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에케르트 - 대한제국 애국가 작곡, 기미가요 편곡
한국 군악대 창설자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ret)
에케르트는 1852년 4월 5일 독일 실레지아주에서 출생하여 브레스라우 음악학교와 드레스덴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육군 군악대 대원이 되었다가 해군 군악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우리나라에 서양식 군악대 조직의 필요성이 논의되기는 1884년 갑신정변 때부터 1894년 갑오경장까지로 볼 수 있다. 1896년 민영환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참석을 겸하여 영국, 독일, 불란서, 오스트리아, 미국 등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는 귀국하여 서양 문명을 본대로 정부에 보고하면서 새로운 제도인 군악대 설치를 적극 주장하여 1900년 12월 군악대 설치에 관한 법령이 공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에서 귀국하려던 에케르트를 초청하여 1901년 2월 7일 내한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한국 최초의 군악대 조직과 창설 작업에 착수했다. 악기들을 구입하는 동시에 악사들에게 제복을 입혀 훈련을 시작했다. 대한제국 국가의 작곡을 제일 먼저 시도하였다. 고종 임금 제50회 탄신 기념일인 1901년 7월 25일(양력 9월 7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를 서양 음악으로 연주하여 큰 찬사를 받았다. 이 연주회에 대하여 코리아 리뷰(1901. 9월호)에는 “고종황제의 제50회 탄신 축하 행사는 적시 적기에 아주 훌륭한 순서로 거행되었다. 이 축하 행사는 한국 발전 역사상 반세기 역사를 앞당긴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그가 작곡한 애국가는 한 번 연주되고 정식 채용되지 않았지만 한국 음악사에 획기적인 일이었다.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 제국의 가사는 지금의 애국가보다 간결하다. "샹뎨여 우리 나라를 도우쇼서 반만년의 역사 배달민족 영영히 번영하야 해돋이 무궁하도록 성디 동방의 문명의 원류가 곤곤히 상뎨여 우리 나라를 도우쇼서." 군악대는 27명의 한국인으로 4개월 연습을 하였다. 그러나 악기를 다루는 솜씨나 음악 효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에케르트의 공로가 컸으며 연주자들의 끈질긴 노력과 지휘자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그의 제자로 백우용 강흥준 김창희 등이 그의 뒤를 따라 군악대의 지휘봉을 들었다. 늠름한 제복차림, 번쩍거리는 악기들, 정확한 박자, 흐르는 듯한 리듬과 하모니. 이런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상상 밖의 효과를 가져왔다. 이때 한글로 새긴 은(銀) 기념 메달도 하사되었다고 한다. 이 군악대는 1907년 우리 군대가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될 때 함께 해산되었다. 에케르트는 이때 일자리를 빼앗겼으나 본국으로 가지 않고 한국에서 후진 양성에 진력했다. 그리고 1916년 8월 6일 자택에서 별세하여 8월 8일 3일장으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카톨릭 신자로 명동 천주교 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일본 정부는 대표를 파견하여 조의를 표하였다. 일본국가 기미가요(君代)의 작곡자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국 정부는 태극장 3등을 수여하였다. 그의 부인은 그가 별세한 지 5년 후 1920년 독일로 돌아가서 1934년 별세하였으며 양화진에 묻히지는 못했다. 3남 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딸들은 한국에서 출가하였다. 맏딸(아마리 에케르트)은 프랑스 외교관 마르텔(Martel, Emile)과 결혼하였으며, 그는 한국에서 불어학교를 설립하고 프랑스어 교육에 힘썼다. 한국에서 55년(1894-1949) 동안 장기간 활동하다가 마르텔도 양화진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