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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하나님의 나타나심
1-19절, 하나님의 나타나심
[1절]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엘로네)[테레빈스 나무들]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케콤 하이욤)[뜨거운 낮에, 한낮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여호와께서 나타나셨다. 역사상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고 매우 드문 일이다. 창세기 17장은 아브람의 99세 때에 그가 나타나셨음을 증거했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인격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사람에게 나타나실 수 있고 나타나셨다. 그는 마침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14).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나셨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초월자이시므로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나실 수 없고 사람이 육신적으로 경험하거나 또 그 경험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 진리와 다른 그들의 잘못된 사상에 불과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체적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나셨다고 증거한다. 그것은 신화적 묘사가 아니고 사실적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장소는 마므레의 테레빈스 나무들 근처 장막문에서이었고 시간은 오정 즈음에, 한낮 즈음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체적 시간과 공간에서 나타나셨다.
[2-5절]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유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장막문에 앉았다가 맞은편에 사람 셋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세 사람은 둘은 천사요 하나는 하나님이셨다. 다음에 나오는 10절과 13절은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계속 아브라함과 말씀하고 계셨고 두 사람만 소돔 성으로 갔고 19:1은 두 천사가 소돔 성에서 롯의 영접을 받았다고 증거한다.
아브라함은 그 세 사람이 특별한 자들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정통 유대교 서기관들인 마소라 학자들은 3절의 ‘내 주여’라는 말을 하나님께 대한 호칭인 아도나-이로 읽었다.30) 히브리서 13:1-2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였다. 이것은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주께서는 그의 제자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옷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본 것이 곧 주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5:35-36, 40). 또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교훈하였고(롬 12:13), 또 감독의 자격요건 중 하나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말하였다(딤전 3:2).
아브라함은 어떻게 손님을 대접하였는가? 우선, 그는 달려가서 그들을 영접하였다. 그것은 그가 즐거운 마음으로 영접했음을 보인다. 또 그는 몸을 땅에 굽혔다. 그것은 그가 겸손한 마음으로 영접했음을 보인다. 또한 그는 그들에게 ‘내 주여’라고 말했고 자신을 ‘종’이라고 말했다(3, 5절). 이것은 손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춤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고(마 20:26-27), 사도 바울은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하며 피차 복종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0; 엡 5:21; 빌 2:3).
또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자신을 떠나 지나가지 말 것을 간청하며 그들에게 발 씻을 물을 드리고 떡을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대접은 자원적이었다. 성경은 우리의 선행이 억지같이 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되어야 할 것을 말했다(몬 14). 사도 바울은 우리의 헌금도 인색함이나 억지로가 아니고 즐거움으로 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교훈했고(고후 9:7), 또 사도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양 무리를 돌보는 목회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벧전 5:2).
[6-8절]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부드럽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아브라함은 급히 그의 아내 사라에게 가서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로 떡을 만들라고 부탁했다. 세 스아는 약 22리터로 세 사람 먹기에는 넉넉한 양이다. 또 그는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해 하인에게 급히 요리하게 하였다. ‘기름지다’는 원어(라크)는 ‘부드럽다, 연하다’는 뜻이다. 그는 맛있는 고기로 대접한 것이다. 그는 뻐터와 우유와 송아지 요리를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모셔 섰고 그들은 먹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손님을 대접하되, 즐거이, 겸손히, 간절히, 자원적으로, 정성스럽게 대접하였다.
[9절]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좋은 아내는 좋은 주부이다. 시편 128:3은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라고 표현했다. 디도서 2:4-5는 젊은 여자들이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것을 교훈한다. 반면에, 잠언 7:11은 ‘그 발이 집에 머물지 아니하는 음녀’에 대해 묘사하였다. 좋은 아내는 집안일을 잘하는 아내이다.
[10절]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카에스 카이야)[오는 봄에(BDB), 내년 이맘 때(NASB, NIV)]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9절에는 ‘그들이 . . . 이르되’라고 말했으나, 10절은 ‘그가 가라사대’라고 말한다. 주어가 ‘그들’에서 ‘그’로 바뀌었다. 여기에 ‘그’가 누구인지는 13-14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는 “내년 이맘 때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고 14절에서도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셨다.
[11-15절]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생리]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내년 이 맘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는 생리가 끊어졌다.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웃으며 그와 그의 남편이 늙었으니 무슨 낙이 있겠는가라고 속으로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웃으며 부정적인 말을 함을 지적하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민 11:23; 욥 42:2; 눅 1:37).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엘 솻다이)이시다(창 17:1). 그는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다(신 32:39; 롬 4:17).
[16-19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이는]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택하였음이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 소돔 성으로 향하였고 아브라함이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몇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로, 그는 “내가 그를 택하였다”고 말씀하셨다(19절). ‘내가 그를 택하였다’는 원어(예다티우)는 ‘내가 그를 알았다’는 단어이다. ‘안다’는 말은 ‘호의적으로 안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선택하심을 의미한다. 로마서 8:29,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둘째로,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의를 행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사람이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그 자손들에게 명령하고 가르쳐야 할 내용이다. 부모는 자기 자녀들을 의의 말씀인 성경말씀으로 교육해야 한다.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에베소서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8-19절).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12:3에 나와 있는 말씀이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 복의 약속은 창세기 22:18에서도 반복될 것이다. 이 복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구원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아브라함은 즐거이, 겸손히, 간절히, 자원적으로, 정성스럽게 손님을 대접했다. 선행은 경건과 의의 열매이다. 하나님의 계명의 요점은 사랑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사람을 사랑하며 손님도 잘 대접한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장로의 자격 요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은 손님을 대접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접하였다. 잠언 19:17은 가난한 자에게 구제한 것이 하나님께 꾸어드린 것이라고 말했다. 주께서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그의 제자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교훈하셨다(마 25:31-46).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고 구제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99세된 아브라함과 89세된 사라에게 아들을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 사두개인들처럼 회의주의자나 불신앙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 자들이었다(마 22:29).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어야 한다. 그에게는 능치 못한 일들이 없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기적이 일어남을 믿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들을 다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은 역사상 기적들을 통해 충분히 확증되었고 성경에 충족히 기록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을 다 믿고 그가 약속하신 대로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광스럽고 복된 천국과 영생을 믿고 소망하며 그 생활 교훈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면 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기를 원하셨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 곧 영생, 천국, 몸의 부활의 복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하나도 빠짐 없이 다 예수님 믿고 죄사함 얻고 실제로 의롭게 살다가 마침내 영생의 복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의 복을 받았다. 우리는 이제 이 복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20-33절, 의인 열 명이 없어서
[20절]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한 도시가 악화되는 것은 매우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 같다. 처음에는 악한 자들의 악한 행위로 인해 의인들의 고통과 부르짖음이 있고 여론의 지적과 비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악의 세력이 커지고 악에 대한 반대는 약해진다. 도시는 점점 더 악에 물들어간다.
사회의 도덕적인 갱신과 회복은 오직 경건의 회복에서만 가능하다.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잠언 16: 6,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경건의 회복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도덕적인 갱신과 회복의 가망성이 없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컸다. 그것은,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의인들과, 그 사회에서 밀려나고 사라져 가는 순진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의 부르짖음이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어린양이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伸寃)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고 외치는 큰 소리를 들었다(계 6:9-10). 그런 부르짖음이 소돔 성을 위해서도 있었을 것이다
또 선한 천사들의 부르짖음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의인들을 섬기는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다고 말씀하셨다(마 18:10). 또 소돔 성에 살았던 의로운 롯의 부르짖음도 있었을 것이다. 베드로후서 2:7-8에 보면, 소돔 성에 살았던 의로운 롯은 날마다 저 무법하고 불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들을 보고 들음으로 심령이 상하고 고통을 느꼈고 아마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것이다. 그의 부르짖음은 하나님께 들려졌다.
소돔의 죄악은 심히 무거웠다. 죄들은 다 악한 것이지만, 그래도 그것들 가운데 그 죄의 성격상 작은 죄가 있고 크고 중대한 죄가 있다. ‘부지중에 지은 죄, 실수로 지은 죄, 연약하여 지은 죄’는 작은 죄이고, ‘알면서, 고의적으로, 반항적으로 지은 죄’는 큰 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고의적인 큰 죄를 짓지 말고 작은 죄도 조심해야 한다.
[21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소돔 성의 죄악된 형편을 확인하기를 원하셨다. 그가 유한(有限)한 사람처럼 무엇을 직접 확인하셔야 비로소 그것을 아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全知)하시다. 시편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의 확인하심은 실상 우리로 확인케 하시는 뜻이 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죄악으로 인해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였다. 그것은 우리로 소돔 성의 멸망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분이심을 알게 한다. 말세의 적그리스도 왕국과 배교한 교회도 그러할 것이다. 성경은 그 죄가 하늘에 사무쳤고 하나님께서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셨다고 말한다(계 18:5). 그때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다.
[22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 앞에 그대로 서셨더니].
‘그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세 명의 사람들 중 하나님을 뺀 나머지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창세기 19:1은 소돔 성에 두 천사가 나타났다고 기록한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라는 구절의 원래 히브리어 원문은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 앞에 계속 서 계셨더니”이었으나, 유대교 서기관들이 오래 전에 이 구절을 한글개역 본문과 같이 수정하였다.31) 그러나 원문에서 다음 절의 주어가 ‘아브라함’이므로(한글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본절의 주어는 ‘아브라함’보다 ‘여호와’가 더 자연스럽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떠나지 않으시고 계속 그 앞에 서 계셨다. 그는 아브라함을 친근히 하셨고 교제하기를 원하셨다. 이사야 41:8에 보면, 그는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고 부르셨다.
[23-25절] [아브라함은]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50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50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갔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양심의 거리낌을 가지면 가까이 나갈 수 없다. 아담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 3:8). 주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요 3:20-21).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신명기 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라.” ‘친근히 한다’는 원어(다바크)는 ‘꼭 붙잡는다’는 뜻으로 ‘부종(附從)한다’고 번역되기도 하였다(신 11:22).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꼭 붙잡아야 한다. 야고보서 4:7-8,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아브라함의 질문은 당돌해 보였다. 그는 하나님을 가르치고 책망하는 듯한 어투로 말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질문의 내용은 정당하였다.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다루셔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공의로 심판하셔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단지 아브라함은 세상을 너무 선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죄악된 소돔 성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의인이 50명 정도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 그는 무지했다. 그는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잘 모르고 있었다. 세상에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너무 절망적이게 보아서도 안 되겠지만, 세상을 너무 선하게 보아서도 안 된다.
[26-31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50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재와]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50 의인 중에 5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5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45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40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40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30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30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20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20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자신의 비천함과 무례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라는 원어(아노키 아파르 와에페르)는 ‘저는 티끌과 재입니다’라는 뜻이다. 사람은 티끌과 재이다. 그는 본래 흙으로 지음 받았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거기에 ‘흙으로’라는 원어(아파르 민-하아다마)는 ‘땅의 흙으로’라는 뜻이며, 거기에 ‘흙’이 바로 본문에 ‘티끌’과 같은 단어이다. 히브리어로 ‘아담’은 첫사람의 이름인 동시에 ‘사람’이라는 보통명사이기도 한데, 사람(아담)은 땅(아다마)에서 나왔다. 사람은 티끌과 재 같은 존재이다.
아브라함의 계속되는 끈질긴 대화는 그의 확고한 도덕적 신념을 보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과 악,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여 심판하셔야 한다는 신념이다. 그는 그의 무지한 관대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례한 대화를 계속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무지한 생각을 오래 참으셨고 너그럽게 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 아브라함을 상대해주셨고 그를 단번에 무시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너그러움과 인내심도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이 더 바르고 좋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우리는 아브라함의 무지하고 무례한 질문을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시며 너그러이 대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32-33절]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10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10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소돔과 고모라 성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롯의 가족들이 겨우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그것도 그의 아내는 실패하고 두 딸들은 근친상간적 죄를 지을 것이다. 그러면 실상 의인은 롯 한 사람뿐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는 그토록 오랫동안 소돔 성에 살면서 마음 고생만 많이 했고 결국엔 빈손으로 그 곳을 떠나야 할 것이다. 베드로후서 2:7-8,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소돔 성의 사람들은 큰 죄인들이었다. 죄들 중에는 그 성격상 큰 죄도 있고 작은 죄도 있다. 부지중에, 연약하여, 실수로 짓는 죄는 작은 죄이다. 물론 우리는 작은그런 죄도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모든 죄는 다 하나님을 근심시키고 노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알면서 짓는 죄, 고의적인 죄, 반항적이게 짓는 죄를 극히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큰 죄이다. 그것은 회개하기 쉽지 않은 죄이다. 그런 죄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고칠 수 없는 심령의 심각한 병이다. 우리는 고의적인 큰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멸망하는 소돔 성 사람들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공의로 징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하거나 편벽된 심판자가 아니시다. 그는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망시키는 자가 아니시다. 그는 무정한 자가 아니시다. 그는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는 악에 대해서 엄하시다. 그는 사람들이 행한 대로 공의롭게 보응하신다. 그러므로 전도서 12:14, “하나님께서는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로마서 2: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
로 하시리라.” 죄인들은 모든 죄를 회개하고 구원 얻어야 한다.
셋째로, 소돔 성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을 당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소돔 성에 의인들이 얼마 정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열 명도 없었고 마침내 멸망을 당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도시와 나라는 소돔 성보다 나은가? 오늘날 세상은 점점 더 불경건해 가고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 되고 있다. 현대 문명은 부도덕하고 음란한 문명이 되고 있다. 지구의 종말이 오고 있다. 이 세상이 멸망할 때, 거기에서 구출될 거룩한 교회의 교인들은 누구인가? 서울의 멸망을 막을 의인 10명은 어디 있는가?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할지라도, 우리는 남은 자가 되어야 하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지키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