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날/ 도종환
온전히 쓸 수 있는 하루의 시간이 생긴다면
깊은 골짜기를 찾아가리라
밤새 무거워진 안쪽의 공기를 새벽 공기와 바꾼 뒤
초록을 만지고 온 바람을 깊게 받아들이며
해 뜨는 쪽 향해 몸 낮춰 절하고 정좌한 채
고요를 내 안에 가득 채우리라
황폐해진 지난날과 흔들리는 오늘과
불안한 미래를 고요 안에 멈춰 세우리라
그렇게 흩어졌던 마음의 뼈를 가지런히 수습한 뒤
한두시간쯤 달려 깊은 곳을 찾아가리라
한동안 적조했던 숲의 참나무들에게 인사하고
다람쥐 안부를 묻고 나서는 침묵하리라
상사화가 알아들으면서도 말하지 않듯
배롱나무꽃이 빛깔로 말하고는 더 말하지 않듯
나도 묵언으로 하루를 보내리라
골짜기를 흘러 내려가는 물줄기가 대신 말하고
뻐꾸기가 내가 왔다는 걸 숲에 다 말했으므로
나는 떡갈나무가 바람과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리라
하늘을 오래오래 바라보리라
흘러간 것들과 흘러가는 것들을 지켜보리라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리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채 흘러간 세월과
여기까지 걸어온 내 운명을
많이 후회하며 구름과 함께 있으리라
그날은 적게 먹으리라
찐 감자 한개
삶은 옥수수 하나
작은 과일이 있으면 충분하리라
덜 채워진 허기의 공간을 음악으로 채우리라
가지고 간 시집도 다 읽지 않으리라
몇편만 읽고 밀쳐두리라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읽으며
읽은 것들에 얽매여 산 날이 많았으므로
지식에 대한 갈구가 집착이 되지 않도록
내려놓으리라
조용히 지워지는 시간 속에
내가 지워질 수 있도록 놓아두리라
바람이 내게 와 나를 어루만져주리라
바람이 나를 위로하며 들려주는 말을
알아들을 때까지 바람과 함께 있으리라
맨발로 산길을 걸으며
흙이 발에 닿는 감촉의 미세함을 느끼리라
골짜기 물에 손을 담그고 세속의 손을 씻으리라
돌아갈 날을 생각하리라
흙과 물과 햇빛과 바람에게서 받은 기운이
하나하나 몸을 빠져나가는
마지막 날의 내 자세에 대해서도 사유하리라
어두워질 무렵 돌아오리라
그날 보낸 시간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 안 하지만
감사하리라
나와 함께하는 것들에게 감사하리라
돌아오는 길 별 몇개가 나를 지켜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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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에서 가장 제 마음에 든 시입니다.
치유에너지와 성찰이 있는 시,
이것이 도종환 시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닌가 합니다.
첫댓글 저는 좀 지루하네요
저는 너무 좋아서 감탄했는데.......
시는 정말 사람마다 감상과 평가가 너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만인을 두루 만족시키는 시를 쓰기는 쉽지가 않는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