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장
믿음으로 이삭은 다가올 일들에 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고,
이삭이 야곱만 축복한 것으로 알았는데 에서도 축복을 하였습니다.
그의 아비 이삭이 대답하여 그에게 말하기를
"보라, 너의 처소는 땅의 기름진 곳과 위로부터 하늘의 이슬이 내리는 곳이 되리라.
너의 칼로 네가 살 것이며 네 아우를 섬기리라.
네가 다스릴 때에 네가 네 목에서 그의 멍에를 끊어 버릴 것이라."하더라.
O 그의 아비가 축복해 준 그 축복으로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더라.
에서가 속으로 말하기를 '내 아버지를 위해 곡할 날이 가까웠으니,
그때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니,
창세기 27장 39절 40절 41절
성경은 이처럼 모든 것이 완전하게 맞아떨어지는 진리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아마도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하게 되는 에서의 축복은 에서가 그 아우인 야곱을 섬기게 된다는 것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얍삽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야곱이 이삭이 에서에게 주려던 축복을 가로챈 과정은 그의 어머니인 리브카의 지시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에초에 에서가 장자권을 경시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긴 하지만 리브카가 야곱을 그토록 아낀 것은 에서가 얻은 그의 이방여인들을 부인들로 얻음으로 인하여 리브카가 고통을 받음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리브카가 이삭에게 말하기를 "내가 헷의 딸들로 인하여 내 삶에 짜증이 나거늘,
만일 야곱이 이 땅의 딸들과 같은 헷의 딸들을 아내로 얻으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되리오?" 하더라.
창세기 27장 46절
예나 지금이나 고부갈등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리브카가 이삭이 야곱을 대를 잇는 축복을 받게 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 의하여 일어난 일로 보입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두 아들 하나하나에게 축복하였으며, 그의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드렸느니라.
O 이제 내가 이집트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이집트 땅에서 네게 태어난 너의 두 아들 에프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그들은 내것이 될 것이라.
창세기 48장 5절
요셉의 두 아들을 야곱이 양자로 삼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같이 요셉의 아둘 중 장자인 므낫세가 아닌 둘째인 에프라임에게 먼저 축복을 합니다.
그의 아비가 거절하며 말하기를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역시 한 백성이 될 것이며 그도 역시 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그의 아우가 그보다 더 크게 되고 그의 씨가 수많은 민족들을 이룰 것이라." 하고
창세기 48장 19절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이 떠날 것에 관하여 말하였고, 또 자기 유골에 관하여 명하였느니라.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맹세시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뼈들을 옮겨 가야 하리라." 하였더라.
창세기 50장 25절
히브리서는 이처럼 구약에 나타난 믿음으로 이뤄진 약속들에 대해서 나열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언급되는 구약을 찾아서 맞춰보는 것이 즐거운 부분도 있습니다.
요셉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반드시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반드시 찾아 오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400년이 걸렸듯이 우리에게도 정해진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오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태어났을 때에 출중한 아이로 보였기에, 그의 부모가 삼 개월 동안 숨겼으니, 이는 그들이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잠시 동안의 죄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였고
죄의 낙이 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의 삶에서 경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이고 곧 사라지며 더 큰 곤란과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거짓말은 순간은 모면하지만 결국은 더 큰 거짓말을 불러오고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주게 됩니다.
이 세상의 잠시 누리는 죄의 낙은 순간을 모면하는 수단이며, 그것은 더 큰 고통이므로 모세처럼 진리의 길인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겪는 고난이 더 유익하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능욕을 이집트의 보화들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상 주심을 바라보았음이라.
그리스도의 능욕은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고난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백성들이 육신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보화들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뜻에 순종하는 것이 더 가치있음은 모세가 다른 사람들은 못보는 순종에 의한 상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으니 이는 그가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견디었기 때문이라.
믿음으로 그가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지켰으니, 이는 첫태생을 멸하는 이가 그들을 손대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라.
믿음으로 그들은 마른 땅을 가듯이 홍해를 통과하였으나 이집트인들은 그렇게 해 보려고 시도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느니라.
히브리서 11장 20절 ~ 29절
히브리서의 계속된 문장에서 믿음으로 (By faith~) 가 강조된 것은 이집트인들이 믿음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홍해를 건너다 물에 빠져 죽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형식으로 믿는 것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아닌 행위와 형식으로 구원을 받으려 하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던 이집트 군사들처럼 모두 죽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히브리서가 가르쳐주는 믿음의 선배들의 예를 보고 믿음으로 순종에 이르러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요셉의 말이 이뤄져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직접 다시 오신다고 하셨고 곧 그분을 보게 될 날도 멀지 않은듯합니다.
그분이 이야기하신 그분이 오실 때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우리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