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26]대가족모임 '남매계' '사촌계' 단상
작은 아버지(우리로선 유일한 친척)의 7주기를 맞아, 사촌동생 4남매가 묘소 앞에서 추모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고향집에서 내가 준비할 것은 그동안 돌보지 못한 묘소를 단장하는 것. 토요일 새벽 5시반 가족묘지로 올라가 잡풀들로 삐쭉삐죽한 봉분을 깎아드리고 산소 주변 벌초를 1시간여 동안 했다. 그직후 오전내내 폭우가 쏟아져 추모예배도 드리지 못하는가 싶었는데, 점심 후엔 날씨가 활짝 개었다. 네 동생 가족들은 모두 크리스찬. 상석에 제물을 차리지도 않고 절도 하지 않는 걸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전혀 비난할 일이 아닌 것을. 나에게도 같이 예배하기를 권하기에 그저 무릎을 꿇고 묵념과 기도를 드렸다.
큰동생은 나와 세 살 차이. 일산 큰교회 장로님의 말씀이 이어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자 피난처이고, 오직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대가족이 모여 경건하게 의식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게다가 올해 1월 숙모님이 숙부님 곁에 7년만에 나란히 누우셨기에 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모처럼 <주기도문>을 따라 낭송해봤다. 나는 심정적으로 불교도이나, 못할 까닭은 없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셔야 할 텐데, 언제든 조짐兆朕이 없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동생들은 저희의 총생(나로는 5촌)들을 형편되는 대로 여럿이 데려와 모두 11명. 당숙堂叔이란 호칭을 모르고 자랐으나, 이젠 낯설지 않은 게 고마운 일이다.
아무튼, 예배를 마친 후 집에 돌아와 이런저런 한담을 나눴다. 어머니 돌아가신 전주 노송동집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느 조카는 미국유학이 어떻게 되느냐? 둘째 제수는 왜 아이들과 같이 못왔으나? 는 등 가족얘기가 주류다. 큰동생은 여러모로 참 잘난 인물이다. 삼양사에서만 30여년 근무하며 계열사 사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제2 직장 구하기가 만만찮은 모양이어 은근히 걱정이다. 막내동생은 둘째딸이 10여년째 아파 볼 때마다 마음이 짜안하다. 셋째동생은 매제가 중국지사 근무해 보기가 쉽지 않지만, 선생님을 하면서 두 딸과 꿋꿋이 살며 얼굴이 밝은 게 좋다. 사촌이지만, 나는 친동생처럼 느끼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보기만 해도 좋은 것을. 피붙이들의 끈끈한 정을 ‘천륜天倫’이라고 한 이유를 알겠다.
동생들 오는 것에 대비, 뒷밭에 심어만 놓고 관리가 뒷전인 옥수수를 마구마구 따 껍질을 벗기고, 큰 제수에게 봉지에 4개로 나눠 담으라고 했다. 주는 것, 그것은 큰 기쁨이다. 고추도 마늘도 조금이라도 주고나면 은근히 뿌듯하다. 복숭아농장 친구에게 B급 4박스를 샀다. 형제간에 사이좋게 사는 것은 '이런 맛'이 있어야 한다. 동생들도 큰집 형이자 오빠가 있으니, 마음이 놓이고 의지도 될 것이다. 지금도 그 ‘전통傳統’을 이어오는 집안이 있지만, '친형제자매계' 말고도 ‘사촌계’라는 게 있었다. 할아버지가 같은 총생들끼리 1년에 한두 번 모임을 갖고 혈손血孫의 우애를 다지는 것 말이다. 벌초伐草도 모여 같이 했고, 제사도 같이 지냈다. ‘당내간堂內間’이라면 아주 가까운 친척이 아니던가. 그렇게 모여 부모와의 추억을 같이 공유하며, 그보다 더 먼 조상님들을 기리는 일이야말로, 사라져가는 미풍양속美風良俗인 것을.
어제도 화제에 오른 것이 ‘글쓰기 유전자DNA’였다. 내용인즉슨, 초계최가 중시조인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1483-1536) 선조 이야기였다. 신재공은 기묘명현으로 조광조 , 김정, 김안국 등과 <낙중군자회>를 통해 교유했고, 옥당玉堂에 올랐으며, 의정부 사인, 보은현감 등을 지냈다. 우스갯말이지만, 성균관(성균관대) 1508학번이니 나의 직속 선배이기도 하다. 전남 광양이 낳은 역사적 인물이다. 기묘사화때 전남 화순 동복에 유배, 귀양살이를 18년 동안 했으나 해제 후 벼슬에 나서지 않고, 하서 김인후와 유희춘 등을 가르쳐 <호남유학의 종장宗匠>이라고 불리는 분이다. 문장도 좋았다지만, 거의 유실됐고 문집으로 <신재집>이 남아있다. 붓글씨는 몇 작품이 있는데 <조선 명필 100선>에도 낀 위인이다. 생활글작가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나에게, 동생들이 중시조의 유전자가 모두 나에게 간 것같다는 얘기여서 모두 웃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와 숙부, 형님들도 필체筆體가 아주 좋다. 정말 유전자는 그렇게까지 ‘지독하게’ 대代를 이어 내려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조카들이 모두 9명. 모처럼 보니 얼굴이야 알지만, 다 커버렸다. 크내기(처녀)가 다 됐고, 직장인 조카들을 보면, 내가, 우리가 나이를 먹긴 먹은 것같다. 어디서든 모두 사회의 일원으로 ‘한 몫’하며 잘 살기만 하면 된다. 지난해만 해도 복숭아친구가 주는 B급 복숭아 몇 상자를 숙모님께 갖다드리곤 했는데, 올해는 그 생각만 하면 영 허전하다. 조선 중기 박인로가 지은 <반중 조홍감이 고아도 보인다. 유자가 아니라도 품음직하건만 품어가 반길 이 없으니 그를 서러워하노라>는 시조가 생각나기도 한다. 효도는 정말 살아 생전에 해야 맞는데, 그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요양원에 계시는 98세 노부가 떠올랐도, 하루하루 살다보면 금세 그 사실을 잊고마는, 나는 천하의 불효자다. 동생네 대가족이 떠나고 나니, 또 허통한 마음이 든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우리 삶의 다반사茶飯事이거늘, 그것을 그리 애돌애돌할(안타까워할) 일은 아닐 것이지만, 마음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