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가 필요했지
이영주
전북 진안 출생, 1997년 <지구문학>, 1999년 <시와산문> 등단, 한국녹색수필상 수상, 수필집 <시간을 품다>
옆 좌석에 앉은 손녀가 팔뚝이며 손등과, 양쪽 볼을 번갈아 꼬집어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깔깔댄다. 화들짝 놀라 “왜 그래, 왜?” 물었다.
“비행기타고 여행가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꿈인지 생시인지 알아보는 중이에요.”
“자, 여기 할머니 손등을 꼬집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거야”
“할머니 손은 아까워서 못 꼬집겠어요.”
안전벨트까지 다 맸는데 비행기가 왜 이렇게 안 뜨냐며 안달이 났다. 아이는 아홉 살. 뒷좌석에 자리한 일곱 살짜리 손자는 의젓하게 앉아 창밖을 보고 있다.
아이들의 할아버지 고희 기념으로 3대가 함께 해외여행을 가는 비행기에 탑승한 후의 일이다. 온 몸이 상기되어 열기가 오른 손녀를 가슴에 꼭 껴안자 31년 세월이 나를 품어 준다.
아! 그래, 그 때 그 아이들은 잔뜩 주눅이 들어 좋아 하기는 커녕 긴장해서 몸이 굳어 있었는데... 그러니까 1988년, 올림픽으로 전 국토가 들썩이던 그 때, 남편이 교환교수로 캐나다 매니토바주 위니팩이란 도시로 훌쩍 떠났다. 남은 네 식구의 기본서류만 준비해서 외무부에 제출하고선, 나보고 수속 밟아서 아이들 데리고 뒤따라오라 한다. 내가 못한다 해도 “당신은 할 수 있어.” 강력한 억양으로 한 마디 툭 던진 게 전부였다.
그 당시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우리는 온가족이 함께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이의 출국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야 남편 학교에서 봉급을 주기로 결정이 났다.
남편이 출국한 두 달 후, 나는 11살, 8살, 5살짜리 세 아이를 데리고 생전 처음 타는 비행기에 올랐다. 남편은 직장에서 제주도라도 가며 비행기를 타 본 경험이 있었지만 나는 비행기를 사진이나 T.V.에서만 보았을 뿐이었다.
노스웨스트라는 듣도 보도 못한 외국비행기에 승무원은 모두 외국인. 한국인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대한항공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항공권을 부탁했더니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느라 노스웨스트라는 항공사를 선택했다. 캐나다까지 직항이 없던 시절이라 미국을 경유해서 가야 했다. 시애틀을 경유, 미니애폴리스에서 두 번째 환승, 캐나다 위니팩으로 넘어가야하는 여정이었다. 한국인 승무원은, 혼자서 이 아이들을 데리고 캐나다까지 가느냐며 걱정스러우면서도 측은한 눈빛으로 물었다. 나를 바라보던 표정이 지금도 또렷하다.
나는 아이들 셋을 영문과 한글로 이름표를 만들어 앞섶에 채우고 이민가방 3개에 손에 드는 큰 가방. 그 땐 캐리어와 배낭도 귀했다. 남부시장에 가서 이민가방을 샀을 뿐. 한 손에 손가방을 들고 다른 손에 막내딸 손잡고, 둘째는 엄마 가방 한쪽 끈을 꽉 잡으라하고, 큰아이는 둘째 손 꼭 쥐고 잘 따라오라 했다. 생활영어책 한 권, 포켓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손가방 가까이에 넣었다. 학교에서 열심히 배운 영어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영어를 못하는 내가 믿을 거라곤 이 책들과 바디랭귀지가 전부였다. 비행기 환승하는 공항에서는 화장실에 갈 때도 넷이서 함께 갔다. 엄마 손 놓치면 영영 못 찾는 국제고아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남편은 일주일 넘게 걸리는 국제우편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아이들 이름표를 반드시 달을 것. 특히 비행기 탈 때 게이트 잘 확인하고 탈 것. 기내에서 음식 시키는 방법 등, 비행기 탑승권을 그려서 자세히 설명했다.
그랬는데, 나는 마지막 환승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공중전화로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동전을 있는 대로 모두 공중전화기에 넣었건만, 전화는 되지 않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안내음성이 나왔다. 순간, “모어모어”라는 말이 귀에 들어 왔다. 아하, 동전을 더 넣으라는 말이구나 싶었다. 스넥코너 흑인종업원은 나의 바디랭귀지를 얼른 알아듣고 동전을 바꾸어 주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남편의 목소리가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를 도와주는 한국인 교수님께 전화해서 소식을 알렸다.
도착해서 우리 가족을 염려해주던 분들을 뵙게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애기엄마가 이렇게도 용감하고 똑똑 한가 했나 보다. 헌데 그저 순박한 주부에 당차보이지도, 똑똑해보이지도 않은 사람이 나타나니 의외라는 눈치가 역력했다.
난 25살에 결혼해서 세 살 터울인 아이들 셋을 키우고, 남편은 공부하며, 치열하게 각자의 삶을 살아내느라 숨 돌릴 겨를이 없었다. 서로 무언가를 공유하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남편이 겨우 학위 받고 외국을 가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젊음이라는 무기 하나만 들고 정글 속으로 뛰어드는 형국이었다.
남편이 가는 것보다 더 이슈가 된 건 내가 가는 일이었다. 진취적인 친정아버지는 남편이 외국에 가게 되었다 말씀 드리자마자 “너도 가야지.” 하시며 비행기 표 끊으라며 돈을 주셨다. 반면 시댁에선 노심초사. 내가 잘못된 일을 꾸미는 것처럼 보이나 싶을 정도였다. 항상 다소곳하고 순종적이던 사람인데 저렇게 당찬 면이 있는 줄 몰랐다며 놀란 듯 했다. 집안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고작 1년인데 뭘 가느냐는 의견과 그래도 가족은 함께 있어야하니 가야한다는 의견이 대립하며 결국은 다툼까지 일게 되고 말았다. 온 가족이 도와주고 격려해줘도 힘든 상황인데, 나의 서러움은 눈물이 되어 펑펑 쏟아졌다. 먼저 출국한 남편에 대한 원망과, 반대파로 인해 내 마음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든 가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내가 여기서 주저앉으면 패배자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은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도 남의 일에 왜 그다지 관심을 보이며 왈가왈부하는지 모르겠다. 때로는 무관심한 척 하는 게 도와주는 일이 되는데. 나는 ‘바늘 가는 데 실 가야지요.’ 일축하면서도 속이 상하고 마치 무슨 잘못이나 저지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집은 세놓고 살림살이를 넣어 둘 방 하나만 남겨두었다. 줄자로 재어보고 도면을 그려가며 연구를 했다. 농속까지 빈틈없이 꽉꽉 채워 넣으며 차곡차곡 쟁였다. 마지막으로 세탁기를 방에 넣고 한 발을 딛고 한 발은 쳐든 채, 가까스로 허리를 구부려 배수호스를 돌려 빼내니 아슬아슬하게 방문이 닫혔다. 그렇게 살림 정리를 해놓고 집을 나섰던 게다.
캐나다에서의 1년. 그 시간이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하게하고 변화시켰는지. 경우에 따라서는 1년이 10년 보다 더 긴 시간을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가끔씩 생각한다. 살아오면서 생의 전환점이 여러 번 있었다. 이 일도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큰 전환점 중 한 가지에 속한다. 용기를 내고, 도전, 실천하기 까지 어려움도 많았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 세 가지 중 하나로 꼽는다. 어려운 일이 닥쳐 의기소침해지거나 망설여지는 일이 있으면 그 일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힘차게 한 발 내딛으며 앞으로 전진 한다.
그 때 엄마의 손을 잡고 비행기를 오르내렸던 5살 막내딸이,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캐나다에 가던 나이가 되었다.
살아오는 동안 희로애락이 번갈아가며 수시로 밀려와 파도타기를 하듯 살아왔다. 무심한 세월이 한없이 고맙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다. 그러나 세월의 힘은 얼마나 위대한가. 고맙게도 시간은 나의 편이 되어주었다.
나도 손녀처럼 내 손등을 힘주어 꼬집어본다. 그리고 세월에게 고백한다.
그동안 수많은 힘든 일들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옛날, 넷이서 잔뜩 움츠러들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었지. 헌데 오늘, 할아버지 칠순잔치라는 피켓을 들고 온가족이 신이 나서 해외여행을 할 수 있게 해줘서 깊이 머리 숙인다고. 귀여운 손녀, 손자를 품에 안고 맘껏 웃을 수 있게 해준 당신은 진정, 위대한 존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