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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未知界 등 疑問界에 대한 雜念 궁금증 吐露。
未知界 등 상념한바 가르키는것이 어떤 흐름작용이 그런 것인가? 아니면 모든 작용에서 벗어난 곳 일수도 있는 것인가? 또 未知界등이 인간의 상념이나 見解를 뛰어넘은 곳을 말하는 것인가? 도시 이것이 궁금한 것이다。未知界속엔 極樂界 같은것도 지칭할 수도 있으니 그러한 界들을 時空光과 결부시켜 論한다면 시간적인 光明속에 들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공간적인 허울 광명속에 들었다는 것인가? 이러한 것들이 몇 허물 벗은(한허물 벗은 상) 物事象을 말하는 것일수도 있을 것일진데 이것이 또한 현실계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원위치나 미래계 과거계 또다른 차원의 界를 말하는 것인가? 순간의 (오래도록 일수도 있다) 기이하게 보이는 色相化塊나 光相化 速度化 현상이나 實體로써 잡히지 않는 物象形은 過來物事의 現實과 融和제되지 않는 모습이 그렇게 현실공간을 쪼개듯 시간을 초월하듯 나타나 보일수도 있는 것이다.또 過來만 아니라 他界의 立長을 代辨하는 것 또한 그렇게 보일수도 있다 할 것이다. 융화된 모습은 현실세계로 나타나 보이는 것일 것이니 현실세계가 지어지는 方式을 취택한다할 것이다。以上은 순전히 상상력 개념에 의한 未知의 일부분의 표현을 말한 것이다。未知 극락이라는 것은 一切의
고를 벗은 곳일것이니 그 象形化次元이 어떻든간 行作用이라는게 있다면 그 行作用이 羅列森羅象間 爲害란 뜻을 모르는 곳일것이다。또 그 感의階梯가 몇 층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樂感하는 方式이 空食空滿일 것이니 산해진미를 먹대 또는 情人과 交感에 있어서도 空感(性覺이 一種의 想念으로 그려 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억측을 해본다。언젠가 정보매체에서 들은 것 같기도 한것이 기억에 되살아난 것인지도 알 수 없다)으로 먹고 락을 누리니 物事象間 爲害가 있을 수 없고 또 物事象이란게 실제론 그 形象만 있고 實體는 없는 氣形의 次元으로 짜여져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特理態의 具成을 말하는 것인지 徒是 무엇을 어떻게 감이 잡히지 않아서 궁금증만 자아내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할것이다。한 허물 벗은 곳이 一世界라 할것이나 多群像 世界일 것이니 꽃은 꽃이란 것을 가르키는 것일수도 있을것이니 原來 以現實界가 그렇게 벗은 것인데 보는이의 관점이 아직 修行中에 있어 미달이라서 갖은 苦의 덩어리로 보는 心目의 次元속에 갖혀 그렇게 보인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또 극락界란 것은 인간의 理想추구界가 어떠한 차원의 단계에서 나타나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未知界라 하는 것엔 극락을 가르키는 뜻은 일부분에 불과하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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物事
및 生命의 胎動과 現實界의 緣關 關係 어떠한 事物을 構成코자 하려는 元素라 하는 것들이 相間 충격적인 行에 의해 (極感받음) 지울 수 없는 아로새김을 받아서 그 알음알이(알알이 또는 점점이、覺覺의 결정체점 眞骨髓)가 맺혀 이어진 상태가 生命力을 띄게 되고 (((生命있다는 표현 그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更直된 것이 아니라 差等的覺의 연결((들쑥날쑥한 모습 마치 太古의 신비를 간직한 동굴의 종류석筍처럼 기기묘묘한 흐름의 形을 짓는다. 이쪽 벽면에서 저쪽 벽면까지의 (可視거리內 설령 可視거리內가 아니고 추측 상상거리內라도 그렇다)는 妙한 모양이나 신기한 모양을 그려내는 것이다))로 말미암아 一字式이 아니라 曲線으로 方向을 잡아 움직임의 象을 띄기 때문이다) ))그 생명力을 띈것이 後生의 깊은 파임새김 遺傳性을 띄고 이것이 또한 기억장치에 入力된 것과 같아 本能的인 作用(行動)이라는 것을 일으키
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장황(황당무궤일수도 있다)한 논리에 의거해서 모든 생명체는 차츰차츰 進化의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이다。原素될만한 것이라 하는 것은 그 始作點을 말하는 것이니 어떤 現한 物事라면 어느 지점을 취택한 표현이다. 흡사 人象을 그대 눈을 먼저 그리는 거와 같고 얼굴 模形 외곽선 흐름어느 지점부위부터 긋기 시작하는 거와 같다 할 것이다.그러므로 아무것도 아니라 하는 것이 아무것도아닌 것이 아닌 것이다. 곧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시작해 그리는 것이니 그 아무것도 아니란 것은 시작점 및 그 以前의 與件과 具象의 原因提(製)供無限(어떠한 論理를 갖고 들여 대거나 논리로 규명할 性質(또는 경계가)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미 긋고자 (劃一)하는 着相의 始發點이 곧 그 속에 포함된다할 것이니 어떤 元素라 하는게 知見으로 밝힐 수 없는 特理한 性格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以上의 말들이 또한 未知界를 파해쳐 볼려하는 치우친 견해요 삿된 잣대를 들고 어림 짐작으로 가늠해
보고자함에 불과하다할 것이다。現한 物事나 象을 들어 말함은 현실계의 그냥 이렇게 생긴 立場을 代辯하는 것일 뿐이다. 아무데서부터 긋기 시작해도 의도하고 있는 그림은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설령 뒤집히는 내장을 먼저 긋는다 하더라도 그 原理는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 個人的인 概念과 集團의 개념의 差異
어떤 사람이 자기몸 어느 부분에 (어떤 原因이 있어) 통증을 느끼거나 상처가 부르터서 아픈 표현을 짓고서 양손으로 주물르고 두들기는둥 어떻게 좀 응어리가 풀리고 낳게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그러는 中
너무 고통스런 마음에 생각하길「아이구! 내 팔자야! 이게다 그놈에 것 때문이야!」하고 他自의 탓을하게 되고 他自의 탓을 한다는게 비약되어 도리혀 치료코자 하는 일신의 한部分인 自己의 양손이 그렇게 한 것인냥 (손발이 안맞아 빚어진 탈처럼 여기거나) 또는 그렇게 누구를 시켜서 사주한 것 인냥 여기게 된다면 치료고 뭐고 손이 원수처럼 여겨지게 될 것이다。
즉 아픈 상처의 立長에 서서 代辯할 때 그손은 병약을 번갈아 가면서 주어 골탕을 먹인 다음 자기의 실리만을 챙기려 드는자로만 보일 것이다。이것이 아픈 것과 치료하는 손과 머리 두뇌와의 三者구도로 짜여져 있는 것인데 이러한 개인적 개념 一身에 事를 집단의 개념에 적용시킨다는 것은 무리라 할 것이나 그 일어나는 事를 볼진데 집단을 具成하는 形態를 취함으로 집단의 개념으로 이끌어 볼진데 그 어떤 집단사회의 病釐현상이 곧 이와 같아서 病樂을 갖고 농락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할 것이다. 치료하는 손의 立長에서 볼 때는 병든 곳이 제가 지은 허물을 아랑곳않고 남에게 탓만 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니 반성할줄 모르는 어리석고 부끄러운 초췌한 허물을 내보이는 모습이 그 꼴이라 할 것이다。또는 病쪽의 심하게 질책하는 감度가 깊이 자극받게 당도하면 손이 느끼길 내가 무슨 지나친 행동을 했나 하는 자기를 돌아보는 기회도 된다 할 것이다.이것은 결과가 어떻게 된 다음 힘있는 자의 뒷전의 생각일 뿐이다。개인의 통증처와 치료처는 머리 두뇌의 한 허물 벗고자 하는 작용에 의해서 제반事가 일어나는 것이지만 집단사회는 누구 어느 한쪽을 위하여 누구 어느 한쪽의 회생을 강요하는 듯한 현상이 일어난다면 개인적인 개념과 차이가 있다할 것이니 만약 집단현상도 머리 두뇌와 같은 者가 있어 三者구도로 짜여진 것이라면 이것은 짧은 소견일줄 모르지만 그 치료하는 쪽을 옹호하는듯한 흐름작용이라 할 것이니 병쪽의 반발을 무마시킬 대책이 어떠한 구실을 대던간 적당치 않다할 것이다. 몇번허울 벗은 나중 후생身이 극락 천만당을 간다하더라도 지금 당장 고통에 든 처지는 생각지 않는 作態라 할것이다.
그래서 立長의 利害得失에 따라 제삼의 조정자나 대처하고 있는 일이 상대성을 띄게 되는 것이니 병든 처지에서 볼 때는 보는 자세에도 문제가 있다하겠지만 모든 일어나는 현상과 집단의 두뇌라하는 흐름작용이 삿된 끝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그 병든 편에 들은 者들은 立案의 上頂처럼 檀位에 上頂된 삿된 끝을 끌어내리려고 애성에 받쳐 악을 쓰는 것처럼 되나 삿된 끝은 바람부는 나무에 찰싹 달라 붙은 거머리와 같아 그 흐름을 바꿀 의향이 전혀 없는 것이다. 나무는 제 놀이터요、제먹이요、제집이요、제몸이요 저라는 것이다. 이것은 삿된 끝에 메인 논리 스스로를 卑下하여 비참하게 하는 논리ㆍ 모다 내가 그病藥의 事를 지어 나를 여가시키기 위하여 (한 허물벗기 위하여) 조정하는 것이라 한다면 모든 일어나는 현作用 삿된 끝이라 하는 것도 저 앞서도 말했듯이 내 종사자에 불과한 내 아래 내 일 해주는 자일 뿐이니 나를 높이 올려 놓아 삿된 끝이라 하는 모든 일어나는 현상을 눌러 잡아보면 오히려 나의 일해주는 고마운 치켜세울만한 天人 天使 如來로여겨 질것이니 나의 일 진척에 의하여 겹겹이 쌓였던 내 허물은 한올 한 올 절로 벗겨진다 할 것이다。事必歸正인 것(※ 문맥 흐름상 여기서만이 사필귀정이란 뜻이니「正은、힘이 있어야 正이 되는 것이다.그러므로 그 以前에 전개되는 상황이 이와 反相으로써´ 힘이 있다면 그것이 외형만 삿되지 正인 것이다.)이니 그것은 곧 無力한듯하나 邪를 누를 大力의 功果를 成就한걸로 됨인 것이다。※ 삿된 끝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에 논리로써 또 괴뢰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금할길 없다 할 것임.
지례짐작 노파심 自我를 위한 충고적인 경계 또는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할까하는 우려석인 번민, 어떤이가 생각하길 자기가 하는 일에 긍지를 갖길 지금 내가 이렇게 하는 일이 森羅大衆에게 功獻하는
일이나 이일로 하여 훗날 이것이 나의 약점작용을 하여서 어떤 핍박의 운명의 時空間이 到來케 된다하더라도 나는 개의치 않고 기꺼이 기여코 이일을 감행하리라 한다면 이는 실로 나라는 존재를 버린 그릇일수도 있다할 것이다.그 핍박의 시공간속엔 시험코자 하는 피치못할 여러가지 시련이 들어 있을 것이니 때로는 모멸감과 수치심과 그 義롭지 못한데 연루되거나 관여케 되어 自(壞)(부끄럽다는 뜻만이 아니라,스스로 무너지는 암담한 맛을 맞게 된다는 뜻)감 같은 것에 빠짐을 堪耐해야만 할 처지에 이를지도 모르리라 (즉 끼친 결과에 대한 책임 여러가지 파장이 일어남을 감수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마치 삭혀야 할 것들이 (깨트려져야 할것들이) 의문과 시험꺼리를 갖고 잡고자 하여 나무에 올려 놓고 뒤흔들 듯이 魔種으로 卞한 것처럼 해가지고 빠질만한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거와 같다. 알면 빠지겠는가? 하지만 빠지지 않으면 무엇으로 그 허전함을 메꾸리! 평소 행하는 길가에 피어 있는 들꽃처럼 해가지고 있는데 어찌 눈의 보는 거리내에 들어오지 않으리! 그것은 개의치 않더라도 절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안빠지겠다고 몸을 도사릴수 없는 것이다.念願을 이뤄줄 門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사람의 心氣를 씀중에는 간특한 면도 있음이라 심기가 간특 고소한 맛을 느끼는 것도 이뤄질 門속에 염원을 이룬 모습인것이다。여러 사람들 中엔 그 實利를 爲해서라면 聖賢에 말씀같은 行事에도 (벽창호 처럼 빈틈을 찾아)파고 들어 헤집어 파훼코자 하는 그래서 실리를 취하려는 자기의 장점으로 利用코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사람들은 실리란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덤벼드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事의 結果를 生覺지 않고 눈앞의 見指에서 (벌어지는 상황) 단순한 行함을 짓는자라면 그행사의 결과에 대한 아무런 책임의식을 느끼지 않아 훗날 이로 인하여 자기에게 불이익한게 닥쳐온다더라도 개의치않는 낙천적 성격의 소유자나 無知하여서 그렇다할 것이다.
모멸감 수치감 자괴감 등 이런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注知시키는 표정이 아닌가? 한다。이런 느낌이 들게하는 것이나 할려해도 그런 느낌에 들지 말아야지 실로 그릇을 비운 位가 되었다할 것이니 이것은 無感의 척도가 아니라 大達한이의 모든걸 達貫했다는 표정을 짓는것을 말하는 것이니 그렇게되면 아예 시련같은 것은 사탄 명함도 못내밀 것이고 오히려 그 시련이 가르침 받는 모습을 代辨하는자로 보일것이므로 그런데도 사단 운운할 것인가? 즉 운명의 시간과 장소와 여건도 그 弟子의 역할을 하게된다는 것이다。이러므로 그 일을 하여 삼라대중에게 공헌하는 것이 至大하다 하지 않으랴? 이 말씀이다。우주 삼라는 저마다 事業의 德化를 입는 것이니 그것은 핍박의 개념이 아니라 자기가 끼친 영향에 의한 혜택의 개념으로 되돌아온다 할 것이다。(이는 보는 이의 당하는 이의 관점에도 달렸다 하겠지만
…) 그 시련이라는 생각은 사탄의 모습을 (보는 관점이 삿되어 제반(諸般) 보이는 것이 삿되게 보이는 것) 登場시켜 그에 메이는 것。그 스스로가 끼친 業積이라하면 같이하겠다는 동반자적인 얼굴, 친화를 도모하는 것。내가 벗어논 허울 씨를 뿌린 것이라면 당연히 감수해야할 것 여의롭지 못한것이 당도한다 하더라도 달갑게 여겨야 할 형편이리라。삼라에게 어떻게 비춰지던간 운명을 개척하고 순응키 위해 여러 형태의 (목적을 위한 수단) 技能을 발휘하는 것은 正當한 것 저것을 여기에 끌어잡아 제實利를 위해 남에 약점을 잡는 것은 비루한 것。이래서 논리모순이라는 것이다。世上事 어지러운것 입찰적 흥정을 하면 흥정자의 취약점을 찾아 그렇게 못하게시리(그렇게하면 가혹함을 당하기 일수이기 때문이다.) 되흥정하기일수요 수의 계약형태로 낙찰되는 것이다.「그 정도는 알만하신 분(그럴입장이나 형편이 아니신데)이 그러시다니…그러실분이 아니신데… 어쩌구 저쩌구 말이다. 얼루고 뺨치고 저마다 실속을 차리고 미친개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몸을 도사리고 어떻게하면 저狂犬을 때려잡을까 궁리하는 것이다. 누구나 약점이 잡히면 그힘이 장상공후의 권력이라도 미끼에 걸린 고기 투망에 잡힌 고기라 맥을 못추게되고 약점을 잡으면 當事엔 天下를 얻은것 같으리니 어떻게 발악하는데 되쏘이지 않고 요리하느냐를 궁리하게 되는 것이다。對人관계에 있어서 실리를 챙기려는 행위가 도에 지나치다보면「그사람 다시는 상대치 못할 사람인데ᆢᆢ)
· 하는 인증을 받게되면 減의 要因으로 作用하여 신의 잃고 거래가 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잡다한 얘기를 필자가 왜 늘어놓는가?…先困後泰가 있고 先泰後困이 있으니 억만장자가 나중에 알거지가되어 길가에서 凍死하듯 실생활은 여의롭지 못하더라도 풍요로운(족함을 알면 풍요롭다) 마음에 삶이 훗날에 여의롭지 못할까해서 경계하고 조심하는 차원에서 이런말을 하게 됨이고 또 前에 겪었던 일을一部내비춰 보임이다.
時空一象이라하는 것은 분리해서 본것이 아니라 多樣象(여러 얼굴(相)을 묶어)을 말하는 것이다。시공의 无象 얼굴없는 象(相無象)이라 하는 것은 그 다양상들을 벗은상(여러 얼굴을 허울벗듯 벗은상)이니 그것은 그릇을 비운거와 같아(빈그릇이란 틀을 만들은 거와 같아) 빈그릇이 되어있어 諸脫을 收容한 象이다。
◎ 過來란 時間的인 槪念과 現實空間과의 一象이란 것에대한 삿된 家見으로 본 說明。그 時間的인 것을空間으로 펼쳐보면 한곳에 집단 群落。多群象을 이뤄 다있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공간이 풀린것이 시간이고 시간이 亭滯化하여 色化등 각종 공간형성 元素(原素)化하여 立體의 성질을 띈 것이 (설령 立體의 성격을 띄지않은 點面의 상태이나 그 以前의 파장등 그 어떤 형태라도 그렇다。※ 이것은 생각을 그렇게 기울겨보니까 그렇치 그 아니라는 反對로 기우는 反相尺을 들여밀면 그렇치 않을 수도 있게(그렇치 않게)되는 것이니 즉 시공은 그 상호간의 解와 亭滯의 성질로 다룰게 아니란 뜻이다。))空間인 것이다。(시간과 공간의 풀림과 정체는 방법론적인 논리다) 輪劫前後生의 翻覆은 그 허울의 바꿔치기(둔갑)인 것이다。분열과 凝縮은 一象이다。시간적인 分列은 前後生으로 나타나고 공간적인 분열은 이탈저탈 空象 시간의 응축化한 象이라는 뜻이니 시간적인 의미를 달리말하는 것 중 하나가 공간이요 공간적인 의미를 달리말하는 것중의 하나가 시간적인 것이다。캐고보면 一人이 이옷저옷을 번갈아 입는 거와같고 그 一人은 指稱하는 것 또한 心性象의 하나의 脫일뿐이다。心性이 또한 家見이니 一切 指稱하는 모두가 탈、 허울이라는 것이다。알속이라 하는 것도 이 가견이라는 것이니 벗어야할 대상중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즉 깨고 깨여서 (뒤집히고 뒤집혀서) 그런 깨임 과정속이나 결과가 크게되면 一切의 家見을 끌어잡아 收容하게 된다는 것이다.혹이 말하길 그것도 家見이 아닌가한다면 그렇다 그것 또한 家見이다。그렇기때문에 마치 하늘이 땅으로 뒤집히듯 또는 여러형태의 오랜 겁을 지나 지금에 옥황상제 지위에 올랐다는 醉醒者類의 얘기가 있는 것이다。그 시간의 어디까지의 도막을 지어 펼쳐보이는 것이 어떠한 집단군락의 공간을 이룬다는 것이다。시간이 서로간 그 시간이 아니므로 다양한 공간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이를테면 열시오십분부터 열두시까지의 시간흐름작용 役事의 도막을 펼쳐보인 것이 어느 한 공간 즉 현재 내주위의 공간이라 한다면 이러한 같은 시각때의 도막시간은 하나가 아니고 무량多群象이라는 것이다.그러므로써 森羅万有가 存在케되어 여기저기 거기등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여러형태의 혼합과 겹치는 모습이 또한 시간의 흐름작용이 그렇다함을 代辨하는 모습이니 시간은 섞히어 흐르고 있어 万有의 變異를 낳게되는 것이며 같은 시각때라도 밤낮이 있듯이 시간의 役事力은 運動作用을 일으켜 다른 모습을 띄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이쪽이 있음 저쪽이 있듯이 한국 일본 등 기타 공간象들이 연이어 형성지어지게 되는 것이다.그러므로 그 시간때는 그 공간에 부합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할 것이다. 즉 그러한 공간이 있다는 것은 그러한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있다는 것을 있을것이라는 것을 있어야지만 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수 있는 것이다.그 시간때는 다군상 시간때로 다양한 家見의 性格을 띈것이며 이렇게 관점은 어떠한
그렇지 않을까하는 또는 실제 그렇다하는 一相에 치우치게 되므로(삿된 관점이 되고) 그보는 관점에 얽메여(얽매이는 理由는 家見이 무너질까봐 가견이 무너지면 의지처를 잃어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던가 푹- 쓰러질까봐 계속 주장을 그것이 그렇다고 내세우는 것이다)서 巨視的인 包容力을 잃는다는 것이며 사소한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이것(見解 事實的인 事物이라도 見解 家見에 붙침)을 벗어야한다.
時間의 槪念을 공간적인 것으로 펼치면 어떠한 관련된 諸象이 한곳에 모여있게 된다는 것이다(설령 관련지어지지 않은것이라도 한곳에 섞여 집단군락을 이룰수도 있으며 동서양의 交流와 같이 관련지어진 것은 인연의 끈에의해 他空間에도 배치된다할 것이다) 그렇게되면 저기 꽃들도 저기 있는 나무도 古刹안의 石像도 나였다는 것인가? 그렇다 나 였다는 것이다.또 나 일것이라는 것이다.주위가 모두 一象(相)化하여 나라는 것이다。이것은 넋의 分列相이기도 하고 넋의 一集相을 한눈으로 보는것이기도 함인 것이다.그러므로 기억장치에 입력된 여러가지 형상지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왜냐? 지금 그 自體로大自我의 두뇌에 入力된 모습이(情報) 저 森羅萬象事이기 때문이다.또한 그래서 지금현재 현실로 고래를 다보고 다 겪고 있기 때문이다。(未來라 하는것의 변모하는 모습도 모두다 그에 근거를 두고있어 形質 態의 卞貌。현상 일어나는 것을 가르키는 것이므로 과래라 하는 것이다) 또 기억장치에 입력된 정보에 의하여 合成되는 여러가지 形狀態를 의심할 필요가 없다。왜냐? 그것이 현실의 諸作用。物事에 있어서 可能하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차림(프로그램) 굴레바퀴가 굴러가면 인쇄되듯 찍히는 것이 공간의 多群象立體現相인 것이다(여기서 입체현상이란? 無感 추측, 상상감 등을 포함한 諸感을 말한다) 즉 말하자면 그 시간속에 절대 상대 등 모든 性格을 띈 空相의 이 모두 들어있다는 것이다. 어떤 무의식 상태에서 그리는 것 또한 입력된 정보의 合成에 의함인 것이라 할 것이라곤 할 수만 없으며 또 과래의 것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다。변모하는 것이 공간 다군상이다. 그것은 시간속의 다군상도 가만히 있질 않고 변모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저 空間群象에 없는 것이 있듯이 입력되지 않은 것은「모른다」하는데 느끼지 않고 그리는 것은 白紙상태와 마찬가지라 어떤 들어있는 정보를 갖고 상상 예감(感만 미리 당겨온다) 추측을 동원하여 合成된 것을 그린다거나 그냥 백지상태로 있게 되는 것 중의 일부 뜻하는 바가 곧 저쪽의 여러 형태의 변환한 표현일수도 있다. 하필 쪽집게 같은 것만의 표현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됨 관점의 顚倒가 너무 심할 수도 있으니 모를 갖다 윷이라할 것 아닌가 할것이다。이것을 어떻게 辨在할 것인가? 한다면 바로 그렇게 보는 것이 正常的인 관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니 마치 서너살 아이가 좌우의 신발을 바꿔 싣는게 바로 싣는 것처럼 여기듯 말이다.이것은 착각이 아니다。觀하는 이의 作爲變貌도 正常에 참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과거엔 어떤 물건이 저기 있었는데 지금은 그 물건이 저기없다。즉 기억장치에 입력된 정보가 사라지듯 잊게 되었다。과현래가 같이 있다면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은 곧 他界 次元을 달리하는 界로 化하였다는 것인가? 그렇다 겉상으로 변질된 모습으로 옮겨간다 할 수도 있겠지만 次元을 달리하는 界로 化하여 只今이라는 것과 融和되지 않는 모습이 그렇게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즉 과래가 차원을 달리하여 현실과 융화되지 않는 모습이 소멸된 것으로 나타나고 이반면 次元을 같이 하겠다는 것이 새로 生成되는 物事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라고 할것이다。 즉 이 모든 것은 허울의 현상이니 벗어치울 대상이라는 것이다。시공적 다양한 견해(相=家見)를 갖게 되면 이건 이렇고 저건 어떻고 등 鳥類가 지저귀는 것처럼 관여가 되어 얽매이게 된다는 것이다。관여하는 것은 분변하고자 함있고 분별하는 것은 편당을 짓게 하는 것이고 五穀(이 말은 다양한 견해를 일으켜 ㅡ家를 지어 보인다는 뜻)等 一家를 지어 보이는 것이고 균형을 維持코자 한다하더라도 언젠가는 한쪽에 쏠리게 마련이고 쏠리면 그에 집착되어 벗어나지 못해 번복되는 윤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는 것이다。그렇게 해서 혹 깨이고 깨여 벗어나는 수도 있다하겠으나 끈적거리는 오물통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아 그 고통이 심했다는 표현이 오래도록 가시질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 말이 문맥이 통할런지 모르지만 여기서 作爲變貌를 말하였는데、보살의 베푸는 관점의 작위변모는 여러 형태일 수도 있으니 보살이 어떤 치우친 양상에 머물지 않고 대승적 견지에서 계속(濟度) 爲하겠다는데 사용하는 그 掃灑 모습은 필요에 따라 여러 형상을 지울수 있으니 삼라제象과 삼라제行인 것이다. 즉 소새 모습 뒤바뀌어 놓기 때로는 꽃과 나비(장소와 시간의 변형을 가져 오는 것이나)장소 따란 시냇물과 수양버들 등 다양한 형태일 수 있는 것이다.
◎ 法이란 뭔가? 法字形을 볼진데 여러 知識人들이 풀어 말하길 물(水)이 감(去)을 형상하고 있다한다. 즉 물이 흘러가듯이 順理대로 엮어 재킨다(다스린다)는 뜻이다。물은 높은 데서부터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 哲則이다.그 물 흘러 오는 것을 받아주는 자리(位)가 어떻든간 물은 平平하게 메꾸려 하는게 물의 성질이다.물은 흐름바닥이 어떻든간 平하게 하는 精神을 갖고 있다(※ 마치 地球가 둥글듯이 平은
곧 空을 이뤄 空이 되는 것으로도 볼때도 있다(이는 왜 그렇게 되는가? 宇宙의 큰 星(알 卵)들이 표면장력이라는 것에 의해 그렇게 된다한다) 平은 곧 궁극엔 立長이 둥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直이 또한 그럴것이며 어떤 指向을 가르키던 그 궁극의 目的하는 것은 立體性을 띄게 되므로 둥글게 된다는 것이다.큰둥글게 되기까지의 作用이 生動한다는 흐름은 사시적 곡선 나선을 이루어 나아가는 것이고 그것의 다양한집합 積滯현상이 空化하여 타나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重力、引力、遠心力 등에 의한다고도할 수 있다) 이를 본다면 관점은 한계가 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一定한 거리內에서만이 平이라는 것이다。視野를 벗어나면 平의 개념은 다른 개념으로 바뀐다 할 것이다。설령 可視거리內라도 수평선이나 지평선은 兩끝이 시야에 사라지는 모습이 둥글게 보일수도 있을 것이며 바다 한가운데서 삼백육십도로 회전해본다면 하늘은 둥그런 뚜껑처럼 덮혀져 있을 것이다) 물(水)은 주위 여건이나 外部의 영향에 의해 성난파도처럼 격랑을 일으키기도 하고 잔잔한 호수처럼 태평한 모습을 띄기도 한다。이처럼 물은 환경이나 여건에 支配받는 성격을 띄고 있다。이러한 물의 성질을 띈것이 法이라는 것이다。즉 法은 물흐름으로써 때로는 順하고 때로는 嚴하게 제키대로 트인곳이라면 스며들지 않는 곳이 없으며 (막으면 차오른다) 그 짜인 틀(法態)을 지키는 律대로 움직이는 몸을 위해 갖고 상을 거스리지 않는 그러한 조성된 여건에 순응하여 묵묵히 일만 하는 머슴일꾼과 같다 할것이다。이같은 환경 생김 연건조성은 누가 하는가? 그것은 宇宙森羅의 흐름작용이 일으키는 것이다。이처럼 삼라가 조성하고 삼라가 그 法에 제약받거나 의지하여 그法의 흐름 영향을 되돌려 받는 것이다。그래서 法은 어떤 구심점을 둘러 에워싼 여러가지 森羅의 허울상이 되기도 한다。이렇게 조성된 여건에 순응하는 法을 갖다 그 行의 잘잘못 나타남을 法行自體의 原因이나 業積이라고만 할 수 없다。人事의 秩序를 定立함에 있어서도 法의 本性質을 따른다면 制定한 法은 人事가 부리는 종사자에 불과한 것이지 그 法이 人上에 군림하는 월권적인 성질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法은 司命을 委任받은 執行者에 따라서 월권적 行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또 그 法은 집행자에 따라서 스스로 耳目을 닫거나 手足을 묶는 것처럼 하기도 하는 것이다。法은 行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가 있다。諸森羅가 多樣한 法에 이뤄진 法의 허울(家體=衣)이라면 그 法마다 뜻하는 各樣의 性格을 띄어 各樣 한 現象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法을 또한 힘의 强弱相으로도 볼 수 있으니 약한 것은 강한 것에 밀리거나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잠식하는 표현을 짓는 것이 여러 法相의 모습인 것이다。물이 굽이를 짓거나 격랑을 일으키거나 호수를 만드는 것은 물의 힘에 의해서 기도하지만 조성시키는 여건 힘에 밀려서 그렇게 되기도 한다 할 것이다。何必 물만이 法의 성격을 띔이 아니라 조성시키는 여건이 또한 法이기도한 것이다。약한 法은 힘센 法에 저항코자 하더라도 먹히거나 도피하게 되있는 것이니 逃避한다는게자리(位)를 내어주는 듯한「휨」굽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즉 法이 센것을 좋은 말로 그 意指相을 바꾼다면 덕이나 好運이나 福이나 하는 것 따위로 美化하여 말하는데 사실은 이것은 法相의 하나의 허울 역할을 맡은 명칭일뿐인 것이다.또한 나쁜 얼굴로는 갖은 邪僻스런 명분이나 명칭을 달게 되는데 이 또한 다른 면의 法의 허울임인 것이다。이렇게 法은二重三重 등 다양한 見解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하필이면 사람을 속박하거나 지도편달 활동을 培養시키는 것만이 법이 아닌 것이다。人爲的인 法이란 것은 사람들이 뜻을 會合해서 그렇게 하자고 약속을 定한 것(規範)인데 法이 그렇다는데야 被法의 位置에 섰을땐 어찌달리 벗어날래야 달리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 그런것을 다 감안하여 法을 定하였기 때문이다。재량도 그 法의 테두리內에 있음이니 벗어나면 濫用이나 越權이기 때문이다。그래서 自法相 허울이 미약해서 당할때는 규제하는 法을 야속한 허울이라 하기가 십상이고 좀 어떻게 고임받을때는「거참 아
주 좋은 法인데」하는 것이다。세상에 약속한 法이 좋은게 많으니까 이렇게 諸般法相이 扶持하게 되는 것이지 사악한 편을 드는게 많다면 모든게 제대로 부지할 수 있겠는가? 이런뜻이다.그러나 또한 선악이 法相力에 의해 정해지고 그 力을 대변하는 刀劍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이를 본다면 어떠한 견해(相家)이던 영원한 진리는 되지 못하여 그 띄고 있는 모습이 그 파훼를 自招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파훼코자 저만치서 다가오지 않으랴? 빨리 버리거나 유행성 처럼 떠나갈때만이 의지하고 있던 法相만이라도 손상받지 않는다할 것이다。「일체 모든 것 지칭하는 것이 번민法相이니 모두 버려라!」하고 지금 두뇌를 지배하고 있는 邪惡한 空관념이 줏대를 잃게 시키고 있고 그렇게 놀아나는 것이 껍데기 둥신 붓필끝인 것이다.法의 다른말이 갖은 지칭하는 뜻이나 명분 등 견해이라했다.세상에 덕이 있어 큰 산 이처럼 된 자는 속박하는 法 물굽이 처럼 돌아가고 복덕이 없다못해 푹파인 고랑처럼 사악한 허물을 뒤집어쓰게 된 자는 도피한다는게 파이는 쟁기를 끌고 다닌거 같아 물이 그 灌開水路를 따라 찾아들듯 메꾸어 속박한다할 것이니 어디 멀리 도피치 못하리라。그 쓰겁게하는 시련이 徒是 윤겁에의해서 그렇다함이던가 ᆢㅡㅡ
以上의 모두가 法相이란 허울에 갇힌 모습이나 그 山이 장철 隆起의 높낮이가 같다고 할 수 없고 그 고랑의 깊이가 항상 그렇다고 할 수 없으니 가치관의 전도에 따라 相도따라 顚倒되게 되있는 것이니 강 약이란게 그렇고 선악이라는게 그렇고 一切의 번민적 知見이 한결같은 주장을 갖을 수 없다는 것이다.
◎ 宇宙를 十段階의 世界로 나눠서 관찰한다면 三次元의 世界는 立體의 世界이며 活動의 世界이고 四次元의 世界는 이렇게 저렇게 돌려가면서 無方에서 无方으로 照明하는 照明의 世界이고 또 靈(未感影象=혹그림이거나 그림자와 같은 것이거나 확연하게 그것이다 끄집어내서 보일수 없는 그런 추상적인 象體) 神이 빠져나와서 自脫의 (他脫도 포함) 모습을 둘러보는 世界이며、五次元의 世界는 조각조각 分列된다거나 會合凝縮擴散하는 大小輕重等 質、量의 世界이고 六次元의 世界는 뒤집히는 顚倒의 世界이고 七次元의世界는 원위치復來 再蘇生의 世界이고 八次元의 世界는 多樣群象들의 森羅의 世界이고 九次元의 世界는森羅를 相對하여 있는 對象의 世界이고 十次元의 世界는 宇宙萬物을 담은 그릇(器)의 世界 諸脫(허물)을떨쳐버린 不意識(일부러 의식치 아니하는 것도 포함)의 世界이고 큰 圓空도 알갱이 작은 圓空도 알갱이테(回)의 存在有無 明不明 多樣見解 主長줏대(主幹)의 固守 主長줏대의 훼절 卞節 等等 其他空 性覺具備의 世界이고 壹次元의 世界는 性覺에 의한 想念한바 뜻한바를 아무데서부터나 그리고자 하는 準備 또는始作의 世界이고二次元의 世界는 흘러움직임(流動)을 보이기 시작하는 作用의 世界 즉 作用始作의 世界라 할 것이다。作用이 있게되면 立體現相(그 以前의 形態도 포함해 大意的으론 立體라 할 수 있다)이 있게 되는 것이다.
◎ 동냥은 못줄 망정 쪽박은 깨지말라는 말이 있다。큰기대(바램)는 한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반신반의 기대는 기대라 그 기대했던 마음의 그릇(器)이 충격받아 깨어질때 그 자괴감이야 무엇으로 표현해야할지 모르리라 기대하고 간지가 저쪽편에 서 있는 자의 어느 한부분에 實利에 금이가는 혐오감을 일으키는 방훼자로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自己實利에 혹시나 흠집이 갈 줄 모른다해서 뭔가 求할게 있나하고 온 사람을 강아지 개굴창으로 내쫓듯 매몰차게「당신 구할것 여기없어 가—」하고 말대접 한다면 어찌 사람과 사람이 사귀면서 사는 社會라 할 것인가?
사람의 말이 「아」다르고 「어」다르다고 그 억양 어투 어감이 듣는 이로하여금 거북하게 느껴지는 사납거나 친압하려 들고자 하는 感으로해서 감정을 傷하게 한다던가 반감을 사게한다던가 여린 마음에 주눅이 들게 한다던가 한다면 상대방의 진실한 뜻내보임 진면목을 볼수 없다할 것이다。心이 强한자라면「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하고 따지듯 시비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될 것이나、어딘가가 얕잡아 보이는 곳이 있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게되는 것이다。(((입성이 날개 품위있는 행동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라 했던가? 禮儀가 그렇다는 것이겠지: 예의는 허식에 불과한 것 그렇다고 아주 무시할 수도 없는 것, 그런 것이다. 겉으로부터 베어들어가는 것이 諸格式이고、속으로부터 울어나는 것이 마음性 作用에의한 품행(品行)이다。이 두가지가 잘 융화될때 무엇이 要求하는 具備를 이루게 된다할 것이다) 예의가 假式이 되면 다음과 같이도 비춰질 수도 있다。부처는 서방정토에 계신데 부처像에다 치장하고 거기에다 대고 갖은 허례식을 하는 거와 같으니 마치 근사한 옷걸이에 걸어 논 옷에다 대고 佳酒美肴를 들어붙는거와 같다할 것이다.그렇게하고 덕부덕의 거론은 사람들의 관점의 몫어치다)) 얘기가 엉뚱한 곳으로 길을 잡는것 같아 다시 길을 바로하는데 앞과같은 대접받음에서 마음이 넓거나 자기와 큰상관 없는 자라면 원 ㅡ무슨 말투가 저런가? 하고 귓가에 한때 스쳐가는 바람소리 정도로 여길런지 모르지만 실제 당하는 입장이라면 큰 충격이 올 수도 있다.이는 平素에 제 행동이 거울이되어 되돌아 비춰진 것이라고(집사람이 그렇게 생각이 달려가듯 욱욱 내지르는 말을 하거나 발끈하는 행동을 지으면 남에게 첫인상을 좋게 못 심어주니 행동을 고치라 한다. 이는 徒是 우물속 개구리가 되어 사람 상대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일게다) 반성하는 면으로도 생각할 수 있어 뒷행동의 귀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라 할 것이나 어찌 댓던간 정신이 떨더름해 갖곤 한참 동안 어떻게 처신해야 할줄 모를 처지에 있게 된다할 것이다)))
더군다나 제實利에 금이 갈줄 모른다 해서 자기가 대답할 위치에 있지도 않으면서도(혹- 그런 것은 자기가 대답할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또는 그 일의 상황이 그럴 상황일 수도 있다) 남에 답을
따안듯 代辯하는 것은 좀 지나친 행위가 아닌가 한다? 以上은 求할걸 얻지 못하고 문전박대는 아니지만 발길을 돌린자의 편협된 마음을 글로 적어본 것이다。이것이 또한 남을 원망하는 듯한 소인에 뜻을 펴보인 글이라 그것(求하고자 하던 것)이 겉보기와는 달라(또는 어떤 측량치못할 귀신같은 理由에 의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인지 불보살인지 하시는 분이 저 사람, 정신 몸에 실려 그것에서 情떼게 하고 자 해서 매몰찬 대접을 받게 했다는、한쪽으로 辨在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生覺內助者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자괴했던 마음이 어느정도 복귀되는 듯하였으나、그 무안 충격받은 바에 대하여 개운해 지기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어야 했다。각박한 사회가 사람에 마음을 강팍하게 만드는 것이다。여유롭지 못한 사회가 조성되는 것은 世態가 어지럽기 때문이다。스스로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써 그렇게 된대 대한 성찰을 해야 한다할 것이다。徒是 귀신作用이라고 몰아붙쳐도 속 시원찬고 내 잘못이라고해도 그 옭가맨 매듭같은 허울은 풀어지지 않는다할 것이다.
◎ 到達點이 같은 여러갈래 흐름길에서 그 結果가 달라지는 것을 갖고 鬼神은 自權能事라고 하는 것이다。이를테면「가」란 길을 가게되면「甲」이란 결과를 가져오고「나」란 길을 가게되면「乙」이란 것을 귀신 저가 그렇게 벌여는 능력行事라는 것이다。갈래진 곳을 만나 어느 한쪽을 선택하여 가다보면 같은 도달점을 指向하고 간다는게 (그 길들은 저쪽에가면 다시 만난다고 생각하였는데) 그 도달점이 틀릴수도 있다. 또 생각대로 길 行 여건이 따라주질 않아 장애를 만나는 수도 있을 것이다。또 때로는 생각대로 따라줘 잘 풀릴 때도 있을 것이다.이 모든것이 흐름 鬼神 제(自) 能力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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