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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2. 묵상글 ( 부활 제4주간 월요일. -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등 )
*** 05:30 김찬선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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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2.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요한 10,2)
당신 곁을
당신 없는 듯
스쳐가지 않고
해맑은 웃음으로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당신 곁을
당신 없는 듯
스쳐가지 않고
정겨운 목소리로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당신 곁을
당신 없는 듯
스쳐가지 않고
따사로운 눈길로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당신 곁을
당신 없는 듯
스쳐가지 않고
부드러운 손길로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당신 곁을
당신 없는 듯
스쳐가지 않고
깨끗한 마음으로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당신 곁을
당신 없는 듯
스쳐가지 않고
오롯한 믿음으로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당신 곁을
당신 없는 듯
스쳐가지 않고
새하얀 희망으로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당신 곁을
당신 없는 듯
스쳐가지 않고
뜨거운 사랑으로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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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2. 부활 제4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4.22 05:20
- 이름을 불러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요한복음은 한 장 전체가 한 주제를 다루곤 합니다.
그래서 지난주 6장에서는 빵을 주제로 생명의 빵이 주제였고,
이번 주는 10장으로서 목자와 양들의 관계가 주제입니다.
오늘 복음은 먼저 목자는 어떤 존재인지 얘기합니다.
목자는 한편으로는 양들을 우리 안에서 안전하게 지켜주는 존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밖으로 불러내어 풀을 뜯어 먹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하여 목자가 있는 한 양들은 안전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불러주는 존재입니다.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목자는 양들이 다른 이의 양이 아닌 자기 양이 되게 하고,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목자는 양을 떼로 대하지 않고 하나하나 소중히 대합니다.
다들 나가 알아서 풀을 뜯어 먹어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데리고 나가서 풀을 잘 뜯어 먹는지 살피며 먹게 하는 것이고,
한 사람 한 사람 그의 인격과 고유성을 존중하며 소중히 대하는 겁니다.
이런 목자의 사랑을 받는 양들은 어떻게 하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목자의 그 양이라면 자기 목자를 몰라보고 다른 목자를 따르지 않고,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정확히 알아듣고서 자기 목자를 따라갈 것입니다.
목자의 익숙한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그래서 낯선 목소리와 분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 불감증의 양일 것입니다.
목자는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데
양은 목자가 자기를 부르는지 모르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목자의 사랑은 망실되는 겁니다.
여기서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생각나 이 시를 소개하며 끝을 맺겠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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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2.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본당에서 사목 위원으로 봉사하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본당신부님께서 아주 열정적이라서 신부님과 함께 즐겁게 사목한다는 것입니다. 전의 신부님 때보다 일이 많이 늘어서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교회 안에서 봉사하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기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불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당신부님께서 너무 즉흥적으로 일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갑작스럽게 전례가 바뀌거나 일정이 변경되어 혼란스럽다고 하십니다. “이 점만 아니라면….”이라는 말씀에 뜨끔했습니다. 그 본당신부님 모습이 제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신자들에게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 생각을 뒤로 미루면 괜히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바로 행동했습니다. 문제는 이를 진행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매우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한 박자 늦추는 삶이 필요함을 그리고 이 역시 또 다른 배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좋은 의도로 행동했다고는 하지만, 다른 누구는 그 좋은 의도로 곤란한 상황에서 힘들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겸손은 기다림이 아닐까요? 나서서 행동하면 물론 빠른 일 처리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가 이에 따라 힘들고 아플 수 있다는 것도 떠올려야 했습니다.
천천히 기다리는 모습이 예수님의 주특기였음을 묵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어도 기다려 주시지 않습니까? 진정한 겸손의 모습을 예수님께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겸손의 주님임을 오늘 복음에서 이야기해 주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문이 계속해서 자기 자리를 옮길까요? 문은 여기저기 자리를 옮기지 않고 항상 그 자리를 지킵니다. 그래야 양들이 길을 잃지 않고 찾아갈 수 있습니다. 양들에게 이 문은 구원의 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 주님이 계시기에 길을 잃었다가도 얼른 그 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문을 통해 들어올 때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 겸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모범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사람들이 주님 곁으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요, 한 권의 책이다. 얼굴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오노레 드 발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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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2.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도둑의 비유”를 들려주신 다음에 이를 알아듣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여기에서,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수평적 이동의 통로로서의 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늘과 땅이라는 수직적 이동의 통로서의 문이기도 합니다. 곧 이 “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내려오고, 인류의 사랑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그러니 생명과 구원의 문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가는 문으로서 그 문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로 들어간다.”
또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성경이 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며, ‘말씀의 문’을 통해 생명이 드나듦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는, 그 드나듦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동행하는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로 밝혀줍니다. 바로 당신이 그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가 “드나드는 문”이라 하십니다. 당신을 통해 들어가고, 또한 당신을 통해 나가는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나들고 있는가? 혹 들어가는 문으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들어가면, 나갈 필요가 없는 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사실, 예수님이라는 ‘문’은 다시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그러니, 예수님이라는 이 “문”은 ‘들어가는 문’이요, 동시에 ‘나가는 문’입니다. 그러기에, 만약 우리가 ‘양 우리’ 안에 머물러 편안이 자기만의 안식을 누리고자 한다면, 목자를 따르지 않는 ‘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4)
그렇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주와 편리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생명과 구원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요, 먹이는 일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도 그처럼 ‘성문 밖’으로 나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문을)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양’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이런 말씀으로 일깨우셨습니다.
“안락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손에 흙을 묻힌 더러워진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꾼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9)
주님!
저를 받아 주소서! 당신 풀밭에서 생명의 풀을 뜯게 하소서.
당신 기쁨이 차오르고 당신 사랑에 깃들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시고,
당신의 집에 저의 거처를 마련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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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2.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넘치게 하려고 왔다
한 신부님이 많은 돈과 귀한 보석을 선물로 받았답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재물이 생겨서 어찌할까? 고민하다 우선 보관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성체를 모시는 감실에 두면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리라’는 기발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불안하여 감실 앞에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시느니라.”하고 써 붙였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아침에 나와 보니 누군가 감실 문을 열고 보석을 몽땅 가져간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쪽지에다가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이곳에 안 계시는 도다”하고 써 놓았더랍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고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받은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놓으면 주님께서 더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공것이라면 비상도 먹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공것이라면 매우 좋아하여 가리지 않고 덤빈다는 말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 매달리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풀밭을 얻으려 한다면 먼저 예수님을 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며, 충만한 생명을 체험하는 지름길입니다. 따라서 감실 앞으로 가서 쉴 기회를 자주 만들기를 바랍니다. 사실 “성체 조배는 예수님과 살기 위한, 예수님 안에서 참된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알베리오네 신부).이 됩니다. 성체 조배를 통하여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신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길 희망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들음은 행동, 곧 실천으로 옮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기존의 삶에 안주하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승은 항상 당당하고 참된 제자는 그를 따릅니다. 스승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저 따를 뿐입니다. 따름으로써 스승을 완전하게 알게 됩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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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2.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성금요일입니다. 성금요일은 3부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말씀의 전례, 십자가 경배, 영성체입니다. 말씀의 전례 중에 신부님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신부님은 창에 찔린 상처에서 나온 예수님의 피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무도함과 우리의 잔혹함으로 예수님의 가슴을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처에서 나온 피는 우리를 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상처에서 나온 피는 우리의 무도함과 잔혹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처에서 나온 피는 우리를 용서하는 피였습니다. 그 상처에서 나온 피는 우리를 사랑하는 피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피와 물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전례를 마치고 인사를 하는데 교우분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강론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님은 자식 때문에 상처를 받고, 자식 때문에 많은 것을 잃어도 그 자식을 벌하거나, 그 자식의 죄를 드러내려하지 않습니다. 사랑 때문에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서 자식이 돌아오기를 바랄 것입니다.
저는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예전에 보았던 영화 ‘공공의 적’이 생각났습니다. 학벌이 좋고, 능력이 있는 증권맨인 아들이 부모님에게 큰돈을 벌 수 있다며 유산을 먼저 달라고 하였습니다. 보모님은 보육원을 운영하기에 아직은 유산을 줄 여력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들은 부모 몰래 생명보험을 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강도로 위장해서 부모님의 가슴을 칼로 찔렀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아들의 손톱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어머니는 비정한 아들을 보면서 떨어진 손톱을 삼켰습니다. 손톱 때문에 아들의 범죄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가슴 아팠기 때문입니다. 손톱 때문에 아들이 감옥에 가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자식 때문에 죽어가면서도 자식을 걱정하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인이 어떻게 젖먹이를 잊을 수 있겠느냐? 설령 여인이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난 너희를 잊지 않는다.”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사랑하는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이 다른 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야기를 하십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뒤를 이어 조선의 두 번째 사제가 되었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두 가지를 주장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양반과 천민이 없는 평등한 세상입니다. 서양의 학문을 배웠던 최양업 신부님은 바로 그런 세상이 발전하는 것이고, 그런 나라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이 되셨고, 사람들의 생각과 사람들의 언어를 배우셨듯이, 선교사들은 먼저 선교해야 하는 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충돌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은 바닷물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우리가 희생과 사랑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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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2.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오늘은 자신을 ‘양들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양들의 문이라는 표현 이전에 양들의 앞을 걷는 목자라고도 표현하셨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걷는 신앙의 길을 어떤 길일까요? 평안하고 아무런 어려움 없는 그런 길일까요? 아니면 유혹과 시련이 도사리고 기쁨과 고통이 공존하는 길일까요?
저는 우리의 길이 두 번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걸으신 길이 바로 두 번째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양입니다. 주님은 우리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걸으신 길을 걷습니다. 그분과 다른 길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주님이 걸으신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렇게 그분이 걸으셨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다다르면 우리가 만나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따라 걸으면 마지막에 주님이라는 문을 통과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가끔 어렵고 힘든 길을 만납니다. 가끔은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길을 만나기도 합니다.
쉬었다 가셔도 좋습니다. 숨을 고르며 앉았다 가셔도 됩니다. 천천히 걸어가십시오. 우리 주님도 그렇게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그 길 끝에는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천국의 기쁨을 두 손 가득 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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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펜
강론을 씁니다.
그리고 그 위에 형광펜을 칠합니다.
특강 원고를 씁니다.
그리고 그 위에 형광펜을 칠합니다.
형광펜은
늘 나중 업무를 담당합니다.
초안을 만드는 역할은 맡을 수 없지만
준비된 원고를 매끄럽게 이어가기 위한 포인트가 되어줍니다.
번쩍 번쩍이는 형광으로….
그 원고를 보는 이로 하여금 맥을 짚어 나갈 수 있도록 합니다.
초안을 만드는 볼펜이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늘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간중간 번쩍번쩍이는 형광펜도 괜찮지 않을까요?
오늘은 누군가를 빛내는 형광펜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이쪽에서 번쩍, 저쪽에서 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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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2.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는 문(門)이다”
-문을 드나듬의 축복(祝福)-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시편43,3ㄱ)
어제 4.21일 성소주일, 아침부터의 각별했던 기쁨을 잊지 못합니다. 요즘 신록의 아름다움이 절정입니다.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이나 믿음의 색깔이 있다하면 아마 이런 신록의 새깔일 것입니다. 계속되는 주님의 파스카 축제시기, 파스카의 기쁨은 신록의 기쁨입니다. 신록의 기쁨으로 빛나는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늘 주일 아침마다 부르는 찬미시편 노래이지만 1시간 찬미로 주일 하루를 여니 참 행복하고 기쁜 아침이었습니다. 파스카의 기쁨, 찬미의 기쁨으로 사는 요즘입니다. 아침 정갈하면서도 아름답고 풍부한 식사에 식사후 주방장 형제에게 감사의 덕담 인사를 드렸습니다.
“천국에서의 아침식사같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천국의 주방장같습니다.”
참 하느님 섭리의 신비가 오묘합니다. 20대시절 10여년간 왜관에서 수도생활을 했던 분인데 사정상 퇴회하여 세속에서 결혼후 성실히 직장생활을 하다가 약40년후 은퇴하여 나이 70을 넘어 수도원에서 주방봉사를 하며 수도원에 머물게 됐으니 오랜후에 고향집에 돌아온 듯 기쁘게 지내는 분입니다. 결혼생활과 수도생활을 겪으며 살고 있으니 우연이라 할 수 없는 하느님의 각별한 축복입니다.
또 하나 나눔의 기쁨이 있습니다. 요즘 영산홍꽃이 한창입니다. 정말 진분홍색깔의 그 강렬함은 장관입니다. 꽃말을 살펴보니 첫사랑이었습니다. 하여 24년전 옛 자작시 “성 요셉”에 이 첫사랑 말마디를 넣은 것을 시적 감성이 풍부한 도반이 참 멋진 시화를 만들어 전해줬고, 고단한 “광야여정”중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생명의 오아시스”를 선물하는 마음으로 요즘 들어 참 많은 지인들과 나눴습니다. 활짝 핀 진분홍색 영산홍꽃을 배경한 성 요셉상을 보고 쓴 시입니다.
“말없이
고요해도
가슴은
타오르는 불이다
성 요셉상 옆
붉게 타오르는
영산홍꽃!
꽃말은
첫 사랑이라네”-2004.4
지금은 나이 60 환갑을 바라보는, 아주 오래전 초등학교 6학년 때 옛 제자와, 조카가 보낸 답글도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선생님과 신부님 두 명칭답게 살아야 함을 다시 배웁니다.
“선생님, 시가 너무 아름다워요, 요셉 성인의 사랑을 말하는 듯합니다!! 첫 사랑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설렘을 품고 있네요. 항상 선생님의 시는 편암함을 줍니다. 감사드려요. 선생님!!! 건강하시구요. 편안한 밤 되세요.”
“삼촌 신부님 시는 언제 읽어도 감동입니다.”
아, 이 모든 은총으로 빛나는 깨달음과 풍부한 나눔, 순전히 파스카 예수님의 은총임을 깨닫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의 문을 드나들면서 얻은 깨달음의 은총의 선물들입니다. 다음 복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도 또 얻어 넘치는 것이다.”(요한10,9-10)
“나는 문이다!” 예수님의 선언은 얼마나 은혜로운 구원의 복음인지요! 예수님은 벽이 없는 사면팔방 활짝 열린 어느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의 “하늘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이 문을 드나들면서 날마다 강론을 길어 올립니다. “문이냐 벽이냐?”, “벽이 변하여 문으로!” 제가 참 한 때 열광했던 말마디들입니다.
제대로 성장중인 영적 사람들이라면 벽은 날로 넓은 문으로 바뀌겠지만 많은 경우는 점차 방어의 벽은 커지고 문은 날로 작아질 것입니다. 과연 나는 문입니까? 벽입니까? 벽은 점차 커지고 문은 점점 작아지지는 않습니까? 이웃이 답답해하면 벽이고 편안해 하면 문일 것입니다. 문이라하여 다 좋은 문이 아니라, 멸망이나 죽음에 이르는 지옥문도 있을 것입니다. 행복도 선택이듯 문도 선택입니다.
“나는 문이다!”, 바로 하느님께 이르는 주님의 문을, 하늘 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문, 지혜의 문, 생명의 문, 자유의 문, 평화의 문, 믿음의 문, 희망의 문, 평화의 문, 기쁨의 문, 행복의 문, 구원의 문, 무수한 명칭을 지니지만 결국은 하나로 귀결됩니다. 바로 주님의 문입니다.
바로 사도들과 제자들, 무수한 교회의 성인들은 이 주님의 문을 발견하고 수없이 드나들며 끊임없이 축복을 받은 분들이며 지금도 무수한 신자들이 이 주님의 문을 드나들며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는,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감격을 노래한 행복기도란 제 자작 기도문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이 시 또한 주님의 구원의 문, 생명의 문을 드나들며 깨달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멋진 지혜로운 깨달음도 바로 구원의 문, 생명의 문, 지혜의 문을 드나들며 얻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바로 오늘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의 보고에서 잘 들어납니다.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주님, 절대 안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번도 제입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두 번째로 응답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주님 지혜의 문을 드나들면서 이런 놀라운 은총의 체험과 깨달음이 참으로 베드로를 활짝 열린 자유인, 지혜의 문이 되게 했음을 봅니다. 참으로 놀라운 분별력의 지혜도 주님의 문을 드나들면서 얻은 은총의 선물들임을 깨닫습니다. 제 매일 강론 역시 이에 해당됩니다. 마지막 베드로의 겸손한 발언이 지혜의 절정이요 결정타가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의 통쾌한 완벽한 승리입니다. 차별이 없는 공평무사한 하느님을 깨달을 때 저절로 겸손이요 감사입니다. 베드로의 깨달음에 전적으로 승복하며 하느님께 찬미하는, 이제 벽이 문이된 예루살렘의 보수파 신자들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11,18)
이제 다른 민족들도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구원의 문을 드나들며 축복의 삶을 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바로 날마다 우리는 주님의 구원의 문으로 들어와 주님의 정화와 성화의 크신 축복을 받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오리다.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시편43,4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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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2. 부활 제4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요한 10,1)
성경은 문이다
도둑의 특징을 잘 보십시오. 첫째로, 그는 드러나게 들어가지 않습니다. 둘째로, 그는 성경에 따라 들어가지 않습니다.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이전에 있었던 이들과 당신 이후에 올 이들을 가리
키십니다. 그리스도의 적들과 거짓 그리스도들, 유다와 테우다스 또 그자들과 비슷한 모든 이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분께서 성경을 ‘문’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옳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데려다 주고 우리에게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열어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그분의 양떼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를 지켜 주며 이리들이 우리를 잡으러 쫓아오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은 튼튼한 문처럼 이단자들에게 대항해 길을 막고, 우리 모두가 바라는 대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며 우리가 헤매도록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열지 못하면 우리는 쉽게 원수들에게 정복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목자이며 누가 목자가 아닌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 우리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양들이 되어 보살핌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을 이용하지 않는 이는 누구나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 비정상적인 다른 길을 만들어 내는 ‘도둑’과 같은 자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더 나아가 당신을 ‘문’으로 표현하시는 것을 놓고 놀라서는 안 됩니다. 그분이 수행하고 계시는 직무에 띠라, 그분은 한편으론 목자이고 한편으론 양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니 문이시고, 우리를 보살피시니 목자이십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바울로 사도는 말합니다 ...”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안으로 모셔 들이십시오”라고 바울로 사도는 말합니다(로마 13,14 참조). 이 말은 그리스도를 내적으로 이해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자신을 비우기만 한다면, 그리스도와 하느님과 지복과 거룩함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가와서 별난 얘기를 하면, 여러분은 그들을 쉽게 믿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로 사도가 엄청난 약속을 해도 여러분은 그를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는 여러분에게 하느님과 지복과 거룩함을 약속합니다(여러분이 자아를 비운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자아를 버리고, 우리의 참된 자기로부터 우리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를 모셔 들여서, 이전보다 더 숭고해지는 일이야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예언자는 두 가지 일로 놀랍니다. 첫째, 그는 해와 달과 별을 보면서 하느님이 하신 일들에 놀랍니다. 둘째, 그는 영혼에 관한 것, 곧 하느님이 영혼을 위하여 엄청난 일을 하셨고, 그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영혼을 위하여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십니다.(157)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사도 11,19-30
안티오키아에 교회를 세우다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보살피시어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안티오키아 교회가 유다 지방의 신자들을 돕다
그 무렵 예언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로 내려왔다.
그들 가운데 하나인 하가보스라는 이가 나서서, 장차 온 세상에 큰 기근이 들 것이라고 성령의 힘으로 예고하였다. 그 기근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 일어났다.
그래서 제자들은 저마다 형편에 따라 유다에 사는 형제들에게 구호 헌금을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그대로 실행하여 그것을 바르나바와 사울 편에 원로들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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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2. 부활 제4주간 월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서로 오랫동안 사귀어 왔어도 상대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물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느님을 알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매번 의심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을 공적으로 소개하는 ‘계시’이고, 요한 복음서는 이 계시를 “나는 -이다.”라는 문장으로 선언합니다.
그 어떤 과장이나 기교 없이 “나는 -이다.”라는 조금은 직설적인 화법으로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 “나는 착한 목자다.”라고 당신을 계시하셨다면, 오늘은 “나는 문이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라고 당신을 소개하십니다.
‘양 우리의 문’이라고 하시지 않고 “양들의 문”이라고 하신 부분을 눈여겨보게 되는데, 단순히 물리적인 울타리의 문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고 ‘풀밭을 찾아 얻게’ 하며 ‘구원’으로 들어가게 하는 ‘문’임을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독서는 바로 그 문으로 들어가 이제 새로운 전망을 가지게 된 베드로의 모습을 전하여 줍니다.
그가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가서 유다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음식을 먹은 일이 논란이 되자 베드로는 명백하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새 이스라엘’, ‘진정한 양 떼들’을 위한 문이 열렸음을 장엄히 선포한 것입니다.
사방이 막혔다고 느낄 때, 어디로 나가야 할지 몰라 당황할 때, 예수님께서는 홀연히 문이 되어 주십니다.
‘여기로 와라, 이게 문이다!’라고 하시며 몸소 당신께서 ‘양들의 문’이 되어 주십니다. 그 문만이 숨 막히는 압박과 불의, 공포와 불안에서 우리를 참된 자유의 길로 이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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