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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부여의 남쪽에 있다."라는 문구를 우리 사학들은 모두 남쪽 방향을 한반도로 지목을 한다. 정말 부여의 남쪽은 한반도 인가? 그렇다면 부여의 위치는 어디일까? 우리 국사는 3세기경의 부여 위치를 위 지도처럼 비정을 한다. 왜 이런 그림이 나오느냐 하면 고구리와 현도가 아래 그림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후한서는 "부여는 현도 북쪽 천여리에 있다"라는 기록에 따라서..., 그렇다면 현도를 심층 분석해 보자. "현도군(玄菟郡)은 본래 예맥(濊貊)의 땅으로 기원전 128년에 창해군(滄海郡)이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예맥의 땅은 어디인가? 濊라는 글자는 종족 이름으로 쓸때는 "예"라고 읽지만 본음으로는 "물이 깊고 넓다"는 뜻의 "외"라고 읽어야 한다. 맥이라는 글자는 "곰" 또는 "고요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글자로서 단군 신화의 조선과 일맥 상통하는 글자라는 묘한 관련성이 존재 하는 글자이다. 後漢書는 小水貊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魏氏春秋>曰:<遼東郡><西安平縣>北, 有小水南流入海, <句驪>別種因名之<小水貊>. 위씨춘추에서 말하기를 요동군 서안평현 북쪽이며 작은 물이 海(黃河)로 흘러 들어 가는데 소수맥은 구려의 별종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요동군 서안평현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의 山西省 汾河 서쪽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수맥은 산서성 서북쪽인 것이다. 현도군=예맥=창해군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창해에 관한 설명은 없다. 다만 조조가 오환을 정벌하고 돌아 오는 길에 觀滄海라는 시 속에서 창해의 흔적을 찿을 수 있을 뿐이다. 참고로 조조의 시 ‘관창해(觀滄海:푸른 바다를 봄)’를 보자.
그런데 조조의 이 詩는 바다(大海)를 보고 노래한 詩라고 보기 어렵다. 중원을 제패한 왕조들은 모두 내륙인들이며 내륙인들의 "海"라는 표현들은 황하와 회수 그리고 장강을 말하는 것임을 간과하면 안된다. 진짜 바다는 "大海"라 표현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조조가 바다를 바라 본 곳이 진황도라면 조조가 바라본 곳은 분명히 大海(바다)일 것인데 바다에 산이 있다? 그리고 수목이 울창하고 온갖 풀들이 무성 하다? 그러나 지금의 진황다오 앞 바다에는 섬이라고는 존재 하지 않으며 진황다오 주변을 흐르는 강에서도 섬이라는 것은 없다. 조조가 술에 취해서 헛것을 보고 지은 詩가 아니라면 거짓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星漢이다. 星漢이란 長江의 최대 支流인 漢水를 지칭하는 말로서 은하수를 뜻한다. 조조가 지은 이 詩에 어찌하여 長江의 支流 漢水의 별칭인 星漢이라는 古代 地名이 느닷 없이 나타나는 것인가? 또한 東臨碣石,以觀滄海。 동쪽 갈석에서 창해를 보네 이 귀절에서 보면 조조는 동쪽 갈석에서 서쪽 창해를 본다는 것이다. 즉 창해는 조조의 위치에서 서쪽을 바라 보고 이 詩를 짖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만약 조조가 진황도의 갈석산에서 바다를 본다는 가정을 한다면 조조가 바라 보아야 하는 창해는 동쪽이 아니던가? 玄菟의 漢字를 따라가 보자 玄이란 "물이 깊다", "고요 하다"라는 의미외 북쪽이라는 뜻과 함께 "멀다(遼)"라는 의미의 글자이며 濊라는 글자와 일맥 상통하는 글자임을 알 수 있다. 菟라는 글자는 범 즉 호랑이의 다른 글자이다. 즉 貊과 菟는 곰과 호랑이라는 의미의 글자이다. 현도라는 이름으로는 창해와 예맥이 같은 지역을 뜻하는 이름이라는 것과 이 지역이 단군 신화와 관련된 곳이라는 것이며 현도의 위치는 산사성 서북쪽인 것이다. 따라서 부여의 위치는 지금의 몽골 초원임을 알 수 있다. 부여라는 이름을 분석해 보면 "소금이 나는 땅을 다스리다" 라는 의미의 글자이다. 숙신의 다음 대의 이름이 읍루이다. 결국 읍루는 숙신의 위치와 같다라고 해야 한다. 숙신의 분명한 위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춘추시대의 숙시의 위치는 산서성 일대 엿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존재 한다. 공자가 지금의 카이펑에 머물고 잇엇을 때 매 한마리가 화살에 맞아 죽은 채 발견이 되었다. 매를 죽이 화살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졋을 때 공자는 " 이것은 숙신의 화살이다"라고 말한다, 즉 카이펑에서 숙신은 멀지 않은 곳에 잇음을 알 수 잇는 기록이다. 카이펑에서 가장 가까운 북쪽은 지금의 산서성이다. 물론 이 시기의 숙신의 위치가 반드시 산서성 뿐만은 아니였을 것이며 산동성도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러 기록을 분석해 보면 숙신의 위치는 산서성에서 부터 지금의 하북이 분명해 보이지만 숙신 이후에는 산서성이 고구리의 영역으로 바뀌며 말갈 때에는 산서성에서는 자취를 찿을 수가 없다, 우리 북방민족의 영역이 다 그렇듯이 후대로 내려 오면서 그 위치가 점점 북쪽으로 이동하는 특징이 있다. 아마도 이것은 농사 기술이 발달 되고 농업의 인구가 늘어 나면서 농업의 종족들이 계속 해서 북으로 이동된 결과로 보여 진다. 흑수 말갈의 영역은 <元史>의 기록으로도 지금의 瀋陽(심양)과 奉天(봉천) 까지 였던 것으로 미루어 지금의 랴오허 동쪽을 말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瀋陽 奉天 우리 고대사에 등장하는 모든 나라나 부족들은 기록으로 나타나는 위치가 애매한 관계로 이를 해석하는 사람마다 그 위치를 다르게 설정을 한다. 그런 이유로 조선의 위치와 삼국의 위치가 역사를 해석하기에 따라서 모두 달라 지는 것이다. 그런데 읍루만은 그 위치가 확실하다. 왜냐하면 挹婁(읍루)는 肅愼(숙신)으로 부터 시작해서 勿吉(물길)과 靺鞨(말갈) 女眞(여진)이라는 이름을 거쳐서 청나라의 만주족 까지 단 한번의 이동 없이 흑룡강을 중심으로 하는 만주에서 명멸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름을 黑水靺鞨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흑수는 黑龍江의 옛 이름이기 때문이다. 東夷 九族은 시대별로 그 위치가 다르고 언제나 이동 했던 유목 수렵민족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나타 내는 시기에 따라서 그들의 위치가 다르게 나타 난다. 하지만 읍루만은 그 위치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고대의 우리 민족 국가들의 위치는 읍루를 기준으로 비정을 해야 한다. 읍루는 동이가 기록에 처음 기록에 나타나는 <후한서 동이열전>에 부여, 고구리, 동옥저, 북옥저, 예, 한, 왜와 함께 처음 나타난다. 이들이 기록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후한말 대륙이 혼란에 빠지기 시작 하는 때에 일제히 나타나는 것이다. <後漢書>의 읍루전은 이렇게 시작 한다. < 婁>, 古<肅愼>之國也. 在<夫餘>東北千餘里, 東濱大海, 南與<北沃沮>接, 不知其北所極. 土地多山險. 人形似<夫餘>, 而言語各異 읍루는 옛 숙신이며 부여 동북 천여리에 있다. 동으로는 대해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북옥저에 이르며 북쪽은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토지는 험한 산이 많으며 사람은 부여인과 닮앗지만 말은 각각 다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 대로라면 우리 고대사를 기록한 모든 기록이 다 그렇지만 읍루의 위치 역시 모호 하다. 하지만 후한서 부여의 위치는 현도 북쪽 천리 즉 지금의 몽골 초원이 분명하며 부여의 동북 천여리 정도라면 지금의 아무르강 상류로 보인다. 그러나 <元史 地理志>에서 심양로는 본래 읍루의 옛 땅이고 또한 개원로는 옛 숙신의 땅이라 하였다. 즉 읍루의 영역은 지금의 중국 심양시 까지 엿으며 이 경계가 지금의 랴오허강이다.
적어도 읍루의 영역은 지금의 요하 북쪽을 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잇다. 그러나 우리 일제의 반도 사관을 바탕으로 쓰여진 우리 국사는 읍루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설정을 한다. 위와 같은 지도가 맞다고 가정해 보자. 관구검이 고구리 동천왕을 공격하자 동천왕은 북옥저 천여리를 지나 숙신의 옛 경게에 까지 도망 갔다는 기록은 도데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때의 魏나라가 한반도에 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더구나 이때의 고구리의 위치를 기록한 것을 보면 고구리는 읍루와 국경 조차 맞대고 있지 않으며 읍루의 외모는 부여와 고구리 사람들과 닮았지만 언어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읍루의 남쪽 경게는 지금의 장백산으로 보이며 서쪽 경계는 지금의 랴오허까지 엿으며 흑룡강을 포함한 만주 전역이 읍루의 영역이엇으며 이들은 부족으로 이루어져 잇으며 부족과 부족 사이는 가깝게는 200리 멀게는 3~400리라고 기록하고 잇다. 그야말로 조금만 생각해도 고구리의 위치는 만주에 잇지 않음을 알수 잇는데도 고구리를 만주에 몰아 넣고 싶어하는 우리 강단 사학의 저의를 알수가 없다. 肅愼(숙신)이라는 漢字를 중국인들이 읽으면 "조선"으로 읽는다. 그렇다면 <사기>에 등장하는 위만의 朝鮮을 중국인들은 朝鮮은 "쥬신"으로 읽는다. 필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단군의 역사는 바로 숙신과 읍루 말갈 그리고 여진과 만주로 이어져오는 만주인들의 역사라고 단언 한다. 지금의 하북 하남 그리고 산동반도에 존재 햇던 위만 조선과 단군을 오버랩하는 우리 역사는 절대로 잘못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숙신의 남쪽은 부여이며 부여의 남쪽은 옥저이며 옥저의 남쪽에 고구리가 잇었던 기록에 따라서 우리 고대사에 등장하는 모든 부족들이 모두 좁디 좁은 한반도에 군웅할거 하는 모습의 지도가 작성 되는 것이다. 지금의 한반도 서울에서 방위를 정한 역사 시각대로 말이다. 기록 싯점의 방위를 따지지 않고서도 부여는 지금의 랴오허 부근으로 보이며 마지만 부여왕이엇던 구태의 부여는 바로 지금의 요동 반도 부근에 잇엇던 것이다. 고구리와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서 요동태수 공손도는 구태에게 딸을 시집 보내고 동맹을 맺는 것으로도 우리 국사가 비정하는 부여의 위치로는 이 역사적 동맹을 설명할 수 없다. 만약 부여의 위치가 지금의 북만주 깊숙히 존재해 잇다면 부여가 고구리와 북위를 어떻게 견제 할 수 있으며 고구리의 위치가 지금의 만주 일대 였다면 고구리와 요동태수 공손도가 어떻게 전쟁을 할 수 잇다는 말인가? 더구나 平壤城의 또 다른 이름은 遼東城이다. 지금의 평양과 요동은 무슨 관계가 있기에 평양성의 또 다른 이름에 요동이라는 이름이 들어 가는가? 또한 관구검에 의해 평양성을 버리고 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더 도망을 갔다면 도데체 동천왕은 어디 까지 도망을 갔다는 말이며 관구검은 도데체 어떻게 이 먼 거리를 이동하며 동천왕을 쫓아 왓다는 말인가? 그러고 관구검의 이동 경로와 도주 하는 동천왕의 이동 경로가 해괴할 뿐이다. 혹여 우라 국사가 맞는다고 해도 이와 같은 의문을 설명할 수 잇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국사대로 역사를 설정하면 도데체 맞아 들어가는 퍼즐이 거의 없다. 우리 주류사학은 어찌하여 홀로 우리 고대 강역을 東으로 東으로 이동 하여 역사 강역을 비정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
만주라는 옛 지명은 올량합(지금의 청해성)을 포함하고 있는 분명한 기록이 존재 함에도 지금의 만주 벙위내에서 역사를 해석하니까 고구리는 지금의 만주 벌판을 헤매고 있는 것이며 이에 따라서 우리 역사도 지금의 만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
첫댓글 내용에 대한 이야기와 별개로 중간에 잘못된 지리정보 내용이 들어 있는 듯하여 그 부분만 지적합니다.
갈석 인근에서 지은 조조의 시에 관하여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조조가 바다를 바라 본 곳이 진황도라면 조조가 바라본 곳은 분명히 大海(바다)일 것인데 바다에 산이 있다? 그리고 수목이 울창하고 온갖 풀들이 무성 하다? 그러나 지금의 진황다오 앞 바다에는 섬이라고는 존재 하지 않으며 진황다오 주변을 흐르는 강에서도 섬이라는 것은 없다. 조조가 술에 취해서 헛것을 보고 지은 詩가 아니라면 거짓이다."
=> 이 구절은 진황도의 '현재 모습'에 기반한 평가일 뿐입니다. 하지만 조조 시절부터 현재까지 진황다
오 지역의 지리정보가 동일하다면 몰라도 지리정보가 달라졌다면 올바른 평가라고 볼 수 없겠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황도의 지리적 모습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진황도(친왕다오)는 한자로 秦皇島 라고 쓰는데, '다오'는 '섬 도'(島)의 중국식 발음입니다. 즉, 진황도는 원래 '섬' 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래 섬이었던 진황도는 나중에 바다를 메워 육지와 이어졌고, 진황도와 인근 육지를 합쳐서 행정구역으로서의 '진황도 시'가 됩니다.
@좋은사랑 님께서는 그 시대를 살다 오신 분이며 진황도가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 생생하게 보신분 같습니다,?^^*
분명히 동쪽 갈석에서 창해를 본다라고 햇지요?
님의 말이 맞아서 진황도가 섬이엿다고 해도 진황도 서쪽에 창해라는 곳이 잇을 수가 있을까요?
님은 창해가 어디라고 생각 하시나요?
필자가 아무 생각 없이 생각나는 대로 읊어 댄다고 생각 하십니까?
발해는 북해라는 이름과 발해라는 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으로 불린적이 없는 바다 입니다.
동아시아 고대사는 오호십육국 이전의 시대는단언 컨데 모두 거짓입니다.
제가 바로 그 거짓을 증명하는 글을 쓰는 것입니다.
@무명 저고리 고대 요동은 산서성에서 산동반도 일대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제 글을 읽는 것은 헛수고 입니다.
@무명 저고리 무명님, 저는 '내용에 대한 이야기과 별개' 로 지리정보에 대한 부분만 짧게 코멘트한 것입니다. 댓글 첫머리에도 그리 한다고 밝힌 바 있지요.
무명님은 '현재의 진황도 앞 바다에 섬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정확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진황도 자체가 예전에는 섬이었으니까요. 그 지적인데, 왜 다른 이야기까지 끌어와 확장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창해가 어디인지 논했던가요? 아니면 제가 무명님이 아무 생각 없이 생각나는 대로 읊어댄다고 비난을 하였던가요? 왜 하지도 않은 말을 되물으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럼 무명님이 그리 말씀하셨으니, 모두들 '아, 진황도는 먼 고대부터 현재까
@무명 저고리 지 섬이었던 적은 없고 진황도 인근에도 (진황도 자체를 포함해서) 섬이라는 게 존재한 적이 없었구나' 라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명백히 잘못된 지리정보인 데두요?
이게 무명님 주장들의 핵심 논거도 아닐 것 같은데 왜 이리 예민하신지 모르겠군요. 제 말을 긍정하신다면 '아, 예전엔 섬이었군요' 로 끝내면 족하고, 제 말을 부정하신다면 먼 고대부터 진황도 자체가 섬인 적이 없었음을 보여 주시면 됩니다.
@좋은사랑 제가 진황도를 직접 가보지 않아서 진황도가 섬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다만 진황도는 항구 도시로만 알고 있습니다.
진황도에 관한 어턴 정보도 진황도가 섬이였다는걸 말해주는 것은 없으니 말입니다.
단순히 섬을 뜻하는 島 라는 글자 하나로 섬이라는 추론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글이나 주장을 반박 하시려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논박 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그거로 "명백히 잘못된 지리정보인 데두요? " 라고 단정 하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