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7월 5일(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 17-22 마지막 순간, 엄마 걱정 오늘은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분은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고국을 떠나 외국을 전전하며 어렵게 공부하였습니다. 신부로 서품되고, 귀국하여 불과 8개월 동안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3개월의 옥고를 치른 뒤 한강변 새남터에서 참수당하여 순교하였습니다. 1846년 9월 16일의 일입니다. 당시 그분은 겨우 스물여섯 살의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분이 집을 떠난 지 6년, 신부가 아직 되지 않은 스물두 살의 신학생일 때,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중국의 요동 땅에 머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조선에서 온 신자들로부터 자기 부모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낸 보고서에 그 소식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의 부모는 많은 고난을 당하여 아버지는 참수로 순교하였고, 어머니는 의탁할 곳이 없는 비참한 몸으로 교우들 가운데 떠돌아다니신다고 합니다.” 사실 그의 부친 김제준은 아들을 떠나보내고 3년 뒤, 아들을 해외로 보낸 죄가 발각되어 체포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모친 우르술라는 의지할 곳 없는 몸이 되어 이집 저집을 떠돌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 뒤 그분이 신부가 되어 입국하였다가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의 옥에 있을 때, 죽음을 기다리면서 당시 조선 교구의 교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작별 인사 편지를 쓴 것이 있습니다. 그 편지 마지막에 자기 모친을 부탁하는 내용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어머니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들을 보지 못하다가 며칠 동안 한 차례 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다시 아들과 헤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슬퍼하실 어머니를 부디 위로하여 주십시오. 주교님의 발아래 엎드려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 시초부터 순교자들을 많이 배출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는 초기 신앙인들이 겪었던 박해와 순교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이었고,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유대교 회당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하여 살아 계시다고 집회에서 발언하였다가 매 맞고 쫓겨났습니다. 그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유대교와 결별하고, 독자적 공동체를 만들어 독립하였습니다. 복음서들 여기저기에서 그들이 유대교와 결별하면서 겪어야 했던 고통의 흔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신앙인들이 ‘의회에 넘겨지고’, ‘회당에서 채찍질 당하며’,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 “유대인들로부터 40대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매를 다섯 차례나 맞았다”(2고린 11,2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박해는 처음부터 적대감을 지녔던 사람들로부터 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가족의 혈연이 찢어지고 친지들의 따뜻함이 미움으로 바뀌는 아픔을 체험한 그리스도 신앙인들이었습니다. 한국의 순교자들도 같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인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로 가문에서 파문당하고,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하였습니다. 신앙인 한 사람이 발각되면, 그 가문 전체가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신앙인 한 사람이 체포되면,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노비로 끌려가기도 하였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따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잡혀갔을 때에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는 말씀이 오늘 복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입을 빌려 복음은 말합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신앙인들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영이 살아 계셨듯이, 그들 안에도 아버지의 영이 살아 계셔서 말씀하신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렇게 죽음을 각오한 이들이었습니다. 초기에 팔레스타인에서도 그러하였고, 19세기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는 삶의 운동입니다. 죽기 위한 길이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의 생명을 살기 위한 길입니다. 세상은 미워하고, 단죄하고, 벌주면서 그 질서를 유지합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 기득권층도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성전 제사 의례에 충실하여, 하느님의 벌을 피하고, 많은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믿고 가르친 하느님의 일은 달랐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의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여 당신의 자녀 되어 살 것을 원하십니다.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그런 가르침은 그 시대 유대교인들에게는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제거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세기 말입니다. 그 시대 조선 정부는 유교적 질서를 지향하였습니다. 효와 충이 지상의 가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 중심의 질서를 가르쳤습니다. 효와 충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이차적이었습니다. 그런 이념적 이질감에다, 사분오열되어 서로 다투던 그 시대 당파싸움이 가세하여, 조선 조정은 그리스도 신앙을 사악한 종교로 낙인찍었습니다. 그래서 순교한 이들의 수가 2만 명에 육박합니다. 순교는 하지 않아도 순교자의 가족이기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했던 분들까지 생각하면, 참 많은 생명이 희생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 나라의 질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만드는 질서입니다. 그 질서는 아무도 희생시키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자발적 희생이 있어서 이웃이 더 자유롭게, 또 더 풍요롭게 살도록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다가오자 혼자 나서셨습니다. “나를 찾고 있다면 이 사람들은 보내 주시오.”(요한 18,8) 겟세마니에서 체포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죽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질서를 창립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교회 초기부터 신앙인들은 박해를 당하고 목숨을 잃으면서, 예수님이 여신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순교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여 그분의 생명을 산 자녀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셨다는 그리스도 신앙이 말하는 바입니다. 내 이름 때문에 신부가 되어 3년 정도 지났을 때 중국을 방문하면서 김대건 신부님이 사제로 서품을 받으신 상하이의 금가항성당을 순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일행들과 함께 들어선 성당은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비좁고 촌티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당에 들어선 순간부터 함께 갔던 사제들은 비장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던 신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저도 펑펑 울며 미사를 봉헌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눈물과 울음은 머나먼 이역의 나라에서 차가운 성당 바닥에 엎드려 당신의 온 생명을 봉헌하셨던 신부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감동은 하느님께, 순교자들께, 김대건 신부님께, 나아가 신자들께 죄송한 마음에서 솟구치는 설움 같았습니다. 사제로서의 열정이 타성으로 젖어가는 시점에서 편안한 사제생활을 하면서도 툴툴대며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던 자신의 삶에 대한 창피함의 눈물이었습니다. 목숨까지 바쳐 이어 준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지 못한 사제의 삶에 대한 민망함의 울음이었고, 더 이상 나태한 신앙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다짐의 울먹거림이기도 했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작년 교황께서 친히 방문 하셨던 솔뫼가 생가가 있는 곳입니다. 16살이 되던 해 겨울에 최방제, 최양업과 함께 사제가 되기 위해 육로로 평양과 의주 변문을 거쳐 중국 대륙을 종단하듯 내려가 7개월 만에 마카오에 도착하여 신학교에 입학합니다. 함께 공부하던 최방제를 병으로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었고, 마카오의 내전으로 필리핀으로 피난하며 공부를 했습니다. 25살이던 1845년 8월 17일에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 서품을 받고 조선에 들어와 신부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조선교회에 더 많은 선교사의 입국을 위해 길을 준비하던 중 1846년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그해 9월16일 25살의 나이에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 형으로 순교하여 파란만장한 짧은 생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김대건 신부가 도전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자질과 능력이 출중함에도 교만하지 않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굳건하였기에 조정의 회유와 온갖 유혹에도 굽히지 않고 생명을 바쳐 임자(김대건 신부님은 하느님을 ‘임자’라고 부르셨습니다)에 대한 믿음을 증거한 신부님의 삶은 사제로서 현재를 살고 있는 내 자신에게 커다란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목숨을 바치며 믿음을 지켜야 하는 박해의 시대가 아니기에 안일하고 타성에 젖은 신앙을 살아가는 사제는 그저 편하고 쉽고 안락한 것들만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의를 외치며 맞닥뜨리게 되는 고난을 피하려고 불의를 외면하는가 하면, 진리를 세우기 위한 싸움이 무서워 거짓, 위선을 보고도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신자 공동체는 좌우, 여야, 진보와 보수의 가치가 섞여 있다고 작위적인 변명을 하며 ‘예’ 할 것을 ‘예’ 라고 말하지 못하고, ‘아니오’ 할 것을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반벙어리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부정한 권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자행되는 억압과 정의롭지 못한 숱한 폭력 현장의 고통스러운 목소리와 신음을 보고 들으면서도 자신의 안락함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해 신자들과 함께 연대를 위한 투신의 발걸음을 선뜻 내딛지 못합니다. 세상에 가득 찬 이기와 탐욕이라는 맘몬의 논리에 대항해 목숨으로 지킨 신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이미 일러 주셨습니다.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하느님을 증언하면서 박해를 각오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지니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증거 할 수 없습니다. 목숨을 건 증거가 없다면 우리 후대의 신앙은 죽음을 이겨내지 못하는 신앙이 되고 말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죽음을 모퉁이돌 삼아 이어진 신앙을 돌이켜 보는 오늘, 생명을 걸고 믿음을 살아 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깊이 반성해 보게 됩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박해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련이니, 세속과 마귀를 거슬러 싸워 공덕을 크게 쌓을 때입니다. 부디 환난에 짓눌려 항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구원사를 그르치지 않도록 하시오. 오히려 지난날의 성인 성녀들의 발자취를 따라 성교회에 영광을 더하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이며 자녀임을 증거하시오. 비록 여러분의 몸은 여럿이지만 마음으로는 하나 되어 서로 도와주고 사랑하는 생활을 하면서 주님께서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실 때를 기다리시오.”(김대건 신부님의 옥중 편지 중 일부) -박명기 신부님(다미아노) [생활 속의 복음]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한여름입니다. 7월이 되면 여름 휴가와 방학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올해 7월은 전염병, 바이러스 때문에 참 고민이 많은 시기가 됐습니다. 이번 여름에는 멀리 여행을 떠나기보다는 근처에 사는 친지를 만나 감사의 고백을 하고, 서로 위로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듯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해도 미래가 불안한 상황입니다. 누구 하나 믿고 살아가기가 힘든 사회입니다. 정부는 많은 이들을 위한 정책을 결정한다지만 실상은 소수의 엘리트와 부자를 위한 결정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ㆍ도 단체장이나 국회의원 등 지역을 위해 일해야 하는 이들은 중앙정부의 원의에 따릅니다. 우리(가톨릭)를 비롯한 모든 종교는 현실의 아픔과 어려움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도덕적 가르침으로 더욱더 현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키워가고 있는듯 합니다. 오늘 우리는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성인을 기억합니다. 인터넷 검색을 비롯해 여러 방법으로 김대건 신부님에 관한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김대건 신부님 삶에 대한 설명은 공통적으로, 대략 이렇게 시작됩니다. “1821년 충청도 솔뫼마을에서 태어난 성인은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훌륭한 재주)와 굳센 성격(강한 의지력)과 진실한 신심(경건한 신심)으로 생활하던 중…” 즉 어릴 때부터 특출했다는 말인데, 김대건 신부님이 비상한 재주와 강한 의지력을 지녔다고 판단한 근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 사제 순교 성인 몇 분을 더 찾아봤습니다. ‘베트남의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 순교자는 1785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세례를 받고 사제가 되어….” “일본의 성 바오로 미키 사제 순교자는 오사카 인근의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세례를 받고…” “베드로 샤넬 사제 순교자는 프랑스 벨리 근교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목동으로 지내다가 16세 때 소신 학교에 입학했다”고 기록돼있습니다. 성경에 언급된 신앙 선조 대부분은 어른이 됐을 때도 평범하거나 그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예로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75세에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이사악이 태어날 때까지 신실하게 하느님 말씀을 따라 생활했습니까?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그래서 아브람은 나그네살이하려고 이집트로 내려갔다. 그때 아내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내 누이라고 하시오. 그래서 당신 덕분에 내가 잘되고 내 목숨을 지킬 수 있게 해주시오”(창세 13,10-20)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목숨을 위해 부인을 파라오에게 내주는 겁 많고 부도덕한 사람입니다. 또한 사라이의 몸종 하가르에게서 대를 이으려 하였다는(창세 16,2) 기록에서, 하느님과의 약속을 얼마나 의심하고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인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의 일생은 어떠했나요? 그 외에도 엘리야, 요나 등 많은 예언자가 하느님의 선택을 받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도망 다녔습니다. 저는 이렇게 평범한 이들이 더 마음에 끌립니다. 어린 시절부터 특출한 재능을 지닌 영웅을 닮기에는 애초부터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웅을 포기하고 저 멀리 있는 이야기 속 한 주인공으로, 혹은 소설 속의 한 인물로 투사(透寫)하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은 어떤 성인(聖人) 순교자를 만나고 싶습니까?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하는 초인적 능력을 지닌 분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신앙생활에 대해 갈등을 겪고 죄를 범하지만 회개하면서 결국은 하느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성인을 원하시나요? 그래서 저는 기도 드립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으로 기뻐할 수 있는 신앙인, 김대건 신부님의 “모든 신자는 천국에서 만나 영원히 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김대건 신부의 편지 중)라는 말씀을 통해 갈등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떳떳한 신앙인이 되길 말입니다. -박재식 신부님(토마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9>
[아! 어쩌나] 300. 메르스 사태에 대하여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끝까지 견디는 이”
저의 동기신부 중의 하나가 탈북자들에게 우리나라 적응을 돕는 시설인 ‘하나원’에 갔을 때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신부님께 한 봉사자가 고해성사를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시다고 하더랍니다. 보통은 봉사자 중에 가끔 고해를 보기도 해서, 봉사자가 원하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탈북자 중 한 분이 고해를 보기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한 할머니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연세가 여든 내외가 되어 보이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성호를 그으시면서 말씀도 못하시고 계속 우시더랍니다. 그도 그럴 것이 60년 만에 보는 고해성사였던 것입니다.
그 할머니는 유아세례를 받고 어린시절동안 신앙생활을 했지만 공산정권이 들어오고는 종교생활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종교 생활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철저히 숨겨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딸과 함께 탈북을 하였는데 그 숨 막히는 긴장을 뚫고 국경을 넘었을 때 할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성호를 그으셨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하는 것이 무슨 행동인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60년이 넘게 힘든 일이 있으면 남이 못 보도록 이불을 뒤집어쓰고 성호를 긋고 주님의 기도를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떳떳하게 성호를 그을 수 있고 고해성사를 할 수 있지만 만감이 교차하며 눈물만 하염없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 분이 60년 만에 성체를 영했을 때의 그 심정은 누구도 감히 헤아릴 수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나 쉽게 성사생활을 할 수 있어서 그 고마움을 잘 모르고 냉담까지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 할머니는 60년간 박해를 당해오셨습니다. 박해란 무엇입니까? 나의 신앙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 처하면서 바로 시작되는 것이 박해입니다.
이런 외적인 박해도 있지만, 더 가슴 아픈 고통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할머니는 가족에게까지 성호 긋는 것을 숨기셔야 했습니다. 딸도 이해할 수 없었던 바로 그 혼자서만 외로이 60년을 지켜 오셨어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주위에 같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같은 신앙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너무나도 커다란 은총입니다. 또한 원하기만 하면 고해성사를 보고 성체성사를 영할 수 있습니다. 그 할머니에게 우리의 신앙생활은 과연 어떻게 보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여 고독한 가시밭길을 걸어야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희 사제들의 주보성인이신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도 그 할머니처럼 저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동지사 오가던 길 삼천리 트였건만, 복음의 사도 앞에 닫혀진 조국의 문, 겨레의 잠 깨우려 애타신 그의 넋이, 이역의 별빛아래 외로이 슬펐어라.”
‘외로이 슬펐던 삶’,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 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운명입니다. 어쩌면 우리 사제들이나 우리 신자들이 신앙을 통해서 너무 편한 삶만을 바랐던 것은 아닐까요?
김대건 신부님은 또한 아버지 김재준과 어머니 고 우르술라의 장남입니다. 장남이면서 집안은 돌보지 않고 마카오에서 사제가 되는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부모에게 마땅히 해야 하는 효도를 하지 않는 사회의 질타를 받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의 조국은 더 이상 그를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불어, 중국어, 라틴어 등을 구사하고 ‘조선전도’를 그릴 정도로 지리에도 정통한 젊은 인재가 죽기만을 바라는 것이 어리석게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전걸식하는 어머니를 버려두고 그렇게도 순교를 당하려고 고집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물론 김대건 신부님도 어머니가 걱정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순교 20일전에 주교님께 이런 서한을 보냅니다.
“저는 감히 주교님께 저의 어머니 울술라를 부탁드리옵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못 본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 만나 보았을 뿐 또 다시 홀연 잃고 말았으니, 주교님께 간절히 바라건대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십시오.”
관헌으로 압송된 신부님은 극도의 고문을 당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옷이 벗겨지는 치욕과 수 천대의 매를 맞았고 조롱을 당했으며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그 형벌을 주는 관장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제게 이런 형벌을 주신 관장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관장께서 제게 내리시는 이 형벌을 통해서 저는 더욱 하느님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관장 나리를 더 높은 관직에 올려 주시기를 빕니다.”
그랬더니 관장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큰 소리로 비웃었습니다. 그리고는 여덟 자나 되는 긴 칼을 가지고 와 위협하였습니다. 그 때 김대건 신부님은 그 칼을 잡아 자신의 목에 대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크게 웃으며 재밌어 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신앙의 모범들은 이 세상에서의 편안함을 찾았던 분들이 아니라,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대로 모든 고통을 견디어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세상에서의 편안함을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몰이해와 멸시, 외로움과 고통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영광을 누릴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감옥에 들어온 무기수가 있었습니다. 어둡고 좁은 공간에 던져진 그는 교도소장에게 부탁을 합니다.
“소장님! 교도소 마당 한 귀퉁이에 정원을 가꾸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는 허락을 받고 나서 첫 해에는 손이 많이 가지 않아도 잘 자라는 고추와 양파 같은 것을 심었습니다. 다음 해에는 여러 종의 장미도 심어보고 작은 묘목의 씨앗도 뿌렸습니다.
그렇게 한해, 두해, 그는 정성스레 정원을 가꾸며 보람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교도소 마당의 작은 땅에 무언가를 심고 가꾸던 그는 27년이 지난 후,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가 출옥할 때 사람들은 그가 아주 허약한 상태로 나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70세가 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주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취재를 하러 나온 기자가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5년만 감옥살이를 해도 건강을 잃어서 나오는데 어떻게 27년간 감옥살이를 하고도 이렇게 건강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만델라가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나는 감옥에서 하느님께 늘 감사했습니다.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땅을 보고 감사하고, 물을 마시며 감사하고, 노동을 할 때도 감사하고, 늘 감사했기 때문에 건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흑인의 인권을 위해 노력한 것이 인정되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남아프리카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그가 바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입니다.
넬슨 만델라나 김대건 신부님이나 모든 성인들은 이 세상에서의 고난을 예상한 분들이었고 그 고난이 참 기쁨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그런 고난을 이겨내고 영광을 차지할 줄 알았습니다.
성당에서 적지 않은 분들이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기간이나 혹은 세례를 받고 나서 거의 바로 냉담을 하게 됩니다. 집에 조그마한 안 좋은 일이 있더라도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다고 느끼고 성당에 안 다니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닥치고 주위의 몰이해와 비웃음이 돌아온다면 그 때부터 작은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십시오. 이제 참으로 믿음을 증가시킬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끝까지 잘 견디면 그 시련 없이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영광과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십시오. 그들이 없다면 우리 믿음을 증가시킬 기회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루카 6,23) -전삼용 신부님(요셉)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김대건 신부님에 관한 글 서두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836년 열여섯 살 때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최양업 토마스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이듬해 마카오에 도착해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라는 내용인데요.
그 가운데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라는 글을 읽으면서 조규만 주교님이 신학교에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지.. 평화방송에서 얘기하신 게 떠올랐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시골 공소에 외국 신부님이 오셔서, 아이들 교리를 가르치고, 어느 날 찰고를 하신 거 같은데요. 외국 신부님이 다른 아이들에게는 이런저런 질문을 했던 거 같은데, 주교님에게는 한 마디만 하셨다고 합니다.
“너 신학교 가~” 신부님이 뭐라고 했을까요? “네~” 라고 대답하고 나와서 놀았다고 하는데요.
그 분위기가 지금과는 다른 거 같아서 놀랍기도 하고 특별하기도 했던 거 같습니다. 신부님이 신학교 가라는 한 마디에 ‘네..’ 할 수 있는 분위기. 지금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인 거 같기도 합니다.
어제 몬시뇰님이 오셔서 복사 안드레아에게 “너 신부될 마음있어?” 하고 물어보니, 놀랍게도 “네~” 라고 대답합니다.
제가 물어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그런 마음이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신학교에 관심도 없는 루치오에게 ‘너 신학교 가~’ 하면 어떨까요? 아마 황당한 표정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의 분위기는 ‘순종’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기 보다는 이런저런 이유를 늘어놓으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는 분위기가 더 많이 느껴지는 거 같은데요.
우리가 배우기를 피하는 그 순종이라는 단어를 거치지 않고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도, 또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도 나갈 수 없는 거 같습니다.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이 ‘순종’ 일 거 같습니다. 왜냐하면 순종으로 나아가야 그분이 나에게 얼마나 큰 선물을 마련해 두셨는지, 또 바른 길로 이끄시는지 알고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독서에서 만나게 되는 아브라함을 보면 어떻습니까? 그가 체험한 하느님은 야훼이레 하느님이었습니다. 살 곳을 마련해 주시고, 먹여 주시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게 도와주시고, 손수 번제물을 마련해 주신 하느님을 체험하는데, 그 모든 체험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떠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아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지 않았다면 아무런 일도 체험하지 못했을 겁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죠. 구세주를 낳으리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그분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랐고, 하느님이 인간을 얼마나 생각하고 돌보시고 사랑하는지 느끼고 깨달았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인 거 같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가진 것을 나눌 때도 있었고, 빌려줄 때도 있었고, 화해를 시도한 일도 있었고, 냉담자들에 대한 열정을 품게 될 때도 있었고, 누군가를 찾아가 볼 때도 있었습니다.
또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인사를 시작한 일도 있었고, 자존심을 꺾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로부터 돌아서고 싶을 때도..
"성령께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 하는 말씀들이 저의 등을 떠 밀어 다시 공동체에 대한 성실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데요.
지금은 그분의 말씀에 등 떠밀려 겨우겨우 살아가는 정도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이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거구나..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두셨구나.. 나에게 더 많은 풍요로움을 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런 과정과 열매들이 그분의 사랑을 조금씩 알게 해 주고, 그분을 위해 살고 싶은 열정도 크게 만들어 주는 거 같습니다.
이거저거 따지고 계산하기보다 먼저 순종하는 법을 배웁시다. 그러면 그분의 사랑도 알게 되고,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면 가까운 이웃도 사랑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부부의 세례명이 안토니아, 안토니오 인데, 끝자만 다른 게 어떤 분에게 신기했나보다.
세례명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며 이러신다. “아~ 안토니..아! 안토니..오! 아! 오! 아! 오!” -김기현 신부님(요한)
[금주의 성인] 7월 9일: 성녀 파울리나(St. Pau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