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5일(목)
* 시작 기도
주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다 구름 아래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는데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 마셨습니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를 예표하였습니다(고전 10:2-4절).
이처럼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속하여 구원을 얻었고, 홍수로 심판을 받던 자들 중에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에 속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 나를 비롯한 주의 자녀들은 예수에게 속하여 구원받은 것을 믿습니다.
나는 마땅히 물에 빠져 죽어야 할 자인데 이런 나를 예수라는 방주에 속하여 물 위로 뜨게 하셨으니 이것이 웬 은혜요 웬 사랑인지요?
그것은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행하신 일임을 믿습니다.
하여 이 종은 오직 주를 찬송할 것밖에 없습니다(엡 1:5-6절).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이렇게 죽어 빈 그릇이 되고 그 자리에 오직 예수로 채우소서.
무엇보다 주를 시험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나를 채찍질하여 주의 소유로 살게 하소서.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므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는 것을 믿사오니 내가 먹고 취하는 것들이 성령 안에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느 3:15-32
제목 : 그 다음은...
15 샘문은 미스바 지방을 다스리는 골호세의 아들 살룬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고 덮었으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왕의 동산 근처 셀라 못 가의 성벽을 중수하여 다윗 성에서 내려오는 층계까지 이르렀고
16 그 다음은 벧술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아스북의 아들 느헤미야가 중수하여 다윗의 묘실과 마주 대한 곳에 이르고 또 파서 만든 못을 지나 용사의 집까지 이르렀고
17 그 다음은 레위 사람 바니의 아들 르훔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하사뱌가 그 지방을 대표하여 중수하였고
18 그 다음은 그들의 형제들 가운데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헤나닷의 아들 바왜가 중수하였고
19 그 다음은 미스바를 다스리는 예수아의 아들 에셀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성 굽이에 있는 군기고 맞은편까지 이르렀고
20 그 다음은 삽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여 성 굽이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에 이르렀고
21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야의 아들 므레못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엘리아십의 집 문에서부터 엘리아십의 집 모퉁이에 이르렀고
22 그 다음은 평지에 사는 제사장들이 중수하였고
23 그 다음은 베냐민과 핫숩이 자기 집 맞은편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아나냐의 손자 마아세야의 아들 아사랴가 자기 집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하였고
24 그 다음은 헤나닷의 아들 빈누이가 한 부분을 중수하되 아사랴의 집에서부터 성 굽이를 지나 성 모퉁이에 이르렀고
25 우새의 아들 발랄은 성 굽이 맞은편 곧 시위청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로스의 아들 브다야가 중수하였고
26 (그 때에 느디님 사람은 오벨에 거주하여 동쪽 내민 망대까지 이르렀느니라).
27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내민 큰 망대와 마주 대한 곳에서부터 오벨 성벽까지 이르렀느니라.
28 마문 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29 그 다음은 임멜의 아들 사독이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동문지기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중수하였고
30 그 다음은 셀레먀의 아들 하나냐와 살랍의 여섯째 아들 하눈이 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베레가의 아들 므술람이 자기의 방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31 그 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 느디님 사람과 상인들의 집에서부터 성 모퉁이 성루에 이르렀고
32 성 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인들이 중수하였느니라.
* 나의 묵상
본문은 예루살렘 성벽의 남쪽과 동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느헤미야의 비밀시찰에서 확인된 것처럼 그 피해가 가장 심한 지역이다.
그런데 이런 지역일지라도 그곳의 성벽을 건축하는데 남에게 미루지 않고 맡은 자들이 충성스럽게 감당한 것이다.
이들이 부자든 가난하든,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이든 일반 백성들이든, 남자든 여자든, 신분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하고 협력하여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데 힘썼다.
그 결과 이들은 불과 52일 만에 이 성벽 재건을 완공할 수 있었다.
특히 오늘 본문이 포함된 3장에서 주목하게 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다음은’이다.
3장에서 이 단어는 총 31회 나온다.
이것은 성벽을 재건하는 각 구간의 공사를 맡은 자들이 한 치의 소홀함이 없이 공사를 진행하여 결국 온전하게 하나로 연결된 성벽을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성벽 공사가 한 구간 마치면 그 다음 구간을 공사하는 식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구간을 모든 사람들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시작하여 공사를 완성하였다.
그런데 어느 한 구역이라도 공사를 소홀하게 하여 성벽을 마무리 하지 못했다면 이 공사는 온전하게 완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다음은’이라는 이 단어가 주는 뉘앙스는 다른 사람들이 공사하는데 불편을 끼치지 않으면서,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공사를 충성스럽게 감당하여 한 치의 오차 없이 서로의 성벽이 잘 연결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모여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어떤 사람은 팔의 역할을, 또 어떤 사람은 다리의 역할을 한다.
또 다른 사람은 몸 안에 있는 심장의 역할을, 그리고 다른 사람은 신장의 역할을 하면서 서로가 유기적으로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엡 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부교역자로 섬길 때 주일학교에서 실물 설교를 자주 하였다.
퍼즐 맞추기 판을 가져다가 아이들을 향하여 세워놓고 그 중에 아래쪽에 있는 퍼즐 한 개를 빼낸다.
아래에 있는 퍼즐 조각 한 개를 빼내더라도 퍼즐 전체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 다음 두 번째 퍼즐을 빼내면 퍼즐이 무너질 것처럼 느슨해지면서 좀 위험해 보인다.
그리고 세 번째 퍼즐을 빼내면 위쪽에 있는 퍼즐들이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아이들에게 이것이 바로 교회임을 가르쳤다.
교회는 서로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서로를 잡아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지탱해 주기도 한다.
그로 인하여 온전한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하나가 되어 세워진다.
(엡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교회를 세우는 성령의 역사는 다름 아니라 성도를 통하여 일하신다.
따라서 교회를 세우는 일이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물론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처럼 동시에 시작하여 같이 마치는 것은 아니다.
교회도 그렇고, 하나님 나라도 그렇고 주님께서 시작하셨으며 또한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완성된다.
그 때까지 우리 성도들은 시대 시대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되게 감당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잇돌이 되시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터를 일구었다면 그 다음은 우리들이 성령 안에서 믿음의 기둥을 하나하나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기둥을 세우고 이 세상을 떠나면 그 다음은 우리 믿음의 후손들이, 그리고 그 다음 사람들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 다음’이 계속 이어지다 보면 하나님의 때에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며, 그 날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이다.
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족보로써 현상적으로 보면 군데군데 벌레 먹은 곳들이 보인다.
3절의 유다와 다말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이지만, 이들은 서로 동침하여 부적절한 관계가 되어 쌍둥이를 낳게 된다.
5절의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으로 몸과 술을 파는 여자이다.
또한 룻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조차 없는 이방 모압 여인이다.
6절의 우리야의 아내는 다윗과 간음을 저지른 부정한 여인이다.
이처럼 줄기가 군데군데 벌레가 먹어 썩은 듯 보이지만, 그 뿌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결국 그 뿌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교회가 문제가 많고, 타락하고,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는 것처럼 보여도, 그 깊은 곳에서는 면면히 흐르는 맑은 물이 있다.
이는 혼탁한 세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말씀과 성령 안에서 영생을 사는 자들이 모인 공동체를 말한다.
외적인 교회는 썩은 듯 보이나 그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기에 결국 주님은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이다.
내가 곧 교회요 또한 교회를 이루는 지체이지만, 나는 완전하지 않다.
아니 완전할 수도 없다.
게다가 내 안에 얼마나 벌레 먹어 썩은 곳이 많은지 모른다.
그런 나는 때로는 영적으로 고통스러워 절규하며 낙심과 절망에 빠지기도 하였다.
내 안에 다말과 라합, 룻과 밧세바의 모습이 있다.
나는 그들의 죄를 다 합한 것보다 더 큰 죄로 켜켜이 쌓여서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기도 한다.
나는 다말 라합 룻 밧세바와 같은 사람을 보고 손가락질을 하고 비웃기도 하였지만, 어느새 그 손가락은 내 안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나의 죄를 보면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끊임없이 내 속에서 진흙과 더러운 것을 솟구쳐 내며 요동하는 바다와 같다.
내 안에 환난과 곤고, 죄책감과 망상 등 헛된 사망의 증상들이 가득 채워져 나를 사망으로 끌고 가려 한다.
나도 나를 용납할 수 없으며 나는 나를 어찌할 수 없다.
정말 나는 나를 보면 포기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나를 당신의 품에 품으신다.
그리고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쉬라 하신다.
이 은혜는 그냥 주신 것이 아니라 마치 무덤과도 같은 영적 혼돈과 환난 속에서 다른 것을 찾기보다 말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나는 죽은 자이나 주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
주님과 연합하여 십자가에 죽고, 그와 함께 무덤에 장사되어 아버지께서 주님을 살리심과 같이 나 또한 새 생명으로 일으켜 주신다.
무언가 욕심을 가지고 무엇을 기대하면 내 마음이 순간 지옥으로 변하고 만다.
내가 천국을 누려야 성도들도 함께 그 천국을 소망할 수 있다.
내가 누리는 영생의 비밀을 저들도 함께 누리길 소망한다.
그래서 ‘그 다음’ 그리고 또 ‘그 다음’ 주어진 영생을 모두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
모든 이들이 다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가 주님과 깊은 교제와 사귐을 갖고 주님이 보았던 창세전 아버지의 영광을 보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각자에게 주어진 복음을 통하여 ‘그 다음’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소서.
땅과 만물 안에 속한 것들에 천착하여 거기에 매몰되지 않게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 하소서.
평생 애벌레로 살면서 땅의 것만 바라고 먹는 자가 아니라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고 맛있는 말씀을 먹는 자 되게 하소서.
그곳에 진정한 영생이 있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짐을 알게 하소서.
비록 순간순간 벌레 먹어 썩은 것 같은 모습일지라도 나 자신을 보고 낙심하여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나를 시작하게 하신 주님을 보고 다시 담대하게 일어서게 하소서.
주님의 나라가 오기까지 ‘그 다음’ 영적 바통을 잘 받아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세워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