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世孫)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大臣)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號)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라 한다. 복제(服制)의 개월 수가 비록 있으나 성복(成服)은 제하고 오모(烏帽)·참포(黲袍)로 하며 백관은 천담복(淺淡服)으로 한 달에 마치라. 세손은 비록 3년을 마쳐야 하나 진현(進見)할 때와 장례 후에는 담복(淡服)으로 하라
하였다. 승지 정광한(鄭光漢)이 국문하기를 청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하매, 임금이
윤숙을
해남(海南)으로,
임덕제(林德躋)를
강진(康津)으로 찬배(竄配)하라고 명하였다.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7일(기묘)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죄인
엄홍복(嚴弘福)을 친국하였다. 이때에
엄홍복이
조재호(趙載浩)의 불령(不逞)한 말을 듣고서
이미(李瀰)에게 전하였고,
이미는
홍봉한에게 전하였으며,
홍봉한은 임금에게 아뢰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판부사
조재호와 응교
이미를 모두 삭직(削職)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그 일은 엄홍복이 허황되게 한 난언(亂言)에 불과하다. 조 판부사가 이 사람을 만나본 것은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라.’는 뜻이 아니며, 이미가 이 말을 들은 것 역시 ‘예가 아니면 듣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비록 향리에 있다지만 그 이름을 생각하면 재상인데 은근한 편지를 보냈으니, 이미 재상의 체면을 잃은 것이다. 후에 엄홍복의 초사(招辭) 가운데 ‘좌우(左右) 삼현(三絃)’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이 말을 듣고서 내 얼굴이 부끄러웠다. 이미는 그 아비의 아들로서 어찌 이처럼 교악(巧惡)한 무리와 친했는가? 귀로는 비록 들었더라도 입으로 어찌 말할 수 있는가? 비록 나라를 위한 고심(苦心)에서라고는 하지만, 만약 엄홍복과 친하지 않았다면 그런 말이 어찌 귀에 들어왔겠는가? 처음 정사의 여신(勵新)하는 도리에 있어 끝내 모른 체하기 어려우니, 모두 파직하라.”
하였다.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8일(경진)
죄인 엄홍복을 수구문(水口門) 밖에서 참하였다.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8일(경진)
사간 박기채(朴起采), 장령 조태상(趙台祥), 지평 심욱지(沈勗之)·정언섬(鄭彦暹), 헌납 박필수(朴弼燧), 정언 강지환(姜趾煥)이 합계하기를,
“
조재호는 이미 한 죄인
엄홍복의 초사에서 나왔고, 또 상신(相臣)의 몸으로서 요얼(妖孼)과 친근해 은근한 편지를 보내기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엄히 국문하는 도리에 있어 결코 삭직하는 데 그쳐서는 안되니, 청컨대
조재호를 먼 변방에 안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첫머리의 말은 그에게 스스로 해당되니, 누가 지나치다고 하겠는가? 끝의 감률(勘律)은 바로 내가 하교한 것이요, 복정(復政)한 때에 대체(臺體)를 얻었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강지환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
엄홍복의 초사가 나온 후에 쟁집(爭執)하지 않은 양사의 대사간
심관(沈鑧), 장령
정운유(鄭運維)는 모두 파직하고, 오늘 합계에 이의를 제기한 정언
임희효는 청컨대 삭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끝의 두 가지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26일(무자)
헌납 황간(黃榦), 정언 임관주(任觀周)가 아뢰기를,
“죄인 수인(守仁)·이재(二才)와 요무(妖巫) 연이(連伊) 등을 청컨대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령 이택징(李澤徵), 지평 박상로(朴相老)가 수인(守仁) 등의 일로써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위패(違牌)하고 외방에 있다고 일컬으면서 대론(大論)에 이의를 제기한 대사헌 김기대(金器大), 집의 이정오(李正吾), 사간 여선응(呂善應), 장령 이운해(李運海), 정언 이시정(李蓍廷), 수찬 김노진(金魯鎭)에게 모두 삭출(削黜)하는 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따랐다.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6월 1일(임진)
임금이, 전 참판 한광조(韓光肇)를 대정현(大靜縣)으로 정배하라고 명하였는데, 반교(頒敎)에 불참한 것으로써 대계(臺啓)를 인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6월 17일(무신)
사간
홍술해(洪述海)가 상소하여
조재호의 죄를 논핵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심각(沈殼)이 대론(大論)을 교묘히 피한 것은 이지회(李之晦) 등과 같은데 간신(諫臣)이 유독 거론하지 않았으니, 심각에게 멀리 찬배하는 율을 시행하고, 간신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6월 19일(경술)
대사헌 남태회(南泰會)가 아뢰기를,
“청컨대 전 지평 정문주(鄭文柱)를 영원히 대망(臺望)에서 발거(拔去)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감(末減)하여 삭직하였다. 또 성문(城門)을 잘못 닫은 선전관을 삭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말 때문에 죄를 받은 대신(臺臣)을 석방하고, 서지수(徐志修)를 서용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단지 서지수만 서용하라고 하였다. 대사간 이기경(李基敬)이 아뢰기를,
“서유량(徐有良)이 연중(筵中)에서 조재호(趙載浩)를 기려서 일이 매우 놀라우니, 청컨대 삭직하소서. 윤광소(尹光紹)는 사나운 사람으로서 스스로 폐고(廢錮)의 죄를 범하였고 성문을 출입하여 발자취가 음비(陰秘)하니, 청컨대 절도(絶島)에 정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따랐다.
또 아뢰기를,
“엄홍복(嚴弘福)이 경폐(徑斃)되었는데 유채(柳綵)와 남씨(南氏) 성을 가진 사람 역시 조재호와 친밀하여 엄홍복이 들어가면 두 사람이 모두 일어나 피했다고 합니다. 이는 반드시 엄홍복과 조재호 사이에 은밀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청컨대 남·유 두 사람을 국청(鞫廳)에 잡아들여 엄히 물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조숙(趙)은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남의 부탁을 받고 연로에서 폐단을 일으켰으니, 청컨대 삭직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이영휘(李永暉)의 위리(圍籬)를 철폐하라는 일을 다시 중지하소서.”
하니, 모두 따랐다.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6월 21일(임자)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경상 감사
김상철(金尙喆)이 입시하고, 삼사가 뒤따라 입시할 때에 헌납
이흥종(李興宗)이 아뢰기를,
“평양 서윤(平壤庶尹) 정극순(鄭克淳)은 조태구(趙泰耉)의 사위로서 전임지인 회덕에 있을 때에 그 장인의 묘소에 가서 절하기를 마치 소분(掃墳)하는 의식처럼 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니, 세변(世變)에 관계됩니다. 또 오랫동안 기름진 고을에 재임하면서 오로지 불법(不法)만을 일삼았으니, 이런 사람은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평양 서윤 정극순을 멀리 찬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찬배에 그쳐서는 안되니, 잡아다 신문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6월 22일(계축)
임금이 태복시에 나아가 죄인 유채(柳綵)·남경용(南景容)을 친국하니, 차례로 취복(就服)하였는데, 서판장(書判狀)에 ‘요언(妖言)으로 대중을 미혹시켜 함께 부도죄(不道罪)를 범하였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여러 차례 유채와 남경용 등을 신문하니, 남경용이 말하기를,
“
조재호가 항상 말하기를, ‘한쪽 사람들이 모두 소조(小朝)에 불충하였으나 나는 동궁을 보호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
조재호가 항상 말하기를, ‘동궁을 보호한다.’고 하기에 제 마음도 그러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남인(南人)이 7, 80년 굶주렸으니, 하늘의 이치로 보아 반드시 남인이 득지(得志)할 것이요, 노론(老論)은 반드시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라고 하고, 또 ‘세도(世道)를 조제(調劑)하고자 하나 할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을 개탄하며 이곳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6월 22일
천극(栫棘)한 죄인
조재호(趙載浩)를 사사(賜死)하였다. 임금이 승지
정광한(鄭光漢)에게 전지를 쓰게 하기를,
“한번
엄홍복(嚴弘福)의 일이 드러난 후로부터,
조재호의 죄상이 이미 탄로났었는데 이번 두 죄수의 공초와는 다름이 있었다. 그의 천극은 의리를 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또 장물(贓物)도 없어 합사의 청을 윤허하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더욱 남김없이 탄로가 되었다. 아!
조재호는 누구의 아들인가? 임금을 잊고 아비를 배반하여 이런 기슬(蟣虱) 같은 무리들과 나랏일을 들추어 냈으니 이미 무상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몰래 의 여당(餘黨)과 합쳐 감히 지난해에 했던 일을 서술했으니, 더욱 음참하다.
아! 과 의 일을 양성(釀成)한 그 근본은 그에게 있는데 그가 감히 무슨 마음으로 그 아비의 공훈(功勳)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이런 무리들과 더불어 체결하여 이런 음험한 모의를 하였는가? 비록 기사년의 여당은 아니지만 지위가 삼사(三事)의 반열에 있는 자가 이처럼 방자하니, 할 말이 없다. 더군다나 그 말의 불측함이 이처럼 극에 이르렀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한다면 무슨 일을 못하겠는가? 또 ‘장차 기회를 탈 것이다.’라는 등의 말을 어찌 오늘날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일각이라도 천지 사이에서 먹고 숨쉬며 살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승선(承宣)을 불러서 하교하고자 한 것이다. 반나절 동안 소차(小次)에 머뭇거리다가 불러 쓰게 한 것은 음참한
조재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비의 뜻을 생각해서이다. 을해년 역적
심악(沈)의 일이 있은 후,
조재호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제는 핵심(核心)을 제거했다.’라고 하였었다.
심악은 관직이 한 수령에 불과했는데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더군다나
조재호이겠는가? 하늘의 도(道)가 밝다 하겠고, 하늘의 그물이 넓음을 볼 수 있다. 부동(符同)하였던 하찮은 무리들은 모두 법을 바루었으니
조재호에게도 해당하는 율을 시행함이 마땅하다. 재위(在位)한 지 30여 년에 처음 이런 일을 판결하게 되었는데, 한갓 옛사람이 ‘반수(盤水)에 칼을 가한다.’라고 한 것만이 아니라 국조(國朝)에서도 많이 있는 일이 아니다.
심기원(沈器遠)·
김자점(金自點)과 차이가 없지 않으니, 국조에서 상행(常行)하는 법을 따름이 마땅하다. 해조로 하여금 도사(都事)를 보내 배도(倍道)하여 그 곳에서 즉시 특별히 사사(賜死)하라.”
하였다.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6월 24일(을묘)
지평 임해(任瑎)가 아뢰기를,
“부처(付處)한 죄인
한광조(韓光肇)는
조재호의 가까운 인척으로서 복정(復政)의 진하 때 멋대로 집에 있으면서 병을 핑계하고 참석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하소서.”
“
조재호의 부범(負犯)이 남김없이 탄로나서 온 조정의 신하들이 다 토벌하기를 청하였으나
장지항(張志恒)만은 명백하게 앙대(仰對)하지 않았으니, 놀라운 정적(情跡)이 뚜렷하였습니다. 청컨대 삭출한 죄인
장지항을 먼 곳으로 정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6월 25일(병진)
임금이 태복시에 나아가 죄인 목중도(睦重道)·목조술(睦祖述)·황면(黃冕)·박수유(朴垂裕)를 친국하니, 차례로 취복(就服)하였다. 목중도·박수유는 대역 부도로 판결문(判決文)을 쓰고, 목조술은 요언(妖言)으로 대중을 미혹시켜 부도죄를 함께 범한 것으로 지만(遲晩)하였으며, 황면 만은 불복하였다. 박수유에게 묻기를,
“너는 박징빈(朴徵賓)의 아들로서 김일경(金一鏡)의 당처럼 대역(大逆)으로 지만하고자 하는가?”
하니, 박수유가 공초하기를,
“마땅히 하겠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너와 마음을 같이 한 자는 누구인가?”
하니,
박수유가
심발(沈墢)과
심관(沈鑧)을 끌어들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남을 무함하면 마땅히 네 삼족(三族)을 멸하겠다.”
하니, 박수유가 공초하기를,
“벼슬을 하고자 하였으나 두 사람이 막았기 때문에 과연 무함했습니다.”
하였다. 대사헌 정광충(鄭光忠)이 아뢰기를,
“청컨대
조재호의 전 심복(心服)인 전 현감(縣監)
안이(安履)와 전 만호(萬戶)
강위열(姜渭說)을 모두 절도에 정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안윤행(安允行)이 아뢰기를,
“청컨대 이만회를 아주 먼 변방으로 찬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조 100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7월 1일(신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지금은 옥사가 일어난 뒤이니 마땅히 진정시키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고,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함께 참여한 형적이 훤한 자는 진실로 죄주는 것이 마땅하지만, 단지 서로 친하게 지낸 사람이라면 묻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어찌 구별하는 방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옛날에 나 의 관계도 있었는데, 더구나 친구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일찍이 전에 서로 친했다면 사세가 당연한 것이고 혹 연인가(連姻家)인 경우에 어찌 누(累)가 될 수 있겠는가? 이번
조재호(趙載浩)의 불측한 말은 미친 사람이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말하여 전혀 거리낌없이 한 것이니,
조재호와 더불어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자가 아닌데 한때의 소문으로써
조재호의 일당으로 몰아붙인다면, 누가 마음대로 손발을 놀리겠는가?”
하였다.
영조 100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7월 2일(임술)
【정언 유선양(柳善養)이다.】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
조갑빈(趙甲彬)은
조태억(趙泰億)의 아들로서 그 아비의 직첩을 환수한 뒤에 진실로 마땅히 자취를 숨기고 머리를 수그리고 있어야 하는데도 조금도 거리끼거나 두려워함이 없으며,
윤광소(尹光紹)와 더불어 왕래하며 친밀하게 지낸다는 설이 떠들썩하여 은연중에 폐고된 족속(族屬)들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조재호의 흉계는 오로지 빨리 폐고된 족속들을 수습하려는 것이었는데,
엄홍복(嚴弘福)과 결탁했던
윤광소는 이미 멀리 찬배되는 율을 받았으니,
윤광소와 친밀했던
조갑빈을 어찌 연곡(輦轂) 가까이에 두어 바야흐로 끝없는 근심을 불러들이십니까? 청컨대
조갑빈을 변방에 멀리 찬배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그 당습(黨習)을 의심하고 하교하여 엄히 책(責)하였다.
첫댓글 임오화변이 단순히 부자간의 일이라고 요즘 학계에서는 대세적으로 그렇게 기존의 인식대로 주장하지만 그러나 영조실록의 임오화변 직후의 기록들을 보면 사도세자의 측근 지지세력과 소론에 숙청작업이 연이어 벌어질 정도로 임오화변이 단순히 부자간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지요 특히 조재호는 자신은 동궁을 보호하고 노론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는 자신의 발언이 영조와 노론의 국문으로 발각되어 사형당할 정도로 임오화변의 본질이 명확히 드러내주고 있지요
임오화변 본질은 그냥 부자지간 갈등입니다. 소론 숙청? 조재호 숙청이지요.....조재호가 그냥 영조의 기분을 건드린 것 일 뿐...
소론이 사도세자를 지지했다는 증거 또한 없습니다. 조재호 죽음은 소론에 대한 경고 정도로 보면 됩니다. 임오화변은 처음부터 영조가 계획한 부자 갈등입니다.
임오화변의 본질이 부자지간 갈등만이 아니라는 것은 영조실록의 유채 남경용의 자백기록이 이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또한 조재호 뿐만 아니라 나주괘서사건의 연루자로 곤욕을 치루었던 소론 인사 윤광소와 영조의 정적이었던 김일경의 심복 박징빈의 아들 박수유 경종대 소론 정권의 실세 조태구의 사위인 정극순 등 여러 소론 인사들이 영조와 노론에 의해 숙청당할 정도로 범 당파적 숙청임을 드러냈지요 경고가 아니라 숙청이었던 것이지요
조재호의 처형을 이끌어 냈던 유채와 남경용의 자백에서는 조재호가 세자를 보호한다고 자신들에게 얘기한 것을 영조에게 자백하였고 또한 남인은 반드시 득세할 것이라 노론은 반드시 다 죽을 것이라는 집권층인 노론과 영조를 자극하는 조재호의 말을 자백하여 결국 이들의 자백으로 조재호는 처형되었던 것이죠 단순히 사적인 집안갈등이 아니라 노소론의 당쟁과 여러 세력의 정쟁이 임오화변의 배경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주는 것이죠
소론이 사도세자의 지지세력이라는 것은 사도세자가 나주괘서사건때 소론 인사들을 두둔하려 했던 사실과 이종성 박문수등 소론 영수들이 사도세자의 스승들이었다는 점 사도세자는 이들 스승들을 우대하고 조재호의 조카 조유진을 자신의 측근으로 삼은 정황을 고려하면 사도세자와 소론은 유착관계에 있는건 사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