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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
2:16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감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니 청하건대 그들이 가서 당신의 주인을 찾게 하소서 염려하건대 여호와의 성령이 그를 들고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보내지 말라 하나
2:17 무리가 그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그들이 오십 명을 보냈더니 사흘 동안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2:18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그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
2:19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2:20 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2: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2:22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
2: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24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2:25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 주해
1. 열왕기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에게 유다의 멸망과 포로된 이유를 알게 함으로 자신의 죄와 주의 인자를 깨달아 알게 하려고 기록되었다.
1) 엘리야는 아하시야에게 징계를 통한 주의 인자를 나타내는 것을 마지막으로 하늘로 올리워진다.
2)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이 땅을 떠나는 것은 남은 자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은 엘리사를 예비하사, 영적인 어둠의 길을 겪는 이스라엘을 돌보신다.
2. 하나님이 엘리야를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리고자 했으므로, 엘리야는 엘리사가 자신과 함께 있다가는 “회오리 바람”으로 인하여 다칠 수 있기에 혼자 가겠다고 했지만, 엘리사는 결코 엘리야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끝까지 엘리야와 함께한다.
1)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적 장자가 되어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는 선지자가 되기를 원했다
2) 엘리사는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여’라 여겼던 엘리야의 승천을 보고, 하나님께서 갑절의 영감을 주심을 믿고 돌아온다.
3) 그는 “자기 옷은 둘로 찢고, 엘리야의 겉옷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른 후, 건넌다.
4) 엘리사는 세상의 헛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끝까지 엘리야를 따르며 함께했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계속 나타내신다.
3. 요단강 맞은편에 있던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사가 요단 강물을 가르고 건너는 것을 보고,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에게 임하였다고 하면서 그에게로 나아간다.
왕하 2:15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
1) 요즘에도 신학교를 보통 ‘선지 동산’이라고 한다. 지금 엘리야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있는 이들은 신학생들이다.
2) 이들이 하나님이 인치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을 얼마나 존경하고 존중하며, 하나님처럼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이는 곧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4. 신자는 사람을 하나님처럼 높이거나 숭배해서는 않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과 존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이다.
1)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 사랑이 표현된다.
2) 하나님의 사람을 존중함은 그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겸손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를 엎드려 영접한 고넬료다.
행 10: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3) 로마제국의 백부장이 어부출신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림은 곧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겸손이다. 물론 베드로는 그 존중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종으로 복음을 전한다.
5. 오므리 왕조 시대는 북이스라엘의 어두운 영적 역사 중에서도 가장 캄캄했던 시대다.
1) 아합은 선지자들을 죽이므로 엘리야는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고 탄식해야 했다.
2) 그런데 그 캄캄한 영적 어둠 속에서도 엘리야를 끝까지 따름으로 성령의 역사가 함께하는 엘리사가 영적 지도자로 세워지고, 그를 따르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있는 것은 주의 은혜다.
3) 아무리 영적 흑암기이고, 목회자들의 삶이 어렵고 인정받지 못하며, 믿는 자들이 사라지는 때에도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라며 찬양하는 이들이 있다.
6. 그런데 엘리야 앞에 엎드려 절하던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사에게 승천한 엘리야를 찾도록 강청한다
1) 그들은 여호와의 영이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가신 것을 알고 믿는다.
2)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면서도 동시에 “염려”하고 “혹시나 하면서 의심”한다.
- 여호와의 성령이 엘리야를 데려가다가 그를 산이나 골짜기에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3) 엘리사는 만류하지만 그들이 극구 졸라대는 바람에 마지못해 허락한다.
- 50명의 힘센 선지자들이 3일 동안 찾았지만 엘리야를 찾지 못하고 돌아온다.
7. 엘리사와 선지자의 제자들의 믿음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1)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돌덩어리처럼 확고하게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
- 지금 엘리사가 그렇고, 갈멜산에서 불을 내린 엘리야가 그랬고, 홍해를 가르고 광야 길을 인도한 모세가 그랬고, 광야 길을 도망 다녔던 다윗 등이 그러했다.
2) 그러나 우리는 선지자의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이 일하심을 믿으면서도 “혹시나” 하면서 염려하고 불안해 한다.
3) 하나님의 공급을 경험하고도 혹시나 하면서 염려하고, 주님의 돌봄을 경험하고도 혹시나 하고 염려한다.
4) 신자라도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항상 믿음으로 볼 때에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행하게 된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8. 한편 여리고 성에 사는 사람들도 엘리사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를 알고 도움을 청한다.
왕하 2:19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1)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 앞에 엎드리며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했듯이, 여리고 사람들도 엘리사를 “주”로 고백하며, 도움을 청한다.
9. 엘리사가 새 대접에 소금을 담아오게 하여 샘이 솟는 곳에 소금을 뿌리며 말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다시는 죽거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으리라”(21절).
1) 여리고는 고대에 매우 비옥하고 번성했던 성읍이었으나, 여호수아가 정복하면서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수 6:26).
2) 다시 건축된 여리고는 본래 비옥한 천혜의 땅이었지만, 여호수아의 저주 때문인지, 샘물이 나빠, 열매가 익지 못하고 떨어졌다.
3) 그러나 엘리사에 의해 샘 근원이 고쳐지고, 지금까지 여리고에 가면 솟아나는 샘물을 볼 수 있다.
4) 예수님 당시에는 부자들이 별장을 짓는 곳으로 유명할 만큼 좋은 땅이 된다.
10. 엘리사가 여리고를 떠나 벧엘로 간다. 벧엘은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에 방문한 곳이다.
1) 그 도중에 엘리사는 자기를 조롱한 어린아이 42명을 저주하고 그들은 숲에서 나온 암곰에 찢겨 죽임을 당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갈멜산으로 갔다가 다시 사마리아로 돌아간다.
11. 엘리사를 조롱한 아이들이 저주를 받아 죽는 것은 당혹스러운 기록이다.
1) 어린아이들이 엘리사를 보고 ‘대머리야 꺼져라, 대머리야 꺼져라’로 조롱하였다.
2) 아이들의 조롱은 ‘선천적이고 신체적인 대머리’를 조롱한 것이 아니다. 당시 노예나 일꾼과 구별되는 여행자들은 반드시 머리에 무엇을 써야 했다.
3) 엘리사가 대머리였다는 것은 그가 속세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로 살겠따는 뜻으로 삭발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엘리야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 삭도했을 수 있는데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며, 너도 하늘로 꺼져라”며 하나님을 엎신여기며 조롱하는 벧엘의 타락한 실상이기도 하다.
4) 즉 어린아이들은 엘리사의 겉옷을 보고 그가 선지자임을 알았고, 삭발의 의미도 알았다.
- 즉 그들이 엘리사를 저주한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저주한 것이다.
12. 어린아이들이 저주받아 죽은 것도 당혹스럽지만, 뜬금없이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조롱하였다는 것도 당혹스럽다.
1) 이는 당시의 영적 어두움과 타락상을 돌아보면 이해할 수 있다.
2) 오므리에 의해 가나안과 동일한 생활을 받아들인 북이스라엘은 아합 시대 때 바알을 국교로 받아들이고, 선지자들을 죽이고 멸시하였었다.
3) 어린 아이들이 선지자를 조롱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선지자를 멸시하는 교만한 태도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보여준다.
4) 벧엘은 야곱이 돌 배게를 베고 잤던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영적으로 중요했기에 여로보암은 이곳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사하게 하였고, 엘리야 시대에도 타락했다.
13.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사에게 “엎드리며 절하고” 여리고 사람들은 그를 “주”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어린아이들조차 선지자를 “대머리라며 조롱”하고 하나님을 경멸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1) 극과 극이라는 말이 있듯이, 가장 영적으로 어두운 시기에 바알숭배자화 되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엎드리는 이들이 공존하는 시대다.
14. 오늘 본문에는 4부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1) 엘리사는 어떤 위험이나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엘리야를 떠나지 않음으로, 성령이 역사하는 선지자가 되어 사명에 충성하길 원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서는 자가 된다.
2) 선지자의 제자들은 영적 암흑기에 대접받기 힘든 사명의 길을 가고 있다. 그들은 엘리사를 존중하고 하나님을 믿으나 “혹시”나 하면서 “염려”하는 신앙생활을 한다.
3) 여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나 엘리사를 “주인”으로 부르며 그를 통한 하나님의 도움을 믿고 엘리사에게 도움을 청함으로 물 근원이 고쳐지는 은혜를 입는다.
4) 엘리사와 하나님을 조롱하던 어린아이들은 비록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이 깊이 세속화되고 오염되어 심판을 받는다.
15. 바벨론의 포로 되어 살아가는 백성들은 자신이 어디에 속하여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1) 내가 어디 있는지,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누구인지를 알면, 언제나 소망이 있다.
2) 하나님을 엎신여긴다면 심판을 받아들이는 회개로, 믿음 없음을 안다면 여리고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선지자의 제자들처럼 믿으면서도 ‘혹시’나 하면서 염려한다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보아야 하며, 엘리사와 같은 믿음이 있다면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3) 의인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려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봄으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자라가야 한다.
◈ 나의 묵상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선지자의 제자들의 염려와 강청이 마음에 찔린다. 아합이 왕이었던 시대에 선지자가 되겠다고 나섰으니, 참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그 사명감과 댓가지불, 그리고 엘리사를 대하는 겸손과 낮아짐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염려한다. 그런데 그 “염려”가 자신들의 먹고 사는 것, 건강과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엘리야를 위한 “염려”다. 그런데 엘리사가 보기에는 헛된 염려고 안타까운 염려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염려다.
나는 어릴적부터 염려가 많았는데,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면 수시로 염려를 한다. 그들처럼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경배하면서도 염려를 끊어내지 못한다. 나를 위한 염려도 있지만 교회와 사람들을 위한 염려가 많다. 섬김이라는 좋은 면도 있지만 염려가 많아서, 미리 염려하고 대안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선한 의도이긴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쓸데 없는 염려다. 그래서 쓸데 없이 3일간 엘리야를 찾아다닌 것처럼 에너지를 낭비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도 의심하는 선지자의 제자들과 엘리사의 차이가 무엇일까?
어려운 문제지만, 로마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다. 놀라운 체험과 말씀을 앎으로 신앙의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믿음에서 믿음으로”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의 뻥튀기가 아니라, 믿음에서 믿음이고, 그렇게 믿음이 한 계단씩 자라기 위해서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보아야 한다고 하신다. 그러나 나는 자주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나의 의”에 주목한다. 그로 인하여 교만하게 되고, 교만으로 영혼이 황폐하게 된다. 그래서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 앞에 엎드려 절하는 그 마음이 귀하고 본받기를 원한다. 나는 누구에게 엎드리고 절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 앞에서도 판단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분석하기에 바쁘고, 심지어 하나님 존재 앞에서도 경외함으로 절하지 않는다. 겸손할 만큼의 충분한 조건이 형성되었음에도 여전히 판단하고 우월감을 느끼는 자다. 교만이 내 안에 있기에 죄의 세력이 집어 넣는 탐심에 항상 속아 넘어간다.
그런데, 그래서 십자가의 주님, 겸손하신 주님,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한다. 이런 나를 아시고도 생명 주신 주님, 이런 나를 아시고도 목회자로 부르신 주님, 이런 나를 아시고도 여전히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며 긍휼로 품으시는 그 영원한 사랑과 인자하심을 찬양한다. 죄인 되었을 때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사랑은 지금도 동일하며, 영원히 동일한 사랑이다. 나를 아시는 주님이 생명을 주셨고, 여전히 사랑하시니, 나에 대한 나의 실망을 접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아간다. 그 보혈로 내 영혼을 씻고, 그 사랑으로 내 영혼과 마음을 채우고, 그 은혜의 왕노릇 앞에 경배한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 묵상 기도
주님의 살아계심과 은혜를 알고도 염려하고 의심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악함과 약함이 드러날수록 주의 인자와 긍휼은 더욱 깊고 아름답습니다. 나의 깊은 죄악과 상처와 교만을 아시고도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그 사랑과 긍휼을 찬양합니다. 나는 나에게 실망하고 놀랄 때, 주님은 지긋이 미소지으며 사랑으로 품어 주십니다. 나에게 실망하며 낙심할 때, 도리어 십자가에서 나를 낳으신 변함없는 사랑을 나타내 주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성령 하나님, 내 안에 있는 염려와 불안, 그 원인 되는 부패한 마음과 상처들, 무의식에 있는 분노와 불안과 외로움을 치유하소서. 나는 나를 알지 못하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의 영혼과 마음과 몸을 드립니다. 영적 암흑기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시고, 교회를 세우시며, 믿는 자를 세워가시는 주님의 주권과 은혜와 역사를 찬양합니다. 신정아 전도사님이 이전보다 더욱 성령충만함으로 주님이 값주고 산 몸으로 사역함으로 참된 예배자가 되는 기쁨을 주십시오. 몸과 마음이 힘겹고, 아픔을 품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주님이 지체이오니, 치유하시고 생명을 부어 주시며, 도와 주십시오. 감사함으로 염려를 아뢰고, 선한 목자되신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교사들과 다음세대에게 주의 영을 부으사, 하늘의 기쁨과 연합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옵소서. 주의 이름을 높여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