) 상념 또한 없는 것(無) 막연한 空에 現象。그러나 시간과 상념은 空 속에 엄연하게 존재한다。맑은 물그릇 속에 티를 넣고 움직이는 원인제공이 있으면 움직여 돈다. 시간과 상념은 물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육안으로 볼때의 물의 元素들은 서로를 분간할 수 없어도 서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나에 이웃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그러나 나의 생각 굴림을 볼진데 부딪치던 아니던간 움직이는 건 확실하다。
宇宙는 크고 장엄하고 秀麗하게 꾸밈이다。크고 화려하게 꾸며논걸 갖다 깨뜨려진 千億態의 森羅萬象 벗음이라 한다(말하자면 큰 圓을 그리는 것 같다)。
구경(관람이나 두루편답)하는건 좋으나 잘못하면 그 유혹하는 함정에 빠져 자기본연에 覺을 忘却시키고(스스로 짓는 覺의 行을 잃어버리고) 남에 理想이나 思想의 發露象만 받아들이는 괴뢰역할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어떻게 할 줄 몰라 그 가르침을 받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좋다면야 무슨 탈잡을게 있겠냐만은 이는 이른바 남에 가르침을 받아 물드는 것인데 가기 쉬운 길이고「복락이 있다 할런진 몰라도 흡사 쪽바다에 빠져 남일색됨을 벗음이라 하는 거와 같아 발전해봤자 一色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일 것이다。그렇게 되면 천태만상의 群脫이 무슨 빛을 발하여 아름다움이 있다 할 것인가? 또 이는 깨뜨린 맛을 보이겠다는 立場에서 볼진데 제道를 펴는 것이라 받아들이는자 있어 기쁘다 할런지 모르지만
고를 깨뜨리고자 하는 立場 그래서 뭔가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立場에서 볼진데 깨뜨리는 쇠망치를 얻는 것이 아니라 백지에 오염시킬 물감을 받는 것이라 이 또한 한쪽에 치우친 말 그런 관점으로 보니까 그렇지 관점을 전도 시켜본다면 또 그것이 바르게 보여지는 것이다) 良質의 成果를 얻기가 드물다 할 것이다. 그래서 諸感(와 닿는)如來 感管通路를 차단하겠다는 것이 心門閉關修道라 할 것이다. 또 그것이 이미 김관기관에 의해 기억장치에 입력되듯 다보고 들어갔는데 무슨 수도일까? 胎動 그 以前後로부터 물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허울상成家가 된 이상 진정한 폐관수도는 없다 할 것이다(天上이나 넋령象이나 他界 또한 그려논 허울상이 아닌가 파문은 또인다 할 것이다)。그렇더라도 自覺을 일으켜 깨뜨려보고자 노력은 해봐야 한다 할 것이다. 소위 남을 쫓는 것은 收容한 敎이지 개척한 道는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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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現象과 강감찬의 칼
필자가 어렸을 적에 벗들과 모여 놀때에 오고가며 하고 노는 談中에서 누군가가 하는 말이「얘들아 강감찬의 칼이 얼마나 센지 아니? 칼날을 얼마나 갈았는지 맑았다 못해 투명해져 빛을 받아 서기를 뻗치니 칼날은 이만큼 가는데도 적장에 목은 저만큼서 뎅그렁 떨어진다」한다 그는 왜 그런지 아느냐? 칼날을 하도 잘 갈아서 날끝이 투명해져 보이질 않아서 날끝으로 이미 목을 쳤는데도 칼날이 아직 목에 닿질 않고 저만큼 있어 보여서 그렇다 한다.내말의 要旨는 事物의 現象界가 空虛에 뿌리박음이 이 잘 갈은 칼날과 같아 알수는 없으나 점차 차오른 달처럼 칼이 엄연히 存在하여 그 능력을 허공에 내보이듯 物現象界도 엄연히 존재하여 그저마다 된대로 내보인다는 뜻이다。즉 無明과 有明이 어디다대고 한 계 획을 긋지 못하지만 回空의 그릇이 되어 있어 하나가 아니며 둘이 아니며 여럿이 아니란 뜻이니 궁극에가선 비었다는 논리 제반걸 收容할 수 있는 경계에 다달은다는 뜻이다。비었다는 것은 벗었다는 것이니 흡사 누에고치 속에서 누엣나비가 나와 제허물을 제 가시거라 안에 一點物로 둔 거와 같음이니 그 나비는 참으로 빈 것이고 벗은 것이다. 즉 를 깨뜨린자란 뜻이다. 왜냐하면 自心目의 可視거리 안에 모든걸 收容해 가지고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먹이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깨뜨린 맛의 一片이요 그 그린 넋과 영혼같은 것은 心相 허허창공의 그릇처럼 되어 있을 것이다(이것 또한 방편 家見辭일 뿐이다)。
앞과 문맥이 통할런지 모르지만 어떠한 形容이나 數와 質量만을 고집하여 그에 묶인다면 그것은 얽힌
고(罟)이다。그러나 관점을 돌려 어떠한 형용이나 수와 질량을 지칭하더라도 빈것 벗은 것으로 관점을 둔다면 그것은
고(罟)를 깨뜨림인 것이다。이 모든게 없으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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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엔 時差가 여러갈래라 하루가 백년이 될 수도 있다하나, 인간 自身의 依持處인 心中은 요지부동 (한곳에 꽉 틀어 박혀 있다시피한)無爲有動이라 순간의 쉴 겨를이 없다 할 것이다.
如來란 무슨 뜻인가? 如來란 心相(目)에 와 닿는 것을 말한다. 이미 돕는다는 관념은 私端의 정신능력에 유혹이 되어 조건에 걸렸다는 뜻이다。조건에 걸린자는 포로가 되었음으로 하라는대로 할 것이며(누구든 감미롭게 느껴지는 곳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며 빠져나오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모든 맛이 처음만 갖지 못하다하나 여하한 권태나 싫증이 있는 것은 그 계속 포로로 할 수 있는 감미로움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自主權을 상실하였음으로
고(罟)를 벗지 못한다。그 料理하는 먹이가 된 걸 뒤늦게 깨달았다한들 懷恨의 원척이 쌓인 응어리(복수코자 하는 마음)로 因해서 그 그릇을 비우기가 어렵다 할 것이다。森羅萬의 現象과 삶의 옷을 입은 모든 것이 如來一身((와 닿는 粒子(그것이 무슨 元素를 뜻하던)會合一身))이라 個體自我들의 해탈상을 누리는 것이다. 즉 一切의 저촉감을 보이는 것은 해탈상을 누리는 것이라는 것이다。여래는 돕지 않는다 했는데 이 말은 누가 누구를 돕는단 말인가? 이런 뜻이다. 어찌 생각하면 거만스럽고 덕되던 것이 그 효용 가치가 지나서 짐짝처럼 부담만 느껴져 등돌리는 말 같지만 너 나의 나눔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누구를 도운 것으로 된 것이 아님) 된다는 것이다。다시말해 나라면 나고 너라면 너이니 호수에 드린 森羅의 그림자가 어울려 일렁이는 것처럼 그 호수물이 하나라고 생각할게 없고 둘이라고 생각할게 없고 없는 것이라 있는 것이라 고여있는 것이라 흐르는 것이라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다고 생각할게 없다는 것이다。왜냐하면 그울(우리=回=無爲有動이나 不絶作用 등)은 하나(壹)라고 매어붙드는 고(罟)가 없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그 없으니 다른 屢數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보는이의 다양한 각도로써 가늠해 본 것일뿐이다) 書頭의 사단 명분이나 그 하는 行爲의 立場을 틀어놓아 거론할진대邪端은 없다。없는 공포를 自招하듯 있는 것처럼 꾸미듯) 방편상 생기게 하고 만들음인 것이다. 왜 屢數의 방편을 쓰는가? 고기를 잡기위해 미끼를 던지는 거와 같고 여럿이 먹는 밥에 덤벼들지 말라고 파리 제몫의 밥을 따로 주는 거와 같다。저 농부는 봄에 밭을 갈고 씨앗뿌려 가을에 수확을 거둠에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그것은
고(罟)를 벗기 위한 방편씀의 일과인 것이다。방편에 빠진자가 모두 如來이니 그 능력의 유혹이 아니요 그에 의한 조건이 조건이 아니나니 왜냐? 길이 그 하나라고 매어붙드는
고(罟)가 없기 때문이다.이것이 사회통념상 범죄와 악을 부추기는 말이다 할런지 모르지만 하필이면 그런대로만 생각을 굴려 꼬집을 필요는 없다 할 것이다。능력이 있어 돕고자하는자가 그 능력이 어느 원인에 의해서 生成(具成)되어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돕고자 하는데는 필연적인 理由가 있을 것이니 돕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거는데 의지하여 제
고(罟)를 벗음과 동시에 저의 벗음상을 보이고자 함이요 나의 벗음이 이러하다는 참맛을 보여줘 걸림없이 먹어치우게함인 것이니 (이렇게 되면 다양 각양각색의 길이 되니) 첫째론 그렇게 되면 아무근거나 원인이 없어지니 장애가 될지도 모르는 내 벗음상을 찾을길이 없어져 더 이상 벗을 갈구할 근덕지가 없게된다하는 것이고 둘째론(또 하나는) 고려말에 문익점이 목화씨 몇알을 붓대 속에 감춰 갖고 들어왔는데 그것이 전국으로 퍼져 온 백성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것이다。所以 스며들어 삼라가 그 혜택을 입으면서도 그 잊게 한다는 것이니 굳이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원래 天地가 있듯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것이다。필자의 여러 흩틀어 놓는 말씀이 여러 선각이 밭 일궈 거둬논 양식과 별다른 게 없다한다면 그러면 하늘에 별이라도 따와야 신기하고 별다르다 할 것인가? 그렇담 하늘에 별을 딸렴 미래나 과거의 우주로켓이 될일이지 어찌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서 이런 말을 늘어놓아 지면만 낭비하겠는가? 이런 附言이다。조건이란것 또한 그러하니 흡사 잘 여건조성된 씨앗을 뿌리면 싹이 틔여 나오는거와 같을 뿐이다(※ 정리때 생각 이것도 당시의 골수가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다)。
나는 무엇이라 하는 여러가지 사건을 조장하여 어려움에 봉착하게 한 다음 구원에 손길을 내밀듯 주고 藥주고 하는 것은 高次元의 귀신의 사악한 行爲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보다 한단계 높여 空化 내 자신의 立場을 시험(시련)같은 것으로 잘돌기 위해서 여가 걸러내는 것) 하는 것이라고 관점을 놓을수도, 있으니 그렇게 되면 사벽스럽다하는 잡다한 어지러운 世上事는 그 안에 수용되게 돼있어 여하한 神의 동태라도 心手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되고 그 허울을 벗기위한 부지런히 활동하는 작용으로 비춰질 것이다 즉 世上亂事 귀신의 농간이라고 꾸짖을게 아니라 내 일하는 모습이 그렇게 비춰지는 것이라 한다면 어떠한 高次元의 神도 내부림을 받는 보잘것 없는 하나의 使神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世態돌아감을 못마땅하게만 여길것이 아니라 내 일하여 주는 使神의 다양한 힘씀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 무언가 막힌것 같은 답답한 심사에 一末의 위안을 얻는 것이 된다 할 것이다.
그 집요하게 파고들어 굴복시키겠다는 것 그래서 제뜻대로 요리하겠다는 것 이것이 神의 動態라는 것이다. 그러면 神이 그렇게하게시리 제반꺼리(件)를 조성하는자는 누구인가? 이것은 分裂된 森羅諸行象의 혼란스런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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