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월암(5.24) 홍성에 간 김에 간월도에 가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예전에도 간월도에 한번 간 적이 있었는데 갯벌에서 굴을 따던지 무엇인가 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기억이 나고 간월암 들어가는 입구에도 어리굴젓같은 장사를 하던 분들이 있던 기억이 난다. 예전에도 이런 탑이 있었는 지 기억이 안나지만 갯벌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탑이 있었다. 그 탑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니 우리가 가고자 하는 음식점이 있었다. 그곳에서 자연산 광어도 맛보고 찰밥이라고 불리우는 갑오징어 회를 먹었다. 갑오징어 회를 처음 먹어 보았는데 육질이 아주 씹어 먹기 좋았다. 그 곳 사람들의 말로는 갑오징어 회는 인기가 좋아 이곳에서 다 소비가 되므로 서울까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수적으로 골뱅이, 조개, 낙지 삶은 것을 주었는데 배가 불러서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점심을 먹고 간월암 구경을 갔는데 가다보니 생선을 채에 말리고 있었는데 이름을 물어보니 바다장어라는 것이다. 점심 먹기전에는 갯벌에 사람이 없었는데 그 새 갯벌에 들어가서 무엇인가 캐려고 하는 것같았다. 사실은 사람들이 갯벌에 들어가서 저렇게 마구 밟아대면 거기 있는 생물들이 피해를 본다. 간월도 가기전에 유채꽃이 피어있고 송림에 둘러쌓인 주차장이 있었다. 예전에도 간월암 중창불사 안내도가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아직도 있는 것이다. 간월암은 바다에 떠있는 연꽃이라고 하는데 어떤 분은 물에 떠있는 반야용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반야용선이란 사람이 죽으면 극락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되는데 그 배에는 인로왕보살이 안내를 하고 배 머리는 용머리를 하는 배이다. 절에 가보면 특히 지장전이나 명부전에 반야용선의 그림을 그린 것이 많이 있다. 대웅전이나 법당에 용머리가 앞으로 나온 것은 그 법당이 반야용선을 의미하고 그 법당에서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면 극락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나라 암자나 절중 이렇게 반야용선과 같은 모양을 가진 곳은 이 곳 간월암 뿐일 것이다. 창녕 관룡사에 용선대가 있는데 그것도 반야용선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산위에 있는 것이다. 암자앞에는 아주 큰 사철나무가 우산처럼 서있어 사람들에게 햇볕을 가리는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고 그 옆에는 아주 오래된 팽나무가 있었다. 몇백년은 되었다고 하는 것 같았다. 간월암 편액은 만공스님이 쓰셨다고 적혀 있는 것같았고 좌측에 관세움보살, 우측에 지장보살로 보였다. 산신각이 있었고 삼성각도 있었는데 치성광여래와 독성존자 탱화가 모셔져 있었다. 바다쪽의 누각에도 탱화가 있었는데 용위에 서있는 관세움보살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큰 햇볕가리게 양산 밑에 사진을 전시시켜 찍는 분이 있었는데 그 사진에는 물에 떠있는 간월암의 모습이 있었다. 간월암의 유래는 아래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간월암은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의 왕사 무학스님이 창건한 암자이다. 당시의 무학스님이 이곳에서 달을 보고 홀연히 도를 깨치셨다하여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庵)이라 하였고 따라서 섬 이름도 간월도라고 하였다고 한다. 무학스님은 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가 고향이다, 스님이 아직 어머니 엄씨 태중에 있을 때 부친이 보시던 동사가 잘못되어 국채가 생긴지라 빚을 갚을길 없어 피신하였다. 사령이 부인을 대신 호송하여 서산 현감으로 가던 중 갑자기 산기를 느껴 쉴 곳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때는 엄동설한이라 눈이 산천을 덮었는데 오직 한 곳에만 눈이 없어 이곳에서 몸을 풀고 아이를 옷가지로 덮어두고 현감에 이르렀다. 부인이 몹시 괴로워하는 것을 본 원이 이상히여겨 그 연유를 물어 자초지종을 듣고는 인간의 도리로 어찌 그럴 수 있는가하고 부인을 아이가 있는 곳으로 돌려 보냈다. 부인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기 있는 곳에 도착해 보니 큰 학이 날개를 펴서 아기를 보호하고 있는지라 현감에 돌아와서 원에게 사실을 그대로 고하였다. 원은 그 이야기를 듣고 몹시 상서로운 일이라 하여 아기의 이름을 무학(舞鶴)이라고 지어 주었다. 후에 무학스님이 탄생한 곳을 학돌재라고 부르게 되었다. 무학이 20세에 나옹스님과 인연이 되어 출가를 하게 되었다. 이 때가 고려 공민왕 3년(서기 1253년)이다. 스님은 이곳 간월암에 토굴을 지어 열심히 수도하던차 달을 보고 도를 깨우치니 나옹스님이 "너는 더 배울게 없다."하시며 법호를 무학(無學)이라고 지어 주셨다. 고려의 국운이 시들어 갈 무렵 스님께서는 함경도 백연암에서 이성계에게 500일 기도를 올리게 하였다. 이성계가 기도를 마치는 날 석가래 3개를 짊어질 이상한 꿈을 해몽하시고 이미 그가 왕이 될 것을 짐작하셨다.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한 후 무학스님께서는 한양을 도읍지로 잡으시고 창여문 첫자를 창(蒼)字로 하시고 경복궁울 28칸으로 하시니 이미 28대 왕운을 짐작한 것이었다. 당시에 조정에서는 간월도 황도 등을 사제지로 정하여 스님께 드렸으며 그 후 많은 수도인들이 이곳 간월암에서 득력을 하였다. 조선왕조 말엽 이 암자가 완전히 폐해된 것을 1941년 만공선사께서 선승의 안목을 기리시며 복구하실 뜻을 비치시매 마벽초선사께서 그뜻을 받들어 크게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인이 탄생한 곳이 명슨대지가 아닌 곳이 없지만 이곳처럼 자리가 빛나는 곳도 드물 것이다.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섬들이 이곳을 에워싸고 그 속에 한 송이 연화가 피었으니 멀리서 찾는 고향이 바로 여기요,적멸보궁(寂滅寶宮)이 바로 이자리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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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수강산 원문보기 글쓴이: 청초호
첫댓글 많은 추억이 서려있는 간월암~ 한문으로 보면 더 이쁨니다.
고맙습니다. ^^
간월암, 물이 찼을 때 나룻배 타고 건너가 본 그 일몰은 아직도 내 안에 홍시빛으로 남아있는데,,,,
나룻배 타고 건너가면 그 광경 잊을 수 없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