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00
12월10일[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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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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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9IH_SCA-SLw
[서울대교구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님 집전(사회사목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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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비자발적 가난의 슬픔과 교회의 역할>
대림 시기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인 한분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의 옷차림이며 생활방식이 얼마나 청빈하고 소박했으면, 복음사가들 마다 그의 과도하게 없어 보이는 행색을 지적합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마르 1, 6)
낙타털 옷, 가죽 띠, 메뚜기, 들꿀...이런 표현들은 세례자 요한의 극도로 제한되고 겹핍된 삶을 수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경험하는 것처럼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고, 누리고 싶은 것 다 누리고, 즐길 것 다 즐기며 살아갈 때, 다시 말해서 물질적 풍요 속에 살아갈 때, 따라오는 한 가지 위험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능력, 자신의 힘, 자신이 지닌 재물에 의존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 그분의 섭리는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하느님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던 어느날, 크게 뒤통수를 얻어맞게 될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보다 신속히, 그리고 정확하게 알아보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처럼 결핍과 추위, 배고픔과 목마름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난과 고통, 배고픔과 목마름 앞에 너무 괴로워할 일이 아닙니다. 물론 지나친 결핍은 우리에게 굴욕과 비참을 느끼게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결핍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교회은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 겸 사회 교리 주간으로 정했습니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가난은 영예요 기쁨이지만,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비자발적 가난은 씻을 수 없는 오욕이요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태생적 한계로 비자발적 가난에 노출된 수많은 이웃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오늘 대림 제2주간은 그런 이웃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우리 교회와 사회가 그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동반하고 연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사회 교리! 말만 꺼내도 귀를 막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사실 사회 교리는 이 시대 가장 강조되어야 할 소중한 교리입니다.
사회 교리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을 포함한 모든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구체적인 사회 현실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증거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초대합니다.
제정신이 아닌 지도자로 인해 세세대대로 보존되어야 할 금수강산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굽이굽이 전 국토를 흘러 적시는 아름다운 강줄기를 잔인하게 토막내 버릴 때, 그것은 교회 밖 일이니 상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뭔지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하는 지도자로 인해 국격이 완전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그들이 만든 그릇된 제도로 인해 가난한 백성들의 신음소리가 하늘을 찌르는데, 그것은 남의 일이라 여기고, 높은 교회 담 안에서 우리끼리 희희낙락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얼굴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연유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정말이지 일관되게, 끊임없이 외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 제발 교회와 수도회 담 너머로 나가십시오. 안에서 안전하게 머무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서 상처입고 고통당하는 것이 백배 천배 더 낫습니다.”
교황 착좌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계속 반포하시는 일련의 회칙들의 주된 골자는 한결같이 사회 교리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또 한 분의 대 예언자, 제2의 세례자 요한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에 좀더 귀기울이는 대림 제2주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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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73zoYEv8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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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친구를 손절해도 될까?>
대림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고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이때 틀림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죄의 용서는 회개의 세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세례로 성취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준비하는 세례가 요한의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를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는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선물을 주고 계시는데 받지 않고 반대쪽을 보고 있는 이들의 시선을 그분께로 돌리는 일이 회개입니다. 회개가 없이는 그래서 죄의 용서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은 이에게 당신 선물을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땅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끝까지 자신을 잡아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신앙을 이용해 심리적으로 지배하려는 시도입니다. 오히려 손절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참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유튜브 채널 ‘포크포크’에 ‘전 세계 화제가 된 어미 리트리버의 훈육’이란 제목의 동영상이 있습니다. 리트리버 어미는 8주 된 여덟 마리의 새끼들이 젖을 먹겠다고 달려들자 갑자기 짖으며 새끼들을 떼어 놓습니다. 새끼들은 처음 보는 어미의 반응에 어리둥절 쥐 죽은 듯이 뒤로 물러납니다. 어미는 차분해진 새끼들을 핥아주며 위로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때가 되면 놓아주어야 하는 ‘단호함’과 그러면서도 새끼를 사랑하는 ‘다정함’이 공존하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훈육법을 배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단호하고 언제 다정해야 할까요?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간다면 단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항상 다정해야 합니다. 대신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면 단호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자신도 망치고 자녀도 망칩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에서 갓 대학을 졸업한 앤디는 권위 있는 패션 잡지 ‘런웨이’의 강력하고 까다로운 편집장인 미란다 프리스틀리의 보조 비서로 취직합니다. 미란다의 정식 비서는 에밀리입니다. 그녀는 촌스러운 앤디를 비웃습니다. 앤디는 다소 순진하고 수수한 옷차림을 한 젊은 여성이며 고급 패션 세계에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는 저널리즘 산업에서 그녀에게 문을 열어줄 것이라고 믿기에 미란다 프리스틀리 밑에서 자기 실력을 증명하려 합니다. 처음에 앤디는 까다롭고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 그리고 불가능해 보이는 미란다의 작업과 기대로 인해 어려움을 겪습니다. 오기가 생긴 앤디는 자신의 역할에 적응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더욱 멋지게 옷을 입고 모든 노력을 다한 끝에 미란다의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 상사인 에밀리를 밟고 오르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심지어 애인과도 헤어지고 친구들과 가족도 변한 그녀의 모습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영화의 결말 즈음 앤디는 미란다가 자기 지위를 지키기 위해 가장 가까운 동료인 나이젤을 희생시키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나 미란다는 앤디도 에밀리를 밟고 오르는 모습이 자신을 닮았다고 말합니다. 앤디는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란다는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모두가 우리처럼 되길 원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앤디는 미란다와 ‘런웨이’의 세계를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납니다. 그러자 남자친구와 친구들, 가족들과의 관계가 다시 정상화됩니다.
물론 선교 하려면 죄인들에게 가까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행복의 기준을 바꾸지 않는다면 떠나야 합니다. 낭떠러지로 가는 노새의 끈을 끝까지 잡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타인을 위해 나의 영혼을 희생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나의 영혼도 귀합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가 돈이나 명예, 쾌락이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임을 느끼며 참 사랑으로 살기를 원할 때 머무르면 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나부터 죄의 본성인 탐욕과 육욕, 그리고 지배욕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를 손절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나도 그 행복을 바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와와 손절하지 못해 결국 그의 지옥에 빠졌습니다. 자신도 세속-육신-마귀를 이기는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단식하며 광야에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례자 요한의 초대에 응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정함과 단호함을 동시에 지니고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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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LA ‘성 프란치스코 한인 성당’에 갔을 때입니다. 성탄을 준비하면서 구역장, 반장들과 함께 성당 대청소를 하였다고 합니다. 마침 독지가가 있어서 성당 친교실의 바닥을 새것으로 교체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도 본당에 있을 때는 ‘대청소’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성탄을 준비하면서 대청소를 하였습니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곳까지 청소하였습니다. 성당 벽에 있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청소하였습니다. 성당 입구의 성모상도 닦아 주었습니다. 성가대로 들어가는 입구도 청소하였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의 교리실과 학생들의 교실도 청소하였습니다. 물 호수를 뿌리며 성당 올라가는 계단도 깨끗하게 청소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나절 청소를 마치면 여성 구역에서 국수와 막걸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성당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이 주님을 맞이하는 외적인 준비라면,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탄판공’입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성탄 판공이 되면 어머니는 내년도 ‘교무금’을 책정하였고, 본당에서 주는 ‘달력’과 ‘판공 성사표’를 받았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주신 성사표를 들고 본당에서 마련한 고백소에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린 다음 차례가 오면 성사를 보았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성당을 청소하고, 판공성사를 보는 것은 ‘주님의 길’을 닦아 놓는 것입니다.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렇습니다. 참된 성탄의 준비는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갇힌 이들의 손을 잡아 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슬픔과 절망의 골짜기를 메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분열과 갈등의 골짜기를 메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만과 욕망의 언덕을 낮추는 것은 무엇일까요? 시기와 질투의 언덕을 낮추는 것은 무엇일까요? 슬픔과 절망의 골짜기는 위로와 희망으로 채우면 좋겠습니다. 분열과 갈등의 골짜기는 일치와 용서로 채우면 좋겠습니다. 교만과 욕망의 언덕은 겸손과 나눔으로 낮추면 좋겠습니다. 시기와 질투의 언덕은 인내와 관용으로 낮추면 좋겠습니다.
2년째 계속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면 좋겠습니다. 3달 째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면 좋겠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고, 세상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서 이사야 예언자의 꿈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제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언제가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우리의 행동입니다. 사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들,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희망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모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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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1-8: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기다림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장차 일어날 중대한 어떤 사건이 있고 오셔야 할 어떤 분이 계신다는 것이다. 그분을 기다리는 가운데 사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다. 이사야서는 오시는 주님을 위해 길을 준비하라 권고한다.(이사 40,3-5) 그러면서 슬픔과 비탄에 젖어있는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다고 한다.(40,9-11) 주님의 가장 위대한 오심은 당신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 오심은 화해와 사랑의 오심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그분은 어미 양과 새끼 양들을 자상하게 보살피는 목자이다.(40,11) 그분 안에서는 권위와 사랑이 전혀 대립하지 않는다.
이 신비스러운 소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며, 그 소리는 사막에서 시작되어 퍼져나간다. 그의 선포는 아주 짧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온통 더 훌륭한 분 즉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과 그 메시아가 베푸실 성령의 세례에 대한 것이다. “내 뒤에 오신다.”(7절)는 말은 오심의 긴박성을 말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그리스도가 곧 오신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이며, 요한 자신은 그리스도를 섬기기조차 부당하다고 한다. “신발 끈을 풀어드린다.”(7절). 이 두 가지는 모두 주인을 위해 길을 내며 앞서가는 종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중요한 그리스도께 대한 중요한 내용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수께서 요한 세례자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며, 또 하나는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는 것이다. “더 훌륭한 분”은 ‘더 힘센 분’의 의미로 “악마가 저질러 놓은 일을 파멸시켜”(1요한 3,8) 사탄을 쳐부수시어 구원업적을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성령으로”라는 표현은 성령을 베푸실 분으로서의 메시아를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언을 따라 마지막 날에 성령이 충만히 넘쳐흐를 것을 기대해 왔다.(이사 44,3; 에제 36,26 참조)
요한은 단순한 소리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 자체로써 메시아의 오심을 알리고 준비하였다. 그의 생활 자체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웅변적인 설교였기 때문에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5절) 낙타 털옷을 입고 들 꿀을 먹으며 광야에 살았다는 것은, 그의 속죄의 정신만이 아니라 고행의 열정, 또는 그분을 찾아 얻기 위한 간절한 기도, 어떠한 상황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 근본적 자유에 대한 갈구, 그리고 주님께서 지나가실 광야의 길을 다른 사람들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열망 등을 말해준다.
이렇게 요한은 삶과 설교를 통해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4절)의 세례를 선포한다. 즉 메시아의 오심은 마음의 회개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 회개가 없이는 메시아도 오시지 않는다. 만일에 오신다면 그것은 그분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사람들을 단죄하시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르코 복음이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절)이라는 고백으로 시작되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복음 전체의 제목과도 같다. 이제 복음이 나 자신을 위해서도 시작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죄를 뉘우쳐야 하고, 물과 성령으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잘 준비하고 우리가 모두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에 계속해서 참여하여야만 한다.
베드로 사도는 신앙인들에게 주님의 날을 기다림에 있어서 경박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베드 3,14) 신앙인들의 기다림은 무기력하거나 운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동적이고 나아가 창조의 힘을 지닌 기다림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기다림은 은총이 아니라 단죄를 위한 심판’이 될 것이다.
이제 주님의 오심이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대림시기와 성탄 시기의 짧은 시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질 주님의 오심에 대한 긴장을 이완시켜서는 안 된다.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까지 우리가 가진 몫을 꾸준히 채워감으로써 완성해야 할 과제를 우리는 갖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노력과 또한 나 자신과 싸움을 계속해 가면서 이루는 것이다. 대림시기는 오랫동안 하느님을 떠난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고향, 하느님 나라로 돌아오는 시기이다. 더 넓게 생각을 한다면 이 대림시기는 우리의 일생 전체가 대림시기라고 할 수 있다. 짧게 대림시기와 성탄 시기의 삶이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계속될 수 있을 때, 우리는 항상 대림시기와 성탄의 신비를 함께 계속해서 살아가는 삶이 될 것이다. 우선 우리에게 성탄을 통하여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는 삶을 살면서 그 삶을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 진정한 제물로 봉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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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이사야 예언자는 일찍이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여기서 ‘주님의 길’은 하느님께서 걸어가실 길, 곧 유배의 속박에서 당신 백성을 이끌고 그들과 함께 광야를 지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새로운 파스카’의 길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걸어가실 구원의 길을 미리 준비하라는 외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이 예언의 말씀을 자신의 복음서 시작 부분에 인용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그런데 여기서 ‘주님의 길’은 문맥상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 이해됩니다. 복음서 시작부터 예수님께서 주님으로 불리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드러내면서 또한 그분께서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계심을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파스카, 곧 구원의 길은 결국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길로 실현되며, 그 길은 역설적으로 수난과 죽음의 길로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를 통하여 마침내 실현됩니다. 그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고, 그 외침을 들은 많은 이가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광야에 있던 외침은 세례자 요한의 시대를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다다릅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그 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 주변에서 늘 울려 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소리에 제대로 반응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을 맞이할 준비에 적극적입니까? 대림 제2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의 길을 마련하며 그 길을 곧게 내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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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김시몬 시몬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의식주가 필 요합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 것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일은 수단이 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고, 일을 못한다고 해서 인간으로 대우 를 받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일을 못 하는 것이 사회 구조의 문제임에도 개인이 노력하지 않아 생 긴 문제로 전가합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더 큰 문제는 일자 리가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그 줄어든 일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편이 나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일을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상대가 일자리를 차지하면 내가 밀려나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엉뚱한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돈이 많은 사람은 적은 노력으로도 더 많이 버는 반면, 돈이 없는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도 수입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노력하는 만큼 더 좋아져야 하는데,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도 사람은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많이 가졌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이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주위 사람들을 불행하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회개를 위한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정말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고 있는지 다시금 되돌아보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능력 있는 사람만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개인의 성공이 아닙니다. 나중에 성공해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좋을 듯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웃들이 힘들게 사는 것을 지켜보기보다 그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며 살기 바라십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기술을 익히지 못한 사람들은 더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많이 노력하고 일하는데도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별로 없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그 뒤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군대에서 행군할 때 앞에서 살짝만 속도를 내도 뒤에서는 뛰어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전에는 똑같이 나눠 갖는 것이 공평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공평하게 나누는 것은 가진 것이 없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만큼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태어났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모두에게 있습니다. 내가 가진 권리를 더 많이 누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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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빛의 소리
[광주대교구 정윤수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시작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탄을 준비하는 시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성탄은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어 우리 곁에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여정에 있는 것이지요. 특별한 만남이지요. 만남에는 언제나 준비가 따르기 마련이지요. 옷을 곱게 차려입어야 하는 만남도 있고, 자료를 잔뜩 안고 가야 하는 만남도 있으며, 편안한 몸과 마음만으로 충분한 만남도 있지요. 그럼 예수님과 우리 자신과의 만남에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교회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과 만남에 있어서 중요한 준비 중의 하나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네요. 그것은 무엇일까요? 네, 회개입니다.
우리는 왜 회개해야 할까요? 회개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우리처럼 믿는 이들에게는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회개에 대한 좁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회개의 필요성은 사랑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종종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사랑이 부족한 사람은 회개의 필요성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내가 잘해 주어도, 돌아서면 늘 부족함을 느끼며 다음에 더 잘 해 주어야지 하며 마음 다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회개는 마음에서 시작하지만, 밖으로 드러나야 진정한 회개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시기에 회개의 외적 표지로 고해(판공성사를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고해성사 준비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생각하면서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비참함, 부끄러움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나의 무관심과 냉랭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은총으로 나를 감싸주시며, 나를 구원으로 이끌고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그분의 사랑에 상응하지 못한 나의 모습이 보일 것이며, 그 모습 안에서 나의 부족함, 죄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의 죄는 나를 움츠러들게 하거나 숨기는 그런 부끄러운 죄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나를 하느님께 향하게 하는 "복된 죄”로 보일 것입니다. 이런 복된 죄를 어찌 숨길 수 있겠습니까? 어찌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특별한 만남을 준비하는 복된 대림시기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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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주보》 말씀
[군종교구 송강윤 모세 신부님]
<사랑의 실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을 이 세상에 구원자로 보내시기 전에 먼저 요한을 보내시어, 유다인들이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충실히 하게 하셨습니다. 그 준비는 '세례'라는 표징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에는 여러 명의 '세례 운동가'들이 나타나 깨끗한 물로 몸을 씻고 몸가짐을 정결하게 함으로써 사람의 영혼을 더럽히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세례'는 일종의 정화 의례로써, 일생 동안 여러 번 반복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베푼 세례는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완전히 되돌리는 내적인 변화, 즉 회개의 삶을 살 것을 약속하며 일생에 단 한 번 받는 세례였습니다. 구원의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는 정화를 통한 '회개'가 필수적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참된 회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 벌 받을 것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분명한 확신을 통해서만 진정한 회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며 부모님의 속을 썩 이는 아이들이 혼나고 벌을 받으면 더 삐뚤어지지만, 부모님의 한없는 사랑을 깨닫고 난 뒤에는 죄송한 마음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변화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나면 그 크신 사랑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이제부터라도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징벌이나 심판이 아닌,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 그런 상태가 바로 '하느님 나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과 예수님의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요한이 물로 베푼 '회개의 세례'를 통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면, 예수님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거룩한 생활로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은총이 완성되도록 이끄신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우리의 병든 영혼과 마음을 치유할 뿐 아니라, 우리가 기쁘게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온전히 누리고 싶다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내가 받은 세례의 은총을 완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 종말의 순간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찾아오실 때,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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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주보》 말씀의 향기
[대전교구 김용태 마태오 신부님]
<믿을 교리와 사회교리>
"그것은 '믿을 교리'입니다."
이 말은 교리교육 현장에서 "자꾸 묻고 따지지 말고 그냥 믿으세요!"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삼위일체'처럼 이해하기 모호하고 난해한 교리를 설명할 때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되곤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느님의 신비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에 나름 수긍을 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우리 교회의 신앙교육은 이런 식의 믿을 교리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의 신비라는 게 머리로 이해할 수 없어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믿어야 하는 대상일까? 천주교는 '계시종교'다. '계시'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믿는다는 게 과연 옳은 길까?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알기를 바라신다.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믿는 것은 '맹신'이 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보이는 세상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과 온갖 피조물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다. 교회와 7성사만이 아니라 세상 속 인간과 온갖 피조물들이 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표징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 벽면만 바라보면서 믿을 교리만을 암송할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온갖 피조물들을 바라봐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이 보인다.
교회의 '사회교리'란 그런 거다.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것이 바로 사회교리다. 믿을 교리의 하느님은 사회교리를 통해 우리 곁에 살아 계신 하느님으로 드러난다. '천주 존재'와 '강생구속'은 세상의 가난 하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연대라는 사회교리 안에서 밝혀진다. '삼위일체'는 갈라져 싸우는 모든 이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합하기를 바라면서 혐오 와 배척에 맞서는 사회교리 안에서 드러난다. '상선벌약'은 아무리 가난해도 착하게 살면 영예롭고 아무리 부유해도 악하게 살면 수치스러운 세상을 만들려는 공정과 정의의 사회교리 안에서 구현된다.
지난 10월 말, 어느 본당의 평일미사 주례를 맡게 되어 미사를 봉헌하면서 참석한 신자들에게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했더니 한 신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버렸다.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는 절을 하면서 세상의 십자가는 외면해 버리는 모습이라니! 그런데 이런 신자들이 꽤 많다. 사회교리 교육이 더욱 절실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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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마산》 주일강론
[마산교구 전주홍 요셉 신부님(칠원성당 주임]
<불공평한 천국>
세상 참 불공명합니다.
누구는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 물고 태어나 갖은 호사다 누리며 떵떵거리며 살다가는가 하면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태어나 평생 제대로 한 번 피지도 못하고 져버리는 삶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물어봐도 열이면 열세 상 불공평하다고 하는 걸 보면 예삿일은 아닌듯합니다.
그런데 태초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것 또한 불공평한 모습 그 자체입니다. 어떤 것은 하늘을 나는 놈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땅을 걷는 것은 고사하고 기어 다니는 놈도 있습니다. 평생 물속에 있어야 하는 것들도 있고요, 높은 산이 있는가 하면 깊은 골짜기가 있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천덕꾸러기 가시나무가 있는 반면 탐스럽게 열매 맺고 울창한 숲을 이루는 나무들도 있습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습니다. 만일 세상에 남자만 또는 여자만 있었더라면 하고 생각해 봅니다. 더 나아가 키도 같고 생긴 것도 똑같고 재능도 같으며 성격도 다 똑같고…… 높낮이 다른 산이 아니라 평평한 땅만 있었더라면.
이 얼마나 공평한 세상입니까. 다 똑같으니 서로를 향한 불평불만은 없을 듯한데 만 일 그런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 무슨 나눔이 있고 사랑이 있고 희생이 있을까 싶습니다. 다 똑같은데!! 공평한 지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피조물이 제각각인 것은 사랑이 흐르기 위해서입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풍요로운 곳에서 부족한 곳으로,
저마다 필요한 만큼,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 은 평야가 되어라"(이사 40,3-4)
서로를 향해 사랑이 흐르고 나눔이 일어난다면, 서로의 차이, 다름이 소중해진다면. 삶이 어려워 골짜기와 같은 이들은 채워지고 산과 언덕처럼 높은 자리에 앉은 이들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상처 입어 마음이 굽은 이들은 치유를 통해 곧게 하고 절망과 좌절 때문에 거친 마음 지닌 이는 그 울퉁불퉁한 삶이 평온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러한 불공평한 천국을 희망합니다.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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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부산》 강론
[부산교구 최성철 베드로 신부님]
<기다리는 마음 자세와 태도>
대림시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회개와 속죄로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대림 두 번째 주일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한국 주교회의는 1982년부터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기로 했으며 2011년부터 이 주간을 사회교리 주간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마르코 복음의 시작 부분으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들은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이사 40.3)라고 예언하였는데, 마르코 복음 저자는 이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여기서 길은 결국 예수님의 길이며, 수난과 죽음의 길이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구현해 내는 것입니다. 회개와 속죄가 그 실천이며 오늘 대림 제2주일의 주제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면서 먼저 “회개하여라.”(마태 4,17)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회개의 삶'이라고 합니다.
회개라는 것은 하느님께로 향하면서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삶은 평생 지속해서 살아야 하는 삶입니다. 이 회개의 삶에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할 때 우리는 충실히 살아낼 수 있습니다. 이 삶에 세 가지 덕행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신덕, 망덕, 애덕입니다.
신덕의 삶, 곧 믿음의 삶은 하느님의 가르침과 교회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에는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 실천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됩니다.(야고 2,22-26)
망덕의 삶, 곧 희망의 삶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산다면 우리는 그 약 속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애덕의 삶, 곧 사랑의 삶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보답하는 삶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1요한 4,20)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은 진정한 회개의 삶이며 완전한 삶이 됩니다.(마태 5,48)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루카 11,28)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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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주보》 말씀 담기
[수원교구 한영기 바오로 신부님(성 나자로마을 원장)]
모든 인간은 '존엄'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는 모두가 평등하며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권'입니다. 하지만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간 세상은 항상 계급을 나누고, 더 크고 강한 것을 본능적으로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경쟁에서 '약한 이'들은 항상 배척당하고 무시당하며 버림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출신, 성별, 지위, 재산, 학력' 등 여러 배경에 의해 인권을 빼앗긴 사람들이 항상 존재했던 것입니다.
성 라자로 마을의 한센 가족들도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살아온 과거가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 '한센인의 날' 행사 참석차 마을 가족들을 모시고 소록도에 다녀왔습니다. 그곳 전시관에서 본 한국 한센인들의 역사는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1916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소록도에 세워진 '자혜의원'은 훗날 '소록도갱생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그 확장공사 과정에서 한센인들은 불편한 몸으로 강제노역과 폭행,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이후 많은 이의 노력으로 한센인들의 인권문제가 대두되기 전까지 '한센인은 소록도에서 세 번 죽는다.'라는 표현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한센병이 발병하면서 모든 꿈과 희망에서 죽게 되고, 두 번째는 강제로 생체 실험을 당하여 죽으면 시신 해부를 당하며 죽게 되고, 세 번째는 장례 후 강제 화장을 당하며 죽게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병의 증세만으로도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강제노역을 시켰고, '유전된다.'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한센인 부부를 분방시키는 것은 물론, 강제 단종 수술과 강제 낙태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내용이 전시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금실' 벽에는 한센 환우가 쓴 시가 붙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죄가 없어도 불문곡직하고 가두어놓고
왜 말까지 못 하게 하고 어째서 밥도 안 주느냐
억울한 호소는 들을 자가 없으니
무릎을 꿇고 주님께 호소하기를
주님 말씀에 따라 내가 참아야 될 줄 아옵니다.
내가 불신자였다면 이 생명 가치 없을 바에는
분노를 기어이 폭발시킬 것이오나
주님으로 인해 내가 참아야 될 줄 아옵니다.
이 속에서 신경통으로 무지한 고통을 당할 때
하도 괴로워서 이불 껍질을 뜯어
목매달아 죽으려 했지만
내 주님의 위로하시는 은총으로 참고 살아온 것을
주님께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철저히 인권이 무시당하고 말도 안 되는 처우를 받으며 살아온 한센인들에게도 요한 세례자 같이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신'(마르 1,3)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마가렛 선생님, 마리안느 선생님, 강 칼라 수녀님, 이경재 신부님,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 등입니다. 이분들은 한국 한센인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이사 40,1)이라는 제1 독서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신 분들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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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안동》 말씀의 샘
[안동교구 신동철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정상동성당 주임)]
<회개란, 하느님을 향한 방향설정입니다>
대림환에 두 번째 촛불이 밝혀졌습니다. 교회는 1년을 주기로 예수님의 전 생애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대림'은 한자로, 기다릴 '待', 임할 '臨'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은 어느 특별한 시기만의 일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살이 전체가 '주님 오심을 준비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일생이 바로 '대림'인 것입니다. 따라서 대림 시기를 해마다 반복되는, 성탄 전에 오는 연례행사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생각과 태도는 신앙생활의 '권태기'로 이어지는 지름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사람들을 깨어 준비시키는 선구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자 사람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같은 내용을 전하는 루카복음 3장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위해서 '구체적인 사랑 실천'을 요구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 3,7-8)라고 호통을 칩니다. 회개했다는 것을 행동으로, 또 삶으로 증명하라는 꾸짖음입니다. 지금까지 살던 모습으로부터의 완전한 변화를 요구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선포하면서, '사랑'과 '정의'를 강조합니다. 이 점은 우리에게 좋은 묵상 거리를 제공합니다. '정의'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좋은 예로,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많이 해서 칭찬을 받는 어떤 사장님이, 자기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고 있다면, 그가 낸 성금은, 사랑 실천이 아니라 '거짓 사랑'이고 '위선' 입니다. 또한, 탈세, 횡령, 뇌물을 받아서 돈을 모은 사실을 감춘 정치인이, 그 가운데 일부를 불우이웃 돕기 성금으로 낸다면, '거짓 사랑'이고 '위선'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회개'란, '삶의 변화'입니다. 직업을 그만두라는 것도 아니고, 가정을 버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세속을 떠나라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방향을 다시 설정하라는 것입니다. 그 방향은 하느님을 향한 방향이어야 합니다. 잘못되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하고, 잘하고 있다면 계속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기준으로 본다면,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구체적인 사랑 실천을 통한 회개의 삶으로 깨어서 준비하는 '대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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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빛》 복음 묵상의 향기 '말씀'
[원주교구 이진규 제랄드 신부님(사북성당)]
<쟤 탓이오? 제 탓이오!>
미사를 봉헌하며 참회 예식을 할 때 각자가 가슴을 치며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내 탓'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살아가면서 문제가 발생하면 내 탓이 아니라 남 탓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게 내 탓일 수는 없습니다. 분명 다른 사람의 탓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부 다 남 탓일 수만은 없습니다. 아무리 상대방의 탓이 크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내 탓, 내 잘못, 내 부족함이 있기 마련이지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에 특별히, 대림 2주간을 맞이하는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듣는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노력. 성경에서 전해주는 말씀을 잘 듣고 지키기만 했다면 죄를 짓거나 잘못을 저지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보다 내 것이 더 커지면서 하느님이 자리할 곳이 사라지게 되었고 우리는 점점 죄로 기울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보내어 회개하라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계십니다.
회개란 듣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남 탓할 필요도 없고,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들으려 하지 않는 내 마음에서부터 발생합니다. 잘 듣기 위해, 경청하기 위해 상대방을 향해 몸을 기울인다면 마음이 통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을 향해 몸을 기울이기보다는 상대방이 나에게 숙이고 들어오기를 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툭툭 내뱉으며 상처와 아픔을 주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죄로 물들어가고 내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아기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이 시기에 조금만 더 들으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면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의 마음은 예년과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죄로 물들어져 있는 내 모습을 직면하고 성찰함을 통해 부족하고 죄 많은 나의 모습을 성실히 고백하여 죄 사함을 받아 성탄을 잘 맞이하시면 좋겠습니다. 늘 매번 똑같은 대림시기가 아닌, 그저 시간에 흐름에 따라 맞이하는 판공시기가 아니라 정말로 부족하고 죄 많은 나를 위해 탄생하시는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천천히 지난 시간을 반성하고 고백하는 성실한 자녀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재 탓이 아닌 제 탓이 되고, 나의 내면의 소리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음을 통해 주님을 맞이하는 충실한 종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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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주보》 오늘의 말씀
[인천교구 설재 안셀모 신부님(삼산동성당 보좌)]
오늘 우리는 복음 속에서 세례자 요한을 바라봅니다. 털옷과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광야에서 힘껏 외쳤던 요한, 많은 죄인을 회개의 길로 초대하며, 그들에게 세례를 베푼 요한의 모습을 보며, 당시 요한이 얼마나 주목받은 예언자였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요한을 구약에 나오는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에게 빗대어 묘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글로 인용된 말씀은, 실제로는 말라키 예언서 3장 1절과 이사야 예언서 40장 3절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히 말라키 예언서에 언급된 사자, 즉 앞서 보내 길을 닦아 놓는 그 사자는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엘리야 예언자로 표현됩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말라 3.23)
또 털옷과 가죽띠를 두른 요한의 모습에서 "몸에는 털이 많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두른 사람"(2일 왕 1.8)인 엘리야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더욱이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었던 그곳 요르단강 역시 엘리야가 세상을 떠난 장소와 같아, 요르단강의 요한에게서 엘리야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 보입니다.
구약시대의 위대한 예언자로 손꼽혔던 엘리야 예언자, 그 엘리야에 비견될 만한 예언자가 이렇게 이스라엘에 등장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요한을 예언자로 여겼고(마태 14.5 참조), 헤로데도 그를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마르 6.20 참조) 예수님께서도 그에 대해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고 말씀하시며, 세례자 요한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
자신은 그저 이제 곧 다가올 분의 길을 닦는 존재로서, 그분의 신발 끈조차 풀어드릴 수 없는 존재로 스스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상 앞에서 자기 뒤에 오실 그분에 대해 큰소리로 선포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검소함과 놀라운 말솜씨, 강인한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의 말과 행동이 오직 다가오실 한 분만을 향해 있었다는 것과 그가 성경 말씀대로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는 것에만 힘썼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겠지요.
오늘날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바로 교회 그리고 교회 모든 공동체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이 바로 다시 오실 그분을 맞이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기 위한 일이 아닐지 하고 말입니다.
대림 제2주일을 보내며, 세례자 요한의 모범을 본받도록 합시다. 때때로 입으로는 주님을 위한 일, 주님 뜻에 맞는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 안에 주님이 빠져있다면, 우리는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겠지요. 세례자 요한처럼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고, 겸손된 마음으로 그분을 빛내는 데에 열중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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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정이》 강론
[전주교구 유영 스테파노 신부님]
살다 보면 안타까운 죽음을 만난다. 물론 대부분의 죽음에는 원인이 있다. 병으로 인하든지, 누군가의 범죄나 부족함으로 인하든지 간에, 대부분 그 원인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그래서 아무리 안타까운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 이유를 알기에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한편 이와 다르게 영문 모를 죽음들이 있다. 2014년 4월 16일. 설렘 가득한 꿈에 부풀어 행복해하던 이들이 차디찬 바다에 가라앉았다. 2022년 10월 29일.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벗과 함께 축제의 기쁨을 만끽했던 이들이 차디찬 땅과 마주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304명.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9명.
왜 죽어야 했는지 영문을 모른다. 1년이 지나고 9년이 지났는데도 원인을 아직도 모른다. 아니 누군가 혹은 어떤 세력이 죽음의 원인을 감추는 듯하다. 그 세월 동안 진실을 못 밝힐 연유가 없기에 그렇다.
"인권은 인간 각자가 지닌 존엄성에 뿌리내리고 있다. 인권의 궁극적인 원천은, 인간의 단순한 의지나, 국가라는 실재나, 공권력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체에서 그리고 그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153항)
인간의 권리는 인간 그 자체가 지닌 존엄성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첫 번째 권리는 '인간 생명권'을 지키는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155항 참조) 그런데 세월호·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이들은 소중한 생명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원인마저 밝혀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죽었다. 그것도 상당수의 젊은이가 영문도 모르게. 그러했는데도 이 나라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 세월호·이태원 참사를 막을 수 없는 사고라 여기든지, 혹은 나와 관련 없는 일이라 치부하는 것일까. "인권은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수호되어야 한다. 부분적인 인권 수호는 인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간추린 사회교리」, 154항).
나 개인의 인권만 주장한다면, 내 직업군에 속해 있는 이들만, 혹 어느 일부 지역이나 특정 누구의 인권만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부분적인 인권 수호이므로, 그야말로 인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또 세월호·이태원 참사로 인해 희생된 이들의 진상규명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인권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
자고로 사람은 자신의 출신성분을 맘대로 정할 수 없다. 그러니 내가 만약 안산에서 태어나 단원고에 다니며 2014년 4월 16일에 수학여행을 갔더라면 세월호 참사 때엔 내가 죽었을 것이다. 2023년 10월 29일 밤에 내가 이태원에 갔더라면 내가 죽었을 것이다. 곧 내가 세월호 희생자일 수도 있다. 혹 내 가족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일 수도 있다. 그 현장에 있던 이가 내 가족 중 누군가였다면 그이가 죽었을 것이고, 그게 내 벗이었다면 내 벗이 죽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월호·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은 곧 나요, 내 가족이자, 내 벗이나 다름없다. 아니, 그 들은 곧 나요, 내 가족이요, 내 벗이다.
"공권력의 명령이 도덕 질서의 요구나 인간의 기본권 또 는 복음의 가르침에 위배될 때, 국민들은 양심에 비추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의무가 있다." ("간추린 사회교리」,399)
불과 2주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온 누리의 임금'으로 모셨다. 나는 누구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존재인가. 세월호·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 앞에서도,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막막함에 주저하고 있을 우리에게 한편으론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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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김용주 비오 신부님]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울창한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맞으며 한적한 산길을 걷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길을 걷다 보면, 가끔 잘 가꾸어진 길옆에 자그마한 샛길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르내릴 때 다치지 않도록, 또 경사를 완만하게 하여 힘들지 않도록 만들어 놓은 길과 알 수 없는 이들이 수없이 다녀 만들어진 작은 길이 사뭇 대조적입니다. 문득 '왜 잘 만들어 놓은 길을 두고 다른 길로 다닐까?' 의아해하며 작은 길을 따라 걸어 봅니다. 길을 따라 걷고 나서야, 넓게 잘 만들어진 길보다 작은 길이 더 편하고 때로는 빠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두가 다니는 길 대신 남들이 가지 않은 그 길을 처음 걸었던 이의 안목과 용기에 감탄을 보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장엄한 선포를 듣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곧 하느님 아버지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우리를 위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을 보내신다는 '복음'의 핵심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 복음의 시작에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이사야 예언자가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말한 대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요한이 그렇게 한 것은 장차 오실 그분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분께서 그 길을 걸으시기 때문에 요한 자신 또한 걷게 될 그 길을 미리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 한이 준비하고 예수님께서 걸으심으로써 완성될 그 길은 많은 이들이 걷는 길과는 분명 다른 길이었습니다. 넓고 편안한 길 대신 좁고 불편한 길이며,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는 대신 멸시와 조롱이 기다리는 길로, 용기와 믿음이 있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비록 쉽지 않은 길이긴 하지만 그 길은 인내 하며 완주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입니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며 인권 주일입니다. 인권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권리로서 우리가 주님을 닮았기에 갖게 되는 존엄한 권리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존엄성이 타인과 권력에 의해 쉽게 무너지고 있음을 심심치 않게 목격하는 요즘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장엄하게 선포하는 복음의 시작을 들으며, 많은 이들이 침묵하고 모른 척하며 편안하게 걷는 넓은 길 대신 세례자 요한처럼 남들이 걸으려 하지 않는 좁고 험난한 길,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의 권리가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정의를 외치는 길을 용기 있게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도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을 이 땅에 실현하고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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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 신앙, 구원>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2-8)
여기서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는 이사야서가 아니라 말라키서 3장 1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예언에서 말하는 ‘사자’는 엘리야 예언자입니다.(말라 3,23)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말라키서에 예언되어 있는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7,10-1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는 이사야서 40장 3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서 저자가 말라키서와 이사야서의 예언을 인용해서 세례자 요한을 소개한 것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은 메시아 예수님의 활동을 미리 준비하기 위한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너의 길, 주님의 길, 그분의 길”이라는 말은 모두 메시아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 또는 우리가 메시아께 나아가는 길을 뜻합니다. ‘길’은 ‘삶’을 상징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너의 길을 닦다. 주님의 길을 마련하다. 그분의 길을 곧게 내다.” 라는 말은, 메시아를 잘 맞아들이기 위해서 ‘삶’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회개’를 뜻하는 말입니다.
4절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라는 말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하였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죄를 용서받다.’라는 말은 ‘구원’을 뜻합니다. 그런데 ‘구원’은 메시아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회개한다고 해서 곧바로(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도 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회개’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합해져야 합니다. 만일에 회개만 하고 예수님을 안 믿으면? 그것은 방향이 잘못된 회개, 또는 거짓 회개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져야만 진정한 회개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회개를 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거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와 믿음을 동시에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복음을 믿다.’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즉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회개해야 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야 합니다.>
회개와 신앙이 합해져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없어도 진심으로 자기 죄를 뉘우치는 사람이 있다. 그 뉘우침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그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치고서는, 그 은돈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면서 말하였다.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 ……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마태 27,3-5)
유다의 행동과 말을 보면, 그가 진심으로 자기 죄를 뉘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죄를 뉘우치기만 했고,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살했다는 것은,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절망 상태에 빠졌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뉘우침은 ‘회개’가 아닙니다. 자살이라는 더 큰 죄를 짓는 계기가 되었을 뿐입니다. 8절의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은, “나는 너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킬 뿐이고, 너희를 구원하는 일은 그분께서 하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물로 준 세례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회개의 세례’이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주시는 세례는 ‘우리를 구원하는 세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거행하는 영세식에는 ‘회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가 모두 포함되어 있고, 세례 받을 준비를 하는 과정은, 세례자 요한 때보다 더 엄격하고 철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성령의 세례’는 신앙 여정의 출발점(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세례를 받았다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끝까지) 가야 합니다.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멈추는 사람은, 처음부터 출발하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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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수학의 정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 학창시절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책으로 공부할만큼, 심지어 수학 교과서보다 더 자주 볼 정도로 유명한 책이었지요. 그런데 많은 학생들에게 이 책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 1장인 ‘집합’ 부분에는 책이 새카맣게 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한 흔적이 남아있는데 뒤로 갈수록 그 흔적이 점차 옅어지다가 마지막 장은 아주 깨끗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지요.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해보겠다’는 처음의 다짐이 점점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나태함과 게으름 때문에 시간에 쫓기다보니 후반부는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수학성적이 바라는만큼 오르지 못하고 늘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 모습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철저한 성찰과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초기에는 그 변화가 금방이라도 이루어질 것만 같습니다. 나를 새로운 삶에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어렵게 얻은 구원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열정으로 마음이 불타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의 불씨는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쉽고 편한 것을 찾는 우리의 나태함과 게으름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단점, 허물과 잘못에 쉽게 실망하고 좌절하여 포기해버리는 우리의 나약함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회개가 늘 ‘작심삼일’로 끝나다보니 내 삶과 존재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지요.
오늘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꾸준한 성찰과 회개를 통해 구세주이신 주님을 내 마음에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고 권고합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듯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 때는 골짜기처럼 깊게 파였던 곳이 흙으로 메워지고, 높은 산과 언덕이었던 곳이 비와 바람에 깎여 낮아지는 것처럼, 꾸준한 자기 성찰과 통회를 통해, 회개를 위한 한결같은 노력을 통해, 깊이 파인 감정의 골을 이해와 용서로 메우고, 한껏 높아진 교만과 욕심을 겸손과 순명으로 깎아 평평하게 만들라는 겁니다. 그래야만 주님께서 내 마음 안에 더 수월하게, 더 빨리 오셔서 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이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대림시기를 보내며 ‘회개하라’는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들었고, 자기 허물과 잘못을 성찰하며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주님의 길’을 닦아 왔는데, 우리 마음은 무엇이 달라졌는지요? ‘이런 부분만큼은 확실히 나아지고 좋아졌다’고 자신있게 내세울 만한게 있는지요? 이 천 년 넘게 길을 닦았으면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시는 길이 세상에서 가장 넓고 빠른 ‘고속도로’가 되어있어야 하는데, 그 길은 여전히 좁고 험한 ‘가시밭길’이 아닌지요? 우리 각자의 삶을 살펴보아도, 그렇게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며 사순시기와 대림시기를 보냈으면 언제 어디서 주님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기쁘게 그분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할텐데, 우리는 올해도 또 지금도 여전히 준비되지 않은 부족한 모습으로 ‘그분을 갑자기 만나게 되면 어쩌나’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만약 그렇다면 올해는 정말 달라야 합니다. 회개는 죄에서 하느님께로 한 번 돌아선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 그 상태를 꾸준히 유지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매 순간 하느님 뜻에 깨어있는 자세로 꾸준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 예전의 상태로, 욕심과 집착에 눈이 멀어 하느님께 등을 돌린 죄인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마는 겁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그 길은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그 길과 같은 길입니다. 지금 그 길이 나의 실수와 잘못으로 막혀있다면, 자기 합리화와 핑계들로 그 상태 그대로 방치해둔다면, 그러면서도 자꾸만 남들의 잘못을 탓하며 그들을 비난하고 원망한다면, 내 마음은 그 무엇도 지나갈 수 없는 막다른 길, 어느 쪽으로도 나아갈 수 없게 사방이 꽉 막힌 거대한 장벽이 되겠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시고 싶어도 오실 수 없고, 우리가 주님께 건너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완전한 단절과 고립의 상태가 되고 마는 겁니다.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며 피하고 싶어하는 ‘지옥’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봉독하는 마르코 복음은 이런 독특한 구절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음이, 그분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세상 종말의 순간 ‘심판주’로서 다시 오심이 나에게 ‘복음’, 즉 기쁜 소식이 되려면 다시 오실 그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재림이 마치 ‘덫’이 나를 덮쳐오는 것처럼 두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세상에, 그리고 내 마음 안에 오실 길을 곧게 내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회개’할 것을 강조합니다.
요한의 삶 중에서 우리가 집중하고 따라야 할 부분은 물로 세례를 베푼 그의 ‘활동’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 따른 그의 ‘삶’ 자체입니다. 요한은 고귀한 신분과 대중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뒤로하고 세상이 아닌,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부족하고 약한 인간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음’을 잘 알았기에,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단절시키기 위해 광야로 나아간 겁니다. 척박하고 메마른 땅인 광야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하느님의 도우심과 자비에 의탁할 따름이지요. 요한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길쌈을 하여 원하는대로 옷을 지어입지 않고 죽은 낙타에서 가죽을 벗겨내어 옷을 해 입었습니다. 경작이나 목축을 하여 제 힘으로 먹을 것을 마련하려 들지 않고 광야에서 얻을 수 있는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마저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먹을 수 있었으니 요한은 철저히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순명하는 삶을 산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요한으로부터 본받아야 할 ‘회개의 세례’입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내 뜻과 계획, 내 욕심과 바람, 내 기호와 취향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허락하고 바라시는 것들에 온전히 집중하며 살아야, 내 마음과 지향이 오롯이 하느님을 향하는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사는 이들은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에 집착하거나 연연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심으로써 시작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복된 삶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합니다.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방치해두지 않고 즉시 뉘우치고 회개하여 영적으로 ‘티 없고 흠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첫번째 노력입니다. 자신에게 고통과 시련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시련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주님과 그분 사랑에 대한 굳건한 신뢰와 믿음 안에서 그 고통과 시련을 극복해나갈 힘을 얻는 ‘참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두번째 노력입니다. 우리가 그런 노력들을 성실하고 꾸준하게 해 나간다면,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이 우리에게는 고대하던 구원에 이르는 기쁨의 시간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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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벌써 대림 초 두 개에 불이 켜졌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만큼 맑고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당신 사랑 안에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요한 15장9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국어 공부를 잘하면‘주제파악’을 잘하고, 산수공부를 잘하면 ‘분수’를 안다. 지리공부를 잘하면 ‘있어야 할 자리’를 안다. 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주제파악을 잘한다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과 분별력, 자신의 깊이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수를 안다는 것은 자기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자녀로서의 알맞은 처신입니다. 독일 속담에 ‘개구리는 금의자에 올려 줘도 다시 뛰어내려 연못 안으로 들어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각자는 자기 자리가 있는 법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은 주제 파악을 잘하였고 분수를 지켰으며,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고 그래서 그리스도라 사칭하고 사기 치며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라고 말하며 자신을 확실히 낮추는 겸손함을 보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고 훌륭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그는 결코 자신으로 말미암아 오실 주님이 가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요한이 분명히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분명 구세주가 아니었고 주님의 도구요, 연장이었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고 내 역할이 무엇이며 또 어디까지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으로 실수와 잘못을 범하고 살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가로막지는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죄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고 사랑하십니다. 그것을 안다면 나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선택받은 사람다운 처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구원을 위한 신앙은 무상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역할이 분명해집니다. 이웃을 위한 구원의 도구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에 맛 들이지 않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곳에 서 있어야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한껏 받들어 올리고 자신을 한껏 낮춤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겸손함으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도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2베드 3,14)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주님 앞에 서 있는 나를 먼저 살펴야 하겠습니다.
1독서를 보면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곧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이사 40,3) 하고 외칩니다.
따라서 혹시라도 우리 마음이 광야요, 메마른 사막이라면 곧게 길을 닦아야 하고 서로 간의 골이 진 골짜기라면 메우고, 나를 높이는 교만함이 산과 언덕이라면 낮추고, 거친 마음이면 평탄하게 하고, 험하다면 평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이사 40,10)는 은혜를 체험케 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모르면 길을 닦을 수도 없고 골을 낮추거나 평야로 만들 생각 못하고 결국 주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주제 파악을 잘해야 하고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하며 있어야 할 자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자리가 있습니다. 남편은 남편의 몫이 있고 아내는 아내로서의 몫이 있습니다. 자식은 자식으로서의 자리가 있고 부모는 부모로서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인은 신앙인으로서의 자리가 있습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수도자는 수도자로서, 평신도는 평신도로서의 고귀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겸손이요, 사랑 안에 머무는 길이지만 때때로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두 마음을 품고 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신부가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머릿속엔 텔레비전 드리마의 내용만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결혼한 여자가 멋진 남자를 보고, 아, 내 남편이었으면 좋겠다.
아내가 있는 남자가 어떤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왜 내 아내는 저런 매력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고 해 보세요. 그 가정 안에 화목함이 있겠습니까? 내 자식은 왜 저 모양일까?....
혹 두 마음을 품고, 엉뚱한 것에 빼앗긴 마음이 있다면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빼앗긴 마음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요,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요,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연다.”고 하였습니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겸손함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또한 천국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한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않고 주님을 자랑하는 한 주간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은 밥 먹는 시간보다 밥하는 시간이 더 길고, 돈 쓰는 시간보다 돈 버는 시간이 더 깁니다. 노력 없이는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법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시간보다 미워하며 사는 시간이 더 길고, 만족하며 사는 시간보다 후회하며 사는 시간이 더 길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천상을 향한 삶의 태도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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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 레이더 기자에서 근무하는 어느 장교가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근사한 파티가 있다고 해서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요. 그런데 한 사병이 레이더 스크린을 가리키면서, 그 안에 까만 점들이 가득 채우고 있음을 보고했습니다. 적 비행기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였습니다. 더군다나 미국을 상태로 이렇게 적 비행기를 보낼 나라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이렇게 단정 지어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저것은 우리 비행기이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 비행기 353대가 진주만으로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고, 이렇게 레이더 기지에서는 1시간 전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곧바로 응전했으면 피해를 줄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장교의 안일한 생각에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자그마치 미군 3,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177대의 항공기가 파괴되었습니다.
“깨어 있어라.”(마르 13,35)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바라보게 됩니다. 혹시 우리 역시 그 장교처럼 순간에 누릴 쾌락만 생각하면서 안일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과연 지금의 모습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일까요?
안일한 마음을 벗어버리고, 주님을 바라보는 데 더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 뜻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만납니다. 그는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지요. 그가 이렇게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실제로 세례를 베풀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우리가 모두 철저히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역시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떠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편하고 쉬운 삶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겸손을 갖추어 더 열심히 살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고 살았다고 전합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위해, 그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야 예언자처럼 옷을 입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엘리야처럼 마지막 날을 준비하려고 순수한 음식인 메뚜기와 들 꿀을 먹었던 것입니다. 바로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듯,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아라.”라고 명령합니다. 진정한 회개와 함께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면서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생활을 통해서만 주님께 더 집중할 수 있으며, 주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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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 앞서 나에게>
마르코 1,1-8 (세례자 요한의 설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당신 앞서 나에게>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코 1,3)
내가 가야 할
믿음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믿음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믿음의 길이 되리라
내가 가야 할
희망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희망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희망의 길이 되리라
내가 가야 할
사랑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사랑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사랑의 길이 되리라
내가 가야 할
정의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정의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정의의 길이 되리라
내가 가야 할
진리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진리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진리의 길이 되리라
내가 가야 할
자유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자유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자유의 길이 되리라
내가 가야 할
해방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해방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해방의 길이 되리라
내가 가야 할
평화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평화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평화의 길이 되리라
내가 가야 할
살림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살림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살림의 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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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희망, 회개, 겸손-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보이소서, 또한 우리에게 구원을 주소서,”(시편 85,8참조)
방금 우리는 대림 제2주일을 맞이하여 참으로 애절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자비를, 주님의 구원을 주십사 기도했습니다.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대림 촛불 둘이 주님 오심이 점차 가까워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는 누구나 시인이 되는 계절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기쁨이. 대림의 희망이 예언자들처럼 우리를 사랑의 시인이, 사랑의 신비가가 되어 살게 합니다.
어제 저는 강론을 통해 배움의 여정, 치유의 여정에 대해, 또 우리의 평생 스승이자 치유자이신 주님께 대해 나눴습니다. 오늘 한밤중 일어나 가톡을 열었을 때 뜻밖의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제 강론 끝부분이 인용되어 있었습니다. 팔십이 넘은 자매님이지만 늘 푸른 열정과 순수로 하느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자매님입니다.
-“+찬미 예수님!
신부님, 매일의 강론 말씀은 제 삶의 길잡이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희의 스승, 저희의 위로자, 저희의 치유자이옵니다.
저희의 사랑, 저희의 생명,
저희의 희망, 저희의 꿈, 저희의 기쁨,
저희의 길, 저희의 빛, 저희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하나되어,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대림 제2주일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게도 이미 이런 주님과 함께 살면서 동시에 이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삶의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닦으며 날마다 설레는 기쁨으로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합니다.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우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오시는 대림의 주님의 위로가, 기쁨과 평화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를 찾아 오시는 대림의 주님을 실감나게 상징적으로 묘사하며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분연奮然히 일어나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각자 삶의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을 것을 촉구합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내어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바로 이런 착한 목자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의 우리들입니다. 탄생하실 우리의 착한목자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 삶의 광야에 주님의 길을 잘 닦을 수 있을까요? 그 구체적 방법을 소개해드립니다.
첫째, 희망과 꿈입니다.
희망이, 꿈이 있을 때 자발적 기쁨으로 인내히며 주님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희망과 꿈이 힘입니다. 희망과 꿈을 잃으면 살 수 없습니다. 타락과 유혹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주님 만날 희망이, 꿈이 우리를 기쁘고 행복하게 합니다.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꿈이신 주님이 우리를 하루하루 설레는 기쁨으로 살게 합니다. 오시는 주님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자 꿈입니다. 제2독서 베드로 사도의 말씀이 참 적절한 답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날을, 이분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없고 흠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바로 주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이요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꿈입니다. 바로 이런 새하늘과 새땅의 희망이, 꿈이 우리를 살게 하는 내적 힘의 원천이 됩니다. 이미 궁극의 희망이자 꿈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앞당겨 살고 있는 행복한 우리들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의 희망과 꿈에서 샘솟는 평화와 기쁨이요 꽃처럼 피어나는 행복입니다.
둘째, 회개입니다.
오늘은 인권주일이자 오늘부터 대림 제2주간은 사회교리 주간이기도 합니다. 진정 생태적 회개, 사회적 회개를 통해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오실 우리의 희망이자 꿈이신, 새하늘과 새땅을 열어주시는 주님이 우리를 부단히 회개에로 이끌어 줍니다. 지칠줄 모르는 회개의 동력이 됩니다. 회개는 후회나 감상적 뉘우침이 아닙니다. 오시는 주님을 향하여, 맞이하며 우리 삶의 방향을,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야 말로 영적혁명이요 끊임없이 날마다 회개의 여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회개를 촉구하는 시적 표현이 참 멋집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불평등의 골짜기는 모두 메꿔 평등으로 이끄는 회개요, 산과 언덕의 교만은 낮아지는 회개요,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됨으로 정의와 공정, 사랑과 평화가 실현되는 회개입니다. 이런 외적 회개와 더불어 우리 내면의 평화와 안정을 상징하는 회개의 은총입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습니다. 모두가 순식간입니다.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위하여 참고 기다리십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회개하여 매일 새롭게 사랑의 삶을 살라고 연장되는 날들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와 사랑, 찬미와 감사, 기도와 공부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그러니 살아 있을 때 아까운 시간과 정력 낭비하지 말고, 회개하고 사랑하고, 찬미하고 감사하고, 기도하고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겸손입니다.
회개의 참 좋은 열매가 겸손과 온유입니다. 광야의 의인이자 예언자 세례자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결코 시류와 영합된 괴물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광야 여정, 세상 것들에 중독되다 보면 괴물도 폐인도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참 건강한 영혼의 사람, 세례자 요한은 겸손의 전형입니다. 요한의 절제와 극기의 겸손하고 단순소박한 독야청청한 삶의 모습이 우리에겐 신선한 충격이요 우리를 회개에로 이끌어 겸손하게 합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말그대로 무공해의 삶이요 생태적 회개와 자연친화적 삶의 모범입니다. 이어지는 고백에서 그의 겸손한 모습이 또 우리에겐 신선한 감동입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존재이유이자 전부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세례자 요한은 상상할 수 없듯이 예수님 떠난 우리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바로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거울에 투명히 드러나는 참나의 얼굴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광야에 주님 오실 길을 닦는데 회개와 겸손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꿈이신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회개와 겸손으로 이끄십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함께, 우리를 향해 오시는 주님을 향해 길을 닦으며 마중 나가게 합니다. 끝으로 “詩가 찾아 왔네, 나를!” 아름다운 자작시를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참 아름다운 시이기게 "시"는 "주님"으로 바꿔 읽어도 좋겠습니다. 늘 읽어도 늘 좋은 그리스도왕 대축일 때 주님께 바쳤던 헌시獻詩입니다.
“詩가 찾아 왔네
나를!
은총처럼 사랑하는 詩가
가슴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詩가
나 외로울 때, 그리울 때, 기다릴 때 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참 반가운 손님, 참 기쁜 선물, 참 좋은 연인, 참 좋은 친구인 詩
늘 詩를 생각하며 詩와 함께 살아왔고 살고있고 살것이라네
詩덕분에 하루하루 날마다 늘 평생 한결같이 살아왔네
詩없이 이 삭막한 광야여정 무슨 맛, 무슨 기쁨,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눈이 열리니 온통 詩인 천국이라네
세상에 나보다 평화롭고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네
나 언제나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행복한 하늘 나라의 삶이라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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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신망애 삼덕의 길>
오늘 대림 제2주일은 오실 주님을 위해 주님의 길을 닦으라는 주일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그런데 정확히 얘기하면 주님의 길을 닦을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실 나의 길을 닦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의 길이라면 주님이 닦아야지 우리가 어떻게 닦겠습니까? 주님도 당신이 길이라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이요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길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사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길을 우리가 닦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길은 주님께서 몸소 닦고 오시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오신 주님께서 나에게 오실 길만 닦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그 길을 어떻게 닦느냐인데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데 방해되는 것들, 곧 방해물인 죄들을 치우는 것이고 회개하는 겁니다.
그것을 저는 올해 신망애 삼덕의 관점에서 봤습니다. 신망애 삼덕을 일컬어 향주삼덕(向主三德)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께 향하는 또는 주님을 향하여 가게 하는 세 가지 덕이라는 뜻이지요.
우리에게 이 향주삼덕만 있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침없이 오실 텐데 이것이 없으니 주님께서 우리 문 앞까지 오셔서는 들어오지 못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침없이 오시도록 우리는 첫째로 믿음을 지녀야 하고 반대로 불신과 의심을 우리 안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불신이나 의심이 제게는 교만과 무관심과 즉시 연결됩니다. 교만은 주님이 오시건 말건 무관심하게 하고 무시하게 하며, 그래서 실천적 무신론 또는 불신론에 빠지게 하지요.
그러니까 주님이 오셨어도 오시건 말건, 주님이 내 옆에 계시건 말건, 내 안에까지 들어 오시지 못하여 주님께서 내 안에는 아니 계시고 그래서 주님과 상관없이 내 뜻대로 내 좋을 대로 사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도록 주님께 희망을 걸고 반대로 다른 것에는 희망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야 하는데 아직 세상에 희망이 있고
세상에 희망을 두는 사람은 주님께 희망을 두기 어렵겠지요. 그래서 세상에 희망을 두다가 실망하고 절망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스러질 때가 새로운 희망을 둘 때임을 알아채고 롯의 아내처럼 스러질 것에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것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희망을 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것이 스러질 터인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희망의 또 다른 측면이 갈망입니다. 희망이 원하는 것의 성취 차원이라면 갈망은 원하는 사랑의 성취 차원입니다.
희망이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라면 갈망은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인간적인 사랑으로 대충 대리 만족하기에 하느님 사랑이 없어도 고갈을 느끼지 못하고 갈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희망의 반대가 절망이라면 갈망의 반대는 욕망이며 이 욕망을 몰아내고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닦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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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1,3)
<회개의 세례!>
오늘 복음(마르1,1-8)은 마르코 복음의 시작인 '세례자 요한의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의 사명'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마련하는 것, 그분의 길을 곧게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이었고, 세례자 요한은 이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대림 제2주일인 오늘은 '인권주일이자 사회교리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에서 시작된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짓밟히고 있는 현실로부터의 돌아섬(회개)을 촉구하는 주일'이 바로 '인권주일'입니다. 그리고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져 있는 그늘지고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로의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주간'이 '사회교리주간'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의 세례'입니다. '말보다는 행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행동하는 교회, 땀 흘리는 교회의 모습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 모습의 원조이시자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지금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회개의 세례'는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그리스도'라고 불렸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랬던 것처럼 '단순하게 복음을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외치는, 테이블 위에서만 외치는 탁상공론의 모습에서 벗어나, '몸이 움직이는 세례'가 필요한 때입니다. 요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화두가 되어 버린 '구체적인 행동의 세례인 생태적 회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2베드3,9의 말씀을 곰곰이 되새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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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EYD_f1GdTZ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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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 1, 3)
우리의 허물을
고쳐 나가는 것이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존중어린
삶이 됩니다.
존중이 사라지면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평화도 사라집니다.
존중은
인격적 관계를
맺는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것은
존중입니다.
존중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회개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회개와 실천은
먼저 하느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집중은
우리 마음에
하느님을
품고 사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품고
사는 삶이란
우리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존중의 삶입니다.
존중의 삶은
관심의 삶으로
주님의 길을
환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삶을 치유하는
것은
존중입니다.
무시하고
깔보는 교만이
아닌 겸손을 통한
내적수용입니다.
존중을 부정하면
하느님까지
부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랑의 길은
존중으로 환하게
열립니다.
인권과
사회 교리는
이와 같이
존중으로
완성됩니다.
우리 모두를
살리는 것은
존중입니다.
제 자신과
이웃,
하느님을
존중하지 못한
지난 시간을
진실로
회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삶을
치유하시고
당신의 길로
우리의 길을
치유하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존중으로
우리의 길을
되찾아 길을
곧게 내는
존엄한
인권 주일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참된 존중이
참된 복음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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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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