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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다이아몬드
Immortal Diamond
우리의 진짜 자기를 찾아서
The Search for Our True Self
리차드 로어 지음
김준우 옮김
한국 기독교 연구소
5장 당신이 그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영혼 속에 자리 잡고 계시는 장소를 결코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집들 중 가장 자주 머무시는 집이 우리들 안에 있으며, 그 집에 사시는 것이 그분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깊이 묵상하는 영혼은 깊이 살핌을 받는 사람처럼 된다. - 노르위치의 줄리안, Showing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요한 14:20
매우 값비싼 진주
동방교회 교부들이 사용했던 그리스어 '테오시스'(theosis)는 "신화"(神化, divinization)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테오시스'는 비록 보다 신비주의적이며 삼위일체적인 동방교회에서 가르쳤던 것이지만, 서방교회처럼 보다 실천적이며 채찍과 당근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대체로 사라졌다. 교회가 분열되고 갈라질 때마다, 각 집단은 복음의 메시지의 절반을 상실했는데, 이것은 동방교회의 교종과 서방교회의 교종이 서로를 파문했던 1054녕의 대분열에서도 마찬가지었다. 복음의 온전함을 또 다시 상실하게 된 것은 1517년에 개신교 개혁자들(마틴 루터, 요한 칼뱅, 존 녹스, 헨리 8세)의 분열에서, 갈릴레오 시대에 신학이 과학으로부터 분열되면서, 그리고 그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유대-그리스도교 역사의 거의 전부는 여성성(the feminine)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우리가 진리의 절반을 상실한 것이다. 항상 양편 모두 좋은 것을 잃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참단한 결과이다.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신비적이며 비폭력적이거나 불이(不二, non-dual)의 차원("전적으로 하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둘도 아니다")을 체험하는 것은 차지하고라도 그 차원을 이해할 수조차도 없다. 묵상하는 정신은 종교가 사회에 줄 수 있는 독특한 선물인 것이 분명하다. 이 선물이 영적인 진화라는 바퀴가 잘 굴러가도록 기름칠을 한다.
따라서 복음의 이런 "값비싼 진주"를 서방교회, 즉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모두에게, 그리고 세속적 구도자들에게 다시 소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시몬 베이유가 여러 차례 강조한 것처럼, 비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쉽다. 모태(母胎) 신자들은 거의 전부가 채찍과 당근 모델에 사로잡혀 있다.
서방의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 혹시라도 내가 오래된 이단들을 다시 들추어 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1995년에 교종 요한 바오르 2세가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기 바란다. 그는 "동방교회들의 유서 깊은 옛 전통, 즉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신화(theosis)에 관해 가르친 것은 모든 동방교회들의 전통이 되었으며 그들의 공통적 유산의 일부가 되었다. 이것은 2세기 말에 성 이레나이우스가 이미 표현한 생각, 즉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넘어오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께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라는 생각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교종들은 자신들이 틀림없이 신뢰할 수 있으며 권위 있다는 확신이 없이는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 교종 요한 바오르 2세는 서방교회, 즉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가 모두 신화에 관한 믿음을 대부분 상실했거나 심지어 신화의 가능성을 부인해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신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긍심이 부족하고, 문화적으로 자기혐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신화를 위해 흔히 사용되는 "증거 본문"은 베드로의 둘째 편지로서, 영감을 받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가지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경건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영광과 선하심에 힘입어 귀중하고 가장 훌륭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그 선물을 통해서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1:3-4)
많은 교부들은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실제로 존재론적인, 형이상학적인, 객관적인 합일을 믿었으며, 이런 합일을 통해서만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과 함께" 다시 삼위일체의 생명 속으로 데려가실 수 있다(요한 17:23-24, 14:3, 12:26). 이것은 초대교회에서 많은 신자들에게 "참여"가 얼마나 실제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참여는 사람들을 변화시켰으며,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정체성과 새롭게 변화된 형태를 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형태가 단지 인간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실제 형태는 자신처럼 인간적이며 동시에 신적인(a human-divine) 형태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자신만 배타적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셨다. 그는 다니시면서 군중들 누구에게나 포용적으로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전하셨다. 바울로는 이와 똑같은 요점을 말하기 위해서 "입양되었다"(갈라디아 4:5)라는 말과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들"(로마서 8:17)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하며 최종적인 참여"를 예수님으로부터 배웠는데,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멀리 있는 천국으로 초대하신다고 믿기보다는 자신 속으로-친구와 공동참여자로서-초대하신다고 믿으셨다. 나는 지금 개인들 속의 심리적 혹은 도덕적 온전함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결코 가능하지 않으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교리를 무시하거나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나는 지금 하느님께서 심어놓으신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이것을 우리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라고 부른다(로마서 8:16-17). 이것이 우리가 생명과 사랑의 문명을 그 위에 세워야 하고 또한 세울 수 있는 토대이다. 이것이 없으면, 대부분의 종교적 주장들은 플라톤적 관념론이며, 또한 가짜 자기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동기를 부여하려는 헛된 시도들에 불과하다. 우리가 매주일 교회에 와야만 하는 이유는 지난 주일의 메시지가 우리를 깊은 차원 속으로 들어가도록 이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내어주심
이처럼 놀랍고 심지어 주제넘은 듯이 보이는 신화(theosis)라는 메시지는 우리를 "하느님의 형상(image)과 닮음(likeness)으로 지으셨다"는 창세기의 본문(1:27; 5:2)이 뒷받침한다. 많은 신학 저술들은 이 인용문을 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해 기록되었으며, 학자들은 이것에 합의했다. "형상"은 우리의 객관적인 DNA로서, 우리가 어떤 옳은 일을 하거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기 이전에 애당초부터 우리를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특징짓는 객관적인 DNA라고 정의되었다. 이런 하느님의 내주하심(divine indwelling)은 완전히 거저주시는 선물이며 지속적 현존이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살아계신 성령으로서 때로는 "창조되지 않은 은총"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선물을 받은 "성전들", 그릇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내주하심은 우리의 노력과 전혀 상관이 없지만, 우리의 핵심 정체성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타고난 존엄성을 주는데, 그것을 나는 이 책에서 우리의 진짜 자기와 우리의 불멸의 다이아몬드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것이 "구원의 반석"이다. 우리 안에 거하는 하느님의 형상은 우리들 각자 안에서, 마치 천천히 소화되는 초강력 비타민처럼, 우리를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원복"이다.
"닮음"은 다른 것을 뜻했다. 닮음은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완전히 거저 받은 선물을 우리가 개인적으로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personal appropriation)과 점차로 실현하는 것(gradual realization)이었다. 우리 모두는 객관적인 똑같은 선물을 받았지만, 우리가 주관적으로 어떻게 그 선물에 대해 긍정하는가 하는 것에서는 서로 매우 다르다. 우리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닮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실천적인 서방교회는 그곳에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무엇에 주목하는가에 달려 있다. 교회의 묵상적 차원은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보다 깊은 진리, 자기, 신비 안에서 쉬도록 만든다.
보다 행동적이며 외향적인 서방교회는 사람들의 외적인 모습들이 하느님과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만을 볼 수 있었으며, 신비적인 중심 대신에 도덕적인 성취에만 주목했다. 루터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일이란 그가 말한 것처럼, 고작 "똥 더미 위에 눈을 살짝 덮는 것"이었으며, 칼뱅이 우리에게 제공한 것은 "전적 타락"과 "선민의 애정"뿐이었다. 이처럼 본래적으로 부정적인 인간론 속에서는 어떤 신화도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에당초 그처럼 큰 빚더미에 올라 있는데, 무엇을 재건하겠는가? 가톨릭교회에서는 라칭거 추기경이 동성애자들을 "본래적인 장애자"라고 불렀다. 만일에 우리의 문제가 "본래적"이라면, 우리가 무슨 수로 복음을 들을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실질적인 전도방해이다. 전체적으로 서방교회는 항상 핵심에서 벗어났으며 단지 주변에서 춤을 추었을 따름이다. 신화는 깊은 심층 속에 보존되었지, 결코 표층의 급류 속에 보존되지는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초기의 동방교회와 서방의 묵상전통은 하느님의 형상을 강조했던 반면에, 서방교회, 즉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는 주로 닮음을 강조했다. 서방교회는 근거와 변형의 중심을 상실했으며, 동방교회는 밖을 향해 나아가는 역동성과 돌파력을 상실했다. 결국에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영광과 선하심"(Ⅱ베드로 1:4)을 잃게 되었다. 인간만이 아니라 교회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귀가 눈에게 "나는 네가 필요하지 않다"(Ⅰ고린토 12:16)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망각했으며, 우리는 따로따로 만든 신학교와 진영들에서 그 온전한 메시지를 상실했다. 그러나 그 온전한 메시지는 우리 시대까지 계속 이어져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새롭게 등장하는 교회"(emerging church) 운동, 묵상의 재발견과 같은 희망적 운동을 통해서 회복되고 있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실제적인 합일, 진정한 변형, 실질적 참여에 대한 의식을 상실했기 때문에, 우리는 대체로 진짜 자기에 대한 생각도 상실했다. 다시 말하지만, 진짜 자기는 우리가 객관적으로 누구인가 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자기이며,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골로사이 3:3-4) 자기이다. 이 하나의 인용문 속에 핵심이 다 들어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교 역사의 대부분을 통해서 한 일은 주로 그리스도교적인 가짜 자기(Christian False Self)를 치장하고 위장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것에게 세례를 베풀고, 견진성사를 베풀고, 혼인 예식을 거행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교회라는 것(Ⅰ고린토 3:17)을 인식하기보다는 그들을 교회에 오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흔히 교제를 할 수 없는 이들에게 "영성체"를 주었으며,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진짜 자기를 누리기는커녕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가짜 자기들을 사제로, 목사로, 주교로, 심지어 교종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크게 슬퍼하고 비통해 할 일이지, 혐오하거나 경멸할 일이 아니다. 나는 나의 글이 건설적인 것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비한 잔치에 오지 않은 사람들은 보통 나쁜 사람들이 아니며, 하느님께서 거절하신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당신과 나처럼 작은 사람들일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매우 크신 하느님께서는 작은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아마도 작은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실 것이다(이스라엘 역사, 욥기, 스바니야,Ⅰ고린토 12:22-23, 마리아의 찬가,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속에 있는 당신의 형상을 영원히 사랑하신다. 이것이 신비가들의 믿음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속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는 단지 점차적으로 "우리가 비추는 형상으로 변화해 갑니다"(Ⅱ고린토 3:18).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우리에게서 떠나신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그 사랑에 보답하거나 우리 자신이나 서로를 깊이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이 문제였으며 지금도 문제다.
우리의 진짜 자기는 우리들 대부분의 경우에 손대지 않은 채 남아 있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나 하느님과 합일하는 체험이 막혔으며, 부정되었고, 대체로 불가능한 것으로 천명되었기 때문이다. 그 체험은 항상 성서, 사제, 목사, 교회, 성례전을 통해 중개(중보)되어야만 했으며, 흔히 그 중개자들과 그들의 중개를 변호하는 것이 일차적인 메시지 자체가 되었다.1) 대부분의 설교자는 우리의 본래적인 가치를 말하기 전에 우리의 무가치함부터 상기시켜주기에 바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낮은 자존감이라는 블랙홀에 너무 깊이 빠져버려서 기어서 올라올 방법이 없었다. 집을 세울 토대가 없었으며,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들의 연약함과 무능력뿐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세울 견고하며 객관적인 토대가 없으며, 누구나 자유 낙하에 맡겨졌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말이다.
이스라엘의 많은 예언자들이 말한 것처럼, 항상 핵심 메시지를 간직하는 "남은 자들"이 있게 마련이다(이사야 4:3). 남은 자들은 누룩이 되어 마침내 빵 전체를 부풀린다. 예수님도 이 똑같은 아름다운 은유를 사용하여 하느님 나라를 세우셨다(마태오 13:33). 하느님께서는 이 언약의 신적인 측면을 일방적으로 지키시는 일에 익숙하게 되셨으며, 항상 주도적으로 행동하신다. 바울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신의를 저버렸다고 해서 하느님께서도 신의를 저버리시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거짓[자기]이라 하더라도 하느님만은 언제나 진실한 [자기] 분입니다."(로마서 3:3-4).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들 안에 계신 자신을 사랑하신다. 심지어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공경하지도 않을 때라도, 마치 부모가 자기 파괴적인 자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말이다. 부모는 대개 자기 파괴적인 자녀를 더욱 인내심을 갖고 사랑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한 만큼 나는 그들도 사랑했다"(요한 17:23)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삼위일체적인 절대적 사랑이다. 이것은 참여가 더욱 넓게 퍼지는 물결인데, 그 물결은 마침내 인간의 가장 먼 가장자리에까지, 그리고 인간을 넘어 모든 피조물들에게까지 이르는 물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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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자주;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 체험과 합일은 모세와 예수가 가르친 직접 종교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런 직접 종교를 가르치고 후대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예배, 성전, 안식일, 제사장, 경전, 교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문제는 직접 종교가 그 체험을 가르치기 위해 이처럼 "은총의 수단들"로 만든 것들이 일상화되어 축적된 전통이 되었고, 특히 외부의 종교-문화적 위협에 맞서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절대화되면서 종교의 목적 자체(우상숭배)로 둔갑할 때, 직접 종교는 성전중보체제로 변질되었다. 종교는 성전세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과 외부인들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원천이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성전중보체제의 핵심인 안식일법과 정결법, 용서에 대한 제사장들의 독점권에 대해 저항하며 하느님의 무차별적 사랑과 누구나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친밀한 "아빠 하느님"과의 합일을 가르치자, 제사장들과 신학자들이 앞장서서 예수를 죽이게 되었으며, 교회는 중세 이후 수많은 신비가들을 박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돈 큐핏은 그리스도교가 성전중보체제에 의해 살해된 예수의 무덤 위에 세워진 역사상 가장 강고한 성전중보체제가 되어, "마지막 거대한 형태의 우상숭배가 되었다"라고 비판한다. 오늘날에도 성경절대주의, 교회중심(성장)주의, 성직자 중심주의, 주일성수, 교리수호, 심지어 "예수의 우상화"는 이런 맥락에서 성전중보체제가 만든 표층종교의 특징들이며, 성직자들의 안이한 "종교 비즈니스"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자본-정권-보수언론-대형교회의 카르텔이 기득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성전중보체제는 지배체제에 대한 예수의 비판과 저항을 약화시키고 매우 유순하며 복종적이며 비정치적인 예수로 둔갑시켜 "삼박자 구원"과 같은 성공과 번영의 복음을 만들었다. 참조, 『예수 정신에 따른 기독교 개혁』(박상선·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06), 4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