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의 저녁 녘애는 대청 마루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들어 애기꽃을 피우곤 했다, 막걸리 걸러서 술상 채리느라
어머니는 분주 하셨지만, 한짝 창호문 안에서 석유 호롱불 밝히고 공부하던 까까머리 나는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해방 후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되어 서로 싸우던 좌우익 이야기랑,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때
이야기, 만주의 중공군 팔로군 이야기 등등 그중에서도 축지법 썼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다.
600고지의 뒷산 이름이 계룡산인데 이쪽에서 보면 유한데 저쪽에서 보면 거친 바위산이라 그런지 기인이사도
전설도 많았는데 근세에 들어서도 축지법 쓰는 사람이 몇이 나왔더란다. 그 중 한사람한테 어떤 사람이 좀 보여
달라고 하도 졸랐더니 다른데 절대 보지 말고 오로지 자기 발만 보고 떼는대로 디디고 따라 오래서 따라갔더니
순식간에 수십리 밖에 가 있더라는 둥...
그중에 왜정시대 거제 사등면에 한 독랍운동가가 나왔는데 만주와 조선을 제 집 드나들듯이 신출귀몰하게 왔다
갔다 했는데 왜놈 경찰이 수시로 잡는다고 출동하곤 했는데도 못 잡더란다, 거제 사등면은 거제 반씨 본관이고
반씨 집성촌이다, 반기문이 유엔총장이 되고 플래카드가 달렸더랬는데 충청도 고향인 반기문은 광주 반씨인데
광주 반씨는 거제 반씨의 한 분파이다. 조선시대에도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 집안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본가에 나타났다는 밀정의 보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해 포위 하고 방금 마당에서 안방으로
들어가는걸 담넘어 보고 쳐들어 깄는데 어디에도 흔적도 없더란다, 그런데 뒤애 경찰서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거제 사등에 출동했던 그 시간대에 부산 모 여인숙에 그 사람 나타났다고 부산 왜경이 출동했더란다,
그래서 축지법을 쓰며 독립운동하는 사람이라고 모두들 믿고 있었는데, 해방후에는 그는 좌익 사상가였던지
북쪽으로 갔는데 그 부인은 서울에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간부로 여성동맹위원장을 맡았는데 그는 그와중에
서울과 북을 역시 제 마음대로 왔다갔다 했다는데, 전쟁후 박헌영의 남로파를 숙청했듯이 쏘련파가 중공파를
숙청할 때 숙청 당했다는 소문이었는데 내막은 잘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어디론가 튀었을까....
그 시절 이 애기를 경고 잔디밭에서 하고 있었는데, 한 쪽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반태영이,
"정본아, 니 고향이 거제가?"
"그래 거제 고현이다."
"니가 금방 얘기한 그 사람이 우리 작은 할아버지다,"
"잉? 그라모 니 고향도 거제가?"
"나는 아이고, 울아부지 고향이 거제 사등이다."
반태영이 이번 50주년에 필라델피아에서 온다는 소식에 그때 생각이 떠 오른다.
그 때는 반쯤 뻥으로 듣고 있던 친구들에게 뻥이 아니라는 증인(?)으로 고맙다는 생각 뿐이었는데,
태영아, 이 글 보고 있다면 기억 했다가 니가 좀 더 자세한 이야기 들려 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